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배간 논쟁(2)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48-2) “역사적 지식이 없는 판사들이 그냥 위원회의 흐름대로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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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선후배간 논쟁(2)   

각 분야별로 어떻게 친일이 결정됐는지 알아보고 싶어 물었다.
“경제 분야는 어땠어요?”
“예를 들면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사장과 주주, 국방헌금을 내고 포상을 받은 경우, 경제정책 수립을 위해 구성된 산업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경우, 동양척식회사나 식산은행 같은 국책회사에 근무한 경우가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지. 그 사람들이 강연이나 글을 쓴 경우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로 봤지. 엄 변호사가 맡았던 김연수(金秊洙) 회장이 그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평가였지. 그분은 1941년 5월 칙임관대우를 받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됐지. 대기업 회장으로 거액의 국방비, 군위문금, 임전보국단 사업비를 지원하고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 이사로 참여했지.”

“그 배경에 하나하나 불가피한 사연을 써서 제출했었는데?”
“엄 변호사가 김씨가에 대해 주장한 글도 봤었어. 시대적 상황에서 사업가로서 불가피한 면이 있더구만.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는 김연수의 형인 김성수는 작위까지 거절했는데 기업가인 동생은 일제당국이 주는 벼슬을 다 받았더구만. 이상해. 그리고 일제시대 재벌 회장의 위치에 있으면 패망의 정보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위치였는데도 왜 그랬는지 몰라. 고창 김씨가뿐만 아니라 경주 최부자집도 형은 민족주의자인데 동생은 아니야. 참 희한한 현상이야. 김씨가의 형인 김성수는 많은 실적이 있는데 일제 말 친일의 글을 쓴 것 때문에 문제가 됐지.

이봐, 엄 변호사 당신이 말하는 어쩔 수 없다는 시대적 상황론도 있지만 그 시대를 유리알 같이 깨끗이 사시다가 간 분들도 있어. 그걸 알아야 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어도 관직을 거절한 분도 있고 또 글을 써달라고 부탁해도 완강히 거부하기도 했지. 그런 분들과 시대적 논리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을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위원회는 김연수 회장이 기업인으로서 특출한 자질과 역량을 가졌지만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회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제와 서로를 활용하는 상관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본 거지. 무엇보다도 그 시절 일본 회사도 얻기 힘든 금융권의 대규모 자본대출과 특혜적인 건설자재의 배급 같은 일제의 적극적인 지원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일제시대 그렇게 지조를 지킨 사람이 누가 있는데요?”
“송진우(宋鎭禹)나 백관수(白寬洙) 조병옥(趙炳玉) 같은 분들은 전시 총동원기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지.”

“사업가에게 그분들처럼 충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곤란한 게 아닐까요? 저는 좀 더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입장에 대한 인식을 위원회에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집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친일행위지만 1930년대 전시(戰時)에 일본 경축일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하는 걸 우리는 비난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의 논문들을 많이 읽었어요. 역사학계는 일제 말기의 상황을 위원회와는 전혀 다르게 보고 있고 그게 정설이던데 말입니다. 일제 말기에 조선인 지도자들이 일제의 협력 요구를 거절할 자유가 정말 있었을까? 당시의 실상을 무시하고 위원회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들이댄 건 아니었던가요?
저는 김연수 회장만한 민족기업인이자 경제 분야의 독립운동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과 문화에도 엄청난 돈을 기부했고 말이죠. 민족에 현실적으로 그만한 도움을 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회사의 이익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제에 대한 협력이 크지 않았을까 라고 위원회는 의문을 품었어. 그가 지원한 만주의 동광학원도 엄 변호사는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한 거라고 썼지만 원래는 친일단체인 재만흥아협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친일교육기관이라고 하더구만. 거기에 돈을 내고 학교를 부설했다고 해도 전적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어.”

“김연수 회장이 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사람은 틀림없어요. 일제시대 해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간 돈도, 해방 후 김구(金九) 선생에게 간 돈도 다 출처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동아일보를 세우고 고려대를 만든 사람 아닙니까? 이런 점이 깊이 확인되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게 아니잖아? 만약 그런 증거가 현출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독립운동을 했다는 데는 여러 얘기들이 있었어. 일제시대 고등과 사찰계주임으로 항일 운동가를 탄압한 사람이 있어. 그 후손이 지금 교육계에서 활동하고 있지. 후손들은 할아버지가 경찰 고등과 사찰계 주임이었지만 애국지사를 보호하고 주요 애국인사가 결성한 비밀단체에 가입했다는 거야.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믿어지지도 않았어. 후손이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선대에 이어 후대까지 위선 속에 살고 있는 거지. 더군다나 그 후손이 교육계의 유력인사로 활동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런 행동이야말로 우리가 청산해야 할 비겁한 태도들인 것 같아.

