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惡靈', 한국의 악령,
소설 '악령(惡靈)'은, 인간은 이상사회를 상상은 할 수 있으나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朴承用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인간의 深淵(심연)을 들여다 본 문학적 천재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공병사관학교 생도 시절 독서광으로서 푸쉬킨(Pushkin)이나 고골(Gogol) 등 러시아 작가들과 서부 유럽의 고전들―셰익스피어, 괴테, 라시느, 발작, 빅터 유고, 쉴러 등―을 涉獵(섭렵)하였다. 그리고 월터 스콧의 모험소설과 호프만의 판타지(fantasies) 등 낭만주의적 소설에도 심취하였다. 낭만주의는 일생을 두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20대 전반이 지나갈 쯤 그는 작품의 주제와 인물들을 현실세계에서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현실(reality) 자체보다도 더 환상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병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복무하던 1846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첫 번째 자연주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문학계를 搖動(요동)시키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특히 당대 러시아 문단에서 가장 유명한 비평가였던 벨린스키(Belinsky)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문학적 천재라고 극찬하였다. 벨린스키는 문학을 러시아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위한 투쟁에 사용될 선전도구로 간주하였다. 그는 문학은 사회의 결함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벨린스키의 이러한 要件(요건)을 많이 갖추고 있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벨린스키의 이런 功利主義的(공리주의적) 예술관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당장 뭔가를 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였지만, 그리고 서구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는 실천적 기독교의 한 형태라고도 간주하게 되었지만 벨린스키의 과격한 유물론과 혁명사상은 결코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벨린스키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는 다른 문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그가 회원으로 있던 문학토론 클럽에 침투한 직업혁명가의 정부전복 음모에 共犯(공범)으로 오인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총살 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減刑(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8년 동안―수용소 4년과 二等兵(이등병)으로서 군 복무 4년― 流刑囚(유형수)로 있으면서 많은 苦楚(고초)를 겪었고 또 유럽지역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러시아 민중의 實相(실상)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에게 동정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또 受刑(수형)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범죄 심리(criminal mind)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위대한 소설 대부분이 범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범죄자들과 특히 일부 극악의 흉악범들과 매일 가깝게 접촉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以前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한 믿음 및 인간은 본질적으로 善하다는 믿음은 둘 다 잘못된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인간악의 제거가 필수적인데 종교만이 인간의 존재론적 邪惡(사악)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그의 소설의 중심적 주제는 이러한 것―신앙을 통한 인간악의 극복―이었다. 시베리아의 감옥과 추방생활은 그로 하여금 인간의 영혼이 罪로부터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한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신념을 확고히 갖게 하였다.

‘惡靈’은 도덕적 절대자인 神을 버리거나 神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여 무신론자가 된, 그래서 정치적 정서적 정신적 虛無主義(허무주의)에 영혼을 빼앗긴 一團(일단)의 젊은 지식인들이 체제전복을 위해 악령처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무차별적 폭력과 선동―살인, 방화, 불법시위 등―에 몰두하다가 자멸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로서 反허무주의적, 反사회주의적 소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Nechev)사건〔농업학교 학생들의 지하 혁명조직을 이끄는 네차예프라는 학생이 다른 회원들과 함께 조직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직원 이바노프(Ivanov)를 살해한 사건〕을 ‘惡靈’의 플롯으로 援用(원용)하면서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에게만 가능한 사회주의적 이상사회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악마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욱이 知的으로나 인격적으로 미숙한 젊은이들이 무신론자가 되어 神의 권위를 부정하고 정치적 도덕적 허무주의자 및 급진사회주의자가 될 때에 악마의 조종에 놀아나는 사악한 어릿광대가 되기 싶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탄과 그의 악령들

