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간 논쟁(1)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8-1) “왜 사회주의자를 변론했다고 제외시키죠?”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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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
선후배간 논쟁(1)
   

위원들 가운데 박연철 변호사가 있었다. 재야의 온화한 지도자 역할을 해 온 사람이었다. 광주서중을 나온 그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 시위군중을 따라 갔다가 광주시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본 것들을 ‘시민의 날들’이라는 제목의 글로 남겨 광주5·18기록관에 기증했다. 그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어 재야 인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회원으로 30년간 활동하면서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쓰고 있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고 사법연수원 시절을 함께 했다. 짙고 검은 눈썹에 조용한 성격을 가진 그는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의 활동은 깊은 뿌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도 그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흥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번은 운동권 출신 여당 대표가 그를 보자 선배라고 깍듯이 호칭하면서 까무러칠 듯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법조인끼리의 등산모임이 끝난 후 청계산 자락의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물을 내려다보며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엄 변호사는 말이야. 능력도 있고 자질도 있고 한데 한 가지가 딱 빠졌어.”
그 뒤는 말을 아꼈다. 의미하는 게 뭔지 막연하게 느껴졌다. 나의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이 약하다는 의미 같았다. 그의 화두는 ‘민족자주독립정신’이었다. 대법원의 추천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위원회의 핵심위원이 됐었다. 나는 친일로 통보된 사람들의 변호인이 되어 그와 마주하게 됐다. 그는 위원들 사이에 영향력이 강하다는 평가였다. 소송에서도 그가 뒤에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며 지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공식적으로 그가 나의 면회를 거절할 사유는 없어졌다. 우리는 다시 자연인으로 그리고 동종의 변호사 신분으로 돌아갔다.

오후 2시의 하얀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날 나는 서울 교대역 부근의 빌딩 7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어서 오시오.”
개량한복을 입은 박 선배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길게 자란 백발이 목까지 내려왔고 눈썹에도 흰털 몇 올이 나 있었다. 
“형님, 아니 언제 이렇게 머리에 서리가 내렸죠?”
내가 물었다.
“좀 아팠더니 이제 노인이 됐어.”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해 보였다.

“이제 다 끝난 일이지만 허심탄회하게 논쟁을 하러 왔어요.”
“뭐를?”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죠. 그동안 변호사로서 직업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공격했지만 이제 마음을 열고 뒤풀이를 해 보고 싶습니다. 선입견 없이 위원회에 흐르는 사상이나 형님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시다면 뭐 좋죠. 나도 위원이 되기 전에는 일제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경제·사회·문화 같은 광범위한 분야나 인물에 대한 정통한 자료에 접한 적이 거의 없어서 위원 중 사학교수님들과 전문연구원들에게 물어가면서 일을 처리했어. 잠깐만.”

그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 쌓여있는 자료 쪽으로 시선을 돌려 뭔가 찾고 있었다. 위원회에 있을 때의 자료들인 것 같았다. 그가 프린트된 서류철 한 권을 꺼내와 앞에 놓았다. 여직원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 탁자 위에 놓고 조용히 나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 이건 나의 입장과 소견에 대한 논고를 작성해서 위원회에 제출한 논고문이야. 애산학보에도 게재했어. 이번의 친일반민족행위 판정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서 다시 이러지 말자는 교훈을 남기기 위한 거지. 1949년도 같이 위원회가 생존자를 형사 처벌하기 위한 건 아니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한일합방 무렵부터 우리 민족을 가지고 논 일본의 고도의 통치기술을 보고 혀를 둘렀어. 한번 얘기 들어 볼래? 나도 모르고 있었던 게 많아.”

“그게 어떤 거였는데요?”
“구한말 의병토벌 당시부터 조선인 출신 밀정을 조직적으로 대량으로 키웠지. 밀정들이 정찰대까지 조직해서 의병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의병을 진압하게 했지. 경찰권이 넘어간 때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인 순사들을 임명해 움직이게 했어. 최동섭이란 인물은 경찰 계급인 경부로 있으면서 신돌석 부대의 의병을 신문하고 투항을 종용했었지. 김광현이라는 인물은 순사로 있으면서 의병장 김현봉을 체포했어. 일본인들은 합병 전에 자기네를 지지하는 조선인 단체를 만들어 합병과 일본의 통치를 지지하게 했지. 일진회는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할 것을 주장했지. 합병에 가까워서는 대국민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순종황제에게 합병을 하자는 상소를 했지. 그러자 그 의견을 따르는 여러 단체가 지지여론에 합류한 거야.”

