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지역 外 최초 帝大, 京城帝大(경성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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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11. 산케이 신문 

1924년에 帝國大學으로는 여섯 번째로 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되었다. 日本 외 
外地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다. 당시 대륙(만주, 조선) 유일의 종합대학이었
다. 대학본부와, 法文學部, 醫學部, 理工學部 등 세 개 학부가 있었고, 預科, 
부속병원, 각종 연구소, 도서관, 운동장 등을 합한 부지면적은 약 40만 평에 
달했다.  

교수진 면면을 보면 화려하다. 醫學部 부장으로는 이질균(赤痢菌)을 발견한 
'시가 기요시'(志賀潔, 세균학자,1870~1957)가 1926년 부임했고, 그는 나중
에 총장이 된다. 法文學部 부장은,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철학자, 1883~
1966)가 부임했고, 나중에 그는 문부相이 된다. 京城帝大 운용비는 1941년 
시점 기준으로 볼 때 연간 300만 엔(현재가치 60억 엔 前後) 이상의 예산이 
편성되었다. 

조선보다 15년 빨리 日本 통치가 시작된 대만의 帝國大學 설립은 조선보다 
4년 늦었다. 預科 교수였던 '곤도 도키지'(近藤時司)가 동창회誌에 기고한 
내용 중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대만총독부 총무장관과 회동한 자리에서, '경성에 
帝國大學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당시 예산을 보면 대
만은 흑자였다. 반면 조선은 적자 상태로서 歲入 부족분을 일본 정부가 보
전해주는 상황이었다. 적자인 조선에 帝國大를 세운다면, 대만에도 세워야 
한다는…> 

대만제국대학은 1928년 설립되었다. 日本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만주 등 
中國 동북부에는 봉천(현재 심양)에 만주醫大와 여순工大 등 여러 개 명문 
단과 대학은 있었지만, 제국대학이나 종합대학은 없었다. 京城帝大의 '특색
과 사명' 관련한 1926년 3월 일본국회(제국국회)에서의 질의에서 '유아사 
구라헤이'(湯浅倉平) 총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조선의 고대로부터 발달한 대륙의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고 전달하고자 
합니다. 특히 조선의 문학, 조선의 역사 등 분야에서는 內地에 있는 각 대
학과는 각별히 차별화가 됩니다>

조선의 전통을 살리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담당할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 
경성제대의 방침이었다. 전통적으로 '文科 우위' 의식이 강한 조선의 경우, 
특히 법문학부의 인기가 높게 나타났다. 고급관료의 등용문인 법학과의 경
우 1929년부터 1942년까지의 졸업생 수를 보면, 日本人이 350명이고, 조
선인이 339명으로 서로 비슷했다. 고등고시(현재의 공무원 고위직 시험)
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관료나 판사, 검사의 길을 가는 조선인들이 많
았다. 반면, 당시 의학부 졸업생 수의 경우, 日本人이 647명이고, 조선인
이 240명으로 압도적으로 日本人 쪽이 많다. 

內地(일본 땅)로부터 京城帝大에 응시하여 졸업 후 조선 근대화에 몸을 
진 日本人도 적지 않다. 전후(해방 후), 경찰관료가 되어, 사이타마(埼
玉)県 경찰본부장, 오이타(大分)県 副知事 등을 역임한 '쓰보이 사치오'
(坪井幸生)는 1913년에 태어나, 오이타(大分)에서 중학교(舊制)를 졸
업하고, 京城에 거주하는 친척 집으로 가서 경성 預科에 응시하여 입학
한 후, 경성제국대학 法文學部 法學科에 진학했다. 1933년에 고등고시 
행정과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쓰보이'(坪井)는 엘리트 관료로서 조선총독부에 채용되었는데 당시 채
용된 동기생은 13명이었다. 대부분 경성제대 출신이었고 이 중 조선인
이 두 명이었다. '쓰보이'(坪井)의 회고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조선 유일의 종합대학이며 모든 조선청년의 등용문으로서 조선 각지
의 많은 준재들이 경성 예과에 입학하기 위해 쇄도했다. 법학과 교수진
은 쟁쟁했다. 교직원 수는 오히려 재학생 수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보
였다. 잘 정비된 교육시설과 교직원 구성은, 당시 타대학들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뛰어났다…>

