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李文烈)의 의견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0) “인터넷의 포퓰리즘은 진실하고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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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이문열(李文烈)의 의견

며칠 후 나는 김동인(金東仁)의 아들 김광명(金光明)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님의 작품에 대해 무게 있는 증언을 해 줄 소설가를 구할 수 없을까요?”
“누구를 하면 좋을까요?”
“아무래도 한국의 작가를 대표하려면 이문열(李文烈) 씨가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그분이 동인문학상의 심사위원이기도 하니까 그 인연으로 한번 부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 김광명 박사한테서 바로 전화가 왔다.
“이문열 씨와 통화를 했는데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그럴 겁니다. 이 민감한 문제에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겠죠.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세요. 제가 간곡히 부탁을 해 보겠습니다.”
나는 잠시 후 김동인의 아들로부터 받은 번호로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방송에서 들었던 쇳소리가 섞인 경상도 억양이었다.

“이문열 선생 되십니까?”
“그런데요.”
“저는 김동인에 대한 재판을 진행 중인 변호사입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아 김동인 씨의 아드님에게 연락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증인으로는 적합지 않을 겁니다. 제가 조선일보와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또 동인문학상의 심사위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김동인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저 같은 작가보다는 평론가가 훨씬 객관성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시죠.”

“이건 평론가보다는 현대 한국문학을 상징하는 이문열 선생 같은 분이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국문학의 선구(先驅)인 김동인 선생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정조로 부탁했다.
“지난 십년간 세상시비에 휘말려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도 사적(私的)으로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심정적으로 일제시대 김동인 선생이나 이광수 선생이 얼마나 압박감에 시달렸을까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솔직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을 공식적으로 할 수는 없죠.”

나의 뇌리에 신문에 났던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작가 이문열의 책을 관 속에 넣어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몇 마디의 말과 글이 사람들을 자극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를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맡은 이 사건은 김동인 하나만 위한 변호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재판은 법정에 올려진 한국문학입니다. 이문열 선생은 김동인의 영혼이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 이 상황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알기로 친일문학의 연구는 4·19 이후 임종국(林鍾國) 씨한테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한 논리개발은 되지 않고 친일의 글을 적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죠. 친일문제에 있어 북한은 그들의 유일한 강점인 정통성의 고지(高地)를 차지하고 있어요. 친일파가 문제될수록 북한의 정통성이 드러나니까요. 저는 이런 문제를 그런 차원에서 봅니다.”
“도와주시죠.”
내가 다시 부탁했다.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해드리고 싶지만….”
“일단 만나서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모레 내가 대학교육연합회에서 초청하는 강연을 하러 올라갑니다. 이천에 사는데 서울로 올라가려면 세 시간은 잡아야 해요. 그 강연이 오후 6시에 있는데 3시쯤 만나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참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그날 오전에 다시 전화 한 번만 제게 해주세요. 혹시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동안 법정의 자료들을 이메일로 이문열 씨에게 보냈다.
2010년 2월23일 오후 2시30분. 서울시청 앞의 프레지던트 호텔 커피숍. 브라운 계통의 벽과 고풍스러운 의자들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한 테이블 정도만 손님이 있을 뿐 넓은 홀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가방 속에서 김동인의 작품인 ‘운현궁의 봄’을 꺼내 읽고 있었다.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문열 씨였다. 옅은 회색의 싱글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문열 씨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증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저도 처음에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그래도 침묵하는 다수 속에 상당수는 저를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위로를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저는 이제 침묵하는 대중을 그들과 공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한 사람이 길가에서 얻어터질 때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두 모여 신나게 구경하면 그게 뭡니까? 그들은 구경꾼이 아니고 때리는 사람과 공범일 수 있습니다.”
그는 피해의식이 큰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한국문학의 상징 아니십니까? 이문열 선생의 평가 한마디가 문학계에서 판결문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10년 전쯤이면 몰라도 지금은 이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패배하고 한쪽으로 내처져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새로 책 한 권을 냈어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는 잘 팔리더니 갑자기 매상이 뚝 끊어지는 거예요. 출판사 사장이 알아봤더니 내 책은 절대 사서 읽지 말라는 인터넷 속의 안티세력이 계속 글을 올리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네티즌한테 먹혀들어가고 말이죠. 지금은 대형 인터넷 서점이 매상의 반 이상을 벌써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정체 모를 몇 명이 나를 매도하는 그 글을 독자들이 받아주는 거예요.”