소설 ‘惡靈’은 어느 地方 소도시에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코호벤스키(Stepan Trofimovich Verkohovensky)가 座長(좌장)으로 있는 젊은 지식인들의 토론그룹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스테판은 한창 시절에는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文名(문명)을 날렸지만 지금은 이 지역의 세력 있는 大地主인 바바라 페트로브나 스타브로지나(Varvara Petrovna Stavrogina)의 食客(식객)으로 있는 퇴물 자유주의자이다. 이 토론그룹〔토목기술자 알릭세이 키리로프(Aleksei Kirillov), 스테판의 弟子 이반 샤토프(Ivan Shatov), 지방 관리 세르게이 리퓨틴(Sergei Liputin), 지역 관리 버진스키(Virginsky), 유태인 리암쉰(Lyamshin), 쉬가로프(Shigalov), 토르카첸코(Torkachenko), 에르켈(Erkel) 등〕은 베르코호벤스키의 아들인 사악한 급진 사회주의자 피터(Peter)가 나타나기까지는 無害(무해)한 순수 談論(담론) 그룹이었다. 피터는 파리에 있는 국제공산당 본부에서 파견한 지역 細胞(세포) 조직 책임자라면서 아버지를 축출하고 그룹에다 보다 과격한 색깔을 입힌다.

以後(이후) 추악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교회의 聖像(성상)이 더럽혀지고 성서 판매원이 모욕을 당하며 정치적 팸플릿이 배부되고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 불안이 조성된다. 폰 렘브케(von Lembke) 신임 知事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職務(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고, 피터 일당의 꼭두각시가 된 지사부인이 주최하는 축제는 난장판이 되며, 위대한 작가인 카르마지노프(Karmazinov)가 치욕을 당하고 放火(방화)사건이 터지면서 그룹 협력자인 레브야드킨(Lebyadkin) 大尉와 그의 정신이 약간 나간 절름발이 여동생 마리아(Maria)가 살해된다.

그룹의 一員인 이반 샤토프(Ivan Shatov)가 신념의 변화로 그룹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피터는 회원들을 설득하고 위협하여 사토프를 살해한다. 이런 일련의 살인사건이후 이들 사회주의자들 그룹은 恐慌(공황)상태에 빠져 산산조각이 난다. 리암쉰은 자수하고 비진스키는 체포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리퓨틴은 私娼街(사창가)에서 붙잡힌다. 피터는 해외로 도피하고 나머지 다른 회원들은 모두 應分(응분)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니코라이 스타브로긴(Nikolay Stvrogin)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스타브로긴은 소설의 중심적인 인물이다. 모든 인물들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몇몇 인물들―키리로프, 샤토프, 레브야드킨, 피터―에게 그는 崇仰(숭앙)의 인물이 된다. 이들은 그의 정신적 제자이다. 이들은 스타브로긴의 分身과 같은 존재로서 각자 나름대로 스타브로긴의 사상과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피터 베르크호벤스키는 스타브로긴을 자신의 우상으로 인정한다.

그는 스타브로긴을 神으로 대우한다. 스타브로긴의 정신적인 자식들인 샤토프와 키리로프에게도 그는 神이다. 샤토프는 그를 열렬히 숭배까지 한다. 자살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조직원 키리로프(Kirillov)도 그를 敬慕(경모)한다. 여성들은 운명적으로 그에게 매혹 된다. 특히 사토프의 온순한 누이동생 다샤(Dasha)와 미모의 리자 튜시나(Liza Tushina)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그에게 집착한다. 피터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로 그를 모시려고 한다.

스타브로긴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야심차게 창조한 ‘강한 인간’으로서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 즉 神이 없고 神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化身(화신)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인류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神이 없는 자유의지의 필연적인 결과는 인간성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은 神에게 영웅적으로 대항하고 神의 저주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탄(Satan)이고 그를 숭배하고 따르는 사악한 피터와 그의 일당은 악행을 증식시키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들이다. 이들은 사탄 스타브로긴의 정신적인 원칙과 이념을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은 또한 그리스도(Christ) 같은 인물이다. 그는 정신 이상인 가난한 절름발이 마리아와 결혼하고 샤토프에게 뺨을 맞고도 전혀 보복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가가노프(Gaganov) 아들과의 결투에서 의도적으로 誤照準(오조준)하여 그를 살려준다. 이 세 가지 행위는 스타브로긴의 그리스도적인 모습을 비추어 준다. 그의 행동은 고난을 당하는 인류를 위한 희생(마리아),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때리라고 얼굴을 돌리는 것(샤토프),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를 거부하는 것(가가노프) 등 예수와 같다는 것이다.

