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天皇) 모독죄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27) “당신이 외람되게 지존(至尊)에 대해 불경한 언사를 논했다면서?”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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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천황(天皇) 모독죄

1937년 7월10일 파고다 공원에는 호외가 돌았다. 북경 교외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신문은 그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7월7일 밤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노구교(蘆溝橋) 근처에서 야간 전투훈련을 벌였다. 연습이 끝나자 일본군은 전부 대원을 점호했는데 그중에 사병 하나가 안보였다. 무다구치 연대 제3대대 8중대가 즉각 이 실종사병의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군의 가벼운 사격을 받았다. 불과 몇 발의 총소리였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이 도전해 온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군의 이치키 대대장은 대대병력을 노구교로 향해 진격시키는 한편 무다구치 연대장에게 보고했다. 세계의 이목은 극동(極東)으로 총 집중했다. 계속되는 속보는 중일전쟁(中日戰爭)으로 사태가 확대됨을 알리고 있었다. 7월12일 아침 용산역 앞에는 긴급출동명령을 받은 조선군 제20사단 장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7월17일 북경의 광안문(廣安門)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광안문의 전투는 중국과 일본의 싸움이 타협 없는 전쟁으로 돌입했음을 뜻했다. 그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총통은 4억 5000만의 중국 민족에게 항일(抗日) 구국전에 나서라고 호소하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본국에서 다시 제5, 제6, 제10사단이 화북(華北)지구로 투입했다. 전쟁은 중국 전토(全土)로 확대되어 상해로까지 번져나갔다. 거대한 일본군의 물결이 중국대륙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 의회에서는 ‘국가총동원준비의 건’이라는 준전시(準戰時) 체제의 법률이 공포됐다. 조선 총독이 사이토에서 우가키로 변했다. 사이토는 문화를 앞세우면서 식민정책을 완만히 했지만 우가키는 성격이 급하고 자기 보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모의를 하거나 반국가적 행동을 용인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동우회(同友會) 사건이 터졌다.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평양에서 수양동우회를 책임 맡은 형 김동원(金東元)이 회원 25명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동우회가 겉으로는 수양단체로 위장하고 속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벌여왔다는 것이다. 안창호(安昌浩) 선생도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함께 체포되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안창호 선생의 사망소식이 들렸다. 경찰서에서의 고문이 원인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산에서도 막장 광부에 이르기까지 3〜4일 만에 한 번씩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시국의 추이를 관찰했다. 만주에 이은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일본과 조선은 경제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경성방직을 하던 조선의 사업가 김연수(金秊洙)는 만주에 국제적인 기업 남만방적을 설립하고 섬유류 수출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금광 열풍이 불면서 조선의 경제는 끓어오르고 있었다.

김동인이 기차를 타고 경성의 남대문 역에서 내렸다. 역에서 나와 전차를 탔다. 차창 너머로 고색창연한 남대문의 모습이 보였다. 중학교 입시기간이라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로 종로 일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교육열은 학교 부족으로 이어지고 치열한 입시경쟁을 낳고 있었다. 이광수(李光洙)는 아이들을 이화여중에 입학시켰고 김동인(金東仁)도 아이를 경기여중에 집어넣었다.

다시 돌아온 경성이었다.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 보았다. 광산 붐이 일어서인지 호텔에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일류호텔인데도 잠옷 바람으로 식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눈을 찌푸리게 했다. 오랜만에 종로통을 걸었다. 젊은 여성들이 더러 보였다. 서양풍의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보신각 지붕이 저녁하늘을 떠받치고 그 왼쪽에는 화신백화점 건물이 반짝이는 불빛으로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종로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유행가수의 사진, 한글이 섞인 포스터, 화려한 악기 등을 번쩍번쩍하게 늘어놓은 악기점의 진열장, 유행하는 부인모자를 쓴 도쿄제 마네킹 인형이 진열된 양품점 등, 이들 사이로 처마가 낮은 어두운 철물점과 약초가게가 끼어 있다.

보도 한쪽에는 바나나, 그림, 고무신을 파는 야간포장마차가 늘어서 있었다. 해가 저물면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노래책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모여 장난을 치고 놀기도 했다. 조선은행과 미스코시 사이의 광장을 가로지르는 하얀 전등으로 만든 아치 밑으로 들어가 걷기 시작하면 미나카이 백화점의 쇼윈도, 메이지야 에도가와의 장어집, 가네보의 제과점 간판이 보였다. 금강산 과자점은 신주쿠의 나카무라야처럼 고급스러운 다방이기도 했다.

문학 지망자가 찻집에 범람하고 있었다. 경성의 대형서점의 고급책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에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화신백화점에 일본인 손님은 적지만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나카이 미스코시 조지야백화점에 조선인 손님이 들끓고 있다. 백화점 거리의 처마 밑에서 채플린 복장을 한 조선인이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스텝을 밟고 있다. 본정의 뒷골목에는 많은 카페와 바가 있다. 그중 다이아몬드바라는 곳은 안으로 들어가면 자욱한 보랏빛 연기가 퍼져 있고 스피커에서는 블루스곡 ‘오래된 화원(花園)’ ‘비의 블루스’가 흘러나왔다. 사변(事變)경기의 영향인지 최근 새 빌딩들이 들어서고 거리 모습은 상당히 변했다. 기와지붕을 한 신식가옥의 증가가 눈에 띄었다. 경성은 근대적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경제적 성장에 취해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김동인은 소설 ‘제성대(帝星臺)’를 썼다. 견훤(甄萱)을 소재로 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과정을 형상화 했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견훤의 행동을 통해 현실적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의 해방의지를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일제 군국주의의 질곡 아래서도 민족의식을 내면화시킨 것이다. 평론가 이의춘은 당시 상황에서의 김동인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해방까지의 한민족 삶의 구조적 훼손은 그 극에 달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제가 군국주의에 기반한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강화시킨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총후보국(銃後報國)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쇼가 벌어졌다. 현실이 칠흑 같은 암흑으로 미만(未滿)했을 때 문학은 직선코스를 피하고 우회하는 현명함을 택했다. 당시 현실적 질곡 속에서의 ‘민족정신의 포장’이었다.>

