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복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28) “저는 고문이 아니더라도 징역형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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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굴복

 
1938년 12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총독부는 나날이 대중의 숨통을 쥐어틀었다. 총력전을 수행하는 데 국민 모두가 협력하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전쟁을 지지하고 도와야 했다. 협조하지 않고 ‘비국민(非國民)’이라고 찍히면 여지가 없었다. 일본 국회의원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전선에 졸병으로 나갔다. 동경대 교수도 중국 소주(蘇州)에 말단 병사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반국가적 성향을 띤 조선인들은 징용으로 차출된다는 얘기들이 돌았다. 김동인이 대표격으로 있는 문단은 조용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문단은 각각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아직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상 그냥 내버려둘 것 같지 않았다. 문인들을 벼르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김동인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아픈 상태로 다시 감옥에 가거나 징용으로 끌려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광수의 갑작스런 친일(親日) 행동들이 떠올랐다. 이광수도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겁이 났다. 무리를 해서 그런지 건강이 악화됐다. 더러 졸도를 했다. 몸이 점점 쇠약해졌다. 긴긴 겨울밤을 이불을 쓰고 누워 앓았다. 불면증도 심해졌다. 해가 기울면 다가올 밤이 무서웠다. 머리에 안개가 낀 듯 몽롱했다. 일본의 반전(反戰) 작가들도 전쟁문학을 쓰라는 당국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곧 그런 상황이 닥칠 게 틀림없었다.

이광수(李光洙)나 최남선(崔南善) 등 다른 문인 선배들은 여기저기 강연회에 끌려 나가 전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문인들도 전선의 병사들을 위문해야 한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넷째 딸 은환(銀環)이 세상에 나왔다. 그는 여섯 명의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전시(戰時)에 그가 없어지면 가족 전부가 참변을 겪는 셈이다. 어차피 끌려갈 거면 먼저 선수를 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전긍긍하던 그는 아픈 몸을 일으켜 택시를 불러 타고 총독부로 가 사회교육과장을 만났다. 군인위문을 가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김동인은 총독부에서 나오는 길에 종로 네거리에 있는 이태준(李泰俊) 경영의 출판사인 문장사(文章社)에 들렸다. 출판업계도 문단과 사정이 비슷했다. 인텔리 출신으로 출판을 하는 임화(林和)의 학예사(學藝社)나 최재서(崔載瑞)의 인문사(人文社)도 마찬가지였다. 불세례를 당하기 전에 문단과 출판업자들이 그걸 피하자는 데 의견들이 합치됐다. 협의한 결과 세 출판사에서 돈을 내어 문사 몇 사람을 내세워 전선(前線) 위문을 보내기로 했다.

섣달 그믐날, 김동인이 집에서 만든 설 떡을 먹고 있는데 이태준에게서 속달우편이 왔다. 출판업자들이 모였는데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출판업자들은 그에게 함께 총독부 도서과(圖書課)로 동행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총독부 도서과 관리들이 문단에서의 협력행위가 없으면 처벌을 하려고 벼르는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문단에서 대일본제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위문단을 조직해 주시면 그거야 아주 훌륭하신 일이죠. 저희 총독부에서 군부나 현지 당국과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총독부 담당 관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가 함께 간 병색이 완연한 김동인을 살피며 물었다.
“김동인 선생은 안색이 아주 안 좋으신데 장거리 여행을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제 건강상 여행을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문단에서 제 대신 마땅한 적임자를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문단의 수장(首長)인 김동인 선생이 가시지 않는다면 위문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어서 건강을 회복하셔서 가 주셨으면 합니다.”

김동인(金東仁)은 홍지동에서 효자동 아내의 의원(醫院)에 이사해 살고 있는 이광수를 찾아가 그 일을 의논했다. 이광수도 그 행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출판사들이 거둔 돈은 작가 세 사람의 중국행 여비 정도였다. 북중국을 세 달 여정(旅程)으로 세 사람의 작가가 떠났다. 일행이 떠날 때 총독부 국장, 과장급이 모두 정거장에까지 나와 김동인이 가는 걸 확인했다. 김동인은 돌아와서 좌담회에 참석하고 글을 썼다.