샤토프는 “나는 왜 당신을 영원히 믿어야 하는 운명입니까?”라고 말한다. 키리로프는 그를 짐(십자가)을 찾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짐―십자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의 家名<가명> Stavrogin은 십자가를 의미하는 古代 그리스語 stavros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스타브로긴은 악마적 인물이다. 그의 家名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반면 그의 다른 이름 Nikolay Vsevolodovich는 무자비한 권력을 의미한다. 〔Nikolay= 萬國(만국)의 정복자 Vsevolod=萬人의 主君(주군)〕. 소설에서 스타브로긴의 행위의 많은 부분은 그의 악마적 이미지를 뒷받침 해 준다. 피터는 스타브로긴의 ‘거대한 악의 능력’ 때문에 그에게 매료된다고 주장한다.

스타브로긴에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악마의 이미지는 相互衝突(상호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절대적 善이고 악마는 절대적 惡(악)이고 善惡(선악)은 화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酸(산)과 알칼리가 합치면 中和(중화)가 되듯이 절대선과 절대악이 합치면 도덕적으로 절대중립이 되어버린다. 가치의 무가치화가 되어버린다. 스타브리긴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도덕적 허무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이든 사탄이든 스타브로긴은 인간적인 善과 惡의 개념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그는 당대 러시아를 뒤흔들고 있던 사회주의도 공허한 이상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人間事(인간사)의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 그는 善에도 惡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가 자살하기 전에 다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그에게는 善과 惡은 동일한 하나의 개념이다:

〈나는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善한 일을 바랄 수 있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는 惡을 욕구하고 악으로부터 쾌락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즐거운 감정은 모두 사소한 것이고 결코 강하지도 않습니다.〉

美와 醜(추)도 그에게는 동등한 개념이다. 그래서 그는 醜女 마리아와 결혼하고 美女 리자와도 연인이 된다. 그는 美와 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美學的(미학적) 鼓子(고자)이다. 그는 파티에서 가가노프(Gaganov) 지사의 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대 소란을 일으키고 지역 名士(명사)의 귀를 물기도 하여 파티 참석자들을 啞然失色(아연실색)케 하고 리퓨틴의 아내에게 키스공격을 하여 大소란을 일으키지만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죄의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도덕적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의 雙生兒(쌍생아)들

스타브로긴은 죽은 태양과 같다. 그 태양 주위로 그가 창조한 행성들이 태양에서 받은 빛과 열을 가지고 公轉(공전)하고 있다. 우리는 放棄(방기)된 스타브로긴의 파편으로부터 그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고 이 파편들 하나하나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파편들 중에서 키리로프와 샤토프가 가장 중요하다. 이들은 스타브로긴의 쌍둥이 창조물이다. 二卵性雙生兒(이란성 쌍생아)라는 말이다. 그들은 자유사상의 메카인 미국으로 순례여행을 같이 가고 스타브로긴의 사상을 경배하고 같은 집에 살며 각자가 상대방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스타브로긴은 각각에게 그가 이미 廢棄(폐기)한 상호 모순적인 아이디어를 下賜(하사)한다. 키리로프는 神을 살해하여 인간을 해방하려는 열정에 몰두하고 이에 反해서 샤토프는 神을 발견하여 인간을 완성시키려는 열정에 사로잡힌다. 키리로프와 샤토프 각각의 마음속 深淵(심연)에는 自己欺瞞(자기기만)이 있다. 스타브로긴은 과거에 이미 이러한 자기기만으로부터 벗어났었다. 그래서 이들은 스타브로긴의 과거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샤토프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은 2년도 더 전에 스타브로긴 자신이 선언한 후로 버린 것이다. 샤토프에 의하면 神에 대한 믿음은, 특히 이성을 초월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神과 관련되는 모든 것을 신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샤토프 자신은 그러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그는 민중에 대한 믿음이 神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 주기를 희망하지만 神을 믿을 수가 없다. 스타브로긴도 무조건적으로 神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神을 믿을 수도 없으면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기만 속에 살기를 거부하였었다.

