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 여자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19) “작가의 양심, 자존심 죄다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독자 본위로 쓰시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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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셋방 여자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조만식(曺晩植) 사장은 김동인이 연재하기로 한 소설 ‘운현궁(雲峴宮)의 봄’에 대한 원고료 600원을 미리 주었다. 행촌동 집의 잔대금까지는 날짜가 있었다. 김동인은 그 돈으로 옷감들을 사 두었다. 시세차익을 얻자는 계산이었다. 역시 운(運)이 따르지 않았다. 시세 폭락으로 그 돈을 몽땅 날렸다. 김동인은 이 신문 저 잡지사 할 것 없이 모두 돌아다니면서 원고료를 미리 달라고 하여 집값의 최후 잔액을 간신히 갚았다. 그는 동아일보에 ‘젊은 그들’이라는 소설을 다시 연재하기로 했다. 편집국장이던 이광수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독자에게 신문을 팔기 위해 연재하는 소설이니까 작가의 양심, 자존심 죄다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독자 본위로 쓰시오.”

김동인의 행촌동 집 안방과 건넌방 밖 손바닥만 한 뜰 저쪽에 비워둔 방이 하나 있었다. 부족한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 방이나마 사글세를 놓아 얼마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방을 그냥 비워두고 있었다. 잘못해서 술주정뱅이라도 들어오면 글 쓰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당장 현실에 쫓기는 건 아내였다. 아내는 그 방을 세놓자고 남편인 김동인에게 졸랐다. 다음날부터 소개업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방을 보러 왔다. 가족이 여러 명인 사람도 있었고 자식이 여럿 딸린 부부도 있었다. 말이 많은 사람도 있었고 술꾼도 보였다. 김동인에게는 그 모두가 방해자로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타난 게 열일곱 살 정도의 여자였다. 글을 쓰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는 마루의 유리창을 통해 아내가 그 여자를 만나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검정치마에 초콜릿색 구두를 신은 것으로 봐서 학생 같기도 하고 머리가 긴 걸로 봐서는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학생들은 단발을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 여자가 혼자인지 동거자가 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내가 그에게 와서 의논했다. 조용하기만 하면 괜찮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김동인은 문간방에 세 들어 살게 된 여자에 대해 작가적 호기심이 일었다. 세 들어 온 젊은 여자는 카페에 나가는 여급이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바람둥이 손님을 만난 것 같았다. 바람둥이는 결혼을 하자고 하면서 먼저 방을 하나 얻어준 것이다. 여자는 카페를 그만두고 그 남자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시작한 것 같았다. 물론 방세와 생활비는 그 남자가 매달 보내주는 수표였다. 여자는 거의 나다니는 일이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몇 번인가 아버지가 돈을 얻으러 온 게 전부였다.

김동인의 아내가 더러 그 여자의 방에 가서 말동무를 해 주었다. 화류계로 나갔지만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는 주인집 아저씨인 김동인을 어려워해서 웃음소리도 한 번 크게 못 내고 문을 열고 닫을 때도 조심했다. 아내는 문간방 여자를 위해 더러 불을 때주기도 하고 남편이 없을 때는 안방으로 불러 얘기도 하곤 했다. 어느 날 문간방 여자의 남자가 찾아왔다. 문간방 여자는 남자를 위해 저녁을 짓고 전골을 만들었다. 어둠이 내리고 밤이 찾아왔다. 좁은 집은 문간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창호문을 뚫고 마당을 지나 건넌방까지도 들려왔다.

불면증인 김동인은 자정이 넘어도 머리는 물로 씻은 듯 말똥말똥했다. 남자가 뭔가 여자에게 조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여자가 그것을 거절하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간간이 남자가 위협하는 소리도 들렸다. 워낙 좁은 집이라 남자는 위협도 크게 하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어떻게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 방은 고요해졌다. 김동인은 남자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날이 밝아오기가 무섭게 남자는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뛰쳐나갔다. 여자는 따라 나오면서 못 가게 말렸다. 그러나 안방에서 자는 주인집 가족의 눈치를 보며 강하게 말리지 못한 채 남자를 보내고 말았다.

그날 여자는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유행가를 입 밖에 내보지 않은 여자는 그날 작은 소리로 하루 종일 노래를 웅얼거렸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나무대문이 바람에 흔들려 삐익 소리를 냈다. 좀 있다가 또 메마른 마찰음을 냈다. 대문소리가 날 때마다 문간방의 노래 소리는 뚝 끊어졌다. 남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여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김동인은 그 여자가 살기 위해 남자에게 매달리는 걸 알았다. 여자의 생활의 안정은 남자였다. 그리고 부잣집 아들이 그 대상이었다. 카페에 나가지만 여자는 처녀였다. 그래서 남자를 쑥스러워 한 것이다.

드디어 어느 날 밤 둘은 완전히 합친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난 여자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아침을 하기 위해 나왔는데도 얼굴을 주인집 쪽으로 돌리지도 못했다. 낮에 마당으로 나올 일이 있어도 옷깃에 얼굴을 감추고는 외면했다. 문간방 여자가 너무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김동인도 될 수 있는 한 그 여자를 못 본 체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해 주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외출을 해서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갔다 오곤 했다. 어느 날 문간방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결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바람둥이 남자는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뒤로 빼고 있었다. 며칠 후 남자는 가방을 싸들고 나갔다.

여자는 방에 꾹 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좌절한 것 같았다. 밥도 찾아먹지 않는 것 같았다. 김동인의 아내가 민망해 하면서 밥과 반찬을 문간방 여자에게 들여놔 주었다. 여자는 간간이 몇 술은 뜨지만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사오 일이 지났다. 문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가 김동인의 아내를 찾았다. 집을 나가겠다고 방세를 계산하자는 것 같았다. 같이 살면서 정이 들고 그 여자의 사정을 훤히 알게 됐다. 의붓엄마에게서 자란 그 여자는 갈 곳이 없었다. 짐꾼을 불러 작은 보따리를 지워 앞세우고 집을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유리창 건너 내다보면서 김동인은 안타까웠다.

김동인이 가정잡지로부터 단편소설 하나를 청탁받았다. 원고료로 생활하는 그로서 원고청탁은 귀중한 생활비의 원천이었다. 사실 그는 하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쓰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잡지나 신문은 제한이 많았다. 그걸 보는 독자층의 요구를 맞추어야 하고 또 지면 사정상 한계가 있었다. 원고마감이 다가오는데도 쓸 만한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부담감 때문에 원고지 앞에서 펜을 들기도 싫었다. 신문의 3면기사를 뒤적였다. 그러면서도 지난 30년의 세월동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의 창고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재료감이 없었다.
‘정말 괴롭구나.’
그는 쓰지를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그냥 기계적으로 일을 하면 정해진 분량의 안정된 월급이 나오는 회사원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셋방 살던 여자의 모습이 ‘가두(街頭)’라는 단편소설이 되어 태어났다.


(계속)

[ 2018-02-08, 11: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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