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착각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7) “친일문제는 국민정서가 한쪽으로 쏠려 있고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인생이 망가질 수 있어.”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47
위선과 착각 

대만에서 오랫동안 공부를 한 고교 동창 박재우 교수를 만났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군대는 대만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자 다시 중국이 됐다. 대만과 오키나와는 원래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독립을 선택하라고 할 때 오키나와는 그대로 일본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대만은 어땠을까. 우연히 사무실로 놀러온 박 교수와 점심을 먹는 자리였다. 그는 중국의 작가 노신(魯迅)을 전공한 중문학자였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은 일본에 대해 어떤 입장이야?”
“대만에서는 친일(親日)이 전혀 문제가 안 돼. 오히려 지금도 친일성향이 많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대만이 바로 일본의 식민지가 됐지. 그런데 대만 사람들은 일본이 철도도 놓아주고 학교도 세워주고 자기네들 발전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고 있어. 물론 대만 사람 중 일부가 독립을 주장했지만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 대만의 입장에서 중국은 친아버지인데 일본이 어느 날 양아버지가 되어 들어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다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군대가 들어왔어. 친아버지가 온 셈인데 제대로 정치를 잘 못한 거야. 그러니 사람들이 ‘뭐 이런 경우가 있나?’ 하고 오히려 친일(親日)경향을 띄게 된 거야. 우리하고는 전혀 분위기가 달라. 우리는 친일문제에 대해 너무 감정적이고 사상에 치우친 느낌이 들어. 일제시대에 대해 전 국민의 뇌리에 틀어박힌 고정관념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함부로 말했다가는 마녀사냥을 당해 죽을 우려가 있어. 그러니까 그런 말은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해도 절대 조심할 사항이야.”

“그래도 안병직(安秉直) 교수는 책을 보니까 용감하게 바른 말을 했던데?”
내가 안(安) 교수의 책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서울대 안병직 교수는 내 주례선생이기도 해. 정말 성품이 꼬장꼬장한 분이지. 그렇게 때문에 바른 말을 했다가 엄청난 박해를 당했지. 그분 처음에는 사회주의 이외에는 선택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쪽에 몸을 담았던 분이야. 그런데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북한 사람들도 만나보니까 자기가 생각해 왔던 그게 아니거든. 김일성 부자(父子) 세습에 전 인민이 굶어죽는 황제가 다스리는 엉터리 국가더란 말이야. 그래서 그분의 생각이 백팔십도 돌아섰지.

일본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도 그래. 처음에는 제국주의가 우리를 착취한 것으로 인식했는데 경제적으로 전혀 다른 기능을 한 걸 본 거야. 그래서 그걸 과감히 발표한 거지.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하고 학계에서 파문을 당할 정도였지. 그렇지만 안병직 교수는 천만 명이 달려들어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후퇴하지 않는 성격이야. 가만히만 있으면 서울대 교수부터 시작해서 많은 걸 잃지 않았을 텐데… 그것도 성격이지. 사람들마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잖아? 국민정서상 안병직 교수의 주장은 100년쯤 후에는 인정이 될 거라고 해. 그렇지만 지금 그런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 굳이 말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거야? 친일문제는 국민정서가 한쪽으로 쏠려 있고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인생이 망가질 수 있어. 그러니 조심해야 돼.”

“그럼 사회주의 정권인 지금의 중국은 어때?”
그는 국제 노신학회 회장으로 중국의 각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하버드까지 가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국민의 1% 정도에도 못 미치는 공산당원이 귀족이고 나머지 99%는 노예인 나라라고 나는 생각해. 북경 인민대회의 최고위원들은 각자 중국을 나누어 통치하는 황제야. 수천  억씩 재산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서민들은 우리 돈으로 한 달에 이삼십만 원 선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어. 내가 30년 동안 노신의 아큐정전(阿Q正傳)을 강의하는데 전부 아큐(阿Q)들이야. 덤빌 줄을 몰라.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잘 덤비잖아? 친일파를 척결하자고 하고 대통령 가족까지 구속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잖아? 우리는 산업화와 동시에 민주화가 정말 잘 어우러진 나라야.”

