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가정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3) “평론가들은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은 방탕아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현실의 아버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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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의 가정   

보다 깊이 작가 김동인(金東仁)의 가정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 물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생활을 얘기해 주시죠.”

“행촌동 우리 집은 독립문에서 걸어 올라가는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었어요. 마지막에는 다시 가파른 계단이 있었구요. 그 집은 수도도 없었어요. 그 당시는 물장사가 있어 파는 물을 먹고 살았죠. 그리고 빗물도 많이 이용했어요. 처마에서 내려오는 물을 항아리에 받아 허드렛물로 사용했었죠. 그 집 방이 셋인데 하나는 세를 주고 안방은 어머니와 우리 아이들이 썼어요. 아버지는 건넌방에서 글을 쓰면서 생활을 하셨어요.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 방에 가서 원고지에 넘버를 미리 먹여드리는 일을 했어요.

방 가운데에 책상이 있었고 책들이 그냥 산같이 쌓여 있었어요. 방뿐 아니라 집안 가득히 다 책이었어요. 아버지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외부손님도 거의 없었어요. 뭐랄까 아버지는 일종의 대인(對人) 기피증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아버지의 성향 때문에 우리 자식들도 비슷한 걸 물려받았어요. 두툼한 원고뭉치를 가져와 봐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 손님들이 오면 쑥스러워 하면서 제 동생과 저는 서로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언니인 제가 할 수 없이 나가 손님에게 인사를 했지만요. 남동생은 그럴 때면 혼자 광으로 가서 그 안에 있는 야전침대에 누워 있었죠.”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 사랑은 어땠어요?”
“한번은 내가 이질이 걸려서 밤새 화장실을 다녔어요. 그 당시는 마당 저쪽에 있는 재래식이었죠. 어머니는 내가 아픈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는데 아버지가 내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방에서 휴지를 들고 나오셔서 제가 볼 일 다 볼 때까지 기다리시다 휴지를 뜯어 주셨어요. 그리고는 제가 변을 본 위에 횟가루를 뿌렸어요. 아버지는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열의가 대단했어요. 제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천황을 모독했다고 해서 형무소에 가신 일이 기억이 나요. 그해 겨울 아주 추웠어요. 제가 행촌동의 미동 국민학교에 입학을 할 땐데 아버지가 없어서 다른 사람이 저를 학교에 데리고 갔죠.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는 미동 국민학교에 다니던 저를 일류학교에 넣으려고 직접 손을 잡고 가서 시험을 치게 하고 사대부속 국민학교에 넣으셨죠. 아침에 제 옷을 입히면서 좋아하던 아버지였죠. 학교에서 반장이 되니까 너무 기뻐하셨죠. 아버지와 친한 이광수(李光洙) 씨 집 딸이 이화여중에 합격하니까 샘이 나시는지 아버지는 저보고 경기여중 시험을 보라고 했어요. 시험장에까지 따라오셨죠. 아버지의 그런 극성을 보고 어머니가 놀라기도 했어요.

평론가들은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은 방탕아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현실의 아버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길 좋아했어요. 언니를 잘 데리고 다니시다가 언니가 죽으니까 다음에는 저를 데리고 다니셨죠. 추운 겨울날 저를 데리고 충무로의 어느 다방에 갔던 기억이 나요. 거기서 커피와 요깡을 먹었어요.

아버지는 성격이 섬세했어요. 아버지가 외출했다 돌아오실 때면 집안에서 쓰는 향료나 자식들 머리빗 제 머리핀까지 아버지가 사오곤 했어요. 원고료를 받은 날이면 백화점에서 비싼 옷이나 장난감 같은 선물을 환한 얼굴로 사가지고 돌아오셨어요. 아버지는 특히 남동생 광명이를 예뻐하셨죠. 밖에 나갔다 돌아오실 때는 꼭 귤을 사가지고 돌아오셨어요. 그러면 어린 광명이는 아버지 주머니에서 뭐가 나올까 궁금해 했어요.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 펄쩍펄쩍 뛰셨어요. 그러면 노란 귤이 광명이 앞에 뚝 떨어졌죠. 광명이가 그걸 보고 좋아하는 걸 보고 기뻐하셨어요.

