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汚辱(오욕)을 씻지 않고서는 살아오지 않겠습니다!”
《6·25전쟁의 현장》(16) / 중공군 2만 명을 사살 또는 생포한 龍文山 전투의 凱歌(개가)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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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격노했다.
  “무슨 소리인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李 대통령이 그처럼 大怒(대노)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나(丁一權)에게도 호출명령을 내려졌다. 李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전회담을 반대해야 합니다. 汎국민적으로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 입 볶음면과 눈 한 웅큼으로 끼니 채워

병참의 실패에 따라 중공군의 軍需(군수)지원 실태는 “한 입에는 볶음면, 다음 한 입에는 눈으로 끼니를 채웠다”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중공군의 兵糧(병량) 대책은 각개 병사들이 식량 주머니에 3일분의 식량을 휴대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밖에 대대와 연대에서 각각 2일분의 추가 식량을 보유토록 했지만, 수송의 어려움으로 뒤를 대지 못했다.

특히 유엔군의 계속되는 후방 폭격으로 취사도 못해 생쌀로 끼니를 때웠다. 2차 공세 시, 중공 수상 周恩來(주은래)의 지시로 중국 전국의 민간에서 미숫가루와 볶음면을 만들어 전선으로 보냈다. 볶음면(炒麵·초면)은 밀 70%, 콩 및 옥수수 30%를 원료로 삶은 다음에 말려서 0.5%의 소금을 섞은 전투식량이었다. 전쟁 당시 중공군의 병참의 실태는 다음과 같았다.
  
● 중공군은 1차 공세 시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 더 진격할 수 없었다. 
● 제2차 공세 시에는 6만 명의 노무자를 동원하여 보급했으나 수백km를 전진한 부대를 가축과 사람의 힘에 의존한 수송으로 따라 잡기 어려웠다.
● 1300여 대의 수송차량은 유엔 공군의 공습과 전복사고로 대부분 燒失(소실)되면서 겨울철 피복과 총탄, 식량 등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었다.
● 제3차 공세 시에는 소련으로부터 3000대의 차량을 지원받았으나, 전선에 필요한 식량을 4분의 1 밖에 지원하지 못했고, 유엔공군의 폭격으로 기차는 운행할 수 없었다.
● 6·25전쟁 기간 중 중공군의 보급은 미군의 10분의 1수준이었다. 

   ■ 미군 1개 사단에 대한 1일 보급량
    - 보병사단: 600톤
    - 해병사단: 700톤
   ■ 중공군 1개 사단에 대한 1일 보급량: 50톤
   ■ 북한군 1개 사단에 대한 1일 보급량: 60톤
 
● 노획된 중공군 제26군의 문서에 기록된 중공군의 군수지원 실태

<수송수단과 수송을 담당하는 병력이 부족하여 보급추진이 곤란했다. 이로 인해 우리 병사들은 굶주렸고, 또 찬 음식을 먹어야 했다. 2일 동안, 감자 몇 개밖에 먹지 못한 자도 있었다.
 따라서 전투를 위한 체력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부상자를 후송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火力은 근본적으로 부족했다. 火砲(화포)를 사용하려 해도 탄약이 부족했고, 탄약 중에는 불발탄이 많았다.>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한 밴플리트

중공군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 총반격을 개시해 다시 38선을 회복하는 戰果(전과)를 올려 서울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 1951년 5월22일, 유엔군은 ‘파일 드라이버’(말뚝 박기) 작전을 개시했다. ‘캔사스 라인’ 확보를 위한 공세작전이었다.

