밴플리트의 명령: “全화력과 병력을 다하여 진지를 고수하라!”
《6·25전쟁의 현장》(14) / ‘지고도 이긴’ 감악산 계곡의 雪馬里 전투 이야기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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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5월 공세 개시 며칠 전, 유재흥 3군단장이 중공군 포로 두 명을 극비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헌병을 네 명이나 동원한 비밀 후송이었다. 유재흥 3군단장이 정일권 총장에게 보내는 서신도 휴대했다. 서신 내용의 요지는, ‘포로의 진술내용이 하도 기가 차서 보냅니다’로 포로에 대한 정밀 訊問(신문)을 요망하는 내용이었다. 포로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놨다.

“서울을 탈취해 毛澤東에게 노동절 선물로 바치겠다!”

유엔군 총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의 교체 소동 속에 航空優勢(항공우세)의 저지를 위한 공산군의 도전이 치열해졌다. 미그機가 적극적으로 공격을 개시한 것이 1951년 4월이었음은 앞에서 썼다. 1951년 4월12일, 약 105機의 미그는 56機의 F86와 54機의 F84에 엄호된 B29 편대에 대해 집요하게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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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5차 4월공세(1951년 4월) 당시의 전황도. 상단의 빨간 화살표들이 중공군이 진격해 내려오는
방향이다.


이 공중전에서 유엔 공군은 미그 13機 격추, 12기 격추 예상, 7기 격파의 전과를 거두었지만, B29 2機가 격추되었고, 7機가 손상을 입었다. B29의 참담한 모습을 본 미 제5공군의 막료들은 航空優勢(항공우세)의 유지가 한국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임을 절감했다.

아군이 철원-김화를 공격하자, 중공군은 참전 이후 최대 규모인 47개 사단을 총동원하여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제5차 공세 1단계(4월 공세)에 앞서 彭德懷(팽덕회)는 신속한 공격준비지시를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 그는 대병력으로 서울을 포위하여 유엔군의 주력을 격멸하고, 서울을 탈취하여 毛澤東에게 노동절(may day) 선물로 바치겠다고 호언했다.

밴플리트 중장이 제8군사령관으로서 도착했던 직후인 4월22일, 25만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의 제5차 1단계 공세(∼4월30일)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春季(춘계) 공세였다. 이 공세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밴플리트는 前任 리지웨이의 數線防禦(수선방어)를 답습했다. 수선방어란, 敵에 최대한의 피해를 주면서 遲滯(지체)시키고 적의 戰力(전력)이 엷어지는 곳에서 반격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밴플리트를 비롯한 美軍은, 서울을 어떻게든 固守(고수)하기로 했다. 전술적으로 서울 포기가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전략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세 번째 放棄(방기)는 당연히 한국 국민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대로 서울을 지켜내면 한국국민도 한국군도 이 전쟁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밴플리트는 약 400門(문)의 대포를 한강 南岸(남안)에 집결시켰다. 이 때문에 한강 南岸의 빈 터와 학교 운동장은 모두 포병 陣地(진지)로 변했다. 또 미 제1기병사단을 제8군 직할 豫備(예비)로 대기시켜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제8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반격을 예상하면서도 순조롭게 북진을 계속했다. 1951년 4월6일 캔사스선(임진강 南岸∼화천 저수지∼양양)을 확보한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4월21일, 10km 전방의 와이오밍線[연천읍∼고대산(연천군 신서면)∼김화읍 와수리∼화천저수지]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4월22일 밤, 중공군과 북한군은 4시간 동안의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全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의 춘계공세(제5차 공세, 제1단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主攻(주공) 목표는 중부전선이었고, 25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중공군은 최초로 강원도 화천군 史倉里(사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을 덮쳤다. 미 제9군단의 右翼(우익)을 맡았던 국군 6사단은 제8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와이오밍 線의 화천저수지로 진격하다가 경기 가평군 북방의 사창리와 多木里(다목리), 그리고 華岳山(화악산·1468m) 일대에서 중공군 제40군 및 제20군 예하 4개 사단에게 포위되어 3일 동안 방어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군 제6사단의 보병과 포병이 협소한 75번 국도에서 뒤섞이면서 혼란이 야기되어 지휘체계가 와해되었다. 중공군 제20군은 가평∼청평 간의 主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가평 지역으로 진출했다. 경기도 가평까지 뚫린 전선은 미 제1해병사단과 英 제27여단 등이 가까스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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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전투 상황도. 영연방 27여단은 호주 대대와 캐나다 대대의 협조된 방어작전과 뉴질랜드 연대의
강력한 화력지원으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냈다. 중공군은 가평전투에서 1만 여명이 전사하고
수만 여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그러나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동해안 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戰線(전선)은 서울 북쪽으로부터 강원도 홍천을 거쳐 동해안의 大浦里(대포리)로 이어져 있었다. 당시 이 線에는 ‘코드 네임’이 없었다. 한 참모가 그것을 묻자, 밴플리트 사령관은 “그런 건 뭐라 해도 좋아. 노 네임(No name·無名)으로 충분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이 방어선은 ‘노 네임 라인’이라 불려졌다.  