1940년 세상을 불태울 것 같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경성의 신문들은 6월14일 나치스군대가 파리에 무혈입성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일본은 중국 깊숙이 전진하고 있었다. 경성의 공기가 전시(戰時)체제로 급속히 바뀌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와 동아일보(東亞日報) 등 한글로 발행되던 신문이 폐간되고 정오가 되면 경성부청 꼭대기에 걸린 스피커에서 다그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고음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국민복이 등장하고 길을 가던 사람들은 경고신호가 들리면 길을 가다가 멈추고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보석이 되어 불구속상태로 재판을 받던 이광수(李光洙)에게 경성법원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11월3일은 메이지(明治) 천황의 생일인 명치절이었다. 그날 이광수와 중한을 비롯한 28명의 동우회 간부들은 이광수의 집에 모여 ‘사상전향의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일본 황궁을 향해 절을 하는 ‘황거요배(皇居遙拜)’를 실시하고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레코드 반주에 맞추어 합창했다. 그리고 모두 미리 준비한 전향서에 서명했다. 전향서의 핵심내용은 이랬다.

‘우리는 일본제국의 국가적 이상이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매우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아시아 여러 민족으로 하여금 구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동양 본래의 정신문화 위에 공존공영의 신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일본제국의 국가적 이상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그 자리에는 고등계 일본인 형사 사이가 시치로와 조선인 형사 김의수가  참석해 지켜보고 있었다. 서명을 끝낸 그들은 국방헌금을 거두어 형사들에게 건네고 모두 택시에 분승(分乘)해서 남산에 있는 신궁(神宮)으로 향했다.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얼마 후 이광수 부부는 종로구청으로 갔다. 창씨개명을 접수받은 첫날이었다. 춘원은 호적계로 가서 ‘가야마 마쓰로’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변에서는 폐결핵이 있는 이광수의 체력으로 징역 5년을 견뎌내지 못하고 안창호 선생같이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가 홍지동 산장의 이광수를 찾아왔다. 이광수는 유영모와는 오산학교 때 함께 교사로 지냈었다. 이광수가 다석에게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몰골이 말이 아니죠? 하카마에 하오리를 입고 게다까지 신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됐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고 한낮이 되면 역시 동쪽을 향해 절하고 있습니다.”

다석은 그 말에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 조선반도에 일본바람이 불고 일본 비가 내린 지도 벌써 30년 세월입니다. 그 세월 내린 비와 바람을 완전히 피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듯이 다 거기서 거지지요. 옷에 빗물이 묻지 않고 머리카락에 바람을 맞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어지간히 버텨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제정세나 일본의 제국주의기세가 하루 이틀 사이에 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문이 아니더라도 징역형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광수(李光洙)의 고백이었다.

유럽에서는 독일군이 러시아로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에 돌입했다. 유럽 국가들은 같은 유럽에 있는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우수한 게르만 민족이 슬라브 민족을 식민지 주민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얘기들이 돌기도 했다. 일제 당국은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발표했다. 조선인에게 사상훈련을 시키고 조선인으로서 수상한 행동을 하거나 그럴 가능성만 보여도 사전에 체포해서 구속시킬 수 있는 법이었다.

이광수를 조사한 일본인 검사 나가사키 유조는 이광수를 대화숙(大和塾)이라는 사상범을 교화시키는 모임에 불러 사상교육을 시켰다. 이광수는 일본 옷을 입고 일본 말을 하면서 거리를 다니다가 열두 시 사이렌이 울리면 큰 거리의 복판에 서서 묵념을 올리고 동쪽을 향해 예(禮)를 올렸다. 세종로 근처의 부민관에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라는 어용단체가 발족됐다. 이광수는 일본 옷을 입고 그 모임에 참석해 생활부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을씨년스러운 11월의 중순이었다. 이광수는 법원에 출두했다. 항소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최종심에서 마지막 선고를 받는 날이었다. 재판장이 감정을 자제한 낮은 톤의 목소리로 선고했다.
“피고인 이광수는 무죄(無罪).”


(계속)

[ 2018-06-07, 13: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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