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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1) “어디서 감히 김동인을 여운형 같은 분에게 비교합니까?”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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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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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후 재판이 다시 열렸다. 법원의 가로수가 독기 오른 짙은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법정으로 가는 나의 머릿속에 화두 같은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 시절을 살아온 작가 이병주(李炳注) 씨는 해방 전 5년 동안에 우리 민족은 타락의 극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김동인(金東仁)이 문제의 글을 쓴 때가 그 시점에 해당했다. 이병주 씨는 자기가 말하는 타락은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아침저녁으로 맹세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공기마저 거짓으로 물든 생활상황을 타락이라고 했다. 물론 소수의 예외자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 대세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말의 뜻은 무엇일까.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편파적인 해석 때문에 과거 어딘가에 숨어있는 중요한 무엇이 간과되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상황에 따라 고의적으로 달리 읽혀질 수도 있었다. 사회주의자 인정식(印貞植)은 1930년대 말 이미 민족적 전향이 이루어졌다고 논문에서 통탄을 했었다. 이병주 씨는 그 이후 공기마저 허위로 물든 극도의 민족적 타락을 얘기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법정 앞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정부 측 소송수행자 세 명이 보였다. 행정안전부 공무원은 두 명은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위원회에서 일했던 사학자인 김경현 박사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학자인 그의 신념은 확고한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 김경현 박사에게 말했다.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세 사람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제시대 헌병이나 경찰을 지낸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위원회의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진짜 악질적인 친일을 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런 거죠?”
“헌병이나 경찰을 지낸 사람들을 위원회에서 결정을 하자니까 막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시절부터 그 사람들은 세상이 바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고 꼬리를 뺀 거라고 봐야죠. 그래서 빠지게 된 겁니다. 그리고 위원회는 하급직에 있던 사람들은 생계형 친일이라고 해서 봐준 경우도 많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친일을 한 경우는 이해를 해 줘야 하니까요.”

“제가 보면 작가 김동인은 그 시대 전업(專業) 작가로 쥐꼬리만한 원고료로 가족이 생존해야 했습니다. 그가 후기에 쓴 글 몇 편이 친일의 근거가 됐는데 그는 생계형 친일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못한 겁니까?” 
“그 시대에도 붓을 꺾고 끝까지 치열한 투쟁정신으로 임한 작가가 있습니다. 이육사(李陸史)도 그랬고 윤동주(尹東柱)도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무엇인가요?”

김 박사가 되물었다. 김동인도 끝까지 투쟁정신을 가져야 했을까. 내가 배운 헌법에는 양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었다. 학문의 자유도 있었다. 국민들은 어떤 생각도 어떤 사상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다양한 의견들이 부딪치기도 하고 함께 모이기도 하면서 흘러가는 사회가 민주사회다. 지금 일본과 한국 만주 중국이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들자고 하면 친일반민족적인 생각일까. 그 시절 김동인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었을까.

위원회의 이명희 위원은 그 시절 일본헌법도 양심의 자유가 있었다고 했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어떤 생각과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그런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고 해서 60년이 지난 지금의 획일적인 잣대로 친일 반민족 행위로 낙인찍는 것이 과연 국가의 정당한 법 집행인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의혹을 가지면서도 나의 내면은 한쪽이 주눅이 들어있었다. 일본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영혼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나의 영혼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주눅든 변호사의 영혼은 당당하게 김동인을 변호하지 못하고 시대적 상황이나 개인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대신 말하고 있었다.

김동인이 만약 일본과 조선이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자체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친일반민족 행위의 죄를 진 것일까. 역사에 대한 학문적 견해도 위원끼리 달랐다. 그 결론은 학문의 영역에 맡겨야지 이렇게 법적으로 공권력의 칼로 한 인간을 난도질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 시절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가정해 봤다. 강철 같은 민족사상과 투쟁이념을 가지고 현실에 저항했을까. 나약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잠시 후 재판이 됐다. 내가 재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위원회의 위원인 이명희 교수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국가를 대표해서 나온 소송수행자가 이렇게 반박했다.
“증인으로 나오겠다는 위원은 위원회에서 소수의견을 피력했던 자로 알고 있습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위원이었던 사람이 증인으로 나오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특별법 10조는 위원은 외부의 어떤 지시나 감독도 받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위원이 증인으로 나왔다면 그것은 외부의 간섭이나 협박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위원이 증인으로 나온다면 징역 3년형까지도 받을 수 있는 형사문제입니다. 그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증인이 스스로 저를 찾아와서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외부의 지시고 감독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 국가가 힘으로 법으로 이렇게 개인의 양심을 뭉개고 덮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반박했다. 나는 위원회의 불공평을 드러내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덧붙였다.
“일제시대 여운형(呂運亨)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휘하에서 박헌영(朴憲永) 등이 활동을 했고 그는 해방 무렵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작가인 김동인(金東仁)이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평남 영원(寧遠)에서 서울로 돌아왔더니 친지들이 대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고 시내는 전시 분위기였다고 그의 글에서 적고 있습니다. 그 시절 그가 목격한 한 장면을 정면으로 잡지에 이렇게 고발한 게 있습니다.”

나는 김동인이 기고한 잡지 삼천리의 해당부분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 보니, 거리는 방공연습을 하느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 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대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은 그런 일에 나서서 뺑뺑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여운형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삭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신천지 1949년 7월호)

나는 그 글을 압축해 읽어준 후에 이렇게 계속했다.
“이 글은 김동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글입니다. 위원회는 좌익 인사에겐 관대하고 우익 인사에게는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운형입니다.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유언비어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전향서를 쓰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후  그의 이름으로 된 총독부 기관지에 학병권유문이 몇 차례 실리고 경성일보사가 발행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 같은 내용의 글이 게재됐습니다.
여운형은 친일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찬조연사,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이름이 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좌파세력은 여운형을 철저하게 변호합니다. 학병권유문은 조작됐고 친일단체 관여설은 이름이 도용된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운형은 위원회의 조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됐습니다. 그 외 일제시대 화가였던 정현웅(鄭玄雄)은 잡지에서 전쟁을 독려하는 삽화를 썼다고 해서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월북한 사회주의자의 신분이 나타나면서 친일반민족 행위의 결정이 철회되기도 했습니다. 작가였던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 박사는 아버지 김동인이 실제로 친일파라기보다는 사회주의자의 친일을 고발하는 이런 글 때문에 오히려 위원회가 노리는 대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동인이 친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여운형을 비판하는 그런 글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나는 더 나아갔다.
“위원회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 결정 대상에서 제외 했습니다. 일본 육사를 다니고 혈서로 충성을 선서하고 현역 장교로서 활동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선을 팔아넘기고 일제시대 일본의 귀족이 되어 장군 사령관이 된 조선인 왕족 후예는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지금 위원회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공평한 것인지 정말 의문입니다.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위원회의 판단은 아이가 어른을 재판하는 것 같이 경솔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단순한 외형의 일부만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그것은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만일 그런 잣대로 친일을 규정한다면 자신도 학병(學兵)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했으므로 이에 해당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정부 측 소송수행자 한 사람이 들고 일어났다.
“어디서 감히 김동인(金東仁)을 여운형(呂運亨) 같은 분에게 비교합니까? 그건 말이 안 되죠.”


(계속)

[ 2018-06-23, 10: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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