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기자들의 장례식 취재 행태
<그들은 장례가 진행되는 중에 제단 주변을 제멋대로 우왕좌왕했고, 개중에는 관이 안치된 제단의 ‘대여(大輿)’에까지 기어 올라간 카메라맨까지 있었다. 이거야 관에 발을 디딘 것이나 마찬가지 꼬락서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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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서울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쓴 '날씨는 맑으나 波高는 높다.'는 책에는 한국 기자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있다. 태국 동굴 소년 취재현장의 질서와 너무 다르다.

<한일 합동 장례식에 황족도 참석

1989년 5월 8일, 이방자 비의 장례식은 창덕궁 내에서 거행되었다. 왕조의 장례 행렬은 돈화문을 나와 종로4가의 종묘(宗廟)까지 길게 이어졌고, 연도에 나온 시민들은 ‘최후의 왕비’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당시에 적은 메모를 보니 방자 비가 돌아가셨을 때 한국의 MBC텔레비전이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 가운데에서 한일 쌍방의 길거리의 목소리로 “이방자 여사를 아십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고 있었다. 한일 양쪽에서 각각 10명가량이 화면에 등장했는데, 일본에서는 아는 사람이 고작 한 명이었다. 한국에서는 절반 이상이 안다고 대답했다.
이방자 비는 한국에서는 ‘왕비’였다. 정확하게는 황태자비니까 한국에서는 ‘왕세자비’인 셈이지만, 일반인들은 왕비라고 불렀다. 마지막 반생(半生)은 한국에서 복지사업에 헌신하셨던지라 나이든 세대를 중심으로 그 존재는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한일의 관심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한일 간에 종종 문제가 되는 역사 인식의 갭의 한 예이리라.
이방자 비의 장례식은 먼저 돌아가신 이은 전하 장례식과 거의 마찬가지 형식으로 거행되었다. 왕실은 없어지고, 부부는 말하자면 사인(私人)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장례식이 아니었다.
장례 주최로 이왕가를 낳은 ‘전주이씨(全州李氏)’ 동족 조직이 중심이 된 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장의위원장은 전국에 200만 명 이상이 산다는 전주이씨의 동족 조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 이사장인 이재형(李載灐) 전 국회의장이 맡았다.
한국에는 성씨를 근본으로 한 동족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가령 기본적으로 동성(同姓) 남녀의 결혼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성씨를 함께 하는 동족은 혈통이 같은 만큼 “동족끼리의 결혼은 동물적이며 인륜(人倫)에 어긋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동족으로 많은 성씨는 김, 이, 박의 ‘3대 성씨’로, 이들만 해도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다. 단지 동성의 동족이라도 성씨의 출신지(本貫)에 따라 ‘전주이씨’라든지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으로 집단이 나뉜다. 이 성씨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 남녀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바람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이씨 중에서도 왕실을 낳은 전주이씨는 명문으로 꼽힌다.
고별식에 해당하는 ‘영결식(永訣式)’은 창덕궁 내 희정전(熙政殿) 앞에서 거행되었다. 영결식 전에는 언론 등을 통해 준국장(準國葬)이며 ‘전통적인 왕조 스타일’이라고 들었으나, 영결식 자체는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
