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두브로브니크 이야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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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에 가십니까?
베니스처럼 감동적 역사를 만든 빨간 지붕의 도시 국가 이야기. 



두브로브니크는 빨간 지붕과 하얀 건물 색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外觀이, 이탈리아 반도의 동해안 북쪽 도시 베니스와 많이 닮았다. 두 해양 도시는 역사에서도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두 도시 국가는 13세기부터 약600년 간 아드리아 해의 무역과 制海權을 놓고 경쟁한 라이벌 사이였다. 상업에 밝고 해군력도 강한 商武국가였는데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도 같다. 두브로브니크의 옛날 이름은 라구사인데, 귀족중심의 공화정을 운영할 때도 베니스의 제도를 참고하였다.

바다로 돌출한 두브로브니크(옛이름은 라구사)는 해안 절벽을 따라 쌓은 성벽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성벽 길이가 약2km, 너비가 600m쯤이다. 이렇게 작은 나라, 라구사가 16세기 말엔 보유 선박 규모가 유럽의 유수한 해양강국 베니스와 거의 맞먹었다. 라구사의 해양인, 즉 선원들과 무역상 및 외교관들은 세계 도처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벌고 國益을 도모하였다.

16세기 초 인도(무갈 제국)에 진출한 한 라구사 사람은 이슬람 교도로 개종, 포르투갈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다른 라구사 사람은 스페인 함대의 지휘관이 되어 리스본을 출항하고 있었다. 페루의 銀鑛에서 돈을 버는 라구사 사람도 있었다. 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 상인들은 발칸 반도를 휩쓸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다뉴브 유역,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거점을 만든 데 이어 영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라구사 사람들은 해외 유학을 많이 했다.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 출신들이 출세의 雙璧(쌍벽)이었다. 유럽의 외교가에선 라구사를 일곱 國旗를 가진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變化無常(변화무상)한 외교술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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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매년 라구사의 귀족들이 보물들을 싣고 이스탄불로 가서 오스만 터키에 朝貢(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이는 일종의 보험료였다. 라구사는 달마티아(지금의 크로아티아 동쪽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영향력이 큰 베니스, 헝가리, 오스만 터키 가운데 터키 제국의 宗主權을 인정, 보호를 받았지만 한 번도 독립성을 빼앗긴 적이 없다. 터키도 라구사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

라구사는 중세에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스 정교, 가톨릭, 신교도, 이슬람, 유태교의 예배당까지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다가 보니 內政도 많이 開明(개명)되었다. 세계를 아는, 교양 있는 귀족들이 지배층을 이뤄, 노예무역과 拷問(고문)을 일찍부터 금지시켰다. 1347년에는 양노원이 만들어졌다. 외국인을 관료로 채용하였다. 불합격한 사람 중엔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도 있었다.

그들은 개방적 자주에 성공한 이들이다. 라구사 사람들은 슬라브 족이었지만 이탈리아의 先進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늘 베니스와 라이벌이었고 가끔 충돌도 있었지만 전쟁은 하지 않았다. 1699년 라구사는 주위에 있는 베니스 식민지와 離隔(이격)하기 위하여 주변 영토 일부를 오스만 터키에게 넘겨주는 편법까지 썼다.

이때 넘겨준 영토는 지금 보스니아의 유일한 항구 네움으로 변했다.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에 의하여 단절되어 크로아티아와는 陸續(육속)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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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베니스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분수를 지키면서 확장을 꺼렸다. 두브로브니크를 둘러싼 성벽 위를 걸어보면, 외부 세계와 자유롭게 통상하지만 우리 것은 단단히 지키겠다는 意志를 느끼게 해준다. 아름답지만 육중하기도 한 도시이다. 문화와 군사가 공존하며 번영과 규율이 균형을 이룬 도시이다. 이 도시의 600년에 걸친 평화와 자유와 번영을 보장해준 것은 善意가 아니라 성벽과 군함들이었다.

베니스가 게르만 족의 침입을 피해 해안지대로 피신한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듯이 두브로브니크도 7세기 무렵 몽골 계통 아바르 족의 공격을 피하여 해안 절벽 지대로 避亂 온 이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도시이다. 라우스로 불렸는데, 절벽이나 深淵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라우스가 나중엔 라구스로 바뀐다. 피란민들은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근처에서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두브로브니크로 불렸다. 두 도시는 나중에 하나로 결합된다. 두 도시 사이에 있던 해협을 메웠는데 두브로보니크의 중앙로에 해당하는 플라카(스트라둔)이다. 베니스의 말코 광장처럼 붐비는 곳이다.

12세기에 라구사 사람들은 렉터(Rector)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채택하였다. 라구사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다가, 1205년 베니스가 라구사를 공격, 점령했다. 1358년 라구사 사람들은 베니스를 거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지배를 선택했다. 베니스와는 달리 새로운 지배자들은 內政엔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왕에 직속한 자유도시의 자격을 주었다. 달마티아 지방을 둘러싼 각축전으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종주권은 자주 바뀌다가 나중엔 오스만 터키에 넘어갔다. 터키도 자율권을 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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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은 세 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잘 공존하였다. 정치권력은 자산가들이 잡았다. 16세기 중반 이 계층은 약1500명이었다. 그 일곱 배의 시민들을 다스렸다고 하니 인구는 1만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이다. 18세가 된 지배층에 속하는 남자들은 공화국 총회 회원이 되고 이 회의가 의회, 소위원회, 그리고 지도자를 선출했다. 지도자의 임기는 한 달. 그 기간에 그는 사무실에서 살아야 했다.

