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향한 잠언(箴言)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20-1) 영혼까지 일본화하는 조선민족에 던지는 글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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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민족을 향한 잠언(箴言)


김동인(金東仁)이 손바닥만 한 방의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벽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문(文)은 궁지(窮地)라.’
가난을 먹고 글은 태어난다는 뜻이다. 글쟁이는 가난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아들과 딸에게 말해주는 형식의 글 ‘아기네’를 써서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 내용은 영혼까지 일본화하는 조선민족에 던지는 글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영혼에 새 생명과 진리를 불어넣는 작가의 외침이기도 했다. 아들딸 앞으로 썼지만 그건 자라나는 우리민족의 후세대를 위한 역사와 잠언이었다. 그 핵심내용은 이랬다. 


*

일환(日煥)아. 우리 조선 역사 위에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아있는 박제상(朴堤上)의 애국충성을 얘기해 주마. 신라 나밀왕(那密王) 때 일이다. 그해 왜국(倭國)에서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 사신은 신라와 왜국이 서로 친하기 위해서는 신라왕자 한 분을 왜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신라왕은 별다른 생각 없이 열 살 된 아들을 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왜국에서는 신라 왕자를 인질로 삼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신라왕은 충신 박제상에게 왜국으로 들어가 왕자를 구출해 오라고 명령했다. 박제상은 율포로 가서 배를 하나 구해타고 만 리 물길인 왜국을 향해 출발했다. 인질로 잡혀온 왕자 미해(美海)도 어느덧 흐른 세월에 노년이 되어 있었다. 박제상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했다.

“신라왕께서 비밀히 보낸 박제상입니다. 왕자님을 우리나라로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두 사람은 은밀히 일본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탈출하던 날 밤은 안개가 몹시 끼었다. 두 사람은 왕자가 살던 집 담을 넘어 배를 대어둔 바닷가까지 갔다. 배 앞에서 신라에서 온 박제상이 왕자에게 말했다.
“그러면 바다 저편까지 무사히 돌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왕자님.”
박제상이 말했다.
“왜 공은 함께 가시지 않고?”
왕자가 물었다.
“저도 모시고 가고 싶지만 왕자님이 가신 것을 단 일각이라도 감추기 위해 도로 가야 하겠습니다.”

왕자는 같이 가자고 몇 번을 권했다. 그러나 박제상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왕자가 떠난 후 일본 조정에 하루라도 그 사실을 감추어서 쫓는 군사를 더디게 하기 위해서였다. 차차 어두운 안개 속에서 사라지는 왕자가 탄 배를 보면서 박제상은 고국과 처자식을 생각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아침 일본 경비무사들이 왕자를 찾아왔다. 박제상은 아직 주무신다고 그들을 따돌리곤 했다. 마침내 신라왕자의 귀국을 일본무사들이 알아차렸다.

“너희들이 찾는 신라왕자는 이미 신라로 돌아가셨다. 좋은 동풍을 받아가지고 지금은 뭍에서는 보이지 않을 곳으로 넉넉히 가셨을 것이다. 자 나나 잡아다가 너희들 마음대로 하거라.”
왜국 조정에서는 신라 왕자를 빼낸 죄로 박제상을 사형에 처했다.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신라인 박제상은 사명을 완수했다. 일환(日煥)아, 이 어찌 장하지 않으냐 진실로 빛이 나는 죽음이 아니겠느냐. 

지금부터 약 70년 전에 조선의 고종(高宗)이 등극을 하셨다. 그런데 그때 왕의 자리에 앉으신 고종께서는 너무 어리시므로 왕의 아버님 되는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라는 이가 어리신 왕을 도와서 정사를 보시게 됐다. 일환(日煥)아- 네가 이후에 자라서 조선 역사를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근대의 조선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이 대원군이시다. 그분은 극진히도 조선을 사랑하셨다. 왕의 아버지이고 권력을 잡은 그분이 마음만 있으면 무슨 호강인들 못하셨겠느냐마는 그이는 몸에 무명옷을 감고 소찬(素饌)을 잡수시면서 밤이고 낮이고 이 조선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훌륭한 나라로 만들까 이런 생각만 늘 하셨다.