현대의 한국 장례는 일본 장례에 익숙한 일본인에게는 긴장감이 결여된 것처럼 여겨진다. 일본에서처럼 문상객 모두가 검정색 옷차림으로 긴장감이 넘치는 풍경이 아닌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소박하고 온화하게 문상객들이 고인을 추모한다는, 어딘가 빈틈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조잡하여 예식으로서의 매듭이 없고, 때로는 시끌벅적하다.
이방자 비의 장례도 그랬다. 일본 황실에서 온 미카사노미야(三笠宮) 부부를 비롯한 일본인 참석자들도 꽤 있었으나, 그 소란스러움과 긴장감이 결여된 분위기에 놀란 모습이었다.
특히 제단(祭壇) 부근에 몰려든 취재진의 무질서가 장례 분위기를 깨트리고 있었다. 그들은 장례가 진행되는 중에 제단 주변을 제멋대로 우왕좌왕했고, 개중에는 관이 안치된 제단의 ‘대여(大輿)’에까지 기어 올라간 카메라맨까지 있었다. 이거야 관에 발을 디딘 것이나 마찬가지 꼬락서니였다.
또한 한일 양쪽의 요인들이 보내온 조화(弔花)인 국화 꽃잎이 마구 떨어졌고, 제단 바닥에 깔린 하얀 천은 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신발 자국으로 더렵혀져 있었다.
당시 이처럼 예의를 잃은 취재진의 방약무인(傍若無人)함에 나는 순간적으로 “혹시 반일감정 탓인가?” 하고 의아했다. 그렇지만 한국 취재진들의 평소 행동거지를 떠올리자 “그들의 오만함에서 나온 단순한 비례(非禮)”라면서 나 스스로를 납득시킨 기억이 난다.
덧붙이자면 조화는 일본에서 보낸 것이 많았다. 황족 중에는 천황, 황후 폐하를 비롯하여 황태자 부부 등 거의 대다수가 보내왔다. 그런데 조화 역시 두 폐하가 보낸 것보다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총리(당시)의 조화가 가장 앞쪽에 놓였고, 심지어 아야노미야(禮宮, 현재의 아키시노노미야) 전하 이름의 조화가 민간인들이 보낸 것에 섞여 맨 뒤쪽에 놓여 있기도 했다. 그러니 이 역시 조잡했다. 장례가 관(官)이 아니라 민(民) 주최였기 때문일까?
다만 의외였던 것은 장례가 마치 한일 합동장과 같은 풍경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심은 당연히 한국인들이었고, 조사(弔辭) 역시 동족 대표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과 강영훈(姜英勳) 총리 등 몽땅 한국인들이었으나 제단 앞의 참석자 배치가 흥미로웠다.
제단 앞에 텐트를 친 식장은 오른쪽 의자에는 한국인, 왼쪽 의자에는 일본인이 앉았다. 일본인 의자의 제일 앞쪽에는 미카사노미야 부부와 야나이 신이치(梁井新一) 주한 일본대사 등이 앉아 있었다.
실은 1970년에 이은 전하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일본 황족인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부부와 지치부노미야(秩父宮) 부인이 조문하러 오셨었다. 그것이 전후 첫 일본 황족의 한국 방문이었다. 이때는 일본인 조문객은 황족을 비롯하여 제일 앞줄에는 아무도 앉지 못하고, 모두 셋째 줄 뒤쪽이었다고 들었다.
방자 비의 경우, 일본인이었으므로 한일 합동장례처럼 된 측면이 있다. 그와 동시에 1970년으로부터 약 20년이 흘렀으며, 한국 측의 대일 감정이 그만큼 완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역시 방자 비에 대한 한국사회의 ‘따뜻한 눈길’이 있었다.
국제적이며 역사적으로 보자면, 유럽 왕실의 경우 전통적으로 ‘상호 연계(連繫)’가 있었다. 각국 왕실이 혼인을 통해 친척으로 맺어진 케이스가 꽤 있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서도 고려시대(10~14세기)에는 몽골족의 중국인 원(元)으로부터 공주가 이곳으로 가끔 시집을 오곤 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혹은 세계사적으로는 방자 비와 같은 왕실끼리의 혼인이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창덕궁에서의 한일 합동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도 이상한 게 아닐지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일 관계사가 세계사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서로 어딘가 ‘민족적인 거리낌’이 있다. 이것은 영결식이 끝나고 장례 행렬이 시가지로 나선 다음,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졌던 감상(感想)이다.>

[ 2018-07-10, 10:29 ] 조회수 : 609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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