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셰스쿠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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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우셰스쿠의 운명적 결정
  
   1989년 12월 21일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셰스쿠는 운명적인 결정을 했다. 6일 前 지방에서 시작된, 종교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反정부 폭동으로 커져 수도 부카레스트로 확산되자 그는 거대한 기념물인 인민궁전(사무실 용도의 건물로는 세계 제2위-延면적 기준) 앞 광장에서 관제 데모를 열기로 한 것이다. 공장에선 열성분자들을 선발하여 아침 일찍 광장으로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집회가 취소되었으니 공장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노동자들이 돌아가는데 이번엔 다시 정오까지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열성분자들은 거의 다 퇴근해 버려 공장들에서는 당성(黨性)이 약한 노동자들을 뽑아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시30분 차우셰스쿠가 인민궁전 발코니에 나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한 구역쯤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젊은 시위대가 야유를 시작했다. 관제 집회장에 모여 있던 군중들도 웅성대더니 야유에 가담했다. 차우셰스쿠가 당황하는 표정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방영되었다. 연설은 중단되고 관제시위를 하러 왔던 군중은 진짜 시위대로 변해버렸다.
  
   다음날 오전 11시30분, 부카레스트 라디오 방송은「반역자」밀리아 장군이 자살했으며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고 발표했다. 밀리아 장군은 국방장관이었는데 시위대에 대해 발포를 거부했다고 하여 차우셰스쿠가 자살을 시킨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시위대는 인민궁전으로 몰려갔다. 차우셰스쿠는 다시 발코니에 나타나 연설을 하려고 했으나 시위대가 건물 안으로 돌입하면서 물건을 던지자 황급히 사라졌다. 옥상에서 차우셰스쿠 부부가 헬리콥터를 타고 달아나는 것이 목격되었다. 다음날 救國전선이란 조직이 갑자기 등장하여 이온 일리에스쿠 위원장이 임시 정부를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24일, 비밀재판에서 차우셰스쿠 부처를 총살형에 처했다는 발표와 함께 시체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이런 신속한 처형은 공산당 간부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차우셰스쿠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최근에 나오고 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96년 6월26일 기자는 차우셰스쿠가 운명적인 연설을 했던 그 발코니에 서 보았다. 눈 아래로는 파리 개선문에서 내려다보는 상제리제 거리처럼 일직선으로 4km쯤 뻗은 大路와 말라버린 분수가 독재자의 기념물임을 증언하고 있었다. 여대생으로서 이 건물의 안내를 맡고 있다는 한 美女 아가씨의 설명에 의하면 인민궁전은 루마니아産 대리석으로만 지었는데 연면적이 33만㎡, 건평은 6만㎡라는 것이었다. 펜타곤 다음으로 크다고 했다. 관광명소가 된 이 건물을 짓는 데는 매일 2만 명의 노동자와 4백 명의 건축기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길이 150m, 높이 18m나 되는 두 개의 대강당은 연회장이나 음악당으로 활용(活用)되고 있다. 차우셰스쿠는 1960년대에 반소(反蘇)독자 외교노선을 추구하여 서방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문제는 경제에까지도 그런 민족·자주·폐쇄적 정책을 썼다는 점이다.
  
   민족주의로 위장, 金日成식 전제정치
  
   外債를 갚는다고 농산물을 무리하게 수출하다가 국내에서 식량부족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다. 1989년 3월엔 외채 100억 달러 상환기념 대축제를 열기도 했다. 부카레스트市의 중심부를 거대한 기념물로 개조하기 위해 살던 시민들을 내쫓아 원성을 샀다. 이런 차우셰스쿠의 행태는 金日成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주체」란 말까지도 수입하여 써 많는 바람에 루마니아 사람들이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당시 루마니아를 이끌어 가는 집권 세력은 前 공산당 간부 출신들이었다. 일리에스쿠 대통령은 차우셰스쿠의 강압통치 시절에도 비밀리에 黨內에 반대세력을 조직,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가 신속하게 구국전선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리에스쿠는 90년, 92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연속 당선됐었다.
  
   舊東歐 공산권 국가 중 체제전환이 잘 되고 있는 헝가리, 체코, 폴란드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비교하면 한 가지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는 1인 장기지배 체제로서 그 내부에서 개혁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데 반해 선진 3개국에선 공산체제의 지배층 내부에서 오랫동안 개혁의 시도와 모색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전환기를 준비하면서 기다린 나라와 준비 없이 당한 나라의 차이인 것이다.
  
