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민주국가는 단합된 독재국가에 진다!
나치 독일에 굴복한 左右 분열의 프랑스는 한국의 모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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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이 늘 惡을 이기는가?

 지난 150년 동안 증명된 국제정치학적 원리가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국민여론을 중시하는 민주국가는 다른 민주국가에 대한 전쟁을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 原理에 현혹당하기 쉬운 이들은 '민주국가는 전쟁을 하기 싫어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독재국가에 이긴다'고 말한다. 민주국가는 善이고 독재국가는 惡이니 善이 惡을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취지이다. 전쟁은 그러나 도덕적 당위론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다. 힘, 용기, 전략, 野性 같은 게 먹히는 정글의 세상이다. 한국은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북한은 단결되어 있다. 한국은 핵무기가 없고 북한은 있다. 그래도 한국은 선하고 북한은 악하기 때문에 한국이 이길까? 2차세계대전의 교훈은 다르다. 분열된 민주국가 프랑스는 단합된 독재국가 독일에 졌다. 
 

  모로아의 반성

   
   앙드레 모로아(1885~1967)는 프랑스의 작가, 평론가였다. '영국사' '프랑스사'의 著者(저자)로 유명한 그는 1차세계대전중 4년간 영국 육군사령부에 파견된 프랑스 연락장교였다. 反英(반영)감정이 강한 프랑스에서 親英派(친영파)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1939년9월에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정부로부터 영국 육군참모본부 근무 '프랑스측觀戰(관전)연락武官(무관)'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1940년 5, 6월에 히틀러의 전격전에 걸려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프랑스 항복 후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건너가 강연과 집필생활을 했다.    
   그는 전쟁 체험담이기도 한 책을 냈다. 1940년 11월에 나온 '프랑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happened to France)란 책인데 나중에 '프랑스의 비극'(Tragedy in France)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일본에선 '프랑스 지다'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가 大敗(대패)한 원인을 군사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와 국민의 士氣(사기)면에서도 관찰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과 북한을 생각했다. 1930년대의 프랑스가 오늘의 한국이고 그때의 나치 독일이 북한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동맹국 영국은 한국의 동맹국 미국과 거의 같은 처지이고.    
   평화至上(지상)주의, 패배주의, 사회주의가 득세하고 左右대결이 깊어진 프랑스 사회는 무섭게 군비증강을 하는 나치 독일을 쳐다보면서도 전쟁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선전의 천재 괴벨스는 이런 프랑스 사회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프랑스의 左右대결을 부추기고 특히 英佛 동맹을 이간질 시키는 심리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독일의 선전부는 영국의 對獨(대독) 강경론 때문에 프랑스마저 전쟁에 휘말려 들 것이라고 反英감정과 厭戰(염전) 무드를 선동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서 프랑스는 독일과 싸워 조국을 지켜낸다는 擧國(거국)일치의 전쟁의지를 확립할 수 없었고 투지만만한 상대를 만나 어이없는 大敗를 당하고 말았다.

 처칠: '소설을 집어치우고 愛國논설을 써' 
   
   모로아는 이 책에서 문필가로서 자신의 책임을 맨 먼저 지적한다. 1935년 12월 말 그는 영국의 귀족 부인 집에서 당시 윈스턴 처칠과 점심을 함께 했다. 처칠은 끊임없이 히틀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으나 동료 정치인들은 對獨유화론을 지지하여 그는 고립되어 있었다. 식사를 끝낸 뒤 처칠은 모로아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로아君(군), 소설 쓰는 것은 그만두게. 傳記(전기) 따위도 집어치워.'
   놀란 표정의 모로아를 향해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소설도, 傳記도 쓰지 말고 하루 한 편씩 논평을 써! 그 내용도 이것 하나만 다뤄야 해! 프랑스 공군은 과거엔 세계 제1이었지만 지금은 4, 5위 정도란 말이야. 독일 공군은 과거 미미했으나 지금은 세계1위에 육박하고 있어요. 君은 프랑스에 돌아가거든 매일 이 점을 지적하란 말이야. 만약 프랑스가 君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君은 여자의 사랑, 남자의 야망이니 하는 것들을 주제로 글을 쓴 것보다 훨신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야!'   
   '2차세계대전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처칠은 글과 말의 동원력을 안 지도자였다. 그런 그도 소설, 傳記따위는 집어치우고 오직 프랑스가 직면한 국방상의 위험을 알리는 게 글 쓰는 이들의 의무라고 말한 것이다. 모로아는 이 책에서 자신은 그런 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회하고 있다. 처칠은 마지막으로 모로아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고 한다.
   '君의 조국 프랑스는 독일 공군 때문에 멸망할지 모른다. 모로아君! 힘이 따르지 않는 文化는 내일이라도 死滅(사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   
   처칠의 경고를, 오늘날 한국의 글 쓰는 이들에게 變用(변용)한다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여러분의 조국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성, 특히 김정일과 친북세력의 음모, 한국 지도층의 무사안일을 지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소설과 傳記와 詩는 나중에 써도 되지만 음모를 폭로하는 글은 지금입니다. 한국이 누리는 예술과 문화가 국가수호의지의 뒷받침이 없다면 내일이라도 여러분들은 글 쓸 자유, 말할 자유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하루 한 건씩 논평을 쓰세요. 그 주제는 오직 하나, 한국의 위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글로 해서 국민들이 깨어나 이 음모를 저지한다면 여러분들은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화지상주의와 좌파득세
  
  
   앙드레 모로아가 미국으로 건너가 쓴 책에서 프랑스가 망한 원인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이를 한반도 상황에 代入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
  
   1. 평화至上주의가 프랑스의 국가수호의지를 약화시켰다(평화지상주의가 한국의 안보의지를 약화시켰다).    
   2. 소련을 조국으로 삼는 사회주의자들이 국가를 분열시켰다(북한정권을 추종하는 좌익들이 국가를 분열시켰다).
   3. 군대가 정치에 종속되어 재무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국군이 정치권에 종속되어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다).
   4. 영국과 프랑스를 이간질 시킨 나치의 선전戰이 효과를 보았다(韓美日 동맹 관계를 이간질시킨 선동에 국민이 넘어갔다).
  
