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의 親日? 여운형의 親日! 고종의 親日.
정진석 교수, "역사를 왜곡하지 마라! 누구는 죄인이고 누구는 아니란 말인가?"



金成昱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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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누구의 親日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누구의 親日은 무시해 버린다』
  
  
  언론사학자인 정진석(鄭晋錫)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10일 서대문 문화일보 홀에서 열린 「조갑제의 현대사강좌」에서 좌파가 주도하는 소위 親日규명의 편파성을 호되게 비판했다.
  맹목적 「親日청산」 구호도 문제지만, 좌파의 親日은 덮어주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親日은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험신호는 오는데 대책이 없었다』>
  
  鄭교수는 구한말 황실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한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인의 親日을 문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지적이었다.
  『구한 말 신문기사를 보면 분통터지는 기사가 수없이 등장한다. 1900년 황성신문 8월9일자에 남궁억(南宮檍, 1863~1939) 당시 사장은 한반도 분단(分斷)을 제안한 러시아와 이를 거절하고 조선을 통째로 삼키려 한 일본을 모두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이는 「일본이 한국을 합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일본 기사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실은 오히려 나라의 위기를 경고한 남궁억 사장을 가둬버렸다.
  독립신문을 보면, 1896년 2월 크리엠(Kriem)이라는 독일영사가 외무대신 유기환을 영사관으로 불러다가 폭행했다. 그러나 정작 조선 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독립신문 기자였던 청년 이승만은 일본인 전당포 주인이 우리 군인을 패는 기사를 쓰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황제라는 고종 본인도 1895년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러시아 대사관에 도망가 버렸다.
  이런 종류 기사는 수없이 많다. 위험신호는 계속 오는데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당연히 풀이 죽었다. 나라는 1910년 한참 전에 이미 망한 것이다.』
  
  鄭교수가 좌파의 왜곡된 親日청산 논리의 예로 제시한 것은 「장지연(張志淵, 1864~1921)」과 「여운형(呂運亨, 1886~1946)」 그리고 「고종(高宗, 1852~1919)」이었다.
  
  『2003년 5월 경향신문 1면 톱에 「장지연이 親日派」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것을 KBS 등 다른 언론도 받아 대서특필했다. 장지연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05년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문을 남겼고 이후 언론인으로 애국계몽에 나섰다. 을사조약을 규탄했던 「시일야방성대곡」은 1905년 11월27일 「대한매일신보」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돼 실렸다. 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제팬크로니클」 등 유수한 언론이 이를 인용, 계속 확산됐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정신을 깨웠다. 이런 장지연을 親日派로 보는 것은 1916년 하세가와 총독이 온 것을 환영하는 넉 줄짜리 한시를 썼다는 이유였다. 이 사실이 2003년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위암기념사업회」가 장지연 기념비를 세우려던 계획도 완전히 무산됐다』
  여운형은 일제시대 공산당 활동을 벌였던 좌익성향이었다. 그는 오랜 논란 끝에 좌파정권 들어 독립운동가로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鄭교수는 여운형 문제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일제 때 여운형의 충성.,.親日의 활증(活證)을 보라』>
  
  『여운형은 과거 정권에서 최초 2등급 훈장인 대통령장을 받았다. 당시 상당수 언론은 왜 1등급 훈장을 주지 않느냐고 난리를 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 해 말 1등급 훈장까지 줬다. 그러나 여운형은 과연 흠 없는 독립운동가인가?
  1943년 나온 「반도학도출진보」라는 책을 보면 여운형의 「반도 2500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 나온다. 학생들이 일제징병에 자진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장지연의 넉 줄짜리 한시와 학생들을 총알받이로 넘긴 것 중 무엇이 더 나쁜가?
  좌파는 이에 대해 「강압에 의한 것」이라 변명한다. 같은 책에는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글도 나온다. 그런데 여운형의 글 뒤에는 「수기(手記)」, 안재홍의 글 뒤에는 「담(談)」이라고 붙어있다. 안재홍 같은 이는 마지못해 말로 했지만 여운형은 직접 손으로 쓴 것이다.
  
  해방 후인 1847년 「대동신문」은 「일제 때 여운형의 충성.,.親日의 활증(活證)을 보라」며 여운형의 親日행적을 규탄했다. 당시 조선공산당 자료집을 보면 「여운형은 학도지원권고문 발표하고, 총독부와 밀접하여 김태준 등을 전향하게 했다」며 「親日분자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나온다.
  여운형의 초기 활동은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장지연에게 준 훈장도 뺏자면서, 여운형에게는 어떻게 거듭 훈장을 높여주는가? 이것은 타당한 일인가?』
  
  <이토 히로부미 죽자 애도의 글 보낸 고종>
  
  고종(高宗)에 대해서는 최근 을사조약 무효화를 주장하는 親書 등이 발견되면서 소위 『개혁군주』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고종의 셋째아들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붙여져 있다. 이 같은 평가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鄭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지난 달 20일 중앙일보 등은 고종의 독립운동을 대서특필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에 유럽 공관에 「전면 문호 개방하라」는 칙서나 1906년 독일 황제에게 보낸 을사조약 무효화 칙서 등을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직(社稷)이 무너졌는데 왕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고종에게 뜻은 있었을지 모르나 그는 패장(敗將)이다. 전쟁에서 졌는데 작전을 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나오듯, 「나라가 망했는데 골방에서 밀서를 보낸다고 열강들이 외교 전략을 바꾸겠는가?」
  
  오히려 고종은 1909년 11월4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하자, 「이토公 덕에 대궐의 근심 풀렸었다」며 애도의 글을 일본에 보내기도 했다.
  
  황실의 다른 자손들은 어떠했나? 1922년 조선일보에는 고종 아들 이강에게 「조선군사령군」을 줬다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 왕족은 이처럼 모두 작위를 받았다. 나라가 망했는데, 궁중에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알려진 고종 손자 「이우」는 일본 육사를 나와 육군 중좌(중령)까지 지내다 33세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맞고 죽었다. 지난 해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일본에서 독립 투쟁하던 「이우」가 인물도 잘 생기고 황족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하지 마라. 무슨 독립운동인가? 누구는 죄인이고 누구는 아니란 말인가? 개인 「이우」는 비극이다. 여운형도 親日派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누구는 이렇게 받들면서, 누구는 때려잡는가? 이런 역사는 있어선 안 된다』
  
  <정통성 무너뜨리려 親日을 정치무기로 삼고 있다>
  
  鄭교수는 좌파들이 박정희 심지어 이승만의 親日 운운하는 데 대해 『국가정통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親日문제를 정치적 무기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를 살아보지도 않은 이들이 이데올로기로 상대방을 재단하며, 점점 더 親日派에 가혹해진다』며 좌파들의 親日청산이 역사왜곡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08/3/11)
[ 2018-02-16, 04:56 ] 조회수 : 12203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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