   루마니아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도 大宇는 부카레스트에서 서남쪽으로 약 2백50km 떨어진 크라이오바 市에 있는 자동차 공장의 경영권을 인수, 로대(RODAE)라는 이름으로 바꾼 다음, 97년까지 5억 달러, 98년까지 약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승용차 年産 20만 대 규모의 공장으로 확장시키는 사업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6월26일 국회의사당 하원의장실에서 아드리안 나스타세 의장을 인터뷰했다. 46세인 나스타세 의장은 부카레스트 法大 출신이며 법학박사 학위도 갖고 있다. 공산당 시절에는 부카레스트의 법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했고, 1990년부터 2년간 외무장관으로 있다가 92년에 하원의장으로 뽑혔다. 여당內의 2인자로 불리고 있다. 그의 이력서에는 많은 논문 및 강연 제목이 쓰여 있어 학자의 이력서를 연상시켰다. 키가 훤칠하고 귀공자처럼 구김살 없이 생긴 나스타세 의장은 차분하고 정확하게 답변해 갔다. 영어로 말했는데 본토 발음 수준이었다.
  
  *『차우셰스쿠, 金日成 만난 뒤 변질』
  
  
   -귀하께서는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이후 1990년에 외무장관에 취임하셔서 한국과 루마니아의 국교 수립을 주도하셨습니다. 수교 이후의 韓國-루마니아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989년 이전에 바람직하지 못한 정책이 취해졌기 때문에 혁명 뒤 외무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나는 한국과의 國交수립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루마니아가 새로 부상(浮上)하는 유망한 시장이라고 판단하고 과감한 투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인들은 큰 위험부담을 지지 않고도 루마니아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특히 金宇中 회장이 가장 적극적으로 루마니아에 진출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우는 새로운 기술과 영업 노하우를 우리나라에 가져 왔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을 훈련시켜 더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난해 루마니아가 경제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차우셰스쿠의 1인 강압·장기 독재가 지금까지도 루마니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기고 있습니까.
  
   『1989년 혁명 전에는 전체주의, 혁명 직후엔 무정부주의적 경향이 나타났으나 지금 루마니아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절대로 전체주의적 지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人材의 부족입니다. 민주적 시장경제 구조(Democratic Market System)라는 새로운 개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교육해 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차우셰스쿠가 金日成의 1인 전제정치 행태에 영향을 받고 그와 비슷한 통치를 했다는 說은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1970년인가 71년인가 그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1971년은 그런 점에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북한 방문 직후 그 전과 다른 통치이념을 내걸었으니까요. 그것은 차우셰스쿠 통치의 후반기를 알리는 분수령이었습니다』
  
   -한국을 두 번 방문하셨는데 한국 사회를 어떻게 평가하게 되었습니까.
  
   『외무장관으로서, 또 하원의장으로서 한국을 방문하여 여러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좁게 보면 정치적 분쟁과 갈등이 있을지 모르지만 크게 봤을 때 한국의 정치는 경제부문과 협력하여 국익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국내에 5∼6곳의 산업 중심지를 만들어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해외로 진출하는 기지로 삼고 있는 데 대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루마니아에 가장 적합한 모델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다른 나라의 경우가 우리나라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는 될 수 있지만 교과서는 될 수 없습니다. 루마니아의 경우는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참고하여 공통적인 어떤 기준, 유럽的인 어떤 기준을 발견해야 합니다. 전환기에서 루마니아는 두 가지 큰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개혁과 사회보장의 조화이며, 둘째는 루마니아의 국가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유럽의 문화와 질서 속에 통합되는 길의 모색인 것입니다. 우리는 法治와 민주적 경제, 사회민주주의적 정치라는 세 요소를 국가발전의 기준으로 삼고 외국의 시행착오와 성공 사례를 참고로 하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발전을 추구할 것입니다』
  
  
  *『진실은 복잡한 것』
  
  
   -여기서 일하는 한국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루마니아 국민들이 애국심을 결여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989년까지의 차우셰스쿠 통치는 모두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의 미명 아래 국민들에게 강제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89년 혁명 직후에는 국민들의 반발심이 나타나 그런 단어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일 뿐 곧 균형이 잡힐 것으로 봅니다』
  