실제로 반민족 행위자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이 모두 전인격적으로 일관되게 민족을 배반한 건 아니야. 양면성이 있지. 그들의 행동의 중심이 민족진영에 있는데도 일제와의 접촉국면에서 허물어진 부분이 있어. 해방 후 그 사람들은 그런 허물어졌던 부분을 슬쩍 감췄고 사회적으로도 슬그머니 넘어가줘 버린 거야. 그들의 애국적 활동만 부각되고 이율배반적이고 동요하던 심성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거야. 애국자로 알려진 그들의 숨긴 친일행위를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그 기억만은 없애지 못하지. 그게 떠오를 때 사람들이 겪는 배신감은 증폭되는 거야. 그들의 애국심이 허상에 불과할 수 있으니까. 민족자존의 정체성은 왜소한 게 되어 버리지. 그런 기만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적나라한 조명이 필요한 거야. 아무리 독립운동을 해도 친일반민족 행위 그 자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거잖아?”

“김연수의 경우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잖아요?”
“위원회에서 그건 형사 재판이고 그 기록들은 지인들의 말이라 증거로서의 신빙성이 없다고 봤지. 또 당시 친일파의 득세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건 반민법 폐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과대평가해서 특별재판소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생각이 여러 방면에서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위원회의 전반적인 평가 기준을 알고 싶어 다른 분야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체제를 지원하는 다른 분야는 언론이나 문학방향 같아 물었다.

“언론분야는 어땠어요?”
“자발적인 친일행위를 한 경우가 많더구만. 친일성향 신문 잡지의 핵심간부가 친일반민족 행위지. 언론매체에 다수의 글을 기고한 언론인도 포함되고. 매일신보의 편집인이었던 이상협(李相協)이나 주필이었던 서춘(徐椿) 등이 그 대표지. 조선일보를 만든 방응모(方應謨) 씨도 잡지 ‘조광(朝光)’의 발행인이었고 장지연(張志淵) 같은 사람도 매일신보에 다수의 친일 글을 발표했지.”

“이상협이나 서춘은 그 삶을 보면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그들은 우리 민족지인 동아일보를 만들고 그 신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영웅이었던 사람 아닌가?”
“위원회에서 논란이 있었어. 그렇지만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고 매일 발행됐다는 점에서 편집 및 발행인의 직무를 수행한 것만으로도 친일반민족 행위로 보기로 했지. 잡지 ‘조광’을 발행한 방응모에 대해서 일부 이견이 있었어. 일제치하에서 조선일보사를 경영하면서 민족의 계몽에 힘쓴 점을 고려하면 친일 논설 몇 개와 방송 강연을 가지고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거지. 그렇지만 1940년 이후의 조광의 지면 내용을 보면 일제에 협력이 너무 컸다는 점 때문에 대상자로 선정됐어. 지난번에 조선일보 측에서 이의신청에서 주장한 논리를 보면 기묘한 내용이더구만. 글을 그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

“문학 분야는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구한말 애국 계몽적 문예활동은 한일합병을 전후로 자취를 감추었지. 친일적인 신(新)소설류의 문학이 들어오기 시작했지. 점차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같은 서구문예사조가 일본을 통해 대량 유입됐지. 식민지 자본주의 시대라 그런지 계급적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문단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게 됐지. 좌익적 관점에 선 프로문학은 조선프롤레탈리아예술가동맹을 결성하면서 계급과 민족을 아우르는 운동역량을 발휘해 갔지. 1930년대에 들어 카프소속 문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민족운동으로서의 역량은 발휘하기 힘들었지. 현실비판적인 작품은 발을 못 붙이게 된 거야.