日本 입장에서는, '조선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치를 받은 한국 입장은 다른 것 같다. <당시 조선인 손에 의한 사립
대학 설립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성제대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시 때 일본어 능력이 떨어지는 조선 학생에게 불리한 
과목 (일본 古典 등)이 있었다> <조선인 입학자 수를 일정 수준으로 
묶어두었다>는 등의 일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들이 京城帝
大와 관련해 전해지는 상태다. 


京城(現韓国ソウル)清涼里にあった予科の校舎

   서울 청량리(淸
涼里)에 있었던 경성제대 預科 교사(校舎).

安倍能成
 
   法文學部 부장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철학자, 1883~1966).

志賀潔

   醫學部 부장
 '시가 기요시'(志賀潔, 세균학자,1870~1957).


   9大 제국대학 설립일. 



   일본통치下의 조선.




1938년 전후 京城 모습(영화 '집없는 천사' 중 카바레 장면)   
https://youtu.be/PfL0_nU0JGI

언론의 난
[ 2018-02-11, 20:05 ] 조회수 : 1066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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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향꽃무     2018-02-13 오전 12:29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유일한 대학교.

1924년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된 후 1926년에 문을 열었다.

1920~26년에 전개되었던
'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 에 대응하여
일제가 조선사람의 민족대학 설립의 열기를 식히고
회유하려던 의도로 설립했다.

그래서 이 학교에는
조선사람의 독립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이공 등의 학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 · 의학부만 설치하였으며
1941년에 이공학부를 설치했다.

또한 교수와 학생의 구성에 있어서도
조선사람이 차별되어
1926년 개교 당시의 교수는 전체 57명 중 5명,
학생은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941년에는 교수 140명 중 1명,
학생 611명 중 216명만이 조선사람이었다.

그러나 1943년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이 발효되면서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비했다.

첫째, 문과의 정원을 감소시키는 대신
이과의 정원을 증가시키고,

둘째, 이공학부 · 의학부의 정원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기술인력 양성에 힘쓰도록 한 것이다.

해방 후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경성경제전문학교 · 경성치과전문학교 ·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이학전문학교 · 경성광산전문학교 ·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 경성여자사범학교 ·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임진왜란     2018-02-12 오후 6:09
1925년 당시 조선거주 일본인 숫자가 40만명쯤 되고 1944년 무렵에 70만명쯤 됩니다. 1920년경 조선인 숫자는 대략 2000만명쯤 되고, 1944년 무렵에 2500만명쯤 됩니다. . 그런데,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숫자는 일본인이 997명 조선인이 579명입니다. 누구를 위한 대학이었습니까?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숫자만 보더라도 경성제국대학이 누구를 위한 대학이었고,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가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이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상공업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학부가 이학부와 공학부인데,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에 이학부와 공학부를 합해서 이공학부로 그것도 1941년에야 경성제국대학에 설치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2말3초     2018-02-11 오후 10:36
국정교과서와 언론으로만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모두 반일감정만 배우게 된다..
그런데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다보면 일제시대의 진실에 접근하게 되는데,,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1910년대 20년대에는 일본이 조선에 엄청나게 많은 투자를 했고,,
또 당시에는 왕족이나 일부 기득권층을 빼고는..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일본지배를 좋아하고,,만족해했다.
왜냐하면 한일병합 이전의 19세기말 20세기초의 시대는,,왕족과 일부 세도가들 외에는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끔찍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이 한국을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어찌됐든...무너져가는 나라의 기틀을 세워준건 일본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해도,,일본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부분이 90이라면,,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부분은 10도 안된다..

그 피해 받은 부분만 수십년동안 과장하고,,과장해서,,
감정적인 반일감정만 세뇌당하는게 많은 한국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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