   프랑스는 독일이 1935년경부터 본격적인 재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좌익들이 확산시킨 평화지상주의 무드에 정치권이 넘어가 군비증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우파는 좌파의 분열책동에 신물이 나서 공산주의의 씨를 말린 나치 독일에 은근히 호감을 가졌다. 이래저래 프랑스 지도층 안에선 애국심과 決戰(결전)의지가 약화된 것이다.
   1차세계 대전 때 主전선은 프랑스-벨기에-독일전선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젊은이 약 160만 명이 전사했다. 20대 젊은이들의 약 40%가 죽었다고 한다. 이런 참화를 겪은 나라이니 厭戰(염전)사상이 퍼져가기 쉬웠다. 더구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지상주의라는 위장술로써 國論을 분열시키고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1930년대의 프랑스와 2016년의 한국은 비슷한 점이 많다. 나치를 북한정권, 사회주의자들을 친북세력, 영국을 미국으로 바꿔놓으면 역사적 무대의 설정이 흡사하다.
   세계사에서 敵對(적대)관계에 있는 두 국가 사이에서 일방의 사회가 이 정도로 他方(타방)에 대하여 굴종적인 예도 드물 것이고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더 드물 것이다.
  
   전쟁중에도 반목한 프랑스 지도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미국에서 발간한 '프랑스의 비극'에서 프랑스의 국가지도부가 독일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반목, 분열해간 사정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수상은 에도알 달라디에였다. 이 내각의 재무장관은 폴 레이노. 두 사람은 상대를 나름대로 높게 평가하면서도 公的(공적)인 일에선 앙숙이었다. 1940년 3월 달라디에 수상이 핀란드 사태와 관련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레이노가 수상이 되었다. 그는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달라디에를 육군장관으로 붙들어놓았다.
   앙드레 모로아는 레이노 수상에게 축하의 뜻을 담아 이런 문구를 써보냈다고 한다.
   <의회는 평화시엔 국민을 대표하고, 戰時엔 군대를 대표한다.>   
   군대를 신뢰하고 밀어주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사태는 정반대로 흘렀다. 레이노 수상은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가므랑 원수를 싫어했다. 너무 소극적이란 이유에서였다. 가므랑 원수는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쳐들어가고 있을 때를 틈타서 독일을 쳐야 한다는 견해를 묵살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 프랑스 군대가 선제공격을 했다면 독일군대는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주력하느라고 프랑스 접경지대에 배치했던 병력을 많이 빼버렸던 것이다.    
   가므랑의 논리는 이러했다.
   <우리 프랑스는 출산율이 매우 낮다. 1차 대전 때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人的 자원이 없다. 人命(인명)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
   수상은 공격적 전략을 원했고, 가므랑은 방어 위주의 전략을 고집했다. 두 사람은 반목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부엔 이런 異見(이견)을 조정하고 종합하여 더 나은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도력이 부족했다. 이 점이 영국과 달랐다. 異見은 어떤 조직에도 있다. 문제는 그 이견이 반목으로 악화되는가, 아니면 더 높은 수준으로 승화되는가이다.
  
   '서로 싸운다고 敵과 싸울 시간이 없다.'
  
   레이노는 가므랑을 교체하려고 했다. 이런 움직임을 가므랑도 알았을 것이니 전쟁을 지도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수상은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갈 것이 뻔한데도 벨기에 정부가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진주를 허용하지 않는 데 화가 났다. 그는 벨기에 영토로 강제 진입할 생각을 했는데 가므랑은 이에 반대하여 싸우기도 했다.
   독일군의 기습이 시작되기 열흘 전인 1940년 4월29일 앙드레 모로아가 레이노 수상 집무실을 찾아갔더니 그는 이렇게 불평했다.
   '탱크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한다. 대포와 기관총은 창고에서 잠 자고 있다. 독일은 240개 사단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고작 100개 사단밖에 없다. 달라디에의 게으름과 우둔함이 모든 것을 망쳤다.'
   모로아가 '그래도 달라디에는 프랑스를 사랑하는 사나이입니다'라고 변호했다. 레이노가 한 말은 이랬다.
   '그렇다. 달라디에는 프랑스의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승리 이상으로 내가 실각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독일군 침공 나흘 전인 5월6일에 모로아는 다시 레이노 수상 집무실에 들렀다. 책상에 세 개의 직통전화가 놓여 있었다. 정부기관, 외부, 그리고 愛人(애인)인 모 백작부인 거실로 통하는 전화였다. 그때 레이노는 백작부인으로부터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날도 달라디에와 레이노는 국회에서 격렬하게 충돌하여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야 했다.
   5월10일 독일군의 全面(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벨기에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軍의 취약지구를 강타했다. 독일군은 탱크와 전투기를 결합한 電擊(전격)기동전술로 전선을 돌파하여 배후로 진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노 수상은 가므랑 원수를 해임하고, 그를 싸고돌았다고 해서 육군장관 달라디에를 외상으로 전보시킨 뒤 자신이 육군장관을 겸했다. 戰線(전선)은 무너지는데 내부 권력투쟁에 더 치중한 것이 프랑스 지도부였다. 한 영국군 장교가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료끼리 싸우는 데 바빠서 독일군과 싸울 시간이 없다.'   
   앙드레 모로아는 '개인끼리의 싸움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었던 가장 좋은 사례를 프랑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때도 당시 대통령 포앙카레와 클레망소 수상은 사이가 나빴으나 전쟁지도라는 면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對독일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로아는 '지도층의 不和가 결정적 패인은 아니었지만 군대로부터 마지막 抗戰(항전)의 기회를 앗아갔다'고 평했다. 
   중요한 일들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축적된 원인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지금 친북세력이 한국 사회에서 축적시켜가고 있는 분열과 증오와 반목, 여기에 집권세력의 무사안일과 비겁성이 더해질 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戰時에 不信당한 지도부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1940년 말에 미국에서 펴낸 '프랑스의 비극'이란 책에서 左右대결이 계층간 증오심을 폭발시켜 애국심을 실종시킨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엔 희망을, 中産(중산)계급 일부엔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이 된다는 생각을 심었다. 소련과 독일은 프랑스 국민들에 대한 선전전을 통해서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 두 나라의 工作(공작)이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때부터 있어왔던 분열상을 더욱 깊게 했다.>
   독일이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자 전통적인 애국심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인들이 참전했으나 결코 열심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정치인들 전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미운 정치인들이 전쟁을 지도하게 되니 국민들이 흔쾌히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開戰(개전) 6주 만에 프랑스가 抗戰(항전)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해버린 데는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이런 不信(불신)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금 한국인들은 정치인들을 어느 정도 믿는가? 이들이 전쟁을 지도하면 안심할 것인가?   
   프랑스 지도부가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 일부 국민들은 '敗戰(패전)한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저런 놈들이 당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요컨대 프랑스 좌파는 소련을 조국처럼 생각하고 이 꼴을 보다 못한 우파는 차라리 나치 독일이 들어와 좌파를 혼내 주는 것을 보고싶다는 심정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세태와도 비슷하다. 한국의 종북세력은 북한 정권보다 애국세력을 더 증오하고 있다. 애국세력도 북한 정권보다 종북세력을 더 증오하여 '저런 반역세력이 당하는 꼴을 봐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이럴 때 북괴군이 남침한다면 한국인들은 열심히 싸울까? 핵무장한 敵(적)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 안에선 프랑스처럼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게 아닐까? 
   