제8군은 全軍(전군)에 ‘캔사스 라인(임진강 하구∼속초)’에의 공격을 명했다. 이리하여 각 군단은 北上(북상)을 개시, 1951년 5월 말에는 ‘캔사스 라인’을 거의 회복했다. 제8군은 이어 ‘캔사스 라인’의 완전 확보를 위해 필요한 前方(전방)에의 진출을 결의, ‘파일 드라이브(말뚝 박기) 작전’을 발동했다. 각 군단은 북진을 계속, 6월15일에는 목표로서 제시된 ‘와이오밍 라인’(철원∼금화∼속초)을 확보했다. ‘캔사스 라인’을 지키기 위한 前方 요지의 점령이었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이 대관령 전투에서 敵의 예봉을 꺾고 공세전환에 들어갔던 5월25일경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 江陵(강릉) 공군기지로 날아왔다. 탑승기에서 내린 밴플리트 사령관은 대기실에서 들어가지도 않고 선 채로 丁一權(정일권) 육군참모총장, 李俊植(이준식·광복군 참모, 소장 출신) 전방지휘소장, 白善燁 1군단장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충격적 선언을 했다.
 
<한국군 제3군단을 해체합니다. 나는 저항을 계속하면서 후퇴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때문이오. 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도 없어집니다. 육군본부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행정·군수 및 훈련으로만 국한됩니다. 한국 제1군단은 나의 지휘 하에 두며, (동해안에서 운용 중이던) 육본 전방지휘소는 폐쇄합니다.>

한국군과는 한 마디 사전 상의도 없었다. 북진 중이던 1950년 10월16일 창설된 국군 제3군단은 현리 전투로 병력 60%를 잃은 채 창설 8개월 만에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제3군단 해체’라는 냉혹한 조치에 대해 정치적 배려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밴플리트는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한 야전지휘관이었다. 이어 그는 국군 제9사단을 미 제10군단에, 국군 제3사단을 한국군 제1군단에 배속한다고 통고하고, 10여 분 만에 강릉 공군기지를 떠나버렸다.

이로써 국군 제3군단은 解隊(해대)되었다. 그 때문에 국군의 군단은 백선엽 소장의 제1군단만 남게 되었다. 연합작전의 냉엄한 一面(일면)이었다. 현리전투의 패배로 인해 미 제8군사령관은 한국 육군본부의 작전지휘권을 인정하지 않고, 인사·군수·교육훈련만 담당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중공군은 37도선 부근에서의 작전이 병참의 문제로 곤란하다는 것을 절감해 보급선을 약 130km 단축해서 공격력을 비축했고, 유엔군의 보급선이 늘어난 무렵을 가늠해 다시 결전을 걸어보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서울 공략에 실패했고, 유엔군을 붕괴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유엔군의 統合火力(통합화력)은, 그들의 人海戰術(인해전술)로는 돌파 불가능한 장벽이었다. 유엔군의 기동력과 기갑력은 중공군이 맞설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공산군이 격퇴된 장소엔 수만의 전사체가 겹겹이 쌓여 그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龍門山 대첩

사창리 전투(1951년 4월·하단의 [1] 참조)에서 패배한 후, 국군 제6사단에 나타난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가 장도영 사단장에게 “겁쟁이 블루스타(blue star)! 당신, 전쟁 할 줄 알아!”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블루 스타’는 제6사단의 심벌마크이다. 제6사단 장병들은 분노의 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1951년 5월의 龍門山(용문산) 대첩 후, 국군은 더 이상 중공군을 겁내지 않았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가 제6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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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전경.


1951년 5월 중 국군·유엔군의 인적 손해는 3만5770명이었다. 이에 비해 중공군·북한군은 전사 1만7000명, 포로 1만7000명이었다. 일반적으로 부상자는 전사자의 세 배로 계산되므로 공산군의 부상자는 5만1000명으로 총계 8만5000명의 인적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결국·중공군과 북한군에서는, 5월 공세에 참전한 30개 사단 약 30만 명 중 30%에 가까운 인적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돌격 병력의 거의 전부를 잃었다는 계산이다.

어떻든 중공군과 북한군의 인적 손실은 막대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국군 제6사단의 용문산대첩에 의한 중공군의 인적손실이었다. 용문산전투는 史倉里(사창리)전투 패배에 대한 국군 제6사단의 처절한 복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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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전투 상황도.