아버지는 언니나 나를 데리고 외출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냉면을 잘 사 주셨죠. 한번은 동생 광명이도 데리고 덕수궁을 간 적이 있어요. 동생 광명이가 그곳에 있는 불상을 보면서 ‘한쪽 다리가 어디 있어요?’라고 질문하는 걸 보고 ‘얘가 작가가 되려나 보다 관찰력이 예민한 걸 보니까’ 하시면서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는 작가가 최고였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들과 노는 걸 아주 좋아하셨어요. 집에서 아버지하고 우리들이 백과사전을 펼치며 놀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요. 아버지 방에 백과사전이 쌓여 있었어요. 아버지는 거기서 수많은 식물의 이름이나 섬세한 여러 가지들을 뽑아냈죠. 평소에 동생 광명이하고 아버지 방에 가면 백과사전을 들추면서 장난이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에 곰이 나오면 ‘이게 광명이다’라고 장난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광명이는 좋은 그림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가 아니라고 소리를 치기도 하고… 그렇게 놀았죠. 아버지는 장난을 하시느라고 광명이에게 건포도를 말똥이라고 했어요. 그 바람에 광명이는 학교 갈 무렵까지 건포도를 건포도라고 하지 않고 말똥이라고 했죠. 

저는 집에서 아버지한테 공부를 많이 배웠어요. 아버지가 구구단도 미리 가르쳐 주셨어요. 그리고 해방 전에 한글도 가르쳐주셨어요. 일본말만 쓰는 세상이지만 언문으로 편지도 쓰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죠. 제가 한번 집 뒤 계단에서 떨어져서 늑골을 다친 적이 있어요. 그때 아버지는 방에 알코올 램프를 켜고 증기를 만들어 습도를 맞추어 주셨어요. 어렸던 저는 그 냄새가 역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딸을 보호하는 데도 무서운 분이었죠. 한번은 경기여중 선생님이 몇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하룻밤을 자야 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면서 약속장소에 오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어디서 여자아이가 나가서 자냐고 하면서 못 가게 하셨죠. 그렇게 엄하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선생님은 좌익교사였는데 우리 경기여중생 중 반장이나 대표들을 모아 의식화시키려고 그러신 것 같았어요. 6·25가 나고 점령이 됐는데 학교 가보니까 온통 붉은 선전구호가 학교에 좍 나붙었는데 그 선생님이 쓴 것들이에요. 그 선생님은 글씨체가 특이해서 우리들이 보면 당장에 알거든요. 그런데 그 후에 보니까 북으로 가지 않고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셔서 교장까지 잘 사시던데요. 제가 나중에 교사를 하면서 지켜봤죠.”

“작가의 자식으로 형제들은 어떻게 자랐어요?”
“가난했지만 우리 형제들은 반듯하게 자랐어요. 저는 제 여동생 은환(銀煥)이와 함께 방을 썼어요. 밤이면 작은 호롱불 속에서 빌려온 소설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빨리 돌려줘야 하니까 한 페이지는 내가 잃고 다음페이지는 은환이가 읽고 누워서 그랬죠. 내가 다음 부분을 알려주려고 하면 은환이는 절대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손가락을 입에 댔어요. 그렇게 독서를 했어요. 여동생 은환이가 아버지의 문학적 재질의 피를 받은 것 같았어요. 대학 국문학과에 들어가고 틈틈이 소설도 썼었는데 그만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아버지는 남동생 동명이를 끔찍하게 사랑하셨죠. 모든 게 동명이 중심이었어요. 저는 딸이라 그런지 그걸 당연히 받아들였어요. 먹을 게 하나 좋은 게 있어도 당연히 남동생 차지라고 생각했죠. 한 번은 가을날인데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어디서 구했는지 굴 한 접시를 저에게 주시더라구요. 저는 부지불식간에 이거 동명이 건데 내가 먼저 먹어도 되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어머니는 먹으라고 그러시더라구요.

남동생 동명이는 의과대학에 갔는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틈틈이 사진기를 들고 나가고 다른 취미가 많았죠. 그 밑의 남동생은 서울공대를 나왔는데 공부를 잘했어요. 제 언니는 아버지가 천황모독죄로 감옥에 가 있을 때 언니가 폐병에 걸려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방안에 연탄난로가 있었는데 재가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구조였어요. 온 방안으로 재가 떠 다녔었죠. 어머니는 정신없이 용하다는 중국한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다 먹이기도 하고 언니를 살리려고 정신이 없었어요.

한번은 밖에 나갔다 온 어머니의 비녀를 꽂았던 머리가 다 풀려있더라구요.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까 비녀도 빠지고 머리가 엉망이 되는 걸 어머니도 몰랐던 거예요. 그 모습을 뒤늦게 알아채고는 어머니가 흐느끼던 게 생각나요.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그렇게 살기가 힘들었던 세월이죠. 그해 7월 감옥에서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어요. 언니 유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가 죽지는 않았는지?’라고 엽서에 써 보내셨더라구요. 그해 8월 유환 언니가 죽었어요.”


(계속)

[ 2018-06-26, 09: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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