샤토프는 또한 神에 대한 진실한 신앙을 공허한 민족주의로 대체하는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이다. 그는 유럽과 유럽의 가치를 배척하고 러시안人만이 유일하게 神을 진심으로 믿는 민족이라고 간주한다. 그는 예수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먼저 再臨(재림) 할 것이고 그 후에 나머지 세계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샤토프의 치명적인 결함은―스타브로긴에게도 해당되지만―그의 광적인 종교적 쇼비니즘에도 불구하고 그가 神을 믿지 않고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키리로프는 전투적 무신론의 화신이다. 키리로프는 일생동안 한 가지 일만 즉 神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다. 그는 “神은 평생을 나를 고문해 왔어요”라고 고백한다. 그의 이런 ‘생각’이 너무나 철저하게 그를 사로잡아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신(神)과의 싸움에서 자살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그는 神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살을 한다. 그는 신을 죽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찬탈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었지만 그는 자신의 오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예수의 희생에 의해 새로운 인간이 창조 되었듯이 또한 죽음의 공포를 말끔히 털어버리면 인간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미움이(사랑과 희생 중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키리로프는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희생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또 인간을 위한 진실 된 희생을 그로테스크(터무니없는)하게 모방하고 있듯이 그의 자발적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리스도를 그로테스크하게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키리로프는 神을 믿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을 믿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만을 믿기 때문에 인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희생은 불가능하게 된다.

키리로프는 그가 피터에게 “만약 神이 존재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神의 뜻대로 된다. 그리고 나는 그의 뜻에 反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神은 나의 意志(의지, will)이다. 그러면 나는 자기 의지를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의 논리는 흠집이 전혀 없다. 만약 모든 것이 그의 의지의 표현이라면 그러면 그는 어떤 것에도 附着(부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착된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이고 어떤 것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지속적으로 부착되고 있는 것은 神이다. 그래서 神은 자유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장애물이다. 참으로 다른 모든 부착은 神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파생한다. 일단 神이 죽으면 그때만이 인간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키리로프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샤토프에게 동정을 느끼고 生을 사랑하며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피터를 혐오한다. 키리로프가 정말 자유로운 신인간이라면 이 모든 일에 무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신인류가 아니다. 키리로프의 모든 주장과 신념은 자기기만이다. 그가 자살을 감행하여 모든 부착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그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회주의와 악령

‘惡靈’은 정치적 풍자화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요 인물들을 戱畵的(희화적)으로 그리면서 사회주의와 혁명에 대해서 철학적인 反論(반론)을 펴고 있다. ‘惡靈’은 인간은 이상사회를 상상은 할 수 있으나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도덕적으로나 능력에 있어서나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며 전지전능하고 절대선인 神만이 에덴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神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이상사회를 건설하거나 건설하더라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神을 배신한 무신론자이며 도덕적 허무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이상사회 건설을 호언장담하는 것은 신성모독을 넘어 코미디가 된다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다. 하늘에 계시는 전지전능한 神이 내려다 볼 때는 어린애 장난처럼 웃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惡靈’에 나오는 사회주의혁명가들은, 사회주의의 허망한 본질을 꿰뚫어 알고 있는 스타브로긴을 제외하고는, 모두 웃기는 어릿광대라는 것이다.