‘지고도 이긴’ 감악산 계곡의 雪馬里전투

서부전선의 敵은 서울 동북방에 主攻(주공)을 두고, 개성·의정부 정면으로부터 서울을 求心的(구심적)으로 공격해왔다. 경기도 문산 동쪽 정면엔 영연방 제29여단(미 제1군단 예하)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경기 파주군 적성면 雪馬里(설마리)의 紺嶽山(감악산) 계곡에서 중공군 3개 사단(제187·188·189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음에도, 3일간이나 이를 저지했다. 설마리전투는 대표적인 고립방어 전투였다.

특히, 29여단의 전방에 배치된 가니 中領(중령)의 글로스터 대대는 60시간 고지에 포위당해 병력의 90%인 760명의 병력을 잃었으면서도 동두천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중공군을 사흘간 견제하고, 군단 주력부대의 철수와 차기 방어선(‘델타線’)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설마리전투(1951년 4월22일∼4월25일)는 ‘지고도 이긴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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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리 전투 상황도. 설마리 전투에서 영연방 29여단은 여단 전체가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나,
전방의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으로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군단 주력부대의 안전한 철수와 차기 방어선(델타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68년 6월, GOP 소대장 요원이었던 필자는 양주군(지금의 양주시) 남면 신산리에 소재한 비룡사단(육군 25사단) 사령부에 전입신고한 뒤, 전방으로 차량 이동 중에 글로스터 대대가 와해된 설마리를 통과했다. 그때는 비포장 도로(371번 지방도로), 그 양측은 가파른 절벽과 울창한 숲이었다. 당시 인솔장교로부터 글로스터 대대의 처절한 고립방어작전의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매우 비장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나 요즘 감악산 계곡의 모습은 사뭇 딴판이다. 371번 지방도로는 4차선 포장도로로 번듯해졌으며, 감악산 계곡 곳곳에는 음식점 등이 파고들어 ‘전방의 비장감’이 사라졌다.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던 만큼 응당 세태도 변할 수밖에 없지만, 전방의 진짜 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긴장상태이다.
        
제5차 1단계 공세(4월 공세)에서 중부전선을 유린한 중공군은 4월24일 3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임진강을 건너 국군 제1사단을 공격했다. 姜文奉(강문봉)의 제1사단은 사투 끝에 중공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유엔군의 제1선 부대는 奮戰(분전)했지만, 점차 압박을 받아 1951년 4월27일 서울은 다시 風前燈火(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밴플리트는 미 제1기병사단을 미 제1군단에 배속해서 서울 死守(사수)를 명했다. 4월28일부터 중공군은 총공격을 개시했지만, 400門의 대포로 지켜진 진지는 막강했다. 6일간의 사투 끝에 분쇄된 중공군은 4월30일 후퇴했다. 이로써 서울을 지켜냈다.  

