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꿈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5) 金九 주석의 측근한테서 ‘老독립투사의 일대기를 만들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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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집과 꿈

1945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이었다. 전쟁통에 ‘소개(疏開)’라고 해서 16년간 살던 행촌동 집을 팔고 이리저리 전전(轉轉)했다. 김동인은 가족들이 잠을 잘 집을 마련하느라고 절절매고 있었다. 서울은 주택난이었다. 독립한 내 나라를 찾아 돌아오는 많은 귀환인과 전쟁 때 시골에 내려갔다가 도로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스산한 찬바람이 부는 11월이었다. 일곱 명의 가족이 몸을 눕힐 장소가 없었다.

김동인은 마침내 이산(離散)을 떠올렸다. 그는 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을 나누어 맡아 가지고 헤어져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이 놓고 간 집이나 재산들이 널려 있어도 군정청과 끈을 댄 사람들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갔다. 그는 서러움이 솟아올랐다. 삼일운동 무렵부터 해방까지 돈벌이와 무관하게 피와 땀을 조선어 문학에 바쳤다. 물려받은 유산도 문학에 공물로 바쳤다. 항상 가난과 함께 했다. 글을 쓴다고 수모도 많이 겪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추운 겨울 그와 가족이 몸을 눕힐 곳이 없다는 것은 절박한 현실 앞에 그는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군정청 광공국장(鑛工局長)이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내로 나가 군정청 오(吳) 국장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吳 국장이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작가이신 김동인 선생의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동아일보에 연재하셨던 여러 소설들을 그동안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문학을 모르지만 김동인 선생은 돈이 아닌 문학의 외길 인생을 걸어오셨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총독부와 싸우신 분인 걸로 압니다. 해방된 조국은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소리쳤던 김동인 선생에게 보상을 해 줘야 마땅한데도 집 한 칸도 없으시다면 그건 나라가 선생님을 대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광공국에서 신당동의 일본인 호미토모의 경금속회사의 사택들을 접수해서 가지고 있는 게 있습니다. 집을 거저 드리지는 못하지만 그 중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한 채 고르십시오. 집세를 내야 하는 주택이지만 가족이 묵을 곳이 없을 때는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김동인은 가슴이 찡했다. 매섭게 추운 겨울 따뜻한 지붕 아래서 가족이 오붓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 그보다도 더 고마운 말은 군정청 吳 국장이 그를 인정해 주는 한 마디 말이었다. 문학과 인연이 없고 전혀 모르는 그에게서 문학과 우리말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고 그런 호의를 받으니 눈물이 흘렀다.

신당동의 집으로 이사한 것은 1945년 11월 중순이었다. 일본인 회사 사장의 사택이었다. ‘글쓰기 좋은 집’이었다. 부엌이며 가족들이 묵는 방과는 기역자로 꺾어져 떨어진 조용하고 한적한 방이 있었다. 방문을 열면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이 눈앞에 보였다. 작은 돌탑과 상록수들이 조화롭게 배치된 위에 노송(老松) 몇 그루가 뜰을 보호하듯 둘레에 서 있었다. 전화, 전등, 전열, 가스, 수도, 모두 구비되었고 우물도 있었다. 200평 가까운 빈터까지 딸려 있어서 야채를 내 집에서 심어 먹을 수 있고 집 앞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도 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감회에 젖었다.

검열이 없어졌다. 붓을 놀릴 범위가 자유로워졌다. 김동인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담은 진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중국의 삼국지에 대응하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지였다. 고구려 800년, 백제 700년, 신라 1000년 그 기나긴 세월 동안에 이 지역 위에서 활약한 많은 영웅들의 활약상을 엮어 내려가면 위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목숨을 걸고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다음은 일제 40년과 해방된 한국의 현실을 소설화해 보고 싶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 36년 전 기간을 몸소 보고 경험한 사람은 소수였다. 그는 직접 모든 과정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문학적 묘사력도 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제시대의 대파노라마를 적절하고 정확하게 붓으로 재현시킬 만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문학의 씨가 뿌려진 지 30년이고 그새 등단한 작가가 많지만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김구(金九) 주석의 측근한테서 연락이 왔다. 노(老) 독립투사의 일대기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행운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생각했었다. 김구 주석의 70년 생애는 조선독립의 역사였다. 김구 주석은 사심(私心)이 없었다. 조선 독립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임시정부라는 보따리를 등에 지고 상해로 한구(漢口)로 중경(重京)으로 유랑한 40년의 떠돌이 생활이었다. 곁눈질 하지 않고 오직 신념대로 자기의 길을 가다가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김구 주석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 자체가 소설이었고 ‘조선독립사’였다. 한일병합 이후 조선이 걸어온 길과 김 주석의 일대기를 교묘히 엮으면 영원한 좋은 기록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글쓰기에 좋은 방이 생겼고 김구 주석과 그 뜻이 통했다. 김구 주석과 경교장에서 여러 번 만나 상의했고 공주며 마곡사 등지를 함께 여행도 했다. 김구라는 한 노인의 일대기에 일제 40년 조선의 상황과 그 이면에 있는 민족운동사를 함께 엮어 입체적으로 작품을 만들라고 하면 그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한 개의 대작(大作)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 오십이 내일모레고 항상 몸이 허약했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같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이라는 느낌이 종종 엄습했다.

(계속)

[ 2018-06-17, 09: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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