그 당시 조선은 아주 보잘 것 없었다. 나라에는 지키는 군사가 없고 국고에는 돈이 없으며 사람은 제 욕심만 채우고 제각기 당파(黨派)를 만들어 다투기나 하고 이렇게 혼란한 나라였다. 이런 나라의 정치를 잡으신 대원군은 차례차례로 그 못된 정치를 부수어 나갔다.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일상생활에는 불필요하게 긴 담뱃대와 갓까지 금하셨다. 소소한 일에까지 대원군의 마음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단다.

그러나 때는 동양문명이 쇠해가고 서양인들이 동양의 각 곳을 침략해서 식민지로 만들려고 경쟁을 하고 있을 시절이었다. 강한 나라들의 야심을 알아본 대원군은 일체 외국 사람들을 들이지 않으려고 했단다. 조선이 그들의 식민지가 될 걸 짐작하고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신 거란다. 불란서 미국 청국들을 내리누르고 안으로는 자기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친 흥선대원왕 이하응이다. 조선 오백년 역사에 있어서 조선을 사랑할 줄 알고 왕가와 서민, 정치가와 백성,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참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인 우리의 위대한 영웅이다. 과단성과 패기를 가지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은 천년에 만년에 한 번 날까 말까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거대하고 부귀한 나라를 만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인재일 것 같으면 상놈 양반 구별하지 않고 쓰고 무능할 것 같으면 아무리 좋은 배경을 가졌어도 내던졌다. 그는 쇠잔(衰殘)한 삼천리강토에 새로운 활력을 부어 빛나는 나라 부강한 백성을 만들려고 했다. 위와 아래가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랑하는 평화의 왕국을 꿈꾸었다.

일환(日煥)아, 아버지는 지금 너를 위해 이 붓을 잡는다. 잠 못 드는 긴 밤을 네 생각을 하며 이 붓을 잡는 것이다. 장래의 빛나는 조선을 지배할 씩씩한 젊은이가 될 너희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붓을 잡은 것이다. 너는 지금 학교에서 여러 가지 지식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배우는 기계적인 것만 가지고 넉넉할까? 너는 홀로 밤에 뜰에 나가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쳐다 본 일이 있느냐? 그때 너의 마음에 조용히 퍼지는 감정을 맛본 적이 있느냐? 여름 장마 속에서 넘쳐흐르는 흉흉한 붉은 강물을 보면서 마음을 짓누르는 무서운 감정의 물결을 맛본 적이 있느냐?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학교의 교과에는 없는 감정과 정서가 필요한 것이란다. 이 마음의 양식을 학교에서 구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얻어야 한단다.

아버지는 붓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마음속에 있는 너에 대한 사랑을 전부 이 붓대에 부어서 너의 자라나려는 정서(情緖)를 기르려고 한다. 일환아 너는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했지? 그러면 아버지는 너를 위하여 여기 한 재미있는 얘기를 쓰겠다.

일환(日煥)아, 지금부터 약 천구백 년 전에 한 귀한 생명이 이 세상 사람의 모든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유대의 이름도 없는 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 이름이 지금은 넓은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크게 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위대한 이름을 너는 아직까지 들은 일이 있느냐? 진리를 가르치고 위대한 게 무엇인지를 알린 예수는 얼마나 귀한 사람이냐. 이런 것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당시의 권력자인 바리새교인이며 로마의 관리, 군인들을 모두 비웃고 그 권력과 세도를 한 떨기의 꽃보다 못하다고 차버린 예수의 용기는 얼마나 컸느냐. 이런 일들로 그들의 노염을 사서 혹세무민하는 자라고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 못 박히게 될 때도 그는 한 마디 변명도 없었다. 그리고 끝끝내 사랑을 가르치고 의로움을 가르치셨다. 

그가 세상에 남긴 도(道)는 퍼지고 또 퍼져서 세상의 어느 곳이라도 예수를 모르는 곳이 없으니 그때에 그는 십자가 위의 원혼(冤魂)이 되었다 하나 그의 정신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지금까지 그냥 살아있는 셈이다. 어떤 촌락, 어떤 도회를 가든 그곳에 가장 큰 집은 예배당이며, 이 예배당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의 도(道)를 가르치는 곳이다. 비록 육체의 생명은 끊어졌다 하나 신령(神靈)한 생명은 그냥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더욱 장정함을 알 것이다. 그러면 일환아. 아버지는 이 기회에 그 예수의 도 가운데 신교를 가장 먼저 조선에 퍼뜨리러 왔다가 순교한 한 애처로운 혼의 비참한 이야기를 알려주마.


(계속)


[ 2018-02-09, 11: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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