피터는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조직원들의 어리석은 짓과 약점을 재빨리 이용할 줄 안다. 그는 전국적인 거대한 혁명조직을 대표하는 지역책임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다른 조직원들 위에 君臨(군림)하며 조직을 지배한다. 그의 사회주의는 특이하여서 동지애는 물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다. 그는 表裏不同(표리부동)하고 정치적 권모술수에 대단히 능하다. 그는 내심으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정치적 무대를 원하는 폭군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피터를 위협적인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믹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간교한 살인자인 피터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웅적인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코호벤스키는 1840년대에 러시아를 광풍처럼 휩쓸었던 서구식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다. 그의 과장되고 과도한 佛語사용, 그가 러시아 역사를 쓰레기로 간주하는 것, 그의 서구적 낭만주의, 그의 탐미주의, 그의 詩的인 이상주의, 그의 현실감각의 상실―이 모든 것들이 한 세대 동안 러시아 정치사상을 지배하였던 특징들이다. 상냥하고 고상한 사람이지만 그는 러시아의 현실로 부터 離反(이반)되어 있고 그의 이런 비현실적 성향은 도덕적 정치적 이중성으로 歸着(귀착)된다. 그는 인류애를 가르치지만 자신의 아들은 버린다. 그는 農奴制度(농노제도)의 폐지를 옹호하지만 자신의 농노인 페드카(Fedka)를 노름을 해서 잃어버린다. 그래서 아들 피터의 귀향과 탈옥수 페드카의 등장은 상징성이 강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40년대 세대가 ‘자식’들의 과격한 활동(정치적 사회적)을 관대하게 허용하고 있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고 분명히 無害(무해)한 이상주의자들의 세대가 괴물들을 증식시킨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보기에는 1860년대의 ‘아들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1840년대의 ‘아버지’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에 대한 고발은 ‘惡靈’의 書頭(서두)에 있는 누가福音(복음) 인용문에서 미리 나타나 있다. 악귀들이 들어가 있던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정신이 맑아져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을 동안 돼지들은 모두 호수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익사한다. 비슷하게 소설의 돼지들은―피터와 그의 단원들―스테판의 세대로부터 혁명정신을 찬탈하여 자멸하게 된다. 그리고 스테판은 더 이상 귀신이 들지 않고(무신론과 허무주의 및 사회주의 혁명사상에서 탈피하여) 정신적으로 재생하여 스파소브(Spasov, 구세주의 마을)가 보이는 호숫가에서 죽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샤토프와 키리로프 및 스테판에 대해서는 대체로 溫情的(온정적)이다. 그러나 그의 오랜 敵手(적수)였던 소설가 투르게네프(Turgenev)를 戱化(회화)한 카르마지노프에 대해서는 악의적일 만큼 냉정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투르게네프의 서구주의와 假飾(가식)과 재산과 젊은 세대에 대한 阿附(아부) 등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惡靈’에서 카르마지노프를 허세를 부리는 광대로 그리면서 투르게네프를 무자비하게 조소하고 있다.