그 후에 순수문학이나 주지주의(主知主義) 모더니즘 같은 여러 사조가 전개됐는데 문학적 기교가 성숙되고 새로운 기법이 등장했지. 그런 경향은 일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상황에 부응한 면이 있지. 중일전쟁(中日戰爭)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체제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 친일문학이 필요하게 됐어. 1939년에 온 문단이 동원된 행사가 마련되는데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 사절단’ 파견행사였어. 김동인 등 문단대표가 급행열차로 한 달 동안 북지전선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돌아왔지. 그 행위로 조선 문단은 조선의 황민화와 전쟁동원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공공연히 선언하게 된 셈이지.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외곽단체로서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을 이끌었지. 문인들이 집필행위나 강연으로 대동아공영권이나 전쟁을 찬양하게 했어. 그때 동원된 사람들이 김동인, 노천명, 백철, 유진오, 서정주, 이광수, 정비석, 주요한, 채만식 같은 사람들이지.”

“내가 변호한 김동인은 그런 외형적인 것과는 다른 것 같던데?”
그는 이미 나나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 박사가 제출한 이의신청 사유는 다 봤을 것이 틀림없었다.
“김동인의 경우 상황논리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을 위원회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봤지. 그리고 북지황군 위문에서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걸 사유로 했었잖아? 그런데 그 이유는 질병 때문이었고 김동인의 역사소설은 민족의식과 관계가 없다는 게 객관적인 평이었어. 김동인이 천황모독죄로 구속된 것도 그 아들의 주장과 실제가 달랐고 석방된 이후에 친일행적이 다대(多大)하다고 위원회는 봤지.”

또 다른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장지연(張志淵) 같은 분은 어떻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됐죠? 을사늑약 당시 그걸 통탄하는 논설을 써서 고교 시절 우리의 심금을 울린 애국지사 아닌가? 또 아관파천(俄館播遷)시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를 쓴 사람이기도 하고. 장지연은 그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활동도 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고양시키는 논설을 쓰기도 했죠. 한일합방 후에도 경남일보의 주필로서 저항의 글들을 쓴 걸로 아는데 그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장지연은 말이야 그 후에 일제에 대항하는 투지를 잃어버렸어. 그리고 일제의 새로운 정치를 수용하고 찬양하는 기색을 보였지. 예를 들면 1915년 쓴 글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물산공진회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게 있지. 또 1918년 1월1일 쓴 글 중에서 여러 사업들이 활발히 일어나니 다투어 자본 투자함은 예전에 없던 일이다. 신청하는 게 많아 사회를 새롭게 하니 그 이름 기록하기도 어렵네, 라고 쓴 문장이 있어. 장지연은 1919년 3월21일과 26일 마산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걸 듣고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지. 장지연은 말년에 술에 빠져 살다가 병을 얻어 1921년 10월2일 쓸쓸하게 사망했어.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주장과 그 내용이 적극성은 없다는 의견이 갈리다가 친일반민족 행위가 아니라는 쪽으로 판단을 하기도 했어.”

“이광수(李光洙)는 어떻게 생각해요?”
“최남선(崔南善)이나 이광수 같은 사람은 일제의 군대기술을 배워 건국하면 한국군 창설에 도움이 됐을 거라는 이론이야. 그 사람들이 과연 일본의 패전을 예측했을까? 당시로서는 못 했을 거야. 그렇다면 결과를 가지고 만들어 낸 가짜 이유가 되는 거지. 궁색한 변명이라고 봤지. 민족혼을 떠난 이광수의 현란하고 교묘한 필봉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지워질 수 없는 좌절과 상흔을 남긴 거지. 병력동원을 위해 방자하기까지 한 필봉을 휘둘렀지.”

“종교 분야는 어땠어요?”
“일제는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고 다른 종교를 하위에 두고 통제하고 탄압하는 시스템이었지. 종교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는 것은 중요한 정책이었어. 신사참배가 강요되면서 장로교나 감리교의 경우 신사참배 결의를 주도하거나 신사참배를 공인하는 입장으로 나갔지. 종교보국(宗敎報國)’이라는 입장에서 교리를 변경하고 조직을 개편한 거야. 구세군의 경우 지원병 모집을 교단 차원에서 주도한 것도 있지. 천주교의 물질적 정신적 협력도 있었고. 종교 지도층 인사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에 참여하는 건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중대한 피해를 입힌 행위라고 위원회는 봤지. 교파의 핵심간부는 개인적 차원에서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어. 기고나 강연으로 교단을 변질시킨 종교단체의 간부들을 위원회는 일제 협력자로 봤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들어가야만 친일의 딱지를 벗어날 수 있나? 교회 존립을 위해서 했는데도?”
“노기남(盧基南) 주교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희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위원회는 천주교의 수장으로 교회를 변질시키고 일제의 침략에 협력했다고 봤지. 종교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해? 현실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순교의 피를 먹으면서 신앙은 자라가는 게 아닐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초 천주학쟁이들이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일제시대 때 이 나라 교회가 세워진 거 아닐까?” 