   평화至上주의가 좀먹은 自衛(자위)의지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오늘의 한국처럼 평화至上주의가 팽배했다. 어떤 代價(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對獨유화정책이 히틀러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좌파는 핵실험을 하고 핵을 먼저 쏘겠다고 협박하는 북한정권에 대한 自衛조치까지 '그렇다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반대한다. 
   1936년 히틀러가 독일군을 비무장 라인란트 지역으로 불법 진주시켰을 때 프랑스가 군사적 대응을 했더라면 독일 군부의 쿠데타로 히틀러는 실각하게 되어 있었다. 평화至上주의에 빠져 있던 프랑스는 영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단독으로 武力(무력)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도 프랑스를 위해서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 했다. 이 기회를 놓친 프랑스는, 재무장에 성공하여 강대하게 된 독일군과 불리한 입장에서 상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애국심이 약화되자 노동자의 직업윤리가 붕괴되고 기업인들도 이기주의에 함몰되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군수산업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기업인들은 國産(국산)무기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외국 무기의 수입을 방해하였다.
   앙드레 모로아는 이 책에서 '프랑스는 어떻게 했더라면 패전을 면할 수 있었을까'라고 自問自答(자문자답)했다.
   <첫째, 강하게 되었어야 했다. 국민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곧 자유를 잃는다. 민주주의는 국민도덕이 붕괴한 뒤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민첩하게 행동해야 했었다. 민주주의와 의회정치가 과정을 중시한다면서 일을 미루고 기업은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총체적 비효율이 패전의 한 원인이었다.
   셋째, 국론통일.
   넷째,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국민의 여론을 보호했어야 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중에는 독일로부터 돈을 받고 親獨(친독)여론을 조작한 이들이 많았다.
   다섯째, 국가분열적인 사상, 즉 사회주의 이념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켰어야 했다.
   여섯째, 국민들이, 특히 지도층이 고결한 생활을 했어야 했다.>      

   守勢的 군대의  한계: 상상력 부족

  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이 몰고온 人命 손실에 진저리를 친 프랑스 지도부는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뜻에서 마지노 요새를 만들어 안주했다. 이 방어적인 전쟁개념은 1930년대 프랑스의 국가적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를 간파한 히틀러는 戰爭不辭의 공갈작전으로 라인란트 進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성공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히틀러의 확장정책에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경고를 해둔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소련뿐이라고 생각하고 1939년 8월말 獨蘇불가침조약을 맺는다. 히틀러는 소련을 중립으로 돌려놓으면 독일이 폴란드를 쳐도 영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誤算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전격전으로써 폴란드를 한달 만에 요절낸다. 영국은 말로써는 독일에 경고했으나 실제로는 폴란드를 돕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못하였다. 실제로 도울 수단이 없는데 왜 폴란드에 대한 보증을 섰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막을 수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막지 못하고 막을 수 없는 폴란드 침공은 막겠다고 보증을 함으로써 히틀러를 자극하여 2차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히틀러가 主力을 폴란드 침공에 돌렸을 때 獨佛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2대 1로 프랑스가 우세했다. 프랑스 98개 사단 對 독일 43개 사단. 사단의 질에서도 프랑스가 앞섰다. 이때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하면서 독일로 밀고 들어갔다면 독일의 루르 공업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히틀러는 항복하든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왜 프랑스는 이 선제공격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다음해 독일로부터 공격을 당해 6주만에 무너져버렸던가. 많은 연구가 이 점에 집중되었다. 10여 년 전에 나온 하버드 대학의 戰史學者 어네스트 R. 메이 교수의 책 '이상한 승리'(Strange Victory-Hitler’s Conquest of France)를 읽어보았다. 기자는 1996-97년 하버드 대학에서 니만 팰로우(언론재단 연수생)로 수학할 때 메이 교수의 강의를 1년간 들은 인연이 있다.  
   메이 교수가 著書에'이상한 승리'라고 이름 붙인 것은 프랑스 학자 마크 블로흐가 쓴 '이상한 패배'에 대응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패배'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까치 출판사). 저자 블로흐는 역사학자였는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이 책을 유언처럼 쓴 뒤 독일군에 잡혀 처형당했다. 이 책은 프랑스의 패배를 연구하는 데 필독서로 꼽히고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기도 하다. 블로흐는 프랑스가 독일군을 너무 깔보고 자신들의 戰力을 과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메이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와 영국군 지휘부는 히틀러가 감히 프랑스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블로흐는 프랑스 군대가 인명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너무 신경을 썼다고도 지적한다. 마지노선을 만들어둔 것은 이라크 전쟁처럼 과학과 기술로써 인명손실을 代替하겠다는 건전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인간 대신 기계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공세적 상상력이나 신속한 대응이 어렵게 된다.   
  독일군은 프랑스군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이 劣勢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프랑스를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을 때는 군부가 반대했다. 군부와 히틀러는 강대한 프랑스 군대를 꺾을 방도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갑부대로 아르덴느 숲 돌파, 프랑스 군대의 배후를 기습한다'는 절묘한 방책을 만든다.

