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6) 1951년 8월 김동인은 밭고랑에서 부패한 시신(屍身)으로 발견되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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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의 죽음

해방이 된 서울은 경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도가 들끓고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횡행했다. 일본인들의 사택촌인 그 동네는 모두 새 주인들이 들어서 역시 집에 낯익지 않은 사람들이라 저녁만 되면 겹겹이 문을 잠그고 깊은 방에 들어앉아 있었다. 일대는 밤만 되면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 적막한 공간이었다. 강도가 든 집도 있고 그의 집도 이사오는 날 저녁에 도둑이 들었다. 어수선한 세상이었다. 밤에 가족끼리 소곤거리다가 창문 저편 멀리서 야경꾼의 딱딱 하는 소리가 가까워오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그 소리가 고마웠다.

김동인에게 썰렁한 큰 집은 처음 볼 때만 신기했지 자신과는 맞지 않은 크고 화려한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정붙여 살던 행촌동 작은 집이 그리웠다. 작은 건넌방이 그의 침실이고 응접실이고 서재였다. 그 방에서 책상을 안고 펜과 함께 17년의 세월을 보냈다. 작은 집은 앞집에서 음식 먹는 젓가락 소리며 뒷집에서 빨래 너는 발소리며 건너편 집의 내외 싸움하는 소리까지 들렸었다. 그 모두가 정다움이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일본인 사장이 살던 큰 집은 허전하고 무서운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땔 장작도 없었다. 온돌방과 부엌만 썼다.
 
추웠던 1945년의 겨울이 지나고 1946년의 봄이 왔다. 정월 그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문학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었다. 예술이어야 했다. 그는 좌익을 규탄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일 년이 되어가자 새로 들어온 약수동 집도 좀 더 친숙해졌다. 뜰에도 정이 들기 시작했다. 일본인 사택 특유의 썰렁한 공기가 없어진 것 같았다. 동네 분위기도 변하는 것 같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이집 저집에서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한여름만 겪고 나면 좀 더 사람 사는 동네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봄이 되면서부터 동네에 불길한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부근의 일본인 가옥을 미군이 다시 다 빼앗는다는 내용이었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미국의 군용차들이 일대를 요란스럽게 드나들었다. 집집마다 차례로 집을 명도(明渡)하라는 명령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군정청 발포 법령에 의해 집값을 은행에 공탁하고 이제는 내 집이거니 하고 안심하고 있던 사람, 군정청 법령에 의지하여 은행에 임대차 계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당황했다.

일단 명도령이 내리기만 하면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군에서 쓴다는 데 무슨 잔말이냐는 식이었다. 미군은 조선 해방을 위해서 많은 피를 흘린 은인이라고 했다. 미군들은 오로지 조선해방만을 위해 전쟁을 한 것처럼 행동했다. 합법적으로 집을 구입했던 사람들은 집을 빼앗기고 억울한 마음으로 진정을 하러 갔다가 오히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난만 받고 쫓겨 왔다. 경찰에 구속된 사람도 있었다. 내 민족을 보호해 줄 정부를 가지지 못한 백성의 모습이었다. 실력자인 미군이 하라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김동인은 아메리카 문화에 기대가 있었다. 지난 30년 글을 써 문화를 발전시킨 공에 대해 준 집이니 문화를 아는 미국민족으로서는 무슨 생각이 있겠지라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다가도 미군 지프차가 집 근처에 정거할 때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던 그는 집 대문간에 커다란 나무간판이 걸린 걸 봤다. 집을 내놓으라는 통고였다. 집을 알선해 준 광공국(鑛工局)의 吳 국장을 찾아갔다. 김동인의 이야기를 들은 오 국장은 “일껏 김 선생의 편의를 보아드렸지만 군에서 쓴다면 할 수 없지요. 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어서 이사 갈 집이나 물색하셔야 할 겁니다”라고 말한 후 천정을 보면서 긴 한숨을 지었다.

가족이 갈 데가 없었다. 한 통의 진정서를 만들어 군정당국을 찾아갔다. 진정서를 꼭 전해달라고 한국인 비서관에게 부탁했다. 일주일 후에 그 결과를 알려고 비서관을 찾아갔다.
“보여드렸지만 머리를 가로저으시더라구요.”
비서관의 입에 발린 변명이었다.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상관을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는 비서관의 충성이었다. 비서관은 진정서를 중간에서 묵살해 버린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행정자인 미군과 민중의 사이에 끼어있는 사람들의 충성으로 미국과 민중 사이의 오해가 컸다. 전쟁 잉여물자가 많은데도 칠면조와 버터 잼을 빚낸 돈으로 사들이는 희극도 벌어졌다. 그저 그렇습니다. 옳습니다로 상관의 비위만을 맞추려는 통역자가 가운데 끼어 민중의 하소연은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제시절에는 그래도 일본인들과 언어가 통해 오해는 없었다. 그러나 해방된 한국은 미군들의 눈에 한국인들은 미개인일 따름이요. 우리의 눈에 저들은 다만 군인일 따름이었다. 1945년 8월15일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 헛것이었다. 우리는 가련한 인종이었다. 나라를 잃었다는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지배할 뿐이었다. 김동인은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왕십리 110의 65번지 영단주택(營團住宅)으로 이사를 했다. 1949년 초여름 중풍으로 쓰러졌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6월28일 중앙청 앞에 인민군 탱크가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시청 앞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이 걸리고 거리는 온통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7월12일 젊은 인민군 장교가 효자동의 이광수 집을 찾아갔다. 이광수 역시 자리에 누워 앓고 있었다.
“자수서는 썼음둥?”
정치보위부에서 나온 인민군 장교가 물었다.
“못썼습니다.”
“자 그럼 갑세다.”
인민군 장교가 명령했다. 그는 이광수를 차에 태워 데리고 갔다.

전향을 했다는 죄로 작가 김팔봉(金八峯)에 대한 인민재판이 광화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렸다. 돌과 몽둥이로 얻어맞고 의식을 잃은 그를 공산당이 자동차에 끈으로 묶어 끌고 가다가 종로 어디쯤에서 버렸다.

1951년 8월 김동인은 왕십리 집에서 20미터 떨어진 밭고랑에서 가족에 의해 부패한 시신(屍身)으로 발견되었다.


(계속)


[ 2018-06-18, 08: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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