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질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29) 지식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차별로부터의 탈출논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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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변질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강사노릇을 하던 최재서(崔載瑞)에게 절망감이 엄습했다. 사회가 너무 그에게 불공평한 것 같았다. 세상에서 그를 재는 저울대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조선인 출신인 그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일본인 동창생들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었다. 그는 영어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졸업 뒤에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사가 되어 일본 영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인 ‘영문학 연구’에 자주 논문을 게재했다. 또한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사상(思想)’ ‘개조(改造)’ 등의 잡지에 빈번히 기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교수임용에서는 일본인 출신들이 등용됐다. 조선인 천재로 알려진 유진오(兪鎭午)도 역시 교수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선택되지 못했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그런 차별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합병이 된 지 20년이 넘었다. 오랜 시간의 무게는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점점 희박하게 했다. 이제 조선의 지식인들 중에는 일본 통치체제 내에서 제공된 발전의 기회라도 붙잡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은 일본인과 차별받지 않는 그런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다. 지식인들의 내면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갈등 속에서 몸부림쳤다. 지식인층의 생각들이 달라지고 있었다. 차라리 일본 체제에 순응하면서 기회를 잡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들 대부분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차별로부터의 탈출논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선일체만이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었다.

김문집(金文輯)이 쓴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서설(序說)’이란 논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언젠가는 조선인은 완전하게 일본 민족이 되는 운명에 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김문집의 논문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조선이 자립을 한다는 것은 한 시간에 삼십 전씩 세(貰) 주는 한강의 작은 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의 공상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의 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본인과 동족이 되어서 일제의 권리와 의무를 동일하게 향유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는 길이다.’

3·1운동의 실패로 좌절감이 민족에 가득했다.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제패하는 세계강국으로 대두되자 사람들은 절망감을 넘어 이제는 스스로 일본시민권을 가진 일등 국민이 되고자 하는 기운이 이 사회에 폭풍같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광수는 매일신보(每日新報)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임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永生)의 길이 있다. 조선 이천삼백만이 모두 호적을 떠들어 보기 전에는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최후의 이상(理想)이다.’

조선인 지도층의 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천도교의 대표로 삼일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崔麟)은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표방하면서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시아 민족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했다. 서양 제국주의와 대치할 바엔 일본과의 공존공영(共存共榮)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했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윤치호(尹致昊)도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던 민족주의자였다. 윤치호는 ‘내선인(內鮮人)의 동일운명’이란 글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일본제국이란 거대한 배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함께 태우고 큰 바다로 나가려고 하고 있다. 만약 이 거대한 배가 불행히도 풍파를 만나서 난파하면 그 속에 타고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모두 한꺼번에 운명을 같이하고 말 것이다.’

조선 시사잡지 <삼천리(三千里)>에서 인정식(印貞植)이란 인물은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한탄했다.

‘오늘의 정치적 상황을 삼일운동 당시와 비교해 본다면 천양과 같은 차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이 전향한 것이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전체가 일제에 전향한 것이다. 전민족적 저항의 분위기가 이제는 ‘전민족적 협력’의 이미지로 변했다. 저항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조선인들 중에는 예속된 일본인이 아니라 진짜 일본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오직 일본제국의 대륙침략 정책에 끝까지 협동하는 충실한 국민으로서만 개개의 조선인이 존재하며 금일의 조선인의 정치적 노선이란 이 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많은 조선인들은 이 사실을 만주사변에서 이미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따른 만주 붐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가 민족적 저항을 한껏 누그러뜨렸다. 일제의 중국침략을 통해 복리와 번영을 기대하는 조선민중의 자발적인 의사가 내선일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지원병 제도는 조선인 중하층민의 신분상승의 기회로 이용되고 이제 조선의 대중은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일본군대에 협조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변질됐다. 조선인들의 이런 의식변화는 동아시아의 정세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 구한말보다 향상된 데 원인이 있다. 식민지배를 통한 조선민족 일상생활의 향상도 민족적 전향의 원인이다.’


(계속)
 

[ 2018-06-08, 10: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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