[1] 史倉里 전투
사창리 전투(1951년 4월22일∼4월24일)는 華川郡(화천군)의 서부권인 史內面(사내면) 사창리와 38선上의 華岳山(화악산·1468m)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격을 받은 국군 제6사단이 패배한 싸움이다.
제6사단은 미 제9군단의 작전계획에 따라 사창리 북방의 와이오밍線(철원∼김화)으로 진격하던 중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4월 공세)에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제6사단의 병력과 야포, 그리고 각종 차량이 좁은 사창리 계곡을 빠져나가려다가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아 지휘체계마저 와해된 상태에서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후퇴했다. 이로써 중공 제20군은 가평∼청평 간 主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가평지역으로 진출했다.

1951년 5월의 전선은 임진강에서 철원∼김화를 거쳐 거진에 이르는 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용문산(1157m)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사단장 張都暎 준장·하단의 [2] 참조)은 제2연대를 主저항선 전방에 경계부대로 추진·배치했다. 용문산은 남한강 右岸(우안)인 양평군 玉泉面(양평군 옥천면)에 위치한 해발 1157m의 고지인데, 그 기슭은 북한강의 左岸(좌안) 위치한 경기도 가평군 雪岳面(설악면)까지 이어져 있다.

감제고지인 용문산을 점령한 국군 제6사단은 적의 행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경계부대인 제2연대의 전투전초線인 彌沙里(미사리)와 울업산, 353고지와 427고지의 토질이 양호해 진지 구축에 어려움은 없었다.

戰鬪前哨(전투전초)는 영어로 Combat Out Post(COP). 방어 작전 시 각 梯隊別(제대별)로 운용하는 경계부대로서 敵 공격의 조기 경고, 主방어지역에 대한 기습 방지, 敵 조기전개 강요, 능력범위 내에서 敵 전투력을 최대한 약화시켜 主방어지역 전투를 위한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는 임무 수행을 말한다.

제6사단의 작전지역 내 도로망은 청평∼가평∼춘천 간 46번 국도와 용문산 후방의 6번 국도(서울∼강릉)가 양호하여 지원부대의 활동과 步戰(보전·보병+전차) 합동작전에 유리했다.

하지만 위의 두 국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로가 발달되지 못하여 산간도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북쪽으로 홍천강, 서쪽으로 북한강을 끼고 있는 제2연대 제1대대의 전초진지는 접근하기가 좀 까다롭다. 답사에 애를 먹었지만, 알고 보면 쉽다. 60번 고속도로(東홍천 → 서울)의 가평휴게소의 위치가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의 長樂山(장락산·627m) 기슭이다. 그렇다면 가평휴게소에서 빠져나와 산길 小路로 600∼700m만 걸어가면 홍천강변의 彌沙里(미사리)에 도달할 수 있다.       

최근, 필자는 네 차례에 걸쳐 용문산 전투현장을 답사했다. 두 차례의 답사는 양평읍에서 37번 국도를 따라 北上하면서 용문산을 바라보며 有明山(유명산·862m)를 넘어 가평군의 설악면 天安里(천안리)에 세워진 ‘용문산 가평지구 전적비’를 둘러본 뒤 북한강에 걸린 淸平(청평)대교를 건너, 歸京(귀경)하는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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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용문산전투가평지구' 전적비.


3차 답사는 청량리역에서 中央線(중앙선) 기차를 타고 龍門驛(용문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9km쯤 달려 국군 제6사단의 主저항선이었던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공원 입구에 도착, 그 기슭에 있는 용문산전투 전적비를 답사했다. 네 번째 답사 코스는 용문산으로부터 가평→춘천을 거쳐 파로호(화천저수지)에 이르는 추격로 60km였다. 

용문산 일대는 과연 중공군이 욕심낼 만한 요충이었다. 北으로는 북한강변의 청평-가평-춘천을 제압하고, 남으로는 남한강변의 양평-이천-여주를 호령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에서는 漢江(한강)을 지배하는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했다. 

1951년 4월27일, 장도영 사단장은 제6사단 제2연대 집결지에 나타나 강한 평안도 사투리와 억양으로 督戰(독전)의 연설을 했다.

