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패전 후 한반도 상황
韓國은 '독립'을, 日本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日本을 이긴 美國으로부터 거저 얻었다.(2015. 2. 2. 산케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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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 인정하지 않았던 美國
  
  日本帝國은 1945년 8월15일, 대동아전쟁(1941~45년)에서 패전한
  사실을 국민에게 알렸다. 한반도의 무정부 상태를 우려한 朝鮮 총독
  부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설치와 관련하여, 비교적 냉정하고 공정
  하게 추진할 만한 朝鮮人 지도자에게 이를 요청했다. '소련군 침공'→
  '朝鮮人 정치사상범 석방 및 규합'→'日本人에 대한 약탈 및 폭행' 등
  의 시나리오가 상정되는 배경 下에서 한반도內 치안 유지에 대한 협
  력 차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치조직에 불과한 <조선건국준비위원
  회>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을 수립하고 '독립'
  을 선언하고 만다.
  
  이러한 가운데,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前수상,1875
  ~1953) 육군 대장과 조선주둔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1886
  ~1971) 육군 중장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비롯한 주요 건물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하지만, '독립선언' 직후 진주한 美軍
  은 태극기를 내리도록 하고, 일장기를 다시 게양토록 조치했다. 그리고
  美軍의 군정이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시점이 되어서야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나?
  
  美國은, 일장기를 유지토록 하여 '朝鮮=日本'이라는 것을 공인함으로써
  美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朝鮮이 별개의 국가였다면 이
  경우, 이후 통치는 즉시 朝鮮에 맡기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게 된다.
  때문에, 종전 직후 美軍의 한반도 본격 상륙(진주) 前까지의 통치를 日本
  총독부가 여전히 맡도록 밀명을 해 놓은 것이다. 치안 역시 조선 주둔
  日本軍이 담당했다. 美軍 진주 후에도 日本側의 日本人 관리는 상당 기간
  美군정을 지원하며 치안 등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협력했다. 이러한 배경
  중에는, 日本의 통치능력과 기강을 美國側이 높게 평가해 준 것도 있다.
  美國은 군정 초기에 朝鮮人이 군정에 참여하는 것을 철저하게 꺼렸다.
  朝鮮人의 군정 등용(참여)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왜 그럴까?
  
  ■ 강변(强辯) 뿐인 '抗日戰'
  
  통치능력 결여와, 도를 넘는 자기주장, 흥분 잘하는 민족성에 더하여, 편
  협한 사고를 지닌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난립하게 되면서, 일치
  단결하여 건국에 매진하는 작업 등에 차질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朝鮮人의 특성을 간파한 美國의 학습능력은 당시 높았다. 실제로 1945년
  가을 30명 가량의 朝鮮人 軍閥이, 경찰서와 신문사, 기업・공장・상점 등을
  마음대로 접수하는 일이 발생했다. 美軍은 무장해제를 강제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정당을 만들거나 정치 결사를 하는 건수가 200件에 달했고,
  지도자는 내부 항쟁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암살이나 테러가 횡행했다. 또한
  <조선인민공화국> 조직조차 중화민국에 세웠던 <한국임시정부>와 대립
  했다. 아울러, 두 개의 정부 각각 내부에서도 제각각 자체 항쟁으로 해가
  뜨고 해가 졌다. 美군정이 당시 朝鮮人의 정당이나 정치활동을 인정한 적
  이 전혀 없는데도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의 혼란이라면, 38도선 이북에 진을 치고있는 소련 군정에 대항하는
  힘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것은 당연했다. 당시 美國의 최우선 과제는 소련
  의 한반도 지배를 저지하는 것으로서, 남한의 독립은 그 다음(부차적)이라
  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내각이나 정부 형태를 통
  해 한반도를 통치했던 日本과는 달리, 美國은, 韓國에 대해 직접 군정을 통
  한 통치로 일관했다. 더구나 朝鮮人들은, 日本에 대항해 이렇다 할 게릴라
  항쟁이나 민족봉기를 일으킨 적도 없다. 오히려 日本제국 육군內 朝鮮人
  간부가 보여준 무용이 뛰어나, 이에 촉발된 朝鮮人들의 지원병 모집이
  쇄도할 정도였다. 1942년과 1943년의 경우, 지원병 모집인원 각 4000명,
  6000명에 대해, 각 25만 5000명, 30만 명 이상의 朝鮮人들이 몰렸다. 경
  쟁률이 각 63대 1, 50대 1이었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日本과 朝鮮은 일체
  라는 확신을 갖는 美國전문가도 있었다.
  
  韓國은, <日帝를 무찌르고 독립을 쟁취해 냈다>고 강변하지만, 사실상
  독립은 日本이 패전한 이후 3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더구나, 美國은
  장기간 韓國을 신탁통치해 나가는 것을 염두에 두었지만, 北韓 지역에
  통일국가를 건설할 움직임을 보인 소련에 대항하여 韓國의 독립 실시를
  크게 앞당겼다. 결국 韓國은 '독립'을, 日本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아니
  라 전쟁에서 日本을 이긴 美國으로부터 거저 얻었다.
언론의 난
[ 2017-08-10, 04:02 ] 조회수 : 1042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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