  독일군 정보기관의 敵情 판단
  
  1939년 9월이나 10월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작전에 주력을 투입했을 때 프랑스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프랑스과 영국군 지휘부는 연합군이 승리하고야 말 것이라고 과신했다. 경제봉쇄나 독일군의 도발에 대한 응징 형식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선제공격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둘째, 프랑스군 지휘부는 영국군과 함께 피를 흘려야지 프랑스군만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단독 진격을 망설였다. 즉, 어차피 이길 전쟁인데 우리가 먼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심리구조가 결정적 선제공격의 찬스를 놓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메이 교수는 1940년 독일이 6주 만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가장 큰 功을 독일군의 정보부서에 돌렸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 티펠스킬크 장군과 그 휘하의 리스 대령이 프랑스군 지휘부의 생리와 병력배치, 그리고 방어전략을 정확히 파악하여 독일군의 공격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메이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정보 수집능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독일군의 정보기능은 작전기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의 정보기능은 작전 담당자에게 조간신문을 던져놓고 가는 식으로 상호간에 유리되어 있었다고 했다.
 티펠스킬크 소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語를 잘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수집에는 적격의 인물이었다. 리스 대령은 승마선수로도 유명한 엘리트 장교로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파악한 프랑스 참모본부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프랑스 지휘부는 안전성을 대담성보다 중시한다. 즉,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지휘관들의 재량권이 제한되어 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확실할 때만 공격한다. 전투현장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好機를 잡았을 때 이를 이용하여 戰果를 확대하려고 해도 상부로부터의 규제가 많아 어렵다는 결론도 도출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서는 1938년 가을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보인 반응을 면밀히 분석했다. 프랑스군은 독일에 대한 공격보다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프랑스군은 또 벨기에 국경지대에 주력을 배치했다.
 독일 정보부서는 프랑스 장교들의 행태는 기본적으로 방어위주이며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공격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군 참모본부가 분석한 프랑스군의 행태는 방어 위주의 프랑스 사회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지는 현상이기도 했다. 요컨대 프랑스군은 소극적이고 관료적이라 변화무쌍한 전쟁상황에 신속하고 대담하게 대응하는 체질이 못 된다는 이야기였다.

 슐리펜 계획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士氣가 고양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1939년 12월에서 1940년 초에 걸쳐 독일군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의 主攻은 벨기에 북쪽으로 향할 것이라 믿고 主力 75개 사단을 벨기에 쪽 국경지대로 집결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主力 가운데는 프랑스의 기계화 사단과 자동화 사단의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원래 '황색 작전'(Yellow Plan)이란 작전명으로 1940년 1월17일에 프랑스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작전 개시 며칠 전 이 작전문서의 일부를 갖고 가던 장교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벨기에 지역에 불시착하였다. 장교는 문서의 일부를 불태웠으나 나머지는 벨기에군에 넘어갔다. 히틀러는 작전계획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을 연기했다.
 이 '황색 작전'의 핵심은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참모총장 슐리펜이 만들었던 작전 계획과 거의 같았다. 서부전선의 우익에 主力을 집중시켜 벨기에를 돌파하고 프랑스의 옆구리를 강타한 다음 거대한 우회전략으로 파리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슐리펜이 물러나고 大몰트케의 조카 小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小몰트케는 소심하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익에 너무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면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으로 逆攻을 펼 때 방어가 어렵게 된다고 걱정하여 우익에 붙여 주어야 할 병력을 좌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이 변형된 슐리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 작전계획엔 전제조건이 있었다. 중립국인 벨기에로 우익의 主力을 진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기에를 작전의 공간으로 삼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벨기에로 독일군이 쳐들어가자 그때까지 참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변형된 슐리펜 작전계획에 따라 진격을 계속한 독일군은 파리 근교 마른느까지 진출했으나 조프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끈질긴 방어전에 걸려 마지막 순간에 진격을 멈추고 후퇴하고만다. 戰史家들은 당초 계획대로 우익에 압도적 병력을 배치해 두었더라면 마른느를 돌파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를 쉽게 무너뜨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아르덴느 기습 돌파전

 히틀러는 슐리펜 작전계획의 원안대로 프랑스를 치려고 했다. 비행기 사고로 공격이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의 主力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영국군의 主力과 정면충돌하여 지구전으로 갔든지 독일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戰史家들이 많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독일의 몇몇 장군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슐리펜 계획의 반복사용에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런 반론을 무시했다가 공격이 연기된 상황에서 작전계획을 再考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참모총장 할더 장군에게 새로운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
 이때 할더 장군은 이미 정보참모부장 티펠스킬크 소장과 리스 대령으로부터 主攻을, 벨기에 북부 평원이 아닌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을 통해 프랑스 세단으로 나오는 방향에 놓는 게 유리하다는 연구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르덴느 숲 지대로는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전선에는 아주 취약한 방어부대만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1939년 12월에 독일군 참모본부는 워 게임을 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가므랑 장군역을 맡은 것은 독일 정보참모부의 서부과장 리스 대령이었다. 이 게임에서도 기갑군단을 아르덴느 숲지대로 보내 프랑스의 취약한 방어선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리스 대령은 이런 평가를 했다고 한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가면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슐리펜 계획을 연상하여 이것이 主攻이라고 속단하고 자신들의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진시킬 것이다. 이때를 기다려 독일의 주력인 A집단군의 선봉 기갑군단(10개 기갑사단)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버 해협 쪽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영국군 주력의 배후에 독일 기갑군단이 나타나 연합군을 남쪽의 파리와 북쪽 벨기에로 兩斷한다. 그런데 파리 쪽에는 예비병력이 소수이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
 배후가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랑스군 지휘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리스 대령은 오랜 프랑스 지휘부의 행태 연구를 통해서 신속한 대응, 즉 돌파된 프랑스 전선으로 북쪽의 주력군을 재빨리 이동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생리가 임기응변에 약하고 자세한 명령을 받기 전에는 작전 변경을 하지 않는 데다가 통신망이 취약하고, 전화는 도청된다고 인편을 통해서 명령을 수령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0년 5월10일 히틀러는 변경된 「황색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쳐들어가자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상시켰다. 독일군은 B집단군이 主攻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사이 10개 기갑사단을 핵심으로 한 진짜 主力인 A집단군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 지대를 지나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을 닮은 한국군, 독일군을 닮은 북한군

