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아내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4) ‘내가 하늘에 가서 영감을 만나도 이만하면 되지 않았수?’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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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작가의 아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는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우리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셨어요. 전처 자식까지 맡고 딸 셋과 남동생 둘을 낳아 키웠으니까요. 대개 나이가 네 살 터울이에요. 어머니는 임신을 하고 나서 입덧이 심했대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이광수(李光洙) 씨의 부인이 하는 허영숙 산부인과에 다니게 했어요. 어머니는 항상 나이 차이가 나는 아버지를 어려워했죠. 아버지를 특별 취급 했어요.

어머니는 수시로 저보고 동네 내려가서 고기 반 근을 사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비탈길 아래로 내려가 정육점에서 고기 반 근을 사곤 했어요. 어머니는 부엌에 작은 용수철 저울을 가지고 있었어요. 고기가 반 근이 맞는지 확인을 하는데 정육점에서 어린 내가 가니까 거기서 근수를 자주 속였어요. 그래서 점점 멀리 있는 정육점을 찾아가게 됐죠. 그 심부름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렇게 고기를 사오면 어머니는 그걸 잘 다져서 호박볶음, 오이나물, 가지 무친 거에 조금씩 섞어 반찬을 만드셨어요.

아버지는 매운 걸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 빨간색 반찬이 없었죠. 아버지는 고추도 매우면 못 드셨어요. 그렇게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가지고 어머니는 밥상을 아버지 방에 넣어드렸어요. 어머니와 자식인 우리들은 안방에서 먹고 아버지는 건넌방에서 드셨죠. 아버지는 음식을 거의 안 드셨어요. 그 반찬이 그대로 나오면 우리는 그걸 기다렸다가 먹었죠. 아버지는 오트밀이나 카레라이스를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연유를 좋아하셔서 그게 집에 있기도 했어요.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자인 것 같기도 했어요. 이사를 갈 땐데 어머니는 이리저리 뛰고 있는데 아버지는 단장을 짚고 문 밖에서 ‘어흠’ 하고 기다리고 계신 거죠. 세사는 사람이 아버지는 왜 일을 안 하느냐고 물은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아버지다운 너그러움이 있으셨죠. 다른 얘기지만 어머니가 계속 딸을 낳으니까 외할머니가 사위한테 미안해하더라구요.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은 딸이 아닙니까?’라면서 농담으로 무마를 하셨어요. 아버지는 집안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신 분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어떻게 자식들을 키웠죠?”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입에 먹을 걸 넣어주는 게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였어요. 왕십리에서 동대문시장까지 걸어서 왕복하시면서 안한 거 없이 다 하셨죠. 저는 큰 딸이니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어요. 저는 학교고 뭐고 갈 생각을 그만뒀었죠. 제가 열일곱 살 때였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어머니는 저보고 학교를 가라고 하시는 거였어요. 지금 칠십 평생을 두고 어머니께 감사하는 건 저를 학교에 보낸 거였어요. 당시 집안 사정으로는 큰 딸인 제가 학교를 갈 수 있는 입장이 도저히 못됐으니까요. 저는 어머니를 돕다가 서울 삼선교 쪽에 있는 임시 학교에서 공부했어요. 그 후에 경기여고가 부산피난학교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다시 열어서 그곳으로 갔구요.

어머니는 생활력이 대단히 강한 분이었어요. 저를 서울대에 입학시키고 동생 영광이도 세브란스 의대에 보냈어요. 어머니는 일하러 가시고 누나나 형은 학교에 가니까 어린 막내 동생은 항상 혼자 집에 있었어요. 집 앞 나무 아래서 하루 종일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막상 엄마가 오는 게 저만치 보이면 조용히 집으로 혼자 들어가는 성격이 됐어요. 그 여동생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고 막내 남동생은 서울공대에 입학했어요. 우리 형제들이 대학을 나와 저와 여동생은 교직에 그리고 남동생들은 병원과 대기업에서 일하게 되니까 어머니가 한 번은 이렇게 넋두리를 하시더라구요.

‘내가 하늘에 가서 영감을 만나도 이만하면 되지 않았수?’  
어머니는 아버지를 빈 집에 버려두고 애들과 피난 갔다는 것에 대해 평생 가슴 깊이 죄의식을 가지고 사셨어요. 누구한테도 그 사실에 대해 입을 떼지 않으셨죠. 자신조차 그 기억을 잊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모든 걸 잊고 돌아가셨으니까요.”

“집안에서 아버지의 문학의 길을 뒤따르는 사람은 없나요?”
내가 물었다.

“제 여동생이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했어요. 제 동생도 저와 같이 교직의 길을 밟았는데 교감 연수교육을 받고 나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 아이가 아버지의 머리를 이어받아 소설도 습작을 하고 아버지를 연구한다고 그랬었는데…”
그녀는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계속)

[ 2018-06-27, 09: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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