4월 공세는 한반도에 있던 70만 병력의 거의 50%를 투입한 중공군과 북한군의 決戰(결전) 시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웅대한 결의에 반해 공격요령은 구태의연한 것이었다. 탱크는 적고, 포병화력은 미약하며, 공군도 참가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나팔 불고, 꽹과리 치고, 조명탄을 쏘아 올려 돌격을 되풀이하고, 날이 새면 斜面(사면)의 후방으로 후퇴하여 유엔군의 포격을 회피한다는 식이었다. 이제 유엔군 수뇌부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약점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막대한 손해를 적에게 가하며 조금씩 후퇴, 4월 말에는 서울 북쪽∼淸平(청평) 남쪽∼洪川(홍천) 북쪽∼襄陽(양양) 북쪽으로 이어지는 ‘노 네임 라인’에 이르렀지만, 중공군과·북한군의 공세는 이곳에서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제8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再編(재편)과 休養(휴양)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즉각 반격으로 전환, 5월 초에는 4월 공세에 의해 상실했던 땅의 절반을 회복했다. 여기서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또다시 ‘캔사스 라인’으로 진격하는 공세를 계획했다. 

중공군의 제5차 공세에 대해 유엔군은 反攻(반공)으로 38선까지 진격했다. 이때 중공군은 8만5000명(중공군 측의 통계)이라는 空前(공전)의 인적 손실을 기록했다. 제5차 공세 중 유엔군에게 포로가 된 중공군 병사는 1만7000명에 달했는데, 이 숫자는 중공군 포로 總數(총수)의 80%를 차지했다.
   

중동부전선으로 중공군의 물자이동 急增

1951년 5월 초, 국군 제1군단은 38선 이북의 유일한 부대로서 雪嶽山(설악산)을 무대로 치열한 공방전에 돌입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4월 공세(제5차 공세 1단계)를 저지했으나 전선은 문산, 의정부, 춘천을 빼앗긴 채 양평∼홍천∼인제 線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어 5월 들어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에 주어진 임무는 동해안의 간성에서 洪川(홍천)에 이르는 도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험준한 동부전선의 승패는 보급로의 확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8군은 동부전선의 한국군 사단들에게 방어 정면의 북한군을 격멸하고 동해안 속초와 昭陽江(소양강) 남쪽 加里峰(가리봉·1518.5m)을 연결하는 미주리線으로 진격하도록 명했다. 이 작전에 참가한 사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제7사단과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9·제3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 모두 6개의 국군 사단이었다.    

그런데 5월10일 무렵, 북진하던 我軍 정찰부대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중공군의 대공세를 예감했던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陣地(진지) 방어에 의해 이를 격퇴하고, 유엔군의 不退戰(불퇴전) 결의를 실력으로써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중공군에게 군사적 승리를 단념시켜 교섭의 기회를 잡으려고 했던 워싱턴의 意向(의향)에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방어선으로서 ‘노 네임 라인’(서울 북쪽∼청평∼홍천 북쪽∼양양)을 결심했지만, 防禦正面(방어정면)이 220km에 이르고, 縱深(종심)이 없는 진지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제8군은 陣前(진전)에 지뢰를 묻고, 철조망을 치고, 각 화기는 試射(시사)를 마치고 중공군-북한군의 공세를 기다렸다. 이때 중동부전선에 대한 항공정찰의 보고가 들어왔다.

 ― 鐵(철)의 삼각지대 방향으로 중공군의 물자 이동이 급증하고 있다.
 ― 開城(개성)·연천 방면으로부터 중공군 대병력이 東進(동진) 중이다.
 ― 華川(화천) 동부 九萬里 수력발전소 부근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물자 집적소를 발견했다.

중공군의 보급 차량과 병력 이동 차량이 연일 동부전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적의 공세 企圖(기도)를 살핀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단호한 陣地(진지)방어에 의해 적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下令(하령)했다.

“방어에서는 鐵(철)과 火力(화력)의 장벽으로써 싸우고, 가능한 한 人命(인명)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역습을 할 때는 보병이 포탄의 뒤로 약진할 수 있도록 포격을 하라. 적에게 寸土(촌토)도 넘기지 말라. 全화력과 全병력을 다하여 진지를 고수하라!”
 

국군 제7사단의 진지 이탈

중공군은 그들의 3개 병단과 북한군 4개 군단 등 총 41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는 5월 공세(1951년)를 기도했다. 중공군 제9병단과 제3병단 그리고 북한군 3개 군단을 主力부대로서 중동부지역의 국군 부대들의 정면에 집중 배치했다.

그리고 중공군 제19병단은 서부지역에서 陽動作戰(양동작전)을 전개하는 견제부대로 운용했다. 陽動(Demonstration)이란 敵을 기만할 목적으로 결전을 시도하지 않는 다른 正面에서 병력 또는 장비 등을 시위하는 것을 말한다.