 프랑스군은 현지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아르덴느 숲지대를 전차가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쉽게 통과했다. 이 길가의 나무를 베어 길에 걸쳐 놓기만 해도 기갑부대의 통과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찰기가 대부대의 이동을 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 방향으로 대부대가 기동할 리가 없다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였다.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한 독일 기갑군단 선봉은 5월13일과 14일 뮤즈江을 도하하여 프랑스 세단으로 건너왔다. 취약한 프랑스 방어군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 지역으로 主攻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허약한 부대만 골라서 배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普佛전쟁의 패전에 이어 두 번째로 세단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그는 5월15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울먹였다. 레이노 수상은 격전 중인 데도 최고사령관인 가믈렝을 웨이강 장군으로 교체했다. 웨이강 장군은 中東에서 불려와 실전에 임하는 데 이틀을 까먹었다. 그 귀중한 이틀간 프랑스군은 돌진하는 독일 기갑군단에 대한 전략을 수립도, 집행도 못 하여 반격 타이밍을 놓쳤다.
 독일 기갑군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渡河와 진격을 계속했다. 기갑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敵陣에서 고립될 수도 있지만 롬멜, 구데리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장군들의 임기응변에 의해 기갑군단의 진격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1주간 계속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뮤즈강 도하 1주일 만에 도버해협에 도착함으로써 英佛 연합군의 주력을 북쪽으로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 예비병력을 남쪽의 파리 방향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200만 대군은 불과 6주 만에 궤멸된다.
 아르덴느 돌파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함께 세계전사상 가장 뛰어난 기습전으로 꼽힌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사안일주의를 간파한 독일의 정보부서, 안전보다는 모험과 속도를 중시한 롬멜, 구데리안 등 창의적인 장군들의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세적이고 관료적이며 책임회피적으로 대처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電擊戰 사고와 프랑스군의 陣地戰 사고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새 전법으로 모험을 감행한 독일이었다.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의 결론에서 '독일군의 승리는 지휘부의 상상력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패배는 느린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그러한 습관을 간파하여 이 약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정리했다.
 영국의 전사학자 리델 하트는 아르덴느 돌파전이 '모든 사람들의 장래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세계의 진로를 바꾼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 승리로 인해 영국은 고립되고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美蘇日까지 휘말려 들어 오늘날의 세계질서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도 이 전투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덴느 전투 이야기를 읽으면 한국군은 프랑스, 북한군은 독일군을 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 프랑스와 한국군은 수세적이고, 북한군과 독일군은 공세적이다. 

 2. 수세적 군대는 시야가 좁고 공세적 군대는 넓다. 한국군은 북한군만 치는 데 집중하지만 북한군은 한국군 이외에 미군과 일본을 어떻게 하면 무력화시킬 것인가를 늘 생각한다.

 3. 수세적 군대는 관료적이고, 공세적 군대는 상상력이 뛰어난다.

 4. 상상력이 뛰어난 군대는 기습을 통한 逆轉勝을 추구한다. 

 

 '무조건적 평화주의자는 간첩과 같다.'  
  
  
 <나는 종교적 신념에 입각해서 같은 인간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양심적인 병역 기피자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국토방위, 국가의 명예, 국가의 독립을 위한 전쟁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전쟁이라면 무조건 반대하여 싸우는 그런 투쟁적인 평화주의자들은 간첩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파괴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그들의 동기는 다를 수 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호전적 국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노력하기는커녕, 침략성이 전혀 없는 자신들의 조국이 국토방위를 위하여 대비하는 것조차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평화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국가를 위하여 싸우지 않겠다는 사람은 그 누구든 나의 동정을 살 가치가 없다.>   
  한국에서 평화를 떠들면서 평화 파괴자인 북한정권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북한으로부터 위협 받는 한국의 국방 노력을 공격하는 자들을 비판한 글 같다. 이 필자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나는 전쟁이라면 목적과 상관 없이 무조건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은 간첩처럼 위험하고 파괴적이라고 말하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치스, 파시스트, 공산당은 미국식 정부 형태를 전복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려고 한다. 물론 평화주의자들의 목적은 그렇지 않다. 그런 관점에선 평화주의자들을 나치스, 파시스트, 공산당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미국 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반대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문제가 나오면 그들의 의견은 하나로 일치한다. 미국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평화주의자들은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미국이 이 단체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국방계획을 없앤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미국의 적들은 미국의 무방비 상태를 이용, 정부를 전복시키려 할 것이다. 전쟁을 배격한다는 그들은 왜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들을 찾아가서 평화를 전도하지 않는가? 미국 같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에서 평화를 전파하기 위하여 수백만 달러를 쓰는 대신에 (평화를 파괴하려는) 베를린, 로마, 동경으로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세균은 곁가지에서가 아니라 근원지에서 박멸해야 한다. 미국의 손발을 묶는 평화주의자들은, 적극적인 반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민주주의의 大義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이 필자의 글에서 '미국'을 '한국'으로, 나치스 파시스트 공산당을 '북한'으로 바꿔놓으면 2016년의 한반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이다. 요지는 모든 전쟁을 다 반대한다는 무조건적인, 투쟁적인 평화주의자들은 행동의 결과로 볼 때는 간첩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 위선자들은 결국 국가를 파괴하는 데 간첩과 共犯이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누구일까? 이 글은 1941년 봄 미국에서 출판된 책에 실려 있다.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2차 대전을 일으켰고,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하고 있는데도 미국에서 무조건적 평화론을 펴는 풍조를 개탄하면서 반드시 일본이 미국을 칠 것이라고 예언한 책이다.    
  이 책은 'JAPAN INSIDE OUT'(일본의 내막)이고 필자는 당시 66세이던 李承晩이다. 위의 인용문은 비봉출판사(류광현 번역) 번역본에서 뽑아 조금 요약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평화주의자일 뿐 아니라 전투적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므로 평화를 위해서 기꺼이 싸울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의 핵개발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원폭 개발을 건의하였다. 이게 진정한 평화주의자의 행태일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엔 반대하지 않고(오히려 핵개발을 지원하고)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인간들은 간첩과 무엇이 다른가? 
 