“사회단체나 학술분야의 친일협력은 어떻게 다뤘죠?”
“일제 말 전시체제에서 다수의 조선인 지식인이 조선과 일본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기고를 하거나 저작물을 만든 경우가 있었지. 또 강연 형태로 이데올로기적 언술을 생산 유포하는 활동도 있었고. 한국과 일본의 동화주의를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어. 그들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본 거지. 사실 구한말부터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계몽운동가 출신인 정운복은 일본과의 합병에 의한 근대화를 구한말부터 주장했고 합병이 된 이후 경성일보의 주필을 맡아 일본과 조선의 융화논리를 펼쳤던 인물이지.

총독부의 주요 외곽단체도 친일반민족 행위의 대상에 포함시켰어. 조선연극협회, 조선 술가협회, 조선음악협회같은 거지. 통치기구의 의도에 따라 활동한 면이 있으니까. 식민사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도 포함시켰어. 조선사편수회에 위원으로 참가한 사람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어. 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가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수립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 그 위원이었던 최남선 등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결정했지.
그 외 일본어 상용하고 조선어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경우나 사찰 주지로 사찰 건물과 불상을 일본인에게 팔아먹은 사람도 문화유산을 반출한 경우로 보아 친일반민족 행위로 했지.”
“조선사편수회는 학술기관이 아니었나요?”
“위원회는 학술기관이라고 보기보다는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궁극적으로 민족문화의 파괴 말살을 지향한다고 보았지.”

“연극 영화분야는 어땠어요?”
“연극과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분야로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라는 점에서 영향력이 큰 매체라고 봤지. 당시는 문맹률이 높았고 연극과 영화는 대중에게 친숙한 공연예술이라는 점에서 연극분야는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어. 파급효과나 선전효과가 컸기 때문이지. 당시 벌써 유학파영화감독이 나타나고 있었어. 일제 외곽단체인 조선영화인 협회의 간부, 극작, 연출, 평론, 제작, 연기, 강연을 통해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지. 그런데 배우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어. 연극과 영화는 한 편을 제작하는데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동원되는데 그 책임의 소재를 어느 분야까지 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논의됐지. 배우의 경우는 단순한 전문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어. 또 조사대상자로 어떤 기준으로 선정할 것인가 모호하다는 이의제기도 있었지. 그에 반해서 배우가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에서 당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남녀 배우 한 명씩 선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게 설득력을 얻어 두 인물이 대상자가 됐지.”

“음악이나 무용 야담을 해도 친일반민족 행위자가 된 사람이 있던데?”
“일제시대 음악의 경우는 서양의 클래식이 유입되고 대중음악이 근대문화로 형성되던 시기지. 무용의 경우도 신무용이라는 장르가 최승희를 통해 자리 잡게 되고 말이야. 야담은 야사를 바탕으로 재담을 하는 장르고. 대중예술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이나 파급력을 고려해서 엄정한 잣대로 판단하자는 의견이 있었어. 일제의 정책에 협력한 경우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결정했지. 학병 지원장의 음악을 작곡·작사·노래·연주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지. 축하공연을 했거나 징병제도를 선전한 야담가도 그 대상이 됐지.

이의신청도 있었어. 순수한 작곡은 가사를 가지고 하는 이차적인 행위인데 그게 어떻게 친일일 수 있느냐는 거였지. 위원회는 내용이 되는 작사와 형식이 되는 작곡 그리고 대중들에게 인지되는 가수가 각각 유기적으로 총합되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등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봤어. 대중 가수 중 노골적인 군국가요를 부른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로 위원회는 결정했지. 다만 실내악단은 순수음악단체인데 그걸 어떻게 친일단체로 보느냐는 거였지. 그런 경우는 친일반민족 행위에서 제외시켜 주기도 했어.”