일본당국자 자신도 합방 때 국내에서 반대여론이 크지 않은 걸 보고 놀랐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가 설명을 계속했다.
“합방 이후 일진회(一進會)는 의병의 진압을 강구하라는 선언서를 작성해서 발표했지. 의병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고종황제의 퇴위를 지지하고 이완용 내각을 옹호하는 내용이었어. 일진회는 자위단을 만들어 의병을 수색하고 경계하는 활동을 했지. 합병 후에도 여러 친일 조선인 단체가 생겼어.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주장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했지.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같은 단체는 단군과 일본의 시조신이 형제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일본의 신궁제도를 그대로 도입하자고 했어. 조선인 전직관료나 귀족 대지주 실업가들은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를 만들어 일본 통치의 현실을 지지했지. 동시에 지능적인 대규모 회유책이 있었어. 일본은 명치유신을 하고 귀족제도를 만들어 독립성이 많았던 지방의 봉건 영주들을 귀족에 편입시켰지. 귀족제도가 어떻게 좋았는지 반발이 없었어.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황실과 대신을 귀족으로 만들어 체제내로 끌어안은 거야. 그들에게 토지, 임야의 불하에 특권을 주고 자제교육을 위해 별도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작위가 세습하도록 해 주었지. 조직적으로 구한말 기득권층을 그대로 보호해 줬더구만.

구한말의 관리도 그대로 등용하는 정책을 수행했지. 조선인 관료출신들의 항일행위를 방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친일관료를 양성하는 거였지. 일제 초기 조선인 고위 관료들은 이전의 관직에 해당하는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적 신분을 보장받은 경우가 많아. 일제는 민중을 직접 접촉하는 도지사, 군수에는 조선인을 기용했지. 군수는 거의 다 조선인이었어. 일제는 조선에 민의를 반영하는 것처럼 꾸밀 필요가 있었어. 중추원을 만들어 대한제국 말기의 고위관료들을 임명했지. 그뿐 아니야.

일제는 조선사회의 엘리트였던 유림(儒林)을 회유했어. 성균관 대신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해서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유교의 충효의 이념을 유지시켰지. 일본 학자들이 경학원에 와서 강연을 하면서 조선왕실이 일본천황을 모시는 것과 조선이 중국황제를 이중군주로 모시던 것의 차이가 없다는 강연을 하기도 했어. 중국보다 과학과 경제가 발전한 일본 쪽과 친한 게 현실적 이익이 많다는 논리였지.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유림들이 스스로 일본 국왕을 칭송하는 시문을 지어 바치기도 했지. 일제당국은 양반들의 지위도 보전해 줬어. 더 파격적인 건 일찍 일본에 주소를 둔 조선인에게는 특별한 법적지위도 보장해 줬지. 1925년 이후에는 참정권을 줬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 일본의 관료나 지방관료로 활동할 수 있었어. 박춘금(朴春琴)이란 인물은 1932년 일본 중의원선거에서 당선 되서 일본의회 의원이 되고 이어서 1937년 총선거에 당선되어 9년간 의원을 했지. 그는 일본 의회에서 조선의 참정권운동, 징병제 실시를 주장했어.”

한일 합방 후 3·1운동까지 사회가 조용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들었다. 그의 유연한 설명은 계속됐다.

