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혼란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4)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근 40년, 청소년 및 장년의 일부까지도 조선이 없어진 뒤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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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정체성의 혼란
 

1945년 8월17일 저녁 김동인(金東仁)은 시내의 음식점에서 열린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새롭게 문인들의 단체를 만들자는 모임이었다. 김동인은 그 자리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고 놀랐다. 일제(日帝)의 관변단체가 되어 협력하던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의 인물들이 이름만 바꾸어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로 발족하려는 것이다. 일제의 관변단체에서 활동했던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이 모임에서 이광수(李光洙)는 제명해야 합니다. 이광수가 친일행위를 한 게 누가 봐도 명확한 마당에 그를 이 단체에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김동인은 속에서 불끈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주도하던 임화(林和)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문학도 어떤 사상과 이념에 기초하느냐에 따라 본질과 민족문화건설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문학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숭고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상이 결여된 문학이란 바닥짐이 없이 중심을 잃은 배에 불과합니다.”

김동인은 사회주의자인 임화나 김남천(金南天)이 주도하는 그 단체에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이렇게 의견을 제시했다.

“이 모임이 정치단체를 만드는 것이라면 몰라도 문인들의 순수한 단체인 이상 조선 문학의 최초 공로자인 이광수를 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일생 문학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문학 그 자체로 평가를 받아야지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든 그것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균형감각과 비판정신이 우리 문사(文士)들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문학계만은 좌우로 사상적으로 갈리지 말고 통합적인 문학단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동우회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 당국이 조선인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수양동우회를 탄압하기 위해 이광수(李光洙)와 주요한(朱耀翰) 그리고 우리 형님인 김동원(金東元) 등 180명을 검거한 사건 아닙니까? 감옥에 갔던 이광수가 왜 친일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겉의 행위만 보고 판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만약 이광수가 제외된 단체라면 나도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김동인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김동인은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칼럼으로 세상에 직접 목소리를 내놓았다. 그는 칼럼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미(美) 군정의 잘못된 행태를 예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美 군정은 총독부 보다 더 심하게 검열을 하려고 들었다. 그는 문화예술인들을 홀대하는 사회에 대해 소리쳤다. 친일의 죄과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군림하려는 기득권자들에 대해 좌우의 구분 없이 펜을 휘둘렀다.

그는 대중들의 내면의식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일본 국적으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은 일본인이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또 다른 민족개념으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중성이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속도 일본화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일본 이외의 것은 알지 못했다. 일본의 통치가 영원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도둑같이 해방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시대적 상황과 청년들의 내면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학병으로 갔던 한 병사의 영(靈)이 그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 손이 사람을 죽였다. 주판이나 놓고 편지나 쓰고 하던 손이 사람을 죽였다. 손으로 잡은 총검이 영국군의 가슴에 쿡 들어박혀서 그를 즉사하게 한 것이다. 그와 무슨 원한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일본군의 한 사람이고 그는 영국군의 한 사람이었다. 내 칼이 십분의 일 초만 늦었다면 그의 칼이 내 가슴에 박혀서 내가 죽었을 것이다.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고 보니 국민의 수효가 문제였다. 칠천만 국민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지금껏 열등하다고 도외시했던 조선의 2600만까지 끌어넣어 일억 국민을 자랑했다. 멸시하던 조선인에게 반도인이란 자랑스러운 벼슬을 주고 일본인과 동등이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 창씨제도를 세우고 그리고 나서는 일본신민 된 가장 빛나고 귀한 권리인 병역권을 조선인에게도 뒤집어 씌웠다.

우선 지원병이라고 해서 공장과 농촌의 젊은이들을 중국과 남방(南方)지대에 보냈다. 뒤따라 학병(學兵)제도가 생겼다. 그 봄에 상과를 나와 은행에 취직하고 있던 나는 학병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재학 중도 아니고 벌써 취직해서 인생항로를 스스로 개척하려던 나는 딱 질색이었다. 할 수 있는 한 학병을 피하려 했다. 사회는 그런 나를 용납하지 않았다. 신문기자들은 나 같은 사람을 큰 반역자이기라도 한 듯 난리법석을 떨었다. 모교의 직원이나 선배들은 시시콜콜 꼬집어 내어 한 사람도 학병을 피할 수 없도록 괴롭혔다.

나는 그래도 학병을 피해보려고 시골에 내려가 박혔다. 그러나 신문이며 선배들이 얼마나 야단을 했던지 늙은 아버지가 그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일부러 시골로 찾아 내려와서 걱정을 했다. 이번 학병을 기피하면 무서운 처벌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 한 사람의 병역기피자로 인해 전 조선인이 그 보복을 받는다고 했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견딜 수 없었다. 매일매일 신문기사의 위협은 더해갔다.