“미술 분야는 어땠어요?”
“총독부 당국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지원하면서 외곽단체로 만들었지. 그리고 전쟁을 선전하는 전람회를 개최하게 했어. 체제선전의 대규모 전람회를 연 거지. 고급미술에 대해서는 감동을 느끼게 하고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이미지 반복효과를 통해 정책을 전달할 수 있는 선전기능을 하도록 한 거지. 조선미술가협회의 간부가 친일반민족행위의 대상으로 올랐지. 구체적으로 김은호화백은 금비녀를 헌납하는 그림을 그리고 이상범의 전쟁터에 자식을 보낸 어머니의 무사기원을 그린 그림, 김기창은 해군 지원병을 잡지의 표지화로 그렸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친일반민족 행위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림 자체가 표현하고 있는 대상 내지 주제와 정책의 도구로서 미술의 성격 작품의 제작배경과 용도 영향력에 주목해서 결정을 했지. 김은호 화백의 경우 작품수가 적은데 친일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가 그린 그림의 상징성을 중시해서 친일반민족 행위로 위원회가 결정을 했지.”

“교육 분야는 어땠어요?”
“일제시대 관공립 학교장은 조선총독부 고등관료급이야. 그 사람들 중에 훈·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대상이었지. 그리고 교육자로 각종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강연을 한 사람들도 포함시켰어. 민족을 교육하는 지도층 인물들은 일제의 전쟁 협력에 책임이 있다고 위원회는 봤어.”
“전시체제에 협력행위는 학교장의 입장에서 학교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잖아 기고행위도 정말 자의에 의해 했는지도 의문이고?”
“그런 사유는 위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 다만 현상윤의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적극성 주도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하지 않았고 박마리아도 활동횟수나 행위가 미약해서 제외시켰어. 중일전쟁 후 여성교육자 들 사이에 일체주의(一菜主義)라는 생활개선운동이 있었어. 생활을 개선하자는 거였지. 논란이 있었는데 생활개선 운동을 통해 전쟁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친일반민족 행위로 보자는 의견도 강했지.”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기준을 알 것 같았다. 사적인 자리인 만큼 허심탄회하게 몇 가지를 묻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시절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면 너무 좁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잘 생각해 봐. 일제시대를 살던 분들도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현명했던 분들이야. 친일에 대해 이 시대에 한 번 정리하고 가자는 게 위원회의 뜻이란 말이야.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행위라고 해서 비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국민과 후세의 국민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시할 수 없게 되지. 결국 시대적 상황이라는 변명을 받아들일 경우 진상규명을 할 수 없게 되는 거야. 

당시 우리 민족의 상당수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어도 일제에 협력을 거부했어. 대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친일청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잖아? 해방 후는 처벌이 목적이었지만 이번은 어떤 부끄러운 친일을 했는지 그 진상을 규명해 두자는 거지. 당사자가 다 죽었는데 형사처벌은 이미 의미가 없지. 이번의 조사는 개인의 다양한 행위 중에 특정행위만을 보자는 거였지. 행위자 개념보다는 ‘행위’ 개념으로 접근했어. 대상자를 전인격적인 반민족 행위자로 매도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지. 어느 한 시절의 특정한 행위가 반민족적이었다는 것만 판정하고 전인격적인 판단은 유보하는 거야. 그렇게 청산해야 할 건 친일문제만 아니야. 사실 한국전쟁기의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이나 박정희 독재정권의 인권탄압도 앞으로 문제로 삼아야 할 거야.”

“어린 시절 배고파 빵 하나 훔쳐 먹은 걸 너는 절도행위를 했다면서 나중에 아무리 다른 좋은 선행을 했어도 네가 했던 절도행위 자체는 맞지 않느냐며 기록에 남게 하는 게 과연 타당한 걸까요? 한 인간을 평가하려면 그 삶 전체를 봐야지 특정한 시점의 하나의 행위만 평가하면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러면 일진회처럼 망국을 주도하고 독립운동가 가족을 고문하고 일본에 충성해서 고등관료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지식인으로서 변절해서 청년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은 사실들을 모두 못 본 체 넘기자는 거야? 특히 지식인들은 허무주의를 조장하고 사람들을 분열시켜 독립의지를 꺾었는데도? 특정시점의 행위고 나중에 잘했으니까 그런 건 덮어두자고 해야 하나? 해방된 한국은 그런 유산을 청산했어야 해. 그 사람들이 계속 잘먹고 잘살면 이건 정의가 아니잖아? 그걸 청산해야 병든 과거와 단절이 되는 거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했어요?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해방 후 많은 시간이 갔는데 어떻게 하겠어? 주로 그 시대의 문헌자료를 이용해 조사할 수밖에 없었지. 당시 간행된 신문 잡지나 문서 재판기록을 검토했어. 조선 귀족이나 중추원 관련자의 전체 명단은 지금도 쉽게 파악할 수 있어. 관동군에 포섭되어 직업적 밀정으로 기밀비를 받은 게 문서에 남아 있는 경우도 발견되더구만. 만주 보민회 조사원이나 간도협조회 특별공작대 대원명단이 그거야. 수집한 자료는 국내외에서 수집했는데 관련 자료를 거의 망라했다고 봐도 돼. 관련 자료를 위원회에서 한 곳으로 집약한 거야. 그 자료가 앞으로 연구와 조사에 더 기여할 거야.

