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학의 소멸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3) 일본 말을 안 쓰는 사람은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풍조가 만연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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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조선문학의 소멸     

총독부 당국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행했다. 대중들 중에 추종자가 늘어갔다. 젊은이들은 일본인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능숙한 일본어가 자랑이었다. 도시는 거의 일본화하고 문인들도 어학능력을 경쟁하듯이 다투어 일본 말로 소설을 썼다. 관청이며 회사는 물론이요 상점이며 가게의 흥정에 전차 차장 내지 길가는 사람들이 길을 묻는 데까지 일본어를 자랑하며 사용했다. 일본 말을 안 쓰는 사람은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풍조가 만연했다. 시골은 모르지만 도회는 일본인의 거리인지 조선인의 거리인지 분간키 힘들 만큼 일본어화한 세상으로 변했다.

한글로 된 소설이 존재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김동인이 이십년간 공들여온 조선 문학에 닥쳐온 재난이었다. 그는 조선 문단의 개척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문학을 살리고 싶고 한글로 글을 쓰는 작가들을 살리고 싶었다. 조선문학은 황무지였다. 우리에게 고유한 소설용어가 없었다.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이지만 사대주의의 영향을 받고 한문에 압박을 받아 우리말과 우리글은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왔었다. 많은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우리말 소설을 쓰려면 우리의 글밭을 파고 헤치고 갈고 씻고 해야 가능했다.

김동인은 조선의 소설작법을 개척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남들은 그저 예전부터 저절로 그래온 걸로 가볍게 생각했다. 한문 투의 전통을 깨뜨리고 구어체 문장을 연구해가며 소설을 쓰는 것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라는 대명사 하나를 위해 적지 않은 습작과 휴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를 뒤따르는 작가들이 생기고 조선 문학이 자라는 것을 봤을 때 그는 기뻤다. 일제의 조선어 박멸에 대한 가장 적개심을 가지는 게 그였다. 그는 조선문학과 소설의 정착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당국에서는 그에게 일본어로 글을 쓰라고 했다.

그는 수필 한 편을 일문(日文)으로 쓴 일이 있다. 문학을 하는 후배들이 김동인이 일어로 글을 쓰니 그렇게 해도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아팠다. 일어로 글을 쓰면 무덤에 가는 날까지 양심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의 작품을 일어로 번역시켜 발표하든가 혹은 익명으로 남의 눈만을 속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싫었다. 멸시와 방해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박해는 소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 보편화와 조선어 박멸운동이었다.

그는 한글을 고집했다. 당국은 삭제, 압수, 불허가 처분을 내렸다. 그의 문학은 봉쇄된 셈이었다. 글로 밥을 먹고 사는 처지라 나날이 궁박해졌다. 한글로 글을 쓸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은 조선어 방송 소설 한 편씩을 쓰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력증강이나 국민사상 선도를 목표로 한다는 조건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들의 약전(略傳)을 한 주일에 한 사람씩 써내려 가는 것이었다. 흥이 나지 않았다. 간신히 한글로 입에 풀칠을 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었다.

십년 이내에 조선어는 산골의 사투리 정도로 전락되어 버릴 게 틀림없었다. 조선어도 조선문학도 없어질 것이다. 조선문의 명맥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세 편 쓰면 한 편쯤이나 허가하는 총독부의 좁은 관문을 목표로 끊임없이 붓을 놀렸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김동인(金東仁)은 어느 날 총독부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찾아갔다.

“지금 총독부 당국이 장려하는 시국소설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또 그 소리가 그 소리지’ 하고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국에서 종이를 배급하고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많은 시국소설은 효과가 생각보다 없습니다. 억지로 떠맡기고 안기어주니 받기는 받지만 읽지도 않고 그냥 버리는 형편입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검열과장 아베의 표정이 좋지 않아보였다. 김동인이 말을 계속했다.

“일본어로 쓴 소설은 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부나 여인이나 노인은 읽지 못해요. 무의미한 거죠. 당국의 조선어의 방침과는 배치되지만 50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어가 없어질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한글작품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본과 반도는 이미 한나라 한 몸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말도 하나가 되고 문학도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1억 천황의 신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싸우는 전시인 지금 말입니다.”

“논리적 정책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조선인 2600만의 마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조선어 박멸정책은 조선인의 반항심을 일으키는 정책이라고 봅니다. 조선인들의 마음을 읽지 않고 책상에 앉아 거부감을 조장하는 건 일본 위정자들의 실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검열과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부분은 앞으로 검열정책에서 고려하겠습니다.”
일본인 검열과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1945년 8월15일 오전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경성시내를 불덩이 같이 달구어 놓고 있었다. 김동인이 조선총독부 검열과를 다시 찾아갔다. 조선인 작가단의 창설을 주장하기 위해 간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전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 대화가 그대로 김동인의 귀에 들려왔다.
“응? 그건 두 시간만 더 기다려. 단 두 시간뿐이지만 절대로 말할 수 없어. 응 그러구 예금이나 저금 있나? 은행이건 우편국이건 간에 예금이 있거든 전부 찾아내 열두 시 이전에 말이야.”

전화가 끝난 그에게 김동인은 찾아간 용건을 말했다. 아베 다쓰이치는 건성으로 듣는 표정이었다. 다시 아베에게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어떤 다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김동인은 아베의 방을 나왔다. 열두 시에 중대방송이 있다는 뉴스가 퍼지고 있었다. 낮 12시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항복을 알리는 어눌한 목소리의 방송이 잡음 속에 나오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천황의 귀족용어가 더듬더듬 낭독되고 있었다. 얼핏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김동인은 전차를 탔다. 해방이 됐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계속)

[ 2018-06-15, 10: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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