 





  1637년 음력 1월2일 淸(청)의 태종이 포위당한 남한산성 내 조선왕 仁祖(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그 내용이 직설적이고 당당하다.  
  <(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다고 弱者(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정의)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은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이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知謨(지모) 있는 자가 智略(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從軍(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일전)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國力(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明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元(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元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요), 金(금),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신)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북면)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都城(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山城(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城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匹夫(필부)라도 天子(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희 八道(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숭덕) 2년 정월2일>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폐부를 찌르는 직격탄이다. 명나라의 배경만 믿고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겠다고 도발했으니 그 명나라의 구원병으로 나를 막아보라. 만약 明軍이 오지 않으면 너는 오만과 오판으로써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고 들어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충 그런 뜻이다.   
  청태종의 이 직격탄은, 황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요구를 굳이 거부하여 참혹한 겨울 전쟁을 부른 인조와 그 신하, 특히 명분론의 인질이 된 척화파의 무능한 안보와 국방태세에 대한 조롱이다.
 
  상황을 전쟁으로 몰고간 척화파 사대부들은 淸에 반대함으로써 자신의 지조를 높이는 데만 신경을 썼지 그런 외교가 전쟁을 불러 국가와 백성들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눈을 감았고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에도 반대했다. 구제불능의 이런 신하들은 패전한 뒤에도 존경을 받았고 애써 淸과 협상하려 했던 최명길 등은 대대로 욕을 먹었다. 이런 조선조는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   
  1637년 음력 1월29일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이던 인조는 주화파 최명길을 淸軍 진영으로 보냈다. 최명길은 淸에 대한 강경론으로 병자호란을 부른 책임이 있는 오달제 윤집을 데리고 갔다. 청태종은 두 사람에게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盟約(맹약)을 깨뜨리게 했느냐'고 물었다.
  
   오달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300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왔소. 명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청나라가 있다는 것은 모르오. 청국이 황제를 참칭하고 사신을 보내왔으니 諫官(간관)의 몸으로 어찌 화친을 배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라고 했다. 윤집은 '우리나라가 天朝(명나라)를 섬겨온 지 이미 300년이나 되어 의리는 임금과 신하요, 정은 아버지와 아들이오. 더 할 말이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말했다.
  
   두 충신의 말은 기개가 있으나 답답하기 그지 없다. 漢族(한족) 나라 明에 대한 충성과 일편단심만 보일 뿐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으로 죽어나가고 있던 백성들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망해가는 明에 대한 일편단심은 在野(재야) 선비가 해야 할 일이지 在朝(재조)의 관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無知(무지), 외교와 군사에 대한 無知, 백성들에 대한 무관심만 보여주는 조선조 엘리트의 수준이다.
  
   민족사의 극과 극을 이야기하라면 對唐(대당) 결전으로 唐軍(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통일국가를 완성한 문무왕, 김유신 등 7세기의 신라 지도부가 최상이다. 최악은 사대주의와 위선적인 명분론에 혼을 빼앗겨 할 필요가 없는 전쟁을 초대하여 王朝(왕조)도 民生(민생)도 도탄으로 밀어넣었던 仁祖 시대의 집권세력이다. 신라 지도층과 인조 시절 지도층은, 같은 민족인데 어떻게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신라 지도층의 성격은 개방, 활달, 文武(문무)겸전, 풍류, 자주, 명예, 오기, 자존심, 품격으로 표현된다. 인조 지도층의 성격은 편협, 명분, 위선, 독선, 무능, 文弱(문약)으로 표현된다.    
   신라는 국가와 불교가 기능을 분담했다. 국가가 종교에 복종하지도 종교가 국가에 이용만 당하지도 않았다. 신라와 불교는 각기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상호 협력하였다. 흔히 신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말하지만 통치 이데올로기화된 불교는 아니었다.
  
   조선조 시대에는 朱子學(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정치가 주자학을, 주자학이 정치를 이용하면서 전례가 없는 수구성과 명분성과 위선성을 보여주었다. 정치와 철학이 결탁하면 정치는 생동감을 잃고 철학은 흉기가 된다. 주자학적 명분론이 부른 전쟁이 병자호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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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왜병에게 기습을 허용했던 조선은 그 35년 뒤 후금에게 다시 침략을 허용하였다. 丁卯胡亂(정묘호란)이 그것이다(인조 5년). 인조는 그 9년 뒤인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을 막지 못하고 치욕의 삼전도 항복을 하고말았다. 어떻게 된 것이 40여년 사이 세 번이나 똑 같이 외부세력에 선제공격을 당하고 말았느냐 말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인조 조정이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1636년 淸으로 이름을 바꾼 後金은 조선에 대해서 大淸皇帝(대청황제)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조는 明에 사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의리상 그렇게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이때 明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고 大淸은 떠오르는 세력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서 明과 後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여 전쟁을 면했었다. 그런 광해군을 배신자라고 규정하여 쿠데타로 쫒아냈던 인조 조정은 明 황제 이외의 누구도 황제라 부를 수 없다는 명분론을 굽히지 않았다.
  
   인조도 현실외교로써 청과 화친하고싶었으나 명분론을 들고 나온 斥和派(척화파) 신하들의 반발 때문에 淸과 대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한 10개월간 계속된 인조 조정의 내부 노선 투쟁을 들여다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명분론은 淸軍의 침입을 부르는 초대장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명분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쟁 준비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대사간 尹煌(윤황)이 임금에게 전쟁준비를 건의하면 그가 지휘하는 사간원에서는 이런 건의를 올린다.
  