아쉬웠던 건 친일반민족 행위와 관련된 인물의 명단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는 거지. 또 친일반민족 행위의 정황이 명확한 경찰이나 군인의 탄압행위의 경우에도 문서상의 입증자료를 찾기가 어려웠어. 그 때문에 간혹 일반에 널리 친일파로 알려진 경우에도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 위원회는 기본 자료를 조사하고 학계의 연구성과를 두루 수집했지. 위원회는 역사적 연구도 병행했어. 지금까지의 일제 강점기의 연구는 독립운동사와 근대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많은 걸 알게 된 면이 있어.”

“이번의 처리는 너무 정치적이 아닐까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그 시절 뭘 했는데요? 존재했나요?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위해 단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존하는 이유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일까요? 시민을 위한 국가나 민족은 아닐까요? 개인을 희생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헌법이나 특별법이 추구하는 논리가 아니라고도 보이는데요.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정서적인 움직임이 있는 건 인정해. 그렇지만 그런 정서 때문에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위원회의 활동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위원회의 목표는 개인 대 개인을 비교해서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야. 자주 독립국가를 보존하자는 차원의 작업이지. 우리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당대의 선각자, 지식인, 유산층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야. 그들은 해방 후에도 지도자로 생활한 사람이 많아. 그들이 조사와 반성시켜야 하는 대상이야. 그들의 행적을 철저히 파헤치는 건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 우리나라의 동량이 되어야 할 인자들이 어떻게 변모 했는가 그 비극적인 행태를 철저히 인식시키려는 데 있는 거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일까.  
“그러면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1945년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오고 일본과 똑같이 점령지역에 적용하는 군정법령을 시행했어요. 우리는 일본의 지배에서 미군의 점령지역이 되어 버린 거죠. 동경이나 서울이나 다 미군의 점령지고 같은 법이 적용됐어요. 그게 해방이고 광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는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계속했다.

“당시 패전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최대과제로 삼았어요. 조약의 체결은 일본이 피점령지 아닌 독립국가로 다시 선다는 의미가 들어있던 거죠. 우리는 어땠나요? 피점령지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정부를 수립하고 국제적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나요? 통일국가 건설을 말씀하시는데 미소(美蘇)의 냉전체제에 따라 세계의 나라들이 그 중 어느 한 편에 줄을 서야 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남과 북이 각자 다른 줄에 선 채 통일이 가능했나요? 당시의 상황을 하나의 정치적 당위의 잣대로 재기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시민권을 따고 미국 관료가 되는 사람도 친미파로 척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북한형법을 보니까 그런 경우도 민족반역죄로 처벌하게 되어 있던데.”

“그런 논리를 떠나서 민족에 대한 영혼이 빠진 인간들은 친일파 척결과 마찬가지 논리가 되겠지. 내 생각으로는 위원들이 회의 때 의견을 밝힌 건 회의록에 다 정확히 나와 있지. 그 회의록이 지금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고 말이야. 정보공개 청구를 해서 그 회의록을 보는 건 어떨까?”

시간이 흘렀다. 내가 인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하여튼 엄 변호사도 변론의 입장과 역사를 보는 입장이 달랐으면 좋겠어.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 법관들이 위원회의 이론에 영향을 받지 않고 법규정은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해. ‘적극적 주도적 친일’만 친일반민족행위로 인정해야 하는 거지. 역사적 지식이 없는 판사들이 그냥 위원회의 흐름대로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법의 여과를 거쳤으면 하는데 법원이 그렇지 못한 것 같더라구.”

(계속)


[ 2018-07-02, 10: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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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2018-11-01 오전 10:20
'인간이 생존하는 이유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일까요? 시민을 위한 국가나 민족은 아닐까요? 개인을 희생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헌법이나 특별법이 추구하는 논리가 아니라고도 보이는데요.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 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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