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들의 변화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2) “해방 전 5년 동안 우리 민족은 타락의 극에 이르렀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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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영혼들의 변화 

일본은 전선(戰線)이 중국과 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 병력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회의가 있었다. 다나카 정무총감이 입을 열었다.
“각하 이젠 조선에도 징병제도를 실시해야 합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모두 전선으로 나가서 미국 영국과 싸우고 있는데 조선 청년들만 후방에 남아서 안일하게 지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 전쟁이 오래 계속된다면 우리 일본의 청년들은 모조리 전선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고 결국은 조선의 젊은 놈들만 우리 대일본제국의 후방에서 판을 칠 게 아니냐 그 말씀입니다.”

중국 대륙에서 50만 이상의 일본 청년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말레이, 버마, 필리핀, 인도차이나, 그리고 남양군도의 여러 전선에서 이미 이십만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전투는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가 미국 항공대의 공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앞으로 미국의 반격작전도 예상해야 할 때였다. 일본 본토가 싸움터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다가키 조선군 사령관이 반론을 제기했다. 

“정무총감님의 말씀은 분명히 탁견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이 앞으로 오년만 더 끈다면 후방에선 조선의 젊은 놈들이 판을 칠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우리 일본 황군(皇軍)은 곧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머잖아 유럽에서 소련과 영국이 항복을 하면 미국은 완전히 고립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일본군과 독일군은 연합해서 미국을 굴복시키고 말 것입니다. 저는 대일본제국의 군인으로서 황군의 순수성과 전통성을 지키고 싶습니다. 우리 일본인들은 조선인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들을 우리 일본 군대의 일원으로 섞는다면 피의 순결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군기(軍紀)가 더럽혀집니다. 말하자면 군의 순수성과 황군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져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입니다.”

그 말에 다나카 정무총감이 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황군의 명예와 순수성을 지키자는 말엔 저도 동감입니다. 그렇지만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엔 이겼으면서도 일본의 젊은 층은 다 죽고 후방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마치 승리자처럼 거들먹거리고 전 일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오면 그건 난센스가 아니겠습니까?”

법이 바뀌었다. 조선은 이제 내무성 관할의 한 지방이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권리와 의무가 동등하게 되었다. 법이 통과되기 전 식민지 조선의 경우 참정권이 없는 대신 국방의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시민이 된 조선청년들에게 법적으로 국방의무가 부과된 것이다. 해군 특별지원병 제도가 실시됐고 ‘전시(戰時)동원체제 확립요강’이 발표됐다. 조선청년들에게 징병제도를 실시할 법령이 이미 일본 정부의 각의에서 통과되어 중의원을 통과했다.

조선의 지식인층 중에는 법 개정으로 차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고 환영했다. 조선인이 일본의 정규군이 되었다. 중학생들은 소년항공대, 소년전차병으로 지원했다. 나이 어린 소년들에겐 해군항공대나 소년비행대에 지원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도록 세뇌공작이 실시됐다.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에게 학도병 출정을 권유하는 유세단이 활동했다.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등 사회 명사들이 학도병 출정을 권유했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동경으로 간 이광수가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 물었다.

“우리가 학병으로 나가서 죽으면 분명히 우리 민족에게 그만큼 이익이 있겠습니까?”
“안 나가려고 하면 안 나갈 수 있나?”
이광수가 되물었다. 학생들은 절망한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다른 학생이 물었다.
“우리가 나가서 피를 흘리면 후대의 사람들은 우리 피 값을 받아줄까요?”
“그대들이 피를 흘린 후에 일본이 보상하지 않으면 그때는 내 피를 흘려서라도 싸우마.”

함께 갔던 최남선(崔南善)은 이런 말을 했다. 
“군사학은 근대국가의 핵심기술이다.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후 다른 기술은 그럭저럭 배울 수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은 군인으로 뽑지 않아 근대 군사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온 세계의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 오직 조선 청년만 편히 뒤에 앉아 있으라고 두지는 않는 현실이다. 또 그렇게 된다면 전쟁 후에 우리는 어떤 발언권을 얻을 수 있겠나? 일본에 충성을 하기 위해서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군인들을 만들고 조직화하려면 훈련받은 장교 출신이 나와야 한다. 이 기회에 군사지식과 총 쏘는 법을 배워두라는 것이다. 그런 힘의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민족의 자치(自治)도 있는 것이다.”

1942년 1월6일 김동인은 매일신문에 ‘태평양송’이라는 이런 내용의 산문(散文)을 보냈다.
‘유니온 잭의 깃발 아래 해가 지는 일이 없다고 자랑한 대영제국도 아직 태평양은 내 바다라고 외쳐본 일이 없다. 미합중국도 감히 이 소리를 외쳐보지 못했다. 태평양은 내 바다다라고 인류에게 향하여 큰소리로 능히 이렇게 부르짖고 이 권리를 주장할 지위와 실력을 가진 자는 오직 우리 일본밖에 없다.’

1942년 1월23일 ‘감격과 긴장’이라는 이런 내용의 글을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지금 우리는 다만 일본 시민일 뿐이다. 조선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종족을 캐자면 다를지 모르나 지금은 합체된 단일 민족이다.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는 일본과 조선은 별개 존재라는 것을 애당초부터 모르게 하련다.’