   '요사이 병란의 기미가 이미 생겨 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 하늘이 크게 재앙을 내려 수해와 旱災(한재)가 거듭 계속되니, 팔도의 생령이 모두 죽게 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하게 된다면 국가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려면 청이 요구하는대로 그들 황제를 大淸皇帝라고 불러주면 된다. 그렇게 하자는 주화파 崔鳴吉(최명길)에 대해선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짓이라고 규탄해마지 않던 척화파가 자신들이 부른 전쟁 준비를 하자고 하니 백성들의 고통 운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한국의 좌파들은 北의 핵개발을 비호하거나 사실상 지원해놓고는 우파가 '北이 핵무장하였으니 우리는 미사일 방어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나서니, '왜 중국이 싫어할 일을 하느냐'고 반대하는데 인조 시절의 척화파 꼴이다.
  
   대사간 윤황이 또 강화도의 무기와 전투식량을 평양으로 실어보내 평양에서 적을 막자고 건의한다. 비변사는 이 전쟁 준비 건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해야겠지만 民力(민력)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억지로 일을 시키면 내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가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人心 때문이다.'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시대착오적인 명분론을 앞세우다가 초대해놓고는 전쟁 준비를 하겠다니 '그러면 백성이 고생하니 하지 말자. 백성들을 혹사하면 내란을 일으킬지 모르겠다'고 하는 판이니 대책이 없다.    
   실제로 제대로 된 방어책이 없었던 仁祖 조정은 청군이 서울로 들어왔을 때에야 강화도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조로 하여금 그런 굴욕적 항복을 하도록 했더라면, 그리하여 수십만의 백성들이 청으로 납치되어가는 비극을 불렀다면 강경파 신하들 중에 책임지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인데 아무도 없었다. 현실론을 앞세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만 욕을 먹게 되었다.   
   국제정세를 오판한 명분론으로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척화파 선비들은 충신이 되고 현실적 판단에 따라 화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배신자로 치부 된 것이 조선조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어버리니 진정한 반성도 책임규명도 불가능해지고 그런 과오의 메카니즘은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체질로 살아남아 조선조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했으며 지금은 한국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병자호란을 부른 위선적 명분론은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부를지 모른다.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한 자들이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을 방해하는 것은 淸을 도발, 전쟁을 불러놓고는 전쟁 준비엔 반대하는 인조 시절의 명분론자들과 어떻게나 같은지 놀랍다. 지금의 친북좌파가  진보의 탈을 쓰고 있지만 맨얼굴은 수구반동 세력임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左右 대결은 그 본질이 진보 對 守舊인데, 자유민주세력이 잔짜 진보이고 진보자칭 세력은 守舊이다.


'宋의 눈물'은 대한민국 멸망 예언서가 아닌가?

  
  간첩을 골키퍼로 두고 축구를 한 南宋
  
  12세기 초, 北宋은 金과 연합, 宿敵(숙적) 거란을 친 뒤엔 비밀리에 거란과 동맹, 金을 공격, 失地(실지)를 회복하려 했다. 일종의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꾀는, 거란의 天祚帝(천조제)가 金에 붙들려 宋이 보낸 密書(밀서)가 발각되면서 파탄나기 시작했다. 배신당한 金은 宋을 징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켜 개봉을 포위했다. 포위된 개봉에선 主戰派(주전파)와 강화파가 서로 싸웠다. 宋이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수락하자 金은 일단 포위를 풀고 물러났으나 宋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시 남침했다.   
  이때 北宋은 金의 침략을 막기에 화약무기를 처음 사용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의 이야기지만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南宋도 화약무기를 사용했다. 이렇게 宋은 기술창조면에서 우수한 재능을 발휘했지만 변화보다는 안전과 조화에 가치를 둔 유학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 이상의 발전을 기하지 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에서는 1280년 경 화약과 총이 등장하자 총과 대포는 성벽을 파괴했고 그 결과 봉건사회의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靖康(정강) 원년(1126년) 11월, 金軍은 한 해에 두 번째로 황하를 渡河(도하), 개봉을 에워쌌다. 金軍의 격렬한 공격이 시작되자 개봉성은 籠城(농성) 40일 만에 함락되었다. 재화를 약탈당하고 부녀들은 끌려가 욕을 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가 대번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金軍에 복무했던 연경의 漢人들이 약탈의 안내역이었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의 컬렉션이었던 서화·골동품 등은 인기 있는 약탈물이었다. 휘종과 흠종 父子는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金國이 필요로 하는 기술자·예술가 등 수천 명이 북쪽으로 끌려갔다. ‘靖康의 變(정강의 변)’이다. 이렇게 宋왕조는 개국 167년 만에 멸망했다. 이 왕조를 중국史에서는 北宋이라고 한다.   
  北宋의 잔존세력은 양자강 남쪽으로 피란하여 南宋을 세웠다. 南宋엔 秦檜(진회)라는 奸臣(간신)이 나타나 利敵(이적) 행위를 했다. 그는 1127년 北宋이 金에 멸망할 때 어사대장관(감찰원장 격)이었는데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 金軍에서 부역하다가 가족을 데리고 南宋으로 넘어왔다. 금나라 군인들을 죽이고 탈출하였다고 했으나 金이 간첩으로 써 먹기 위하여 살려 보냈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 眞僞(진위)는 알 수 없지만 남송의 재상으로 복귀하여 한 행동은 간첩질이었다. 문제는 간첩질이 늘 평화와 화해를 앞세운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기 싫어하는 황제에겐 달콤한 정책 대안이었다. 진회는 황제를 설득, ‘對金 햇볕정책’을 펴면서 주전파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신경질적인 민족주의
  