“일제(日帝)는 하층계급도 회유했지. 먼저 조선에서 승려들은 그동안 천민으로 취급되어 도성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었지. 일제는 승려들의 그런 제한들을 다 풀어버리고 오히려 대접했어. 조선불교의 지도자들은 갑자기 시대적 억압과 천대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신분으로 상승한 거야. 일본의 불교가 왕성한 면이 있잖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불교를 단일조직으로 만들어 힘을 몰아주었지. 조선불교 조계종이 건설되고 종정의 유시가 전국 사찰에 가도록 했지. 그 대가로 많은 사찰은 출전군인의 무운장구를 비는 법회를 열기도 하고 일본불교와의 연합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어. 조선에서 천시 받던 백정이나 기생들도 단체들을 만들게 해서 지원해 줬어. 백정이 공무원, 특히 경찰이나 헌병이 된 경우도 많지.”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게 저항을 막는 고도의 통치 같았다.
“모든 재산을 팔아 만주로 옮겨가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신흥무관학교도 세우고 말이죠. 그런 독립투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일제는 합방 후 조선인 밀정을 더 많이 키웠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일본 외무성에서도 외곽단체와 밀정을 많이 길렀어. 밀정들은 독립운동 진영에 대한 정보수집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체포, 재만(在滿) 조선인 사회의 동향파악을 담당했지. 간도의 경우 조선인 인구비율이 80%에 달할 정도로 조선인이 많았어. 총독부는 이 지역에 처음에는 조선인 경찰을 배치해서 항일운동을 막았지. 간도파출소에서는 일본을 배척하는 조선인을 체포하기 위해 감찰과와 경무과의 직원을 조선인으로 배치했어.

선우갑이란 인물은 조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 경시청 소속 고등계 형사로 근무하면서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당시 그들의 검거를 주도했어. 그리고 중국 상해와 미주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을 정탐해서 보고하는 활동을 했지.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대구를 시작으로 그 진압을 위한 조선인 단체들이 만들어졌어. 자제단이 그건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자 그걸 탄압하기 위해 군 면 단위로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방해했지. 김기억은 순사보로 재직하면서 3·1운동 관련자를 체포했지.

1919년 이후에 만주는 일본 외무성 소속 경찰이 활동하게 되지. 조선인 경찰은 일본 외무성에 소속되면서 조선인 거주지역의 정보활동을 하고 독립운동세력을 체포하는 일을 했지. 일본인 출신은 조선인 지역에서 눈에 띄니까 조선인 출신 경찰이 활동을 한 거야. 또 조선인 경찰 출신을 만주의 각 현에 책임자로 두고 무장조직을 만들어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게 했지. 조선인 경찰을 통해 조선인을 통제한 거지. 경찰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그 다음으로는 친일반민족적인 단체를 만들어 조선인들을 통제했어. 화북(華北) 지역의 협려회 화중(華中)과 화남(華南)지역의 계림회는 일제에 협조하는 조선인 단체였지.

배정자는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밀정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동경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의 동향을 일본 총리대신, 외무대신,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여자로 이토 히로부미와도 관계가 깊은 밀정의 거물이었지. 박용환이란 인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항일독립세력의 활동과 한인들의 동정을 보고하는 밀정 노릇을 했지. 선우순이란 인물은 대동동지회 회장을 하면서 사이토 총독에게 여러 가지 정탐보고뿐 아니라 12년간 중추원 참의를 했었지. 이희간이란 인물은 조선총독부의 밀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와해공작과 독립지사 회유공작을 하고 그 대가로 공작금과 사업이권을 받은 사람이지.”

“어떻게 그런 비밀공작을 알았지요?”
“일제의 공문서나 훈포상 기록에서 밀정의 정확한 신분과 행위를 알 수 있었어. 각종 경찰관계 문서나 회고록 일기에도 그런 사실이 있더구만. 남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체에 부끄러운 사람이 많아. 그래서 이 기회에 그 진상을 규명해 두자는 거지.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말이야.”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했죠?”

“귀족이 되거나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건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 행위로 봤지. 그 다음은 헌병, 경찰, 군인, 관료 등 여러 분야가 되겠지. 친일반민족 행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부적으로 21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 분야별로 심층적으로 분석했지. 일제강점기 전 분야에 걸쳐 체계적으로 했어. 범주로 나누면 구한말 매국행위, 항일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탄압한 행위, 일제 통치기구에 참여한 행위, 경제나 문화침탈에 협력한 행위, 대륙침략에 협력한 행위로 나눌 수 있겠지. 이번에는 좀 더 소급해서 구한 말 의병운동이 벌어질 때 의병 탄압하는 데 관여한 사람들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했어. 자체 인력으로 부족한 경우 전문연구가의 도움을 받았지. 위원회는 나름대로 치밀한 자료조사와 검증 그리고 엄격한 심의과정을 통해 1007명의 친일반민족 행위의 사실을 확정했어.”