안병직 교수 같은 강직한 인물도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개인의 입장과 변론을 하는 직업적 입장이 분열되어 있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세뇌되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비판 없이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행은 모두 일본 탓이라고 느꼈다. 민족 정통성을 확인하고 사회정의를 규명하자는 위원회의 명분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익명의 군중 속 한 사람으로서 돌 하나를 집어서 친일파라고 지명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로서의 직업적 입장은 다르다. 살인범이라도 그와 동행하면서 그의 입장이 되어 주어야 했다. 나의 내부에 모순이 작용하고 있었다. 친일(親日)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미워하고 독립투쟁을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도록 키워져 왔다. 그래서 변호도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환경이 어쩔 수 없었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위원회와 재판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그들의 용서와 동정을 구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그 태도가 맞는 것일까.

소송을 진행하면서 항상 머릿속에 남은 것은 해방 전 5년이 되는 일제 말 우리 민족은 거의 전체가 ‘극도의 타락’을 했다는 말이었다. 극도의 타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전민족의 영혼이 일본화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대만이나 오키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하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건 아니었을까. 

해방 8년 후에 태어난 나는 아직 일본 냄새가 짙게 남아있는 사회 속에서 자라났다. 1926년에 태어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내면은 어쩌면 일본 국적의 일본인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일본 교육을 받고 일본말과 글을 모국어같이 사용하면서 이십대까지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식 목조(木造) 가옥 3조 다다미방에서 컸다. 내게 벽장은 ‘오시레’였다. 어린 시절 집안이나 동네에서 놀 때 일본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위바위보 대신 ‘짱겜뽕’이라고 했다. 달리기를 할 때면 선생님들조차 ‘요이 땅’이라고 하면서 출발시켰고 통조림 대신 ‘간쓰메’가 우리말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문제집은 일본 자료들의 번역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은밀히 말할 때 일본어를 사용했다. 그게 더 편하다고 했다. 연애편지도 일본어로 쓰던 분들이었다. 일제시대를 바닥 층에서 가난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친일(親日)의 혐의를 두는 사람은 없었다. 만주 유랑농민 출신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마적떼와 빨치산들이 밤에 찾아와 약탈해 가는 게 싫었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일본인은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교에 가면 일본인 아이들은 벤또에 하얀 쌀밥과 계란부침을 싸 오는데 그게 부러웠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성실하고 반듯하던 일본인 선생들을 존경했다.

1926년 출생한 장모도 아버지 어머니와 동갑이다. 경북고녀를 다니던 장모는 진해의 일본 비행기 조립공장에 정신대로 가서 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여학생 중 가장 머리 좋고 우수한 자원들은 사무직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 다음 레벨로 분류된 장모는 비행기 부품들이 종류별로 가득한 자재창고에서 그 미세한 부품들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일을 했었다고 했다. 그 안에서 또 다른 여성들은 비행기 날개를 만들었다고 했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분명 한 달 급료를 받았다고 했다.
고녀(高女)에 다니던 장모는 아버지와 경성으로 올라와 미국 포드사에서 만든 택시를 타고 반도호텔에 묵었던 얘기를 하곤 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어른들은 그들이 몸에 익힌 일본문화와 음식들을 즐기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체했다. 대학 입학 때 법대 학장이 자랑하던 그의 과거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학장은 일제시대 동경에 가서 고시에 합격한 걸 영웅담같이 얘기했다. 또 다른 교수는 일제시대 군수가 되어 말을 타고 마을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길가에 전부 무릎 꿇고 엎드려 맞이하더라는 얘기도 들었다.

우연히 작가 조정래의 역사 대하소설 ‘아리랑’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조선시대 아전들의 변신이었다. 그들의 꿈은 군수였다. 그 밑에서 그 자리가 좋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자신들은 거기까지 가기가 불가능한 신분이었다. 일제시대는 그들의 한이었던 군수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재빨리 일본어를 읽히게 하고 공무원시험을 보게 했다. 조선 말 천대받던 상놈들이 헌병이나 순사가 됐다. 완장의 위력은 양반들을 무릎 꿇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신분해방의 시대였다.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장사꾼들이 사업가로 변신해 대접받는 사회가 됐다. 그런 모든 것이 덮어지고 미움의 종주먹질만 해야 하는 이 사회는 표면과 수면 아래가 전혀 다른 위선과 착각의 사회일 수 있었다.


(계속)

[ 2018-06-30, 09: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