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딸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2) 끊어진 김동인의 행적에 대한 귀중한 증언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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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김동인(金東仁)의 딸 

작가 김동인의 가족들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김동인의 부인 김경애(金瓊愛)는 2008년 5월 노환으로 사망했다. 장남 일환(日煥)은 인천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장녀 옥환(玉煥)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병으로 죽었다. 차녀 유환은 김동인이 천황모독죄로 옥중에 있을 때 결핵으로 사망했다. 4녀 은환(銀煥)은 중학교 교사생활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유족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3녀 연환(姸煥)과 차남 김광명(金光明) 박사였다. 3녀 연환은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퇴임해서 서울 왕십리에 살고 있었다. 차남인 김광명 박사도 왕십리에서 63년간 거주하며 한양대 의대 교수로 근무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을 했다. 남은 두 사람은 작가 김동인의 삶을 증언할 수 있는 귀중한 존재였다.

2010년 4월의 어느 날 사무실로 백발의 곱게 늙은 여인이 찾아왔다. 김동인의 셋째 딸인 김연환(金姸煥) 씨였다. 1935년생인 그녀는 칠십대 중반이었다. 그녀에게 소파를 권한 후 나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분들이 일제 말의 그 어려운 세월을 지났는데…”
소파에 앉은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계속했다.
“위원회의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 작품을 제대로 읽어나 보고 친일이라고 하는지 의문입니다. 저도 교직에서 평생을 바쳤지만 사람의 공(功)과 과(過)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친일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는지 그 사람들 하고 따져보고 싶어요.”
사무실 여직원이 그녀 앞 탁자 위에 차를 가져다 놓고 갔다. 나는 그녀의 출렁이는 감정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으면 뭐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죠.”
“해방이 되자 아버지에 대한 사회의 평가나 대접은 대단했어요. 아버지와 쌍벽을 이루던 이광수(李光洙) 씨가 친일로 몰리니까 아버지가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됐죠. 아버지는 김구(金九) 평전(評傳)과 독립운동사를 쓰려고 하셨죠. 김구 선생이 묵으시는 경교장을 드나드셨어요.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인사하러 찾아오고 민족지도자인 김구 선생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시기도 하면서 집이 부산해졌어요.

한 번은 아버지가 식구들에게 정권에서 문교장관을 하라고 한다면서 문인이 뭘 그런 걸 하느냐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자주 만나시다가 어느 날부터 김구 선생을 못마땅해 하셨어요. 공산당하고 무슨 대화가 된다고 그러냐는 거였죠. 그리고 경교장을 드나들 때 마다 신분을 확인하거나 소지품 검사를 하는 걸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시기도 했어요. 자존심이 강한 아버님은 김구 평전을 쓰시는 걸 그만둬 버리셨어요.

아버지는 해방 후 집필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하시다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셨죠. 1948년 여름경 같은데 한 번은 밖에 나갔다 돌아오셨는데 의치(義齒)를 잃어버리시고 오셨어요. 외삼촌이 광나루의 모래 속에서 그 의치를 찾아왔어요. 1949년 초여름 전차를 타고 나가셨다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어요. 그 후에 가족들의 도움이 없으면 거의 몸을 쓰지 못하셨어요. 아버지가 아픈 바람에 우리는 6·25 때 피난을 가지 못했어요. 6·25 때 제가 가슴 졸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때 어땠는데요?”
끊어진 김동인의 행적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듣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전쟁 속에서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밖에 나가 옷이나 물건을 쌀로 바꿔 왔어요. 그 쌀을 벽장 속에 숨겨놓고 그 앞을 이부자리로 가려 놨죠. 6·25가 나던 그해 여름 어머니는 너무 힘들었어요. 아버지는 꼼짝 못하고 누워있고 애들은 넷이나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집에 있을 틈이 없었어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물물교환을 하러 다녀야 했으니까요. 빈 집에 아버지와 아이들만 남았죠.

내무서원들이 와서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걸 보고 잡아가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수시로 와서 아버지를 테스트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와서 정신도 온전치 않은 아버지에게 ‘우리 영용한 인민군대가 부산까지 가겠죠?’ 하고 물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갔어? 힘들 거야’라고 하시면 난 가슴이 막 방망이질 했어요. 그 사람들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당장 끌려가 죽을 판이었는데 말이죠. 제가 아버지 옆에 가서 ‘아버지!’ 하고 소리치면 아버지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시는 것 같아요. 그러면 다시 그 사람들에게 ‘아니야 아마 갈지도 모르지’ 하고 말을 바꾸시는 거예요.

그 시절 한 집에서 한 사람씩 끌려 나가 부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거기 동원되는 날이 많으셨어요. 가을이 되니까 아버지는 점점 더 상태가 나빠졌죠. 공산군이 물러갔다가 서울이 다시 점령되는 상황이 됐어요. 일사후퇴 때죠. 그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모두 잡혀 죽을 것 같았어요. 아버지가 빨갱이들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죠. 사회주의 지도자 여운형(呂運亨) 씨의 친일행위를 글로 써 발표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반공의식을 잘 아는 골수 공산당인 동네 사람이 다시 들어왔어요. 그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이번에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죠.

어머니는 저보고 피난보따리를 싸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찬찬한 성격은 못됐어요. 그래서 제가 보자기를 펼쳐놓고 살림을 쌌죠.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서 받았던 첩지(帖紙)도 있었고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관대(冠帶)도 쌌어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귀여워하셔서 아버지에게 집안에 내려오는 그런 것들을 주신 거예요. 저는 아버지한테 받은 작은 핀 같은 액세서리도 꼼꼼하게 챙겼어요. 그런데 몸이 마비된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집에 있다가는 가족들이 몰살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두고 식구들이 떠났죠.”

그녀의 가슴 속에 있던 죄의식이 살아난 듯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그녀는 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이렇게 말했다.
“피난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며칠 후 다시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왕십리 집 근처 밭고랑 사이에 돌아가신 채 계셨어요. 시신(屍身)은 벌써 부패했는데 입고 있던 헐렁한 속옷을 보고 알았죠. 그런 아버지를 화장(火葬)했어요.”

(계속)
 

[ 2018-06-25, 09: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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