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 대한 誤解
나폴리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나쁘게 소개되어 있는 이탈리아 도시일 것이다. 세계 3대 미항이라고 배웠는데, 더럽고 시끄럽고 소매치기가 설치더라는 식이다. ‘볼 게 없다’는 무식한 이야기가 더해지기도 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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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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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만 입구를 지키는 노르만의 海城 

이탈리아 나폴리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나쁘게 소개되어 있는 이탈리아 도시일 것이다. 세계 3대 미항이라고 배웠는데, 더럽고 시끄럽고 소매치기가 설치더라는 식이다. ‘볼 게 없다는 무식한 이야기가 더해지기도 한다 

나폴리를 중심으로 하여 볼 수 있는 것들의 목록: 베수비오스 산, 카프리 섬, 폼페이 유적, 소렌토, 살레르노, 아말피 해안, 산중 도시 라벨로,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나폴리 언덕 위 카포디몬테 미술관, 카세르타 궁전 등등. 이들은 세계적인 경관이고 문화유산이다.

나폴리는 로마 제국이 망한 후엔 동로마제국(비잔틴)에 충성하는 공국으로 번성하다가 1139년 시실리 왕국을 세운 노르만 세력에 의하여 정복되어 시실리 왕국에 편입되었다. 그 뒤 독일계 스와비안 세력, 프랑스의 안주, 아라곤, 스페인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면서 '두 개의 시실리 왕국'(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 통치) 수도(팔레르모와 함께)로 기능하였다. 베니스, 피렌체, 밀라노, 로마, 나폴리, 팔레르모. 이들 중 나폴리는 영토와 인구가 가장 넓고 많았던 나라의 수도였다.   

나폴리가 오랜 기간 나폴리-시실리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나폴리를 얕잡아 본다. 당시의 나폴리-시실리 왕국(두 개의 시실리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는 사실, 따라서 문화 유산이 나폴리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면 나폴리는 그냥 소란스러운 도시이다  

역사를 알면 나폴리를 존중하게 된다.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전시된 그리스 로마 시절의 조각품,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 장면 모자이크 그림, 특히 3개 층에 걸쳐 160개 방에 전시된 카포디몬테 미술관의 르네상스 시절 작품들. 이는 피렌체의 우피지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대영박물관에 비견되는 세계적 수집품이다. 주로 파르네제 콜렉션에서 나온 보물들이다. 파르네제 家門은 바오로 3세 교황과 엘리자베타 페르네제 스페인 왕비를 배출한 이탈리아의 名門으로 오랜 시절 최고급 미술품을 수집하였다. 이 보물들은 파르마 공국을 다스리던 페르네제 가문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페르네제의 아들인 찰스가 스페인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던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된 것을 계기로 나폴리로 옮겨와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보관, 전시되게 되었다.

나폴리는 하루 이틀 일정으로 볼 수 없는 도시이다. 역사와 문화의 깊이가 장기 체류에 의한 넉넉한 시간 투자를 요구한다. 그럴 시간이 없으면 短評을 피하고 독서를 더한 다음에 볼 것을 권한다. '''''''''''''''''''''''''''''''''''''''''''''''''''''''''''''''''''''''''''''

*시실리-나폴리 왕국 이야기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자주 만나는 '두 개의 시실리 왕국(The Kingdom of the Two Sicilies)'이라는명칭은, 복잡한 남부 이탈리아 역사를 반영한 용어이다. 노르만 戰士 출신인 루제로 2세가 1130년에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를 통합하여 시실리 왕국을 세우고 팔레르모를 수도로 삼았다. 이 왕국은 그 뒤 지배세력이 바뀌고 시실리와 남이탈리아가 짧은 시기 갈라지곤 하였으나 대체로 하나의 통치 권역으로서 이탈리아가 통일되는 1860년까지 약 700년간 계속되었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의 후손인 노르만 세력은 유럽 역사에 크나큰 흔적을 남긴 것이다.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공은 1066년에 약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해롤드 왕이 이끄는 비슷한 숫자의 앵글로-색슨족 군대를 전멸시키고 잉글랜드(나중엔 아일란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노르만 왕조는 잉글랜드를 가장 잘 조직된 효율적 국가로 변모시키고, 법치를 확립해가면서 세계 제국 영국의 기틀을 다진다.