예상대로였다. 1951년 5월16일 저녁, 공산군의 5월 공세(제5차 공세 제2단계)가 개시되었다. 공산군은 11개 사단으로 서부전선과 동해안 정면을 견제시킨 다음, 중공군 7개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의 30개 사단으로 태백산맥 지구의 국군 제3군단과 미 제10군단의 우익을 돌파하려 했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敵의 돌파에 대해서는 肩部(견부)를 확보하라. 그러면 정면은 좁혀지고, 深度(심도)는 얕게 된다. 그곳을 協擊(협격)하는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깨 부분을 의미하는 肩部(견부)란, 군사 용어로는 다르게 쓰인다. 전방 및 측·후방을 관찰할 수 있고, 적에게 공격하기가 좋아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에 유리한 위치를 말한다.
 
중공군의 1차 목표는 제3·5·7·9사단 등 국군 사단의 포위섬멸이었다. 중공군 제9병단은 북한군과 함께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동부지역의 국군 사단들을 섬멸하고, 제3병단은 중부전선(춘천∼홍천)에서 助攻(조공)으로 유엔군을 兩分(양분)하려고 했다. 助攻(Supporting attack)이란 공격작전 시 主攻의 성공을 돕기 위해 공격을 실시하는 전술집단(부대)을 뜻한다. 

중공군의 5월 공세는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7사단 지역에서부터 개시되었다.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의 맨 동쪽에 배치된 부대였다. 그 인접사단은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9사단이었다.

1951년 5월16일 낮 동안 제7사단 정면에는 진눈깨비와 가랑비가 내리고, 소양강 일대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視界(시계)가 매우 불량했다. 16시40분경부터 중공군은 소양강 남안 국군 제7사단의 방어진지에 무려 2시간 동안,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가했다. 중공군의 5월 공세가 개시되었던 것이다. 이에 7사단의 전방연대인 제5연대와 제8연대 포병대대 진지가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신시설이 파괴되어 일시에 화력지원 체계가 마비되고 말았다.

이때 중공군의 목표는 미 제10군단의 인접부대인 국군 제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31번 국도상의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 위치한 五馬峙(오마치)고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이 오마치 일대로 진출하기 위해 선정했던 돌파지역은 인제군 남면의 富坪里(부평리) 일대였다. 이곳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7사단 제1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현재 부평리에는 44번 국도와 46번 국도가 통과하는 昭陽湖(소양호) 동남단의 新南 휴게소와 藍田里(남전리)의 38휴게소 사이의 704고지(수리봉) 기슭에 위치해 있다. 소양강 남안의 남전리와 소양강 북안의 冠垈里(관대리) 사이에는 38대교가 걸려 있다.

중공군은 공격 개시 2시간30분만인 5월16일 20시경 국군 제7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국군 제7사단은 이러한 사실을 인접 국군 제9사단이나 국군 제3군단에 통보하지 못했다. 심지어 직속 상급부대인 미 제10군단조차 국군 제7사단 전방의 전투상황을 알지 못했다. 중공군의 포격으로 유선이 두절되고, 연대 지휘소와 대대 관측소가 피격되어 통신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 제7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사단 책임지역은 60도 내외의 절벽에 가까운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공격은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5월16일 이전 4일 동안 유엔군이 공산군을 향해 공중폭격과 포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 제7사단은 중공군이 돌파를 강행하자, 그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진지를 버렸다.

특히, 제7사단 제16포병대대의 경우 포진지에 중공군 포탄이 낙하되어 차량 1대가 파괴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자, 대대장은 독단적으로 포진지를 5km 남서쪽의 제5사단 방어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리하여 포병대대는 19시경 於論里(어론리)에 포를 放列(방열·砲門을 개방)한 후 전방에 대한 화력지원을 시도했지만, 13km나 떨어진 부평리의 제5연대에 대해서는 사거리가 미치지 못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중공군의 두 번째 포위지역에 위치한 제8연대의 상황도 제5연대의 상황과 비슷했다. 사단의 예비인 제3연대는 전방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縱深(종심)방어진지인 ‘노 네임 라인’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력부족으로 인해 주요 고지 위주로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계곡지역에 형성된 틈새를 통해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고 말았다.