‘惡靈’은 혁명가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의 인격적 약점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는 혁명적 理想 자체의 도덕적 실패에 관한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罪가 있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 자체의 구원도 없이 사회적 불의를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적 화합을 창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이러한 꿈은 비현실적이었다. “인간은 사회제도가 잘 못되어서 화합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도덕적으로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다. 舊約聖書(구약성서)는 인간이 지상낙원(에덴)으로부터 추방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新約은 인간이 고난과 믿음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變容(변용)될 때만 낙원에로의 복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變容(변용)은 사회적 변화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변화나 혁명은 타락한 영혼에게는 힘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피터 베르코호벤스키 일당의 범죄적 愚昧(우매) 때문에 흉악하게 毁損(훼손)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본성과 渴望(갈망)사이의 비극적 間隙(간극)을 가리키고 있다. 러시아의 급진사회주의자들이 도스토예프스키가 ‘惡靈’에서 묘사하는 것보다는 더 선량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인간이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善한 급진주의자들도 그들 자신의 원죄(죄가 있는 본성, sinful nature)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위대한 理想(이상)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惡靈’에 등장하는 모든 급진사회주의자들의 도덕적 실패는 정치적 혁명 자체의 도덕적 파산을 노출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즉 사회구원은 인간구원을 前提(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혁명그룹의 이론가인 쉬가로프를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인정하고 이런 현실을 사회혁명의 꿈과 조화시키려는 광신적이지만 정직한 혁명가의 꿈을 보여준다. 쉬가로프는 피터와는 다르게 악당이 아니다. 또 사회주의의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사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그는 열성적인 사회주의 몽상가이지만 사회주의적 理想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缺陷(결함)은 파악하고 있다. 그는 그룹의 비밀회합에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지만 피터만이 그가 내리는 결론의 진실을 이해할 뿐이다. 다른 회원들은 그를 嘲笑(조소)한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시스템은 대부분의 사회주의 몽상가들의 그것처럼 평등과 자유와 정의로서 시작하지만 그 논리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나는 나의 데이터에 의해서 혼란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내가 시작한 아이디어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 됩니다. 무제한의 자유라는 이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는 무제한의 독재라는 이상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내가 도달한 결론 외에 다른 사회주의적 문제에 대한 결론은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쉬가로프의 理想의 이러한 파멸적 逆轉(역전)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의 결과이다. 그는 다른 많은 사회적 몽상가들이 看過(간과)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천성적으로 善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卽行的(즉행적) 행동은 이상주의가 아니고 이기주의에 의해서 誘發(유발)된다는 것이며 四海同胞主義(사해동포주의)적 형제애, 사랑, 그리고 평등 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자기의지(self-will)에 의해 쉽게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지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권력의지이다. 가장 秩序整然(질서정연)한 나라에서도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 前面에 나타나고 약한 사람은 후면으로 물러난다.

쉬가로프의 시스템은 인간성의 이러한 면을 인정하려고 시도하며 우연히도 20세기의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 및 ‘1984’와 올더스 헉스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The Brave New World)에 나타나는 사회를 예상하고 있다. 쉬가로프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강력한 권력엘리트들이 겁 많은 다수에게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는 二重社會(이중사회)를 꿈꾸고 있다. 쉬가로프는 그러한 사회는 인간의 본성에 일치하고 노예상태의 화합과 평등이지만 평등을 보장해줄 것이기 때문에 안정되고 정의로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쉬가로프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 중에서도 한 명만이 독재적 최고통치자가 되고 이 과정에서 다윈(Darwin)의 적자생존 법칙에 따라 충돌이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피터 베르코호벤스키의 권력의지에서 들어난다. 피터는 독재적 권력장악을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폭군이다.

쉬가로프의 시스템은 지극히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20세기에 ‘惡靈’의 독자들은 쉬가로프 시스템과 나치독일의 興起(흥기) 및 전체주의국가들의 일반적 원칙사이에 유사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안정된 계급제도(hierarchy)를 위해서 자유를 규제하고 억압할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惡靈’은 舊 계급사회의 붕괴와 질서의 파괴를 다루고 있다. 혁명분자들은 정치질서로부터 이탈하여 사회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그들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한다. 피터는 정치적 차원에서 파괴활동을 하고, 피터의 스승인 스타브로긴은 도덕적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恣意的(자의적)이고 예측불가능하고 몰도덕적인 개인적 행동을 한다. 이리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두 영역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떤 안정된 권위에 復屬(복속)하지 않을 때 인간의 의지는 파괴적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쉬가로프의 이론은 이러한 권위가 세속적 또는 제도적 원천으로부터 파생되면 최종적 결과는 독재(tyranny)가 된다는 것을 논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문제의 세속적 해결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혼란 아니면 독재와 질서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자유와 질서가 이상적으로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질서를 통합해 주는 도덕적 권위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류가 神으로 돌아가서 神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때만 자유와 질서의 이상적인 평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神이 없으면 모든 정치는 악마에게 歸屬(귀속)되고 모든 도덕적 권위는 가짜가 되고 인간이 세운 모든 계급제도도 엉터리가 된다는 것이다.