1938년 칼바람이 치는 1월19일 오후 2시경이었다. 김동인은 종로 1정목 91번지에 있는 삼천리 잡지사에 갔었다. 사무실에는 편집기자 박계주(朴啓周)와 사원 최인화(崔仁化)가 앉아서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다. 박계주는 소설을 쓰고 있었고 최인화는 아동문학가였다.
“이광수 씨가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됐는데 치안유지법 위반이라고 하던데요?”
편집기자 박계주가 말했다. 김동인도 형이 구속되어 사건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상은 원칙적으로 자유이므로 사상 자체는 법률로 처단할 수 없는 거예요.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국체(國體)를 변혁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면 최고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국체변혁이란 일반적으로 천황의 통치권을 부인하는 걸 의미하죠. 조선독립운동 단체는 일본 천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치안유지법상의 국체변혁의 목적을 가진 건 아니죠. 일본이 천황제로 다스리는 건 조선인의 입장에서 부인할 이유도 없죠. 다만 조선인으로는 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거죠.”

“일본 판사들의 해석은 다른 것 같던데요. 조선은 일본 영토의 일부이기 때문에 천황의 통치권을 부인하는 의미를 가진 독립은 국체변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아요.”
편집기자가 법원의 해석을 얘기했다.
“일본 판사들도 의견이 나뉘죠. 치안유지법 제정의 근본목적은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것인데 조선독립단체에 치안유지법을 적용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법관들의 의견도 있어요.”
“도대체 천황기관설이란 게 뭐죠?”
작가인 최인화가 김동인에게 물었다.
“천황이 한 개인이 아니라 천황이란 국가기관 그 자체지 천황도 법률상 국가의 여러 기관 중의 하나에 불과한 거죠.”
당시 세상은 천황을 살아있는 인간 신(神)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얼마 후 헌병대에서 김동인을 불렀다.
“당신이 외람되게 지존(至尊)에 대해 불경한 언사를 논했다면서?”
헌병 오장(伍長)이 독사 같은 눈으로 째려보면서 말했다. 누군가 헌병대에 제보한 것 같았다. 조서는 일방적으로 순식간에 작성되고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김동인(金東仁)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여덟 달을 고생하다 나왔다.

경성 시내는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거리는 수시로 방공(防空)연습을 하고 있었다. 민간 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김동인은 거리에서 여운형(呂運亨)을 봤다. 여운형은 원래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여운형은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민족지도자라고 자처하는 그에 대해서 반감이 솟았다. 지도자로 이름이 났으면 방공훈련 같은 때는 숨어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지도자고 유명작가로 알려진 이광수(李光洙)가 보석으로 석방이 된 상태였다. 이광수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가 사는 홍지동(弘智洞) 산장 서재에 일장기를 걸고 그 앞에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고 향을 피웠다. 이광수 부부는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들도 미사가 끝나고 나면 남산 신궁(神宮)으로 올라가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다. 조선 말 그렇게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그리스도 정신의 순수성을 지켜온 가톨릭이 고분고분하게 신사참배를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천주교 당국은 신사참배에 대해 종교행사가 아니라 국가행사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바티칸 당국에서도 과거 순교자를 많이 낸 조선가톨릭에서는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자를 내지 말고 일본 당국이 요구하는 국가행사에 호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죽음을 보고 공포에 질린 것 같았다. 안창호 선생은 워낙 심지가 굳어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고문을 받고 그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경제적 호황과 공포는 인간을 변질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김동인이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형 김동원(金東元)을 면회하고 나서 택시를 불러 타고 이광수가 묵고 있던 홍지동 산장을 찾아갔다. 김동인은 이광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옥중에 계신 우리 형님 김동원이 전하는 말이오. 춘원(春園) 선생은 이미 이승에서 누릴 영화를 다 누린 셈이오. 첫째, 수명(壽命)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아프다고 골골하면서도 이미 마흔일곱 살이 되었소. 내일 모레면 지천명 (知天命)이라고 하는 쉰이 되는 나이니 살 만큼 산 게 아니겠소? 또 명예로 따지자면 춘원은 이미 조선의 나쓰메 소세키나 기쿠치 칸 정도의 문명을 얻었으니 더 이상 무슨 명예를 바라겠소. 그리고 재력으로 말하면 부인 허영숙 여사가 조선 최초의 여성개업의이자 부잣집 딸이니 아이들 가르칠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형 김동원의 판단으로는 춘원이 진심으로 애국자로 남고 싶으면 지금쯤 저 일장기를 찢어버리고 대들보에 목을 매기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구요. 그렇지 못하시다면 아예 철저하게 춘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고 전향하여 지금 재판을 받으며 옥중에 있는 동우회 회원들을 구해내라고 하십디다. 구해내는 방법으로 우선 고바야시 예심판사에게 석방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해 달라고 하십디다.”
김동인은 그 말을 마치고 황황히 일어나서 문을 나섰다. 춘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동인을 배웅했다.

(계속)
 

[ 2018-03-06, 11: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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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과오답     2018-03-06 오후 3:56
김동인이라..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게
남에게 어려운일 시키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한다는
일본 정신을 배우라고 하고 싶군요
아주 흥미 만땅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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