“야, 야! 깍대기(껍데기)만 사람. 깍대기만 뒤집어쓴 ×××들! 다 나가 죽으라우. 너희들 때문에 사단이 망하구, 유엔군이 후퇴했어. 뒤를 돌아 보라우! 저 도요타 추럭(트럭) 두 대, 그리고 거기에 적재된 화기·탄약·식량·피복이 현재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이야! 이제부터 저 차에 있는 것은 머이든지(무엇이든지) 개지고(가지고) 가고 싶은 대로 다 개지구 가라우. 다시는 再보충 없어. 있는 대로 개지고 가서 죽으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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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 장병이 썼던 '決死'가 새겨진 철모.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는 제6사단 장병들은 설욕의 일전을 벼르고 있었다. ‘블루 스타’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했다. 제6사단은 靑星(청성)부대란 명칭처럼, 철모 양측에 푸른색 별마크가 있었다. 그 위로 머리띠도 감았다. ‘決死’(결사)란 두 글자가 선명했다. 모두 용문산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였다.

“오욕을 씻지 않고서는 살아오지 않겠습니다!”

장병들은 모두 決死(결사)의 결의를 사단장에게 약속했다. 장병들은 두 볼 가득 눈물을 뿌리고 떠났다. 사단장도, 연대장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破虜湖 

宋大厚(송대후) 중령의 제2연대가 前哨(전초·전방 초소)부대로 나섰다. 제2연대는 트럭을 타고 떠났다. 탄약을 실을 수 있을 만큼 가득 실었다. 장병들은 양말에 쌀을 채워서 목에 걸었다. 홍천강을 건너 용문산 기슭에 배수진을 쳤다. 용문산의 북쪽으로는 북한강, 남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이천으로 이어지는 뱃길이었다.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교통로의 요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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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전경/정순태 촬영.



5월18일, 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국군 제2연대의 제1·제2·제3대대는 방어진을 치고, 사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국군 제2연대가 제6사단의 主力으로 착각, 중공군 제63군은 제187·제188사단에다 軍예비인 제189사단까지 투입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고립된 국군 제2연대의 위기였다.

이때 국군 제6사단의 제7·제19연대가 중공군 제63군의 후방을 기습했다. 여기에 유엔군과 국군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개시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포위·섬멸을 모면하기 위해 많은 전사자를 내고, 5월21일 새벽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제6사단은 곧바로 추격에 돌입했다.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군 九萬里(구만리) 화천수력발전소까지 60km를 추격에 추격을 거듭했다. 구만리에는 중공군의 대규모 物資(물자) 저장소도 있었다. 이곳 華川(화천)저수지에서 중공군은 퇴로가 막혀 북한강에 水葬(수장)되거나 격멸당했다. 요즘, 파로호에서 잡힌 장어는 어른 팔뚝보다 굵다. 필자는 그곳 음식점의 장어구이를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차마 입에 댈 수 없었다. 

1951년 5월28일에 끝난 용문산전투는 밤낮이 없이 전개된 나흘간의 死鬪(사투)였다. 중공군 2만5000명 중 2만 명을 사살 또는 생포한 것이었다. 거기에 부상병까지 합치면 사실상 완전 섬멸이었다. 제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다.

병력의 숫자가 월등히 많은 중공군을 국군 제6사단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미군의 포병 지원과 공중 폭격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단의 전과로는 경이적인 것이었다. 다음은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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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파로호 휘호

<이 보고에 陸本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화천까지 추격하는 과정에서 포로들을 주워 담을 정도였다. 길가마다 중공군 패잔병들이 늘어졌다. 중공군은 허기에 지쳐 있었다. 탄약도 없었다. 싸울 의사도 없었다. 아군 소대 병력이 20배인 중공군 대대 병력을 사로잡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용문산전투는 5월28일로 끝났다. 승전보를 접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이처럼 훌륭히 싸운 부대에 어떤 상을 내려 줘야 할 것인가?”라고 치하했다. 대통령의 부대 표창이 있었다. 그때부터 華川(화천)저수지의 이름이 바뀌었다. ‘破虜湖(파로호)’라 부르게 됐다. 오랑캐를 섬멸한 호수라는 뜻이다.>