   -1989년의 유혈 혁명으로써 차우셰스쿠 정권을 타도한 뒤에도 그 정권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재판에 넘겨 처벌하는 일종의 역사적 정리와 단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도 과거로 돌아가서 처벌을 하자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Truth)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증명되고 표현되며 단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공산당원이 약 400만, 청년단원이 수백만이나 되었으니 全인구의 반이 직·간접으로 공산당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50년간의 공산주의 통치 시절에 여러 세대가 살았는데 소련 공산당의 압력에 협력한 사람, 차우셰스쿠를 지지한 사람을 골라내어 벌을 준다면 실제로는 그 체제의 피해자가 벌을 받는 꼴이 될 것입니다. 1989년 이후 우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공산당 핵심간부들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만 더 이상의 역사청산 작업은 국민이 통합과 단결·화해를 해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귀하의 나라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시고 계시지만 역사를 斷罪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일입니다』
  
   -왜 루마니아에서는 헝가리와 체코에서처럼 공산당 내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1968년에 소련군대가 프라하에 침입했을 때 루마니아만이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1950년대 말 이후엔 소련군대의 주둔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는 그런 점에서 동구의 어떤 공산주의 국가보다도 덜 공산주의적이었습니다. 지난 20∼30년간 루마니아의 문화생활 수준은 굉장했습니다. 한때 루마니아에는 유럽에서 인구당 가장 많은 VTR이 있었습니다. 영화상영이 공개된 장소에선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독특한 환경 속에서 개혁그룹이 조직화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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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기사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反정부 시위대에 포위된 리비아의 카다피를 지원하기 위해 제5여단 출신들을 傭兵으로 보냈다고 영국 선데이 타임스가 27일 보도했다.
  
  지난 22일 새벽, 복무 중이거나 은퇴한 수백 명의 짐바브웨 군인들과 소수의 공군 조종사들은 전세기로 수도 하라레에서 리비아로 수송되어 트리폴리에서 활동중이던 코트디부아르, 차드, 모리타니아 출신의 아프리카 용병들과 合流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북한군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제5여단은 反軍을 진압하면서‘마타벨레랜드 대학살’사건을 일으켜 2만 명을 학살하였다.
  
  무가베는 1980년대 초 김일성을 만나고 와선 숭배자가 되었고 김일성의 숫법을 자신의 鐵拳(철권)통치에 도입하였다. 차우세스쿠, 무바라크, 카다피도 김일성을 만난 뒤 사람이 달라졌다는 평을 듣는다. 독재자들은 자신보다 더 독재적인 者를 만나면 그를 부러워하고 닮으려 한다. 히틀러는 스탈린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민주적 지도자는 독재자를 만나면 경멸감과 분노를 갖게 되지만 非민주적 지도자는 독재자 앞에서 작아진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김정일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한 경우이다. 이는, 두 사람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자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무가베와 카다피와 김정일은 김일성科에 속하는 인간들이다. 이들이 또 다른 김일성科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운명을 따라 가려고 용을 쓰는 듯하다.   

1980년 김일성을 만나고 온 무가베는 사람이 달라졌다. 김일성 전집을 부하들에게 읽게 하고, 자신의 생일을 김일성 생일처럼 국경일로 만들었다. 큰 동상을 세우고, 반대자를 숙청, 고문, 세놰하는 것도 김일성 식으로 했다. 무가베는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북한군의 지원을 받았다. 북한군 약3500명이 짐바브웨에 기지를 두고, 앙골라, 모잠빅, 이디오피아의 독재정권을 지원하였다. 

 북한군이 육성한 짐바브웨의 5여단은 2만 명 이상을 정치적 이유로 학살하였다. 무가베는 김일성이 죽었을 때는 추도 위원회를 만들었다. 매년 김일성 추모 모임을 가진다. 2013년 무가베는 김정은에게 핵무기 제조에 쓰일 수도 있는 우라늄 옐로 케이크를 팔기도 하였다.

시리아의 아사드도 김일성을 만나고 온 뒤 전국에 석상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무가베, 아사드, 차우셰스쿠는 악령 김일성에게 영혼을 빼앗긴 독재자이다. 그리하여 나라를 망치고, 국민들을 고생시켰다.  

한국에도 김일성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사람이 달라져 인생을 망친 이들이 있다.

언론의 난
[ 2017-09-13, 21:59 ] 조회수 : 1284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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