“일제하에서 헌병이나 경찰, 군인, 관료, 검판사가 그 체제에 협조하는 첨병으로 봤겠군요.”
“당연히 그렇지. 조선인 헌병의 경우는 1908년 조선인 헌병 보조원 제도가 생긴 후 연평균 4500명 정도가 채용됐었지. 그 사람들은 의병투쟁과 3·1운동 당시 시위 군중을 직접 탄압했지. 친일파의 전형이야. 그런데 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아. 위원회는 자료가 없으면 친일반민족 행위로 지정하지 못했어. 아쉬운 점이었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는 1910년 합병 때 무관학교가 없어지니까 자진해서 일본으로 가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된 사람이 있더구만. 또 일본에 유학한 초기 유학생 중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서 장교가 된 경우도 있고 조선의 왕족이 일본 황실의 관례에 따라 일본의 무관이 된 경우도 있고 말이야.

그렇지만 일제는 1927년까지 조선인의 육사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어. 조선인으로서 육사에 입학해서 졸업한 경우는 1933년 이후에 나타났지.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의 경우 전쟁 참여는 명령에 의한 것이며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하더라구. 받아들이지 않았지. 판검사의 경우 구한말 의병운동 재판에 법관으로 참여한 인물들, 3·1운동 관련 재판에 참여한 판사들,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사건을 심리하거나 신간회 사건 같은 민족운동에 관련된 재판을 한 판검사들이 친일반민족 행위를 한 거지. 그렇게 사법분야에서 32명에 대해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했어. 단순히 판검사를 지낸 것만으로 친일행위자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이의신청이 들어왔는데 그런 주장도 수용하지 않았지.

일제의 통치기구에 편입된 경우는 구조적, 조직적, 계속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에 가담할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는 거로 위원회가 봤지. 판사가 그런 거야. 판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도구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지배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할 경우 일본정부를 대신해서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대열에 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 누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재판을 했는지는 우연한 사정에 불과한 거겠지. 그 행적이 지금 뚜렷하지 않아도 숨은 반민족 행위가 분명히 존재할 거야. 행정관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가 관직생활을 하는 것은 시대적 특수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만으로는 친일파로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어.

또 관료생활을 했더라도 적극적 친일행위를 한 건 없고 오히려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건국 과정에 많은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학력자로서의 관직생활을 시대적 특수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출세하고 싶은 야망일 수 있겠지. 단순한 공무원으로서의 행동도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했다고 본 거야. 물론 그 후 그 분들이 건국과정이나 대한민국 발전에 공이 있었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위원회가 하는 건 역사적 진상규명이니까 그 일부의 행위 자체만 본 거지. 해방 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서 처벌됐는데 왜 또 하느냐고 이의한 경우도 있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라는 거지. 우리는 그냥 진상규명일 뿐이니까 그 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어. 조사대상자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지나사변공적조서 같은 포상을 받은 사람들을 주로 대상으로 했지.”

“그 외에도 강한 반발이 있었을 텐데요?”
“중추원 참의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거나 지역사회에서 명망에 의해 부득이했다거나 중추원 참의로서 구체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서 이의제기를 한 경우도 있어. 그래서 제외시킨 경우도 적지 않아. 일제 때 한동리 변호사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에 관련된 인물의 공판에서 변호인으로 활동한 점을 고려해서 중추원 참의라도 친일반민족행위 대상에서 제외시켰지. 장도라는 이름의 변호사도 충추원 참의로 임명이 됐는데 105인 사건을 변호하고 사회주의자들의 공판에 변호인으로 참여한 사실을 고려해서 친일반민족 행위자에서 제외시켰지. 그 외 기간이 아주 짧은 경우도 제외시킨 경우가 있지.”

“왜 사회주의자를 변론했다고 제외시키죠?”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거든.” 

(계속)

[ 2018-07-01, 08: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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