스타브로긴과의 대화중에 피터 베르코호벤스키는 이러한 진실을 인정하는 어떤 늙은 大尉를 조소한다. 老 대위는 젊은 무신론자들이 神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단히 당황하게 된다. 대위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무슨 종류의 대위가 될 수 있겠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의 깊은 뜻을 스타브로긴만이 이해한다. 神이 없다면 인간개인의 의지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어지며 이렇게 되면 인간의지는 스스로를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하게 되면서 인간의 계급제도와 모든 사회질서를 휩쓸어 가버릴 것이다. 神이 없으면 어떠한 도덕적 확실성도 없어진다. 그러면 세상은 붕괴되어 종말론적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악마와 요한계시록

‘惡靈’의 풍토는 의심할 바 없이 終末論的(종말론적, apocalyptic)이다. 요한계시록에서처럼 일련의 재앙들이 폰 렘브케지사 부인이 주도하는 대축제의 최종적인 파멸과 그 여파를 前兆(전조)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돌발하는 방화와 콜레라는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ement)에 동반하는 불과 疫病(역병)의 재앙을 연상시킨다. 작가 카르마지노프는 서부 유럽의 쇠망을 바빌론의 멸망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키리로프는 탈옥수 페드카에게 밤에 요한계시록을 읽어주고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소설의 종말론적 분위기를 高潮(고조)시킨다. 더욱이 “더 이상 시간이 없을 것”이며 옛 하늘과 땅은 이제 새로운 하늘과 땅에 항복할 것이라는 계시록의 경고는 기이하게도 키리로프의 믿음(그가 자신의 목숨을 끊고 인간의 신격화가 선포되면 시간이 동결되고 인간의 삶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할 것이라는)속에 共鳴(공명)된다.

이러한 종말론적 曲調(곡조)는 ‘惡靈’의 중심적인 인물들이나 주요상황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러시아의 일반적인 풍토는 종말론적이며 이런 도덕적 혼란은 통일적인 믿음이 결여된 시대의 지배적인 특징이다. 피터 베르코호벤스키는 스타브로긴에게 당대의 이러한 도덕적 혼란과 정신적 불안정(rootlessness)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들을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겠다고 말한다:

〈들어보세요…우리는 이미 대단히 강력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에게 속하는 사람들은…단지 살인하고 불 지르는 사람들만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나는 이들을 모두 계산해 보았어요: 학생들과 함께 神을 비웃고 또 아이들을 키운 부모들을 비웃는 선생들이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어요. 교육받은 살인범이 피살자보다 머리가 더 개발되어있고 돈을 구하기 위하여 죽일 수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그 살인범을 변호하는 변호사도 이미 우리 사람이 되어있어요. 살인의 전율을 경험하기 위해 농부를 살해한 학생들이 우리의 것이에요. 무차별적으로 범죄자를 무죄로 판정하는 배심원들도 우리의 것이에요. 보다 더 리버럴하지 못해서 법정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검사도 우리의 것이에요, 우리의 것이에요. 행정관들, 작가들, 오! 이런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는 너무나 많이 있어요, 그리고 그들 자신은 이것을 모르고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과 바보들이 우리에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최고점에 달해 있어요…누더기 같이 초라하고 이미 만들어 놓은 기성품 사상을 이용하여 그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할 수 있는지를 알고나 있습니까?〉

‘惡靈’에 引用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또 하나의 구절에서 神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면서 라오디게 사람들(Laodiceans)을 배척한다. 피터는 지금은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나타나서 백성들을 혼란으로부터 구제할 신비하고 위엄이 있는 인물로서의 스타브로긴에 대한 전설을 만들어 퍼뜨림으로서 동시대인들의 미지근한 마음을 이용하려고 한다. 피터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질서에로의 복귀를 약속한다면 사람들은 있을 것 같지 않는 神話(신화)에 매달리게 된다고 확신한다.

