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金東里) 아들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9)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사상이나 국가의식하고는 또 다른 차원의 부류야.”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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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김동리(金東里) 아들

서초동의 중국음식점 타워차이에서 대한변협회장 김평우(金平祐) 변호사를 만났다. 고교 선배인 그는 작가 김동리(金東里)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동리 씨는 일제 말 절필선언을 했었다. 그리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민족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김동인의 친일과 김동리의 민족주의는 어떤 운명의 갈림길이 있었을까. 그걸 알아보기 위해 돌아가신 김동리 씨의 아들 김평우 변호사를 만났다.

“선배님 저 김동인의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한 소송을 맡고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살아온 작가의 아들이시니까 아는 게 있으면 한 마디 조언을 해주시죠.”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예술가에게 있어서 사상이나 정치는 사실 전혀 관계없는 분야라는 거야. 그게 우리 아버지 김동리의 예술관이었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는 말이지, 베스트셀러만 된다면 어떤 소재도 다룰 수 있고 어떤 구성도 할 수 있는 거지. 그게 작가의 세계라는 거야. 일제시대에 설령 일본에 좋게 썼다고 하더라도 작가로서는 어떻게 하면 글이 많이 팔릴까가 관심이지 아마 사상이나 친일의 관념하고는 달랐을 거야. 그게 내가 아버지한테 들었던 거야.”

“그러면 어떻게 아버님 김동리 씨는 일제 말을 버텨나셨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건 우리 큰아버지 덕이지. 아버지에게는 조선에서 주역을 제일 많이 아는 형님이 있었어. 아버지는 그 형님의 주역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시는 입장이었지. 사실 일제시대 작가들은 우리 아버지 김동리나 김동인(金東仁), 이광수(李光洙), 모두 신문사에 직접·간접으로 밥줄을 대고 사는 사람들이었어. 그러니까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잘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일제 말 하루는 아버지가 형님을 찾아갔었어. 주역을 하시는 형님 말이 점괘를 뽑아보니까 이제 몇 년 후면 이 나라에 큰 변혁이 일어나니까 행동을 잘 해야 한다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형님한테 찾아가서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적이 있어. 그랬더니 큰아버지가 몇 개를 지어놓았더라는 거야. 그래서 웬걸 이렇게 많이 지으셨느냐고 하니까 그게 네 팔자에 있는 자식들 숫자라서 미리 지어놨다고 하시더라는 거야. 그게 정확히 들어맞았어. 아버지는 형님의 주역을 절대 신뢰했지. 그때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아버지는 원고를 쓰는 걸 중단한 거야. 일종의 절필 선언이지. 그리고는 큰아버지의 말씀대로 사회적으로 큰 변혁이 올 때까지 은거하고 있었던 거지.
우리 큰아버지의 말씀대로 갑자기 해방이 다가왔어. 해방이 되고 신문사에 가보니까 자리들이 텅텅 비었더래.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 입맛에 맞게 쓴 기자들이 친일파 문제로 모두 그만뒀으니까 말이야. 일제시대 그런 친일의 혐의가 없는 아버지 같은 사람은 이제는 그 텅 빈 자리들 사이에서 마음대로 골라 앉을 수 있었지. 그래서 우리 아버지 김동리는 바로 편집국장을 하게 됐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사상이나 국가의식하고는 또 다른 차원의 부류야. 그런데 그 작품을 친일로 삼아 단죄하는 건 옳지 않아.”

또 다른 의견이었다.


(계속)

[ 2018-06-21, 09: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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