세상에 대한 섭섭함이 그의 얼굴에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계속했다.
“얼치기 좌파들이 있어요. 제대로 이론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남을 공격하는 소수의 무리들이죠. 개량한복을 입고 코털에 꽁지머리를 한 그런 부류들이죠. 그런 세력이 제가 글을 쓰면 고소를 하고 그게 무혐의 처리되면 다시 문장의 형식을 바꾸어 또 고소를 하고 그렇게 해요. 엄청난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이죠.
한 번은 여주 검찰청으로 소환되어 갔어요. 젊은 검사 앞 철의자에 앉았습니다. 고소를 했다는 그 사람들이 왔어요.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빈정거리면서 슬슬 놀리는 겁니다. 제가 대꾸하지 않고 참고 있다가 나중에 화가 나서 그런 소리 말라고 벌컥 했었어요. 그랬더니 앞에 앉아있던 젊은 검사가 당신들 싸우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내가 언제 싸웠다고? 그게 훨씬 더 모멸감을 주더라구요.
엄 변호사가 지금 하는 친일파 문제만 해도 그래요. 이게 인터넷 포퓰리즘의 위력입니다. 진실이 어떻건 상관없어요. 거기서 친일파라고 만들면 아니라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터넷이 쌍방향이라고 하지만 절대 그게 아니에요. 허상들을 만들어 인간들을 무참히 공격하고 죽여 버리고 있어요. 뽀빠이 이상용 씨라고 있어요. 10년 전쯤 심장재단의 비리에 연루된 것 같은 얘기가 돌았어요. 실체가 그렇지 않은데도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생명은 끊어졌죠. 최근에야 한 프로를 맡은 것 같던데. 그리고 자살한 최진실 씨만 해도 그래요. 네티즌들이 별별 모욕적인 글들을 다 올렸죠. 그걸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에 자살까지 한 거 아닙니까? 인터넷의 포퓰리즘은 진실하고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김동인(金東仁)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산더미 같이 자료를 보내셨더라구요. 내가 대충은 읽어보고 나왔어요. 소설 ‘백마강’을 보면 그걸 연재하기 전에 신문에서 광고로 북 치고 장구 치는 내용이 친일이지 소설 자체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소설 내용 중에 일본의 천황계가 조선민족과 뿌리가 같다던가 조선의 문화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정도인데 그 정도는 역사서에도 종종 나와 있는 내용이라고 보여요. 다만 일제가 그렇게 신문에서 광고를 한 건 김동인이란 작가가 그 시절 그만한 사회적 영향력이 있으니까 이용을 한 거겠죠.
그 외 김동인 씨가 문인보국단(文人保國團)의 일원으로 뽑혀 중국전선(前線)의 일본군 위문을 갔다 온 일이 있더군요. 돌아와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하면서 글을 쓰지 않았어요. 작가로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니까 그런 거라고 보죠. 미당 서정주(徐廷柱) 씨도 기억을 상실했다고 한 적이 있어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라고 할까요.”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물을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일제 말 김동인 씨가 한 마디 한 게 기가 막히더군요. 소설이란 게 별게 있느냐 그저 대중에게 재미를 제공할 뿐이지 뭐가 더 있겠느냐고 한 말이죠. 작가에게 그건 절망이나 체념을 의미하는 아주 의미 있는 말이에요. 김동인 씨의 초기 단편들을 보면 예를 들어 ‘감자’ 같은 걸 봐도 이면에 탐미주의가 깔려있고 역사를 봐도 의미가 담겨있어요. 그런데 작가가 소설에 대해 ‘그저 대중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 이면에는 진한 체념이 깔려 있는 거지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재판에서 그런 시대적 상황이 얘기되고 이해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 재판은 법정에 올려진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대적 상황을 얘기하고 그 속에서 과연 진짜 처벌받아야 하는 친일이 어떤 경우인가를 따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가 다 납득이 되면 그렇다면 친일을 척결하지 말자는 것이냐는 논리가 제기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건 법대로 하자는 겁니다. 법적 요건은 주도적이고 적극적이고 계속적이라는 게 붙어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한 사람만 친일반민족 행위로 규정짓자는 거죠.”

“그것도 문제가 있죠. 조선왕은 일본 황족이 되고 거대한 재산을 소유했어요. 그렇다면 조선의 왕실도 부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인데요.”
“왕이 일본의 귀족이 되고 천황의 신하가 됐습니다. 왕이 항복을 했는데 그 아래의 백성들보고 끝까지 투쟁하라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아니죠. 그렇게 되면 조선조를 부인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북한정권은 조선왕조를 부인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金日成)을 앉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뭔가 갑자기 떠오르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일합방 전에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일본군에 50만 원을 헌금한 사실을 압니까? 지금 같으면 5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데….”
“전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의 주동이었고 법정에서 항변을 한 것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학군이 구한말 일어난 의병들을 없앤 거 아세요?”
이문열 씨가 내게 다시 물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좌파들은 동학을 혁명이라고 하면서 동학군이 의병들을 제압한 건 침묵하고 있어요.”
역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 같았다.


(계속)

[ 2018-06-22, 09: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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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끼호테     2018-06-22 오후 2:25
한일간 연방제통일은 저도 찬성입니다, 나라는 우선 크야합니다,
민족보다 국가가 중요합니다,
   동끼호테     2018-06-22 오후 2:22
손병희 선생이 일본군에 50만원 헌금이라! 처음듣는얘긴데?
동학군이 의병을 죽인것도, 왜 이런 사실이 널리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멸공!     2018-06-22 오후 12:21
아, 그랬구나. 이문열 선생님도 많은 글을 써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폭넓은 지식, 후손들에게 남겨 주셔야 합니다. 저는 지금이야 말로, 한일간 연방제 통일해야 자유민주주의 지킨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이대로 가면 북괴에 흡수되었다가, 중공에 흡수되어 공녀 바치며 산다고 봅니다. 한일간 협력하면, 중공에 있는 만주땅도 되찾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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