서기 1272년부터 1808년 나폴레옹 군대에 정복될 때까지 두브로브니크는 市條例에 의한 통치가 이뤄졌다. 500년 이상 중단 없는 법치국가였던 셈이다. 두브로브니크의 경제는 무역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상인들은, 소금, 소금에 절인 물고기, 陶器, 섬유 등을 싣고 해안 산맥을 넘어 내륙의 보스니아 세르비아로 들어갔다. 여기서 여러 가지 광물, 은 구리 () 납 등을 구할 수 있었고, 이를 배에 실어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 비단을 수입, 이를 가공, 고급 섬유로 만들어 비싸게 팔아 돈을 벌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9세기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 16세기엔 180척의 배와 5000명이 넘는 선원을 보유하였다. 인구 대비로는 세계 최강의 해양국이 된 것이다. 最盛期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민 중 여덟 명에 한 명꼴로 해외무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670년대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고 있을 때 두브로브니크는 70金貨의 가치가 있는 36000개의 마차 분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180척의 배를 움직이며 지중해, 영국, 아프리카, 인도까지 돌아다녔다. 이 나라는 간단한 디자인의 튼튼한 배를 만드는 造船 기술이 뛰어나 여러 가지 배를 띄웠다. 18세기에 들어가면 두브로브니크는 세계 80개 도시에 영사관을 두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에 적을 둔 선박은 어선을 포함, 650, 그중 200척은 대양 항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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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으로 축적된 와 정치적 안정은 문화 예술, 그리고 보건 분야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1317년 프란시스코 수도원 안에서 약국이 생겼다. 영업중인 약국으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377년엔 세계 최초의 검역소를 세웠다. 여러 나라 사람들과 물건들이 오고가니 전염병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쓰레기는 건물 뒤에 난 쓰레기 집적 라인으로 버리게 했다.

두브로브니크는 14, 15, 16세기 유럽에서 핍박 받는 유태인들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의사로 일했다. 종교적 탄압도 받지 않았다. 그때의 시나고그가 지금도 문을 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많은 영웅이 아니라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였다.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는 영웅적 지도자가 없어도 法治에 의한 통치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한다. 베니스도 그런 경우였다.

166746일 대지진으로 두브로브니크는 폐허로 변했다. 8000 명의 시민중 5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정박중이던 배도 많이 부서졌다.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 성당, 수도원, 교회, 정부 청사도 무너지고 수많은 문서들이 불탔다.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다. 지금 관광객들이 보는 건물들은 거의가 再建된 로마식 바로크 건물들이다. 외교와 정치를 잘한 두브로브니크는 전쟁으로 도시가 부서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지진은 막을 수 없었다.

대지진 이후 內治도 어려워졌다. 사회 분열의 증상도 보였다. 결정타는 나폴레옹의 등장이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 찬란한 도시국가의 600년간 이어져온 독립을 끝장냈다. 워털루에서 프랑스 군이 패전한 1814년 이후엔 오스트리아 제국 領 달마티아 왕국의 지배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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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세계대전이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두브로브니크가 속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유고 왕국으로 연합, 독립하였다. 라구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때였다. 크로아티아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군에 점령당해, 괴뢰정권이 들어섰으나 이 나라 출신 티토의 게릴라 전이 성공, 自力으로 해방을 이루고, 소련의 간섭도 물리친 공산국가 유고연방의 일원으로 재기하였다. 티토의 사망과 공산권 붕괴를 틈타 슬로베니이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 연방에서 탈퇴, 이를 막으려는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하는 유고 연방군과 독립전쟁이 터졌다. 1991년 12월 두브로브니크는 세르비아인이 주력인 유고연방군의 포격을 받아 수백 명이 죽고 많이 부서졌다. 이 포격은 세르비아 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독립전쟁에서 이긴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면적이 남한의 약55%이고, 인구는 400만 명을 간신히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반 정도이다. 인종적으론 슬라브, 역사적으론 그리스-로마-이탈리아-베니스 문명권에 속해 40여년 간의 공산주의 지배 前歷에도 불구하고  文明 국가의 분위기가
완연하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 크로아티아에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두브로브니크 구경이다.

베니스처럼 관광객으로 밤낮 없이 붐비는 두브로브니크 구경의 핵심은 성벽 위 산책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기분인데, 높은 데서 내려다 보는 빨간 지붕의 石造 건물과 바다는 그림 같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보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尙武, 실용정신을 놓치게 된다. 自主를 유지하였기에 자유를 누린 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를 포함한 달마티아 지방(아드리아해의 동해안=발칸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디나르 산맥 주변 사람들은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축에 든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사람들인데, 最長身國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와 맞먹거나 더 크게 보인다. 남자의 경우 평균 184cm 전후이다. 男女 신장 차이가 크지 않은 듯하다.  



[ 2018-05-13, 20:32 ] 조회수 : 1485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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