  1140년과 이듬해 金軍은 올출 장군의 지휘 하에 南宋을 치기 위하여 남하했다. 이때 南宋軍은 여러 방면에서 金軍을 격파했는데 그때마다 진회가 고종에게 아뢰어 이기고 있는 남송군을 철퇴시키고 勝將(승장)을 좌천시키거나 파면했다. 올출은 진회를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
  “강경론자 岳飛(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진회는 악비 父子를 역모로 몰아 죽였다. 저자 정순태 씨는 秦檜(진회)를 ‘金의 고정간첩’이라고 단정했다. 진회는 제 명(65세)대로 살고 죽었는데 최후까지 利敵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의 한 從北派 거두의 일생과 비슷하다.   
  南宋의 영종 시절 主戰論(주전론)의 대표인 한탁주는 1206년 金을 쳤으나 대패했다. 金은 이 침략사건의 책임을 물어 영종에게 韓의 목을 요구했다. 宋朝는 韓을 암살한 뒤 그 머리를 상자에 넣어 金에 보냈다. 金은 韓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일본의 중국사 大家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이렇게 평했다.   
  <무력에 자신이 있었던 여진족의 국민주의는 敵國(적국)의 입장을 인정할 정도로 아량이 있었으나, 국력이 쇠퇴하여 敵國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南宋은 강력한 민족주의에 눈을 떴으나 이것은 단순히 신경질적인 적개심으로서만 발로되었다.>   
  宋은 경제적·문화적인 富國이었으나 지도층이 文弱(문약), 경제력을 自主국방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끝내는 몽골에 망했다. 富國이었으나 强兵(강병) 만들기에 실패했다. 돈으로 평화를 사려 했으나 여기서도 실패했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宋과 한국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宋의 末路(말로)가 쇠망하는 한국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배부른 나라가 배고픈 나라에 먹히다
  
  송과 한국은 공통점이 많다. 
  
  *宋과 한국은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자주국방과 尙武(상무)정신을 잃어간 점에서 같다.
  *문화, 예술은 발달했으나 애국심과 단결심과 지도층의 청렴성이 부족했다.
  *文尊武卑(문존무비)의 폐단이 많았다.
  *외교에 의리가 없었다. 從北(종북) 정권이 들어서서 韓美FTA를 일방적으로 폐기하면 한국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韓美동맹도 흔들릴 것이다.
  *지도층이 敵前(적전)분열했다. 화평파가 金의 공갈에 넘어가 利敵행위를 했다.
  *진회와 같은 간첩이 애국자들을 죽였다.
  *화려한 예술과 문화와 위선적 명분론[性理學]이 국가 정신을 좀먹었다.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한국의 지나치게 커진 좌파 문화권력을 걱정한다.
  <오늘의 한국도 文化권력이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北宋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나라다. 우리 학계 예술계 언론계의 현실이 바로 그러하여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좌파의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金日成-金正日 주의를 비호 동조하는 깽판 세력이 ‘進步(진보)’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다.>
  
  그는 국가 지도층의 타락도 지적했다.
  <군대 안 간 대통령이 군대 안 간 학자를 국무총리로 뽑는 나라는 宋의 문관優位(우위) 체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된다면 국군의 사기와 국방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宋의 亡國史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위험하다.>
  
  요사이 한글專用(전용)으로 된 역사서를 읽으면 머리가 아픈데 이 책은 저자와 출판사의 뜻이 맞아 漢字를 適所(적소)에 썼다. 《宋의 눈물》은, 지난 40여 년간 기자로서 글을 썼고, 중국사에 정통한 60代 후반 문필가의 성숙된 시각이 깔려 있는 1급 역사 기행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현지紀行(기행)으로 연결하고 宋과 한국을 오버랩 시켜나간 입체적 記述(기술)로 역사적 실감이 더하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風濤(풍도)’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라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宋이 중국 역사상 가장 부자나라였듯이 대한민국도 韓民族 사상 최고 부자이다. 著者가 머리글에서 썼듯이 배부른 나라는 배고픈 나라에 먹힌다. 한반도의 ‘배고픈 나라’는 북한이다. 세계사의 한 법칙은, 남북 대결에선 거의가 정신력이 강한 北의 승리로 끝난다는 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런 점에서는 예외적이다. 풍요를 즐기면서 강건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에 《영웅숭배론》을 쓴 토마스 칼라일은, “가난을 이기는 사람이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이는 한 명도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한국인들도 가난과의 싸움에선 이겼지만 풍요와의 정신적 싸움에선 지고 있다. 그 결과가 宋처럼 되지 않으려면 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남송의 진회가 敵과 화친한다면서 利敵행위를 해간 과정은 북한과 화해한다면서 安保를 해체해간 햇볕론자들과 흡사하다. 평화제일주의는 많은 경우 입으로만 그럴 뿐 실은 피를 부르는 푸닥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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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2, 16: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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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     2016-09-23 오전 9:51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평화만 부르짓던 아테네는 기원전418년의 장군 선거에서 아테네인들은 알키비아데스 대신 니키아스(Nikias)를 선출하여, 온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니키아스는 아르고스 등이 스파르타와 싸우면 경우에 따라 힘을 보탤 수도 있으나, 아테네가 먼저 평화협정을 정면으로 깨트릴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고 아테네는 패배했다. 민주정부를 없애고 과두정체를 수립한다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항복이 수용되었다. 기원전 404년 4월이었다.그러나 아테네고 스파르타고 할 것 없이 쇠퇴와 몰락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다.
   비단향꽃무     2016-09-22 오후 9:1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義(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ㅡ이승만ㅡ

反共도, 전쟁도 민주주의적으로 해야 한다.
ㅡ조갑제ㅡ
   해리슨 김     2016-09-22 오후 9:07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네요.
625전쟁 중에도 서로 싸우다가 망할 뻔 했는데 미국 덕에 간신히 살았고요. 지금은 더 악랄하고 더럽게 싸우지 않나요?
   임전무퇴     2016-09-22 오후 7:19
세상을 남탓하는 자들에게 이길 방안이 없죠.
있다면 몽둥이 찜질밖에....
   임전무퇴     2016-09-22 오후 7:15
세상을 남탓하는 자들에게 이길 방안이 없죠.
있다면 몽둥이 찜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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