때가 되면 피터는 그의 피보호자를 최고 권력의 자리에 登極(등극)시킬 것이다. 여기에서도 도스예프스키가 요한계시록을 이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최고 권력을 가진 짐승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그는 그가 가진 신비와 위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는다. “먼저 나온 짐승의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는” 한 거짓 先知者(선지자)가 이 짐승을 위해서 길을 닦는다. 거짓 선지자는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짐승에 대한 神話의 불길을 지피고 그의 捏造(날조)된 이야기를 믿지 않은 자들을 모두 죽인다. 이러한 인물들에게서 “야생 짐승” 니코라이 스타브로긴과 거짓 선지자 피터 베르코호벤스키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설에서 피터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스타브로긴의 도착을 발표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사람들이 스타브로긴을 숭배하도록 할 계획을 세운다. 축제일 밤에 그는 방화음모를 주도하여 불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한다. 이 火災(화재)에서 레바야드킨과 그의 여동생이 타죽는다. 그는 또 속임수와 표리부동의 高手(고수)로서 이런 악의 재능을 자기의 후원자로 포섭된 주지사의 아내와 토론 그룹에게 대단히 성공적으로 써 먹는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속임수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샤토프를 포함해서 누구라도 가장 간교하게 제거해 버린다. 거짓 선지자와 짐승의 상징성이 소설에서 혼란과 파괴의 두 주역인 피터와 스타브로긴의 의미를 더욱 더 확대한다. 그들은 정치적인 음모가로서의 능력을 초월하여 형이상학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정말로 악마들이다. 무신론과 허무주의 및 무정부주의와 이들을 자양분으로 하는 급진사회주의로 병든 19세기 러시아의 정신적 황무지에서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한국의 붉은 惡鬼들

지금 한국에서는 19세기 중엽 이후의 러시아에서처럼 붉은 악귀들이 陰(음)으로 陽(양)으로 날뛰고 있다. 千의 얼굴로 위장하고 천사의 말로서 惑世誣民(혹세무민)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거짓 선지자처럼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닦고 있다. 處處(처처)에 피터 베르코호벤스키같은 악령들이 득실거리며 붉은 불길을 지피고 있다. 여기에도 악귀, 저기에도 악귀들이 있다. 거짓 선지자 같은 지식인들이 악귀들과 한패가 되어 饒舌(요설)로 악귀들을 庇護(비호)하고 있다. 투르게네프나 스테판처럼 악귀들에게 아부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스타브로긴처럼 도덕적, 정서적, 법적 鼓子(고자)가 되어서 알게 모르게 악귀들의 사악한 광란을 부추기고 있다. 악귀들에게 경찰관이 두들겨 맞고 경찰서장이 멱살을 잡혀도 義憤(의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국은 법과 도덕의 불모지가 된 것처럼 보인다. 피터가 자랑하며 떠드는 것처럼 한국의 너무나 많은 “선생도, 검사도, 판사도, 지식인도, 작가도, 공무원들도, 학생도, 아이들도…” 악령이 되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칼질을 하고 있다. 이미 붉은 악령들이 국가 지도부를 장악하고 나라를 종말론적 대재앙으로 몰고 가고 있다. 혼이 나간 국민들은 악령이 부는 죽음의 피리소리에 열렬히 호응하며 죽음의 골짜기로 앞 다투어 달려가고 있다. 러시아에서 중공에서 캄보디아에서 북한에서 1억의 무고한 인민을 학살하고 나라를 초토화시킨 공산주의 악령들의 최면에 걸려 歡喜雀躍(환희작약)하며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일본사람들, 영국사람들, 미국사람들, 이들 선진국 사람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런던의 거지도, 워싱턴의 노숙자도, 동경의 술망나니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언론의 난
[ 2017-08-01, 10:16 ] 조회수 : 773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