윌리엄 정복왕의 잉글랜드 상륙보다 약 60년 먼저, 역시 노르만 지역 출신의 바이킹 후예들이 복잡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남이탈리아에 용병으로 왔다. 이들은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축하는 교황세력, 신성로마제국, 비잔틴, 롬바르디 세력, 그리고 아랍인들을 상대로 약 100년간의 合縱連橫(합종연횡)과 끊임 없는 전투 및 모략의 장대한 정복사업을 통하여 드디어 1130년에 시실리와 남이탈리아(나폴리 남부)를 통합한 시실리 왕국을 세운다. 이 시실리 왕국의 지배자인 노르만 세력은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으로 다양한 종교·인종·문화를 융합, 11~13세기 지중해를 포함한 유럽 전체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었다. ‘태양의 왕국’으로 불린다. 노르만 세력이 남긴 찬란하고 거창한 문화유산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에 많이 남아 있다. 지중해를 오고간 여러 문명을 융합시킨 점에서 특별한 매력을 지닌 성당, 城, 수도원, 벽화, 궁전들이다.

노르만 세력은 거의 동시대에 유럽 북쪽의 잉글랜드와 남쪽의 지중해에 당대 최고의 국가와 문명을 건설하였다. 특히 11~13세기의 시실리 왕국은 300년 먼저 온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의 인간 중심 문명이었다. 그 비결은 노르만인들의 尙武정신, 건설적 행정능력,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성격, 그리고 法治로 설명된다. 문명 파괴자가 문명 건설자로 돌변한 경우이다. 건설된 문명과 제도와 국가의 수준과 지속성, 그리고 영향력에서 바이킹과 노르만을 인류역사상 가장 우수한 지배민족이라 설명하곤 한다.

시실리 왕국은 노르만 왕조의 피를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데리코 2세(그는 독일출신이지만 시실리에 주로 살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시도하였다) 때 전성기를 넘기면서 노르만 세력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세력, 프랑스의 안주, 아라곤,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지배로 넘어간다. 시실리 사람들로선 불행이었다. 노르만 지배자처럼 자신들을 위해준 정권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때 시실리 왕국 중심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되는 것이 역사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북부 이탈리아에 기반을 둔 사르디니아 왕국이 통일을 주도,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는 이에 흡수되는 꼴이 되었다. 이탈리아에 가면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貧富, 문화, 인종, 습관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시실리 사람들은 1130년에서 1860년 사이 700여 년간 한번도 자신들이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는 이 기간의 대부분 스페인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시실리는 스페인 분위기가 난다. 유럽에서 가톨릭에 대한 信心이 강한 순서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차례라고 하는데 시실리는 스페인 급이다. 

13세기, 시실리 왕국을 다스리던 페데리코 2세가 죽자 프랑스의 안주 공국 세력이 침공, 페데리코의 아들을 축출하고 시실리 왕국(남부 이탈리아 포함)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안주 세력은 노르만과는 반대로 타민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착취와 군림이 그들의 특기였다. 노르만의 너그러운 통치에 대한 기억이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1282년 3월30일 부활절에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남자가 시실리 여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생기고 이게 기폭제가 되어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시실리에 주둔하였던 약 4000명의 안주 사람들이 폭도들에게 살육되고 쫓겨났다. 여러 나라가 이 사태에 개입하는데 결국은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시실리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지배자가 된다. 약 20년 간의 전쟁 끝에 안주는 시실리를 아라곤에 넘기고 남부 이탈리아 통치권만 보장받은 것이다.