1942년 3월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발간의 잡지 ‘반도(半島)의 광(光)’에 이런 글을 썼다.
‘동양에 다른 인종들이 침입해서 우리의 조상들이 후손들을 위해 남겨두었던 것을 캐어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를 보전하기 위해 감연히 일어선 제국은 보도를 들어 이 침입자를 쳐 물리치는 성전(聖戰)을 시작했다. 이 성전의 결과로 생겨날 대동아경영권 즉 신일본권(新日本圈)이야말로 선원 같은 대 지역일 것이다. 무진장의 수산물, 광산물, 식물의 위에 찬연한 일본의 문화를 가한 마치 태양과 같이 빛나고 무지개와 같이 찬란한 신일본권의 문물은 지금 바야흐로 전개되려 한다. 이 빛나는 역할의 한 몫을 맡은 우리의 자랑도 소리 높여 부르짖자.’

1944년 1월1일과 같은 달 4일 ‘총동원 태세로’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랬다.
‘일억 국민의 사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반도인의 지위는 가볍게 볼 수 없다. 애국은 인간의 사명이다. 문학도 비상시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선동력을 발휘하여 국가목적에 이바지해야 한다. 몇 대의 항공기, 몇 척의 함정을 전선으로 내보는 데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이다. 지원병에서 징병으로 또는 특별지원병으로 우리 반도인도 황민화(皇民化)의 보조가 힘차게 진행된다.’

1944년 1월16일부터 징병제 실시에 대해 10회 연재의 글을 썼다. 그 주요내용은 이랬다.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됐다. 헌법은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잡았다. 명치천황은 조선병합 후에 조선인의 지위를 일본인과 동일하게 해 주신다는 고마우신 분부를 받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에서만은 조선인은 제외됐다. 즉 병역이란 단지 국민의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특권이다. 조선인의 사상은 과연 황국 신민이 되기에 충분한가. 그 사상까지 완전한 일본인적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된다.

한동안의 기간을 지낸 뒤에 우선 지원병 제도를 조선에 실시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황민화의 성과 정도를 보고 이만 했으면 조선인도 황민화했다는 판단을 얻어가지고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했다. 조선인도 황국신민이 된 지 30년 만에야 이 특권을 획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체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이런 국체를 가진 국가의 우수한 병사가 되기를 명하는 바다. 내 몸은 이제부터는 내 것이 아니요 또는 가족의 것도 아니요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것이다.

그만치 엄하였던 해군에서까지 문을 열고 조선인을 부른다. 즉 조선인도 황민의 완전한 자격을 구비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전폭적인 신뢰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신해야 할 것이다. 조선인의 과거의 국가생활을 너무도 기형적이다. 청(淸)이나 명(明)이라는 이중의 군주를 모시고 그 아래서 기형적인 국가생활을 해 왔다. 지금은 그런 기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대군주(大君主) 한 분을 모시고 정상적인 국가생활을 향하고 있다. 지금 국가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사람이 필요하다. 중국과 남방에 전투원과 전쟁보조자를 얼마를 가질지라도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大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다. 현재 우리에게 무서운 것이 무엇이랴. 세계는 우리 앞에 굴복할 것이요, 우리의 거룩한 大목적은 실현될 것이다.’

어느 날 김동인이 전차를 타고 남대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전차의 차장이 소리쳤다.
“지금 전차가 조선신궁 앞을 통과합니다.”
승객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남산 쪽을 향해 고개를 굽혔다.
전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까지 변질시켰다. 고뇌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수재 최재서(崔載瑞)는 태도가 변했다. 총독부 고위층에 연줄을 대려고 애썼고 조선군 사령부의 높은 인물들을 찾아가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어로 문학잡지를 내고 있었고 일본 옷을 입고 일본화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회색지대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친구인 조용만(趙容萬)이 광화문 길거리에서 영문학자 최재서를 만났다. 조용만은 전쟁 반대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었다. 최재서는 각반을 차고 나오지 않은 친구 조용만을 보면서 꾸짖었다.
“왜 각반을 차고 다니지 앉지? 자네는 반전문학(反戰文學) 타령이나 하고, 당신은 비국민(非國民)이야.”
최재서는 조용만을 비난하고 갔다. 해방 후 최재서는 그 유능한 지적능력에도 불구하고 영문학계에서 또다시 차별과 천대를 받는 운명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 이병주(李炳注)는 해방 전 오년 동안에 우리 민족은 타락의 극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사(誓詞)를 아침저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공기마저 거짓으로 물든 생활상황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소수의 예외자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 대세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해방 직전 오년 동안 민족은 타락의 극에 이르렀고 해방 직후 오년 동안 민족은 마침내 파산해 버렸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대변하는 일례로 1949년 친일파로 체포된 이승우(李升雨)가 반민특위 법정에서 “자신은 꿈속에서도 조선의 독립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었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1970년 4월26일 김종신(金鐘信) 공보비서관에게 써 준 <나의 소년시절>이라는 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훈련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음.>
박정희를 연구한 조갑제(趙甲濟) 기자는 박정희로 하여금 군인의 길에 흥미를 갖도록 한 계기는 한반도로 진출한 일본의 군사문화라고 평가하고 있다.


(계속)

[ 2018-06-14, 09:5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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