드디어 나도 지원했다. 나 자신보다도 부모의 걱정이 더 보기 어려웠다. 소심한 나는 신문이 던지는 질책도 견디기 힘들었다. 학병으로 입영하는 날 모교의 선배며 동창 사회유지들의 격려며 찬사에 뒤몰리어 정거장 저편 어둑한 모퉁이에 혼자 초연히 서 계신 늙은 아버님께 하직인사도 못하고 만세소리에 범벅이 되어 기차 안에 몸을 실었다. 조선인 학병인 우리와 일본인 병사의 마음은 달랐다. 일본군은 싸움에서 어떤 실수가 있더라도 그 책임은 개인에게 있었다. 비겁한 놈이라거나 어리석은 놈이라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병은 그렇지 않았다. 실수나 잘못이 있으면 ‘조선인은 그렇다’라거나 ‘조선인은 할 수 없다’라는 비하(卑下)였다.

그러니 모든 일을 용의주도하게 해서 조선인을 욕 먹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육탄용사(肉彈勇士)’라는 말이 있었다. 탄환의 대신으로 사람의 몸뚱이를 내놓는 것이다. 사람 목숨의 존귀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식 무사도였다. 전쟁 초기의 진주만 기습이 ‘사람어뢰’로 시작됐다. 적은 한 병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는 데 비해 일본군은 한 발의 포탄을 절약하기 위해 수십 명의 목숨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예가 특공대다. 겨우 적의 한 척의 배, 한 대의 비행기를 없애기 위해 젊은 병정들의 목숨을 무더기로 내던졌다.

나는 국적상 일본인이요 병적도 일본 군인이다. 일본군의 승리를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요 승리를 축하해야 할 입장이다. 이번 전쟁에서 일본군의 일원으로 그들의 정치적 성격을 충분히 봤다. 일본이 만약 패전해서 조선이 함께 패전국의 책임을 져도 지금보다 더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쁜 현상은 상상할 수 없으니까 밑져야 본전이다. 만약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과 일본이 민족이 다르다고 인정받아 분리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런 경사(慶事)가 없을 것이다. 만약 일본이 승전을 하면 그건 꿈같은 얘기지만 조선에도 약간의 이득이 돌아올 것이다. 이번 전쟁에 조선도 적잖은 희생을 내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이 나면 우리 조선인에게 결코 손해나는 전쟁은 아니다.

기괴한 소식이 들렸다. 미국 영국 중국이 카이로에 모여서 이 전쟁에 대한 회담을 했는데 조선을 일본이 놓아주라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일본이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마닐라시(市)에서 밀수입되는 영자(英字)신문에 그런 기사가 있었다고 한다. 대체 저들은 조선과 무슨 특수한 관계가 있기에 저들의 막대한 물자와 생명을 내던진 이번 전쟁의 승리의 대상으로서 ‘조선의 해방’을 요구할까. 혹은 저들이 조선을 나누어 먹는다면 모를 일이지만 해방시킨다는 조건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다. 혹은 일본의 자원인 조선을 일본에서 떼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좀더 큰 고통을 맛보게 하려는 것인가 또는 군국주의 일본과 대륙과의 완충지대로서 조선독립의 존재가 필요한 것인가. 남의 덕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의 행운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내 나이 스물세 살, 대정(大正) 이십 년에 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조선이며 한국이 소멸하고 일본제국에 병합된 이후에 났으니 엄정한 의미로는 나면서부터 일본인이다.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면 나면서부터 일본인인 우리들의 처우를 어떻게 해줄지. 나면서부터 일본인이요 지금껏 자라는 내내 일본 국가 비상시국 속에서 황도(皇道)정신이 머릿속에 박혔다. 삼십 세 이하의 청년들은 일본인 성격과 일본사상과 일본 황도에 젖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청소년 없이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지 근 40년, 청소년 및 장년의 일부까지도 조선이 없어진 뒤 세상에 나온 사람이다.>


그는 이광수(李光洙)를 모델로 시대를 쓰기도 했다. ‘반역자’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오이배는 평안도에서 자라나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조선민족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사로 유학생으로 언론인으로 민족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가 친일협력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민족의 행복을 위해 그 길을 택했었다. 해방이 되자 그와 똑같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는 까마귀가 아니라 까치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배척하고 있었다. 

김동인(金東仁)은 일제의 그 혹한의 겨울 같던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살아낸 것이 더 중요하지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해방의 감격과 기쁨을 독립국가 건설의 동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 2018-06-16, 10: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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