“한국군을 패배시키면 韓美 사이가 나빠진다”
 
이때, 중공군의 주공 목표는 국군 제7사단(미 10군단 예하)과 제9사단(국군 3군단 예하)의 接點(접점) 지역. 다음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丁一權 장군의 회고이다.

<중공군의 主攻(주공) 목표는 한눈에 분명했다. 한국군만을 노린 것이었다. 나는 下珍富里(하진부리)의 국군 3군단사령부로 급행했다. 그 직전에 육군본부 작전과장 丁來赫(정래혁) 대령이 달려왔다.
“걱정되는 것은 우리 보급선입니다. 오마치고개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劉裁興(유재흥) 제3군단장에게 강조해야 합니다.”>

丁來赫(정래혁) 대령은 육본 작전과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제3군단 작전참모로 근무했었다. 당연히, 국군 제3군단의 주둔 지역의 지형에 정통했다. 오마치는 지금의 인제군 上南面(상남면)의 오미재를 말한다. 한약재인 五味子(오미자)가 自生(자생)한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오마치는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31번국도 상에 위치한 완만한 고갯길이다. 최근, 필자는  44번 국도를 타고 東홍천→ 新南 선착장 → 남전리 38휴게소 → 인제읍 합강리까지 북상했다가, 합강리에서 31번 국도로 길을 바꿔 현리 → 오마치를 남하하는 답사했다. 합강리는 南流(남류)하는 麟北川(인북천)과 北流(북류)하는 內麟川(내린천)이 合水하여 소양강을 이루는 곳이다. 한국의 내륙을 관통하는 秘境(비경)의 도로인 31번 국도는 6·25전쟁 시기, 비포장 단선도로였다. 인제읍에서 현리까지 23km, 현리에서 오마치 고개까지 12.5km이다.

중공군의 5월 공세 개시 며칠 전, 유재흥 3군단장이 중공군 포로 두 명을 극비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헌병을 네 명이나 동원한 비밀 후송이었다. 유재흥 3군단장이 정일권 총장에게 보내는 서신도 휴대했다. 서신 내용의 요지는, ‘포로의 진술내용이 하도 기가 차서 보냅니다’로 포로에 대한 정밀 訊問(신문)을 요망하는 내용이었다. 정일권 총장은 滿洲軍(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신문 결과, 중공군 중대장급 장교는 八路軍(중공군의 前身) 출신이었고, 毛澤東 전법에 익숙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의 진술이 정말로 희한했다.
 “이번 총공세는 한국군만 골라서 덮칠 것이다”
 그 이유는,
 ― 한국군은 미군보다 화력과 장비가 약해 공격하기 쉽다.
 ― 한국군은 주로 산악지대에 배치되어 있으나 산악전에 서투르다.
 ― 한국군은 야간전투에 서투르다.
 ― 한국군을 치면 미군의 무기와 장비를 노획할 수 있다.
 ― 한국군을 패배시키면 한국군에 대한 신용이 떨어져 韓美의 사이가 나빠진다.>

 
한국군에 대한 중공군의 시각이었다. 중공군이 한국군을 여러 각도로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포로는 더욱 놀라운 사실까지 털어놨다.

“이번 총공세는 인제읍 남쪽의 縣里(현리)에 집중된다.”

현리를 중심으로 한국군만 4개 사단이 배치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포로의 진술은 들어맞았다. (계속)

[ 2016-08-03, 12: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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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     2016-08-05 오후 12:02
소금강 전투라면 나의 부친이 육군특무 상사로서 중공군을 상대로 싸우시다가 중상을 입으시고 양산 육군 통합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완쾌 하지 못하시고 , 일생을 장애자로 사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그후 35년 만에 화랑 무공 훈장이 추서 됐다. 나이 들어가니 그 뒷이야기가 자꾸 궁금 해지는데 상세 하진 않지만 비스무레한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선친의 일생이 주마등 처럼 스친다. 용맹심과 정의감이 강하신 아버님 , 중공군의 총격으로 입은 상처로 한쪽 다리를 저시면서도, 나 어릴적 오로지 나의 성장을 기뻐 해주시고 지지해 주신 나의 아버님! 육군 특무상사 제복을 입으신 그모습이 자랑스러운 아버님이 그립다. [ 상세한 기록을 남겨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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