안주는 시실리를 잃고 남부 이탈리아만 다스리면서 이 지역을 나폴리 왕국이라 불렀다(수도 나폴리). 시실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자신들을 ‘시실리의 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시실리를 통치하던 아라곤 세력도 ‘시실리 왕국’이라고 호칭하였으므로 두 개의 시실리 왕국이 존재한 셈이다. 그래서 'The Kingdom of the two Sicilies'라는 말이 생겼다.  

1442년 드디어 시실리를 통치하던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남부 이탈리아를 다스리던 나폴리 왕국을 점령, 두 개의 왕국을 통합하였다. 알폰소 왕이 1458년에 죽은 뒤 두 왕국은 다시 나눠진다. 시실리는 동생인 아라곤의 존2세에게, 나폴리 왕국은 庶子(서자)인 페르디난드에게 주었다.

1501년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는 나폴리 왕국을 흡수, 다시 두 개의 왕국을 통합한 뒤 지배권을 그때 생긴 스페인 왕권 하에 두었다. 페르디난드는 카스틸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결혼, 1492년에 그라나다를 점령, 이슬람 세력을 스페인에서 몰아내고 스페인 통합 왕조를 만들었다.

1516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가 스페인 왕이 된다. 유럽에선 나라가 왕의 부동산에 불과하여 결혼과 협상에 따라 주고 받았다. 칼 5세는 시실리와 나폴리 왕국의 지배자가 되어 400년 동안 시실리 영토이던 말타를 떼어내 요한 기사단에 넘겼다. 두 개의 시실리 왕국은 스페인 왕조의 지배를 계속 받다가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종결하는 협상 과정에서 변화가 생긴다. 1713년 시실리 지배권은 잠시 사보이 공국(현재의 프랑스 앙시 부근)에, 나폴리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 소유로 넘어간다. 오스트리아와 사보이는 수년 뒤(1720년) 시실리와 사르디니아를 맞바꾼다. 즉 사보이는 시실리를 오스트리아에, 오스트리아는 사르디니아를 사보이 공국에 넘긴다. 이렇게 하여 시실리와 나폴리 왕국은 다시 통합되어 오스트리아 지배를 받는다. 이것도 잠시, 다시 스페인으로 넘어온다.

1738년 폴란드 계승 전쟁을 결산하는 비엔나 협정. 파르마 공국(이탈리아 북부)의 찰스 공은 스페인 펠리페 왕과 페르나제 왕비 사이에 난 아들인데, 이 협정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두 개의 시실리 왕국'을 인수하는 대신에 파르마는 오스트리아에 주게 된다(나중에 그의 동생이 파르마 공국을 다시 인수), 찰스는 1759년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로 등극하자 두 개의 시실리 왕국을 아들에게 상속한다. 아들은, 시실리에선 페르디난드 3세, 나폴리에서는 페르디난드 4세로 불린다. 이 무렵 지은 것이 카세르타 왕궁이다. 나폴리 근방에 있는 이 장대한 궁전은 스페인 풍인데, 시실리-나폴리 왕국의 국력을 상징한다. 

1799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이탈리아를 침공,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페르디난드 왕은 시실리로 달아났다. 이때 영국의 넬슨 제독이 왕을 호송하였다. 감사의 표시로 왕은 넬슨을 시실리의 에트나 화산 산기슭에 있는 브론테 마을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에 페르디난드는 넬슨의 도움을 받아 나폴리로 돌아와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동생인 조셉을 나폴리 왕으로 세워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하였다. 시실리는 영국의 보호를 받다가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간  이후 나폴리 왕국과 다시 결합되었다. 

1815년 비엔나 회의는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 출신 페르디난드를 다시 두 개의 시실리 왕으로 인정하였다. 스페인 세력의 지배하에서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를 다스리던 이 왕국은 1860년 가리발디가 이끄는 민병대와 사르디니아 왕국의 협공을 받고 이듬해 해체되어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페인 지배를 600년 이상 받아온 시실리 사람들이 이탈리아 국민이 된다. 그들이 이탈리아 국민으로 산 것은 최근 150여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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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0, 20: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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