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이념과 정치로 재단되는 예술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24) “이제부터 이데올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줘요.”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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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조선일보(朝鮮日報) 학예부장


1933년경이다. 조선일보가 1위인 동아일보를 바짝 따라붙었다. 조선일보의 대주주가 된 방응모(方應謨)는 동아일보를 압도할 신문과 보성전문을 압도할 학교를 만들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주요한(朱耀翰)을 편집국장으로 임명하여 동아일보에 선전을 포고했다. 조선일보는 엘리트 기자들을 채용하고 조·석간으로 바꾸었다. 주요한이 김동인에게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오라고 했다. 불규칙한 원고료로 쪼들리던 김동인은 조선일보 학예부장 자리를 맡았다.

어느 날 편집국장 주요한이 학예부장 김동인에게 물었다.
“연애소설 한 편을 실어야겠는데 누가 좋을 것 같아?”
“여학생 소설로는 이태준(李泰俊)이 으뜸이지.”
이태준은 사실 몇 편의 수필은 있었지만 아직은 미지수였다.
“채만식(蔡萬植)은 어때? 어떤 간부가 채(蔡)를 추천하던데…”
채만식도 아직 경력이 없었다. 며칠 뒤 채만식이 원고 한 뭉치를 가지고 김동인을 찾아왔다. 뒤쪽 편집국장 자리에 있던 주요한이 말했다.
“원고를 보고 고칠 데를 고쳐줘.”

채만식이 쓴 원고의 제목은 ‘인형의 집을 나와서’라는 작품이었다. 그게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그 뒤로 이태준의 ‘성모’가 대중들에게 얼굴을 내놓았다. 김동인은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좌파 작가인 이기영(李箕永)을 발견했다. 이기영은 중앙문단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당시 좌파작가들의 삶은 참담했다. 혁명을 위한 글에 기교나 수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선전문 같은 작품을 연재할 매체가 없었다. 살인이나 방화로 지주나 자본가를 말살시키는 내용을 사줄 잡지도 없었다. 사이토 총독이 문화정책 실시를 선언한 직후 이 땅에 나타난 문화 운동은 붉은 색채를 다분히 띤 것이었다. 그것은 이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수단으로서의 적색(赤色)사상에 은밀한 친근감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주요한도 붉은 사상의 상징인 망치를 찬송하는 시를 쓰고 염상섭도 진보 측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에 반항심을 품은 사람들은 붉은 사상을 사양하지 않았다. 개벽 같은 잡지들도 좌경화했다. 동아, 조선일보도 진보사상에 기울었다.

어느 날 백철이 조선일보 학예부장인 김동인을 찾아와 사정했다. 
“이제부터 이데올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줘요.”
그는 가지고 온 원고뭉치를 김동인 앞에 내어놓았다. 백철이 잡지 삼천리에 썼던 그에 대한 비평이 떠올랐다. 그는 백철에게 자신의 문학적 의견을 이렇게 내놓았다.

“소련에서 제조되어 일본을 거쳐 수입된 좌경(左傾) 문학이론은 문학상의 온갖 기교를 무시하자는 겁니다. 무산자(無産者)는 기교를 부릴 한가한 입장이 못 된다는 거죠. 이 문제로 같은 좌익문학 진영에도 박영희(朴英熙)와 김기진(金基鎭) 사이에 적잖은 논전까지 있었죠. 거기서 기교 무시를 주장하는 박영희가 승리해서 좌익문학은 기교 따위를 돌 볼 한가한 처지가 아니라는 논지 아래 ‘살인 방화 소설’ 전성시대를 만든 거 아닌가요? 살인이나 방화로 지주나 자본가를 말살시키는 내용을 사줄 신문이나 잡지가 있을까요? 혁명을 위한 글에 기교나 수법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 공산주의 선전문에나 써야죠.”

김동인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작가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복간(復刊) 초기라 원고료 예산도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원고료는 거의 주지 않는 게 관례였다. 줘도 주는 사람이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김동인은 그래도 단 몇 푼이라도 지불해서,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文士)들에게 점심 한 그릇 값이라도 내어주기 위해 늘 경리와 다투었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하면서 김동인은 회의(懷疑)가 들었다. 작가란 스스로의 의지로 가난을 만드는 존재였다. 그건 가난이 아니라 청빈이었다. 그는 붓 하나로 일생의 소설도를 닦겠다고 선언했었다. 정치나 명예 같은 것은 일시적이지만 문명(文名)은 영원한 것이다. 천 년 전 당나라의 요란한 황제 이름은 몰라도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은 시인은 사람들이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문장에 걸었다. 월급쟁이 생활은 수절과부의 서방질 비슷한 것 같았다.

조선일보 근무 40일 만에 그는 사표를 썼다. 그는 다시 순수한 작가로 돌아왔다. 매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신문에 글을 썼다. 김동인은 동아일보에 자신의 글이 끝나자 방인근(方仁根)의 작품 ‘마도(魔都)의 향불’을 동아일보에 소개해 연재하게 하고 있었다. 혼자만 지면을 독차지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게 끝날 무렵 방인근은 다음번에는 매일신보(每日新報)에 다른 소설을 연재할 계획이었다. 경쟁적인 매일신보의 독촉으로 동아일보의 연재가 끝날 무렵은 두 신문에 동시에 방인근의 소설이 연재될 형편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갑자기 방인근의 연재소설을 끊어버렸다. 김동인은 동아일보의 이광수 편집국장을 찾아갔다. 몇 회 더 쓰면 마지막인데 작품을 중단시키면 되느냐고 말했다. 이광수도 그런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광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건 돈이 시키는 일이라고 얼버무렸다. 동아일보에 출자를 하지 않는 자기는 권한이 없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쓰는 사람은 받지 않겠다는 방침이었다. 김동인은 매일신보 집필자 문제는 동아일보가 몇 사람을 보이콧하기 위한 일종의 책략으로도 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문사들이 ‘동아일보에 글 쓸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 매일신보의 원고청탁을 거절했다. 문인들은 매일신보에 글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 둘로 갈렸다.

동아일보 기자가 원고청탁을 하러 왔었다. 김동인은 자신은 매일신보에 글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글을 거부했다. 김동인의 오기였다. 기자는 당황하면서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꼭 써달라고 부탁했다. 김동인은 예술을 민족주의 이념과 정치로 재단하는 게 옳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예술인 문학을 하는 사람의 영혼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 2018-02-19, 09: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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