 
그때 李承晩 대통령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으로부터 강원도 화천군 화천저수지까지 중공군을 추격·대파한 것을 치하해 국군 제6사단에게 부대 표창을 하면서 붓글씨로 ‘破虜湖’(파로호)라는 휘호를 썼다. 이승만은 名筆(명필)이었다. 이로써 북위 38도 6부의 파로호와 九萬里(구만리) 발전소는 우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용문산 대첩으로 중공군의 ‘5월 공세’는 종말을 고했다. 1951년 4∼5월에 걸쳐 중공군에게는 총병력의 3분의 1인 약㺕만 명의 인적손실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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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 장군
[2] 張都瑛(1923~2002)


장도영은 1923년 평북 宣川(선천)에서 태어났다. 일본 東洋大學(동양대학) 사학과 재학 중 學兵(학병)을 나가 日軍 소위가 되었다.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을 졸업, 소위로 임관(군번 80번). 1949년 11월 육본 정보국장(대령), 1950년 10월 제6사단장, 1951년 제9사단장, 1953년 미 참모대학 졸업, 1954년 2월 제2군단장, 1956년 3월 참모차장, 1959년 중장으로 승진했다.
장도영 중장은 4·19 후 제2공화국 때(1961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를 진압하려다가 실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쿠데타 주체들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장도영과 박정희, 두 사람의 인간적 관계는 1949년 육본 정보국 재직 때부터 매우 친밀했다. 
그러나 쿠데타 주체들은 집권기반이 굳어지자, 장도영 의장을 ‘反혁명행위자’로 기소했다. 장도영 장군은 1962년 3월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가, 같은 해 5월 刑집행면제를 받고 渡美(도미), 미시간대학에서 國防學(국방학) 교수로 활동했다. 2002년 별세(향년 79세).



불발로 그친 밴플리트의 동해안 39도선 진격 계획

중공군이 5월 공세를 개시한 1951년 5월16일은 기묘하게도 미국이 ‘停戰(정전)의 정책’을 결정한 날이었다. 5월 공세에서 받은 유엔군의 손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엔군이 이 이상 북진하면 할수록 敵의 약점인 병참上의 애로점이 크게 해소된다. 따라서 공세의 頻度(빈도)도 强度(강도)도 증가할 것이었다. 이 전쟁의 장기화를 해결하는 데는 停戰(정전) 정책 이외에 없다는 것이 워싱턴의 판단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회상록 중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5월16일 停戰(정전)의 정책이 결정되었다. 우리는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과의 구별을 명확하게 헤아렸다. 前者(전자)는 민주주의에 의거한 통일국가의 수립이고, 後者(후자)는 침략자를 격퇴하고 정전협정을 체결해 敵對(적대0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투가 끝난 후 한국의 권위를 군사경계선 이남의 지역에 미치게 하고, 북한으로부터 북한군 이외의 군대는 전부 철퇴시키고, 또 한국군을 증강해서 새로운 침략을 격퇴시키는 데 있었다. 이 정책은 不變(불변)이었다.>
 
중공군은 5월 공세의 실패를 고비로 전선은 한동안 잠잠한 모습이었다. ‘철의 삼각지대’에서도 중공군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鐵原(철원)·金化(김화)·平康(평강)은 텅텅 비었던 것이다. 1951년 6월 중순의 일이었다. 북한군만 간혹 나타났다. 국군의 북진은 계속되었다. 동해안에서는 高城郡(고성군)의 남부까지 진출했다. 전선은 북동쪽으로 急(급)커브를 그리며 北上했던 것이다. 이즈음 백선엽 제1군단장은 밴플리트 8군사령관으로부터 새로운 작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국군 1군단을 동해안을 따라 원산 동남쪽 30km 지점인 고저로 진격하며, 제1군단 左翼(좌익)인 미 10군단은 강원도 양구와 문동리를 거쳐 북한강 상류를 따라 금강산 서쪽을 돌아 역시 고저를 공격한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 16군단 예하의 미군 2개 사단이 해상 기동하여 庫底(고저·통천군에 있는 한 地名)에 상륙, 지상 공격부대와 연계한다.>
 
