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으로 다가가는 삶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25) 이제는 수입을 위해 소설을 썼다.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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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어머니의 죽음


1934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연이 많은 해였다. 삶은 벼랑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원고청탁을 받아야 했다.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글을 썼다. 지면만 할애되면 어디에나 썼다. 이제는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야담(野談)도 썼다. 한 달에 하나 이상 창작해 냈다. 무리한 글쓰기가 심한 신경 증세와 우울증을 가져온 것 같았다. 수면제를 먹어야 잘 수 있었다. 평양의 어머니가 경성에 올라왔을 때 밤을 새면서 글을 쓰는 아들을 보고 눈물을 지었다.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손자들 몰래 글 쓰는 아들 옆에 놓고 갔다. 그는 어머니가 놓고 간 과일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평양으로 내려간 어머니가 쓰러졌다. 칠십대의 노인이 나뭇단을 부엌에 끌어 들이고 물을 길러 갔다가 쓰러진 것이다. 중풍(中風)이었다. 병든 어머니를 경성으로 모셨다. 남대문역에 마중 나가 어머니를 보니까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건강하던 어머니는 김동인(金東仁) 부부와 누이 부부, 네 사람의 부축을 받고야 내렸다. 택시에 오르기까지 삼십여 분이 걸렸다. 궁핍한 삶이었다. 어머니 밥상에는 생선토막이라도 올렸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걸 눈치 챈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머니가 묵을 방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안방을 내놓고 부부는 작은 마루에서 잤다. 어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이부자리를 마루에 끌어다놓고 거기서 잔다고 했다. 참외와 수박을 사다드려도 어머니가 값을 내겠다고 고집했다. 어머니는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손주들을 봐도 울었다. 아들이 밖에 나가 늦어도 눈물이었다. 김동인은 중풍인 어머니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부축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항상 미안해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돈 5원을 꺼내더니 한약을 지어달라고 했다. 김동인은 그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어머니가 올라올 때 아무 약도 없기에 그저 안정을 하면 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불효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머님이 준 5원을 돌려드리고 한방(韓方)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하여 약을 지어왔다. 어머니의 목 뒤에 조그만 부스럼이 하나 생겼다. 어머니가 가렵다고 긁더니 부스럼은 이내 벌겋게 부어올랐다. 날이 가면서 그 범위가 넓어졌다. 그 상태에서 어머니가 평양으로 내려갔다. 며칠 후 전보가 왔다. 어머니의 위독(危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김동인은 간신히 기차표만 사서 기차에 올랐다. 불면증과 신경증세는 쉬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기차 안에서 그는 수면제를 먹고 잤다. 평양역에 내리자마자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들은 종기가 난 어머니의 후두부의 피부를 뜯어내고 붕대로 감아놓았다. 머리와 목 전체를 붕대로 싼 어머니는 괴로움에 말도 못하고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몸을 뒤치고 있었다. 어머니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침대의 한쪽은 벽에 붙여놓고 반대쪽으로 침대를 하나 더 놓았다. 김동인은 자신이 온 것을 알리기 위하여 어머니의 눈이 향하기 가장 편한 쪽에 가서 섰다. 어머니는 그를 보았다. 아들이 온 것도 모르는 듯 표정에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김동인은 다가오는 죽음과 힘겹게 싸우는 어머니의 옆에서 오열했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병이 겹쳐서 밀려오고 있었다. 당뇨가 겹쳤다. 당뇨에 사용하는 인슐린은 건강한 사람도 주사를 맞고 즉시 포도당으로 중화를 시켜서 심장마비를 방지하던 시절이었다. 중환자에게는 좀체 놓기 힘든 약이었다. 병원에서는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김동인은 숟가락으로 포도당액을 어머니의 입에 넣었다. 어머니는 포도당액의 마지막 숟갈을 못 삼키시고 마지막 숨을 쉬었다. 양 미간을 늘 커다랗게 찌푸리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최후의 호흡과 함께 힘들던 인생을 마감했다.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어느 날 그는 신문사에 원고료를 받으러 갔다. 그곳에서 나오는 매달 90원이란 돈이 살림의 전부였다. 그는 이제는 수입을 위해 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이 주문하는 대로 베끼어 나가는 기사에 지나지 못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신문사 경리부에서 40원을 받았다. 원래는 90원이지만 연말에 떨어진 쌀과 장작을 사느라고 50원을 미리 받아썼기 때문이었다.

‘40원.’ 그는 그 돈을 보면서 거기서도 갚아야 할 빚이 20원이 있는 걸 떠올렸다. 그걸 제하면 이제 가족은 나머지 20원으로 한 달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너무 부족했다. 그는 받은 돈 중에서 먼저 20원을 떼어 사람을 시켜 집으로 보냈다. 이제 빚 갚을 돈 20원이 수중에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마작방으로 갔다. 이달 생활비가 막혔으니 몇 원이라도 따 가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빚을 하루만 연기하기로 작정하고 그 돈을 가지고 마작방으로 온 것이다.

처음에 2원을 잃었다. 속이 탔다. 놀러온 게 아니라 돈을 조금이라도 따러 온 것이다. 잘못 온 것 같았다. 본전만 되면 일어서 나가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두 번째는 3원을 땄다. 본전은 넘었지만 그까짓 일원을 따가서 뭐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만 더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판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한 결과 그는 가지고 온 밑천의 절반이 되는 10원을 잃었다. 아내는 아들딸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릴 게 틀림없었다. 돈을 잃은 걸 알면 아내는 경악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돈보다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게 더 걱정이 됐다.

그는 마작방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겨울 이른 아침이었다. 마작방을 나올 때는 칼바람이 부는데도 그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나왔다. 어디로 갈지 정처를 못 정해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빈 지갑을 내어보이기가 어려웠다. 거리로 나온 그는 곤한 몸을 좀 쉬기 위해 친구가 하숙을 하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친구는 없었다. 몇몇 다른 친구를 찾았다. 불행히도 한 군데도 몸을 쉴 곳이 없었다. 외출을 했거나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를 헤매면서 그는 식은땀을 계속 흘렸다. 구부리고 앉아서 밤을 새운 탓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어느새 오후 4시가 지났다. 겨울해가 설핏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는 집에 가서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해 용서를 빌고 방에 들어갔다.

피곤에 떨어져 한잠 자고 일어나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잃은 돈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잡지사에서 청탁받은 원고를 써야 했다. 원고지를 앞에 놓고 생각을 했다. 십 분이 흐르고 이십 분이 지나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펜을 잡았다. 청탁을 받고 그 순간까지 헤매던 과정을 소설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게 그의 작품 ‘소설급고(小說急告)’였다.


(계속)

[ 2018-02-20, 10: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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