이 작전준비명령은 펀치볼(강원도 양구군 해안면)과 금강산을 거점으로 하는 敵을 섬멸하여 동해안 전선을 39도선에 위치한 庫底(고저)로 끄집어 올리겠다는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북진 의지가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공격 명령은 끝내 하달되지 않았다. 워싱턴에 순종하는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의 의지가 작용했던 것으로 관측되었다. 통천군은 소떼를 몰고 북한을 다녀온 현대그룹 정주영(1915∼2001) 명예회장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휴전회담을 둘러싼 李承晩의 격노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한 유엔군은 적을 추격해 세 번째로 38선을 넘어 6월 중순에는 캔사스 라인(서해안 문산∼동해안 속초)을 회복했다. 그래서 敵에게 압박을 계속해 회담을 강요했다. 그 효과는 곧 나타났다. 말리크의 聲明(성명)이었다.    

1951년 6월23일, 소련 유엔 대표 야코브 말리크가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停戰(정전)을 제안했다. 중공군으로서도 군사적 승리에 의해 전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해진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더욱이 소련은 미국과의 전면 대결을 회피, 교섭 테이블에 앉도록 중공에 권유했다. 

말리크의 제안에 이어 중공도 人民日報(인민일보)를 통해 정전협상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에 반대했다. 다음 대목은 丁一權 장군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격노했다.
 “무슨 소리인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李 대통령이 그처럼 大怒(대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나에게도 호출명령을 내려졌다. (중략)
 金性洙(김성수) 부통령, 張勉(장면) 국무총리, 卞榮泰(변영태) 외무장관, 李淳鎔(이순용) 내무장관, 李起鵬(이기붕) 국방장관의 모습이 보였다.
 “丁 총장의 생각은 어떠한가?”
 “반대입니다”
 “무슨 이유에선가?”
 “現 전선에서 전투를 끝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더 북진을 한 뒤에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최소한 平壤(평양)과 元山(원산)까지는 올라가야 합니다”
 (중략)
 李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전회담을 반대해야 합니다. 汎국민적으로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말리크의 停戰 제안


그러나 말리크의 정전회담 제의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轉機(전기)를 불러왔다. 영국·프랑스 등 西유럽 동맹국들은 미국이 極東(극동)의 전쟁에 빠져 유럽의 安保(안보)를 등한히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진작부터 표명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이미 1951년 5월16일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의 체면을 훼손당하지 않는 형태로 휴전을 실현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 결정은 6월1일 당시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할브단 리(Trygve Halvdan Lie·노르웨이人)의 “38선에 連(연)하는 線에서 휴전하는 것은 유엔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된다”는 성명에 의해 유엔 여러 나라들의 諒解(양해)가 얻어져 있었다. 이와 같이 휴전 결의를 굳히고 있던 미국에 대해 말리크의 제안은 안성맞춤이었다. 워싱턴은 말리크 제안이 소련의 공식견해인 것을 확인한 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령했다.

리지웨이는 워싱턴의 訓令(훈령)에 의거 6월30일 金日成(김일성)과 彭德懷(팽덕회) 앞으로 휴전교섭을 제안, 그들의 동의를 받았다. 이리하여 전쟁은 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38선을 중심으로 유리한 지형을 탈취하기 위한 진지전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사실, 공산 측도 한국전쟁에 지쳐 있었다. 휴전회담의 불가피성에 대해 흐루시초프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불행히도 전쟁은 결코 빨리 끝나지 않았다. 중국 측은 몇 번이나 큰 패배를 당했다. 毛澤東의 아들이 공습으로 죽었다는 뉴스도 들었다… 중국이 극심한 손해를 입은 것은, 그 과학기술 장비가 미국 측보다 크게 뒤졌기 때문이다. 攻守(공수) 양면에 걸쳐 중국 측의 전략은 거의 전면적으로 人力(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계속)

[ 2016-08-07, 04: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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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6-08-08 오전 10:20
본인의 판단 잘못도 있었으나 결국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이용 당했다. 그외 김종필제거에 참여했는 일부 혁명주체들도 낙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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