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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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3년 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인터뷰/盧泰敦 서울大 국사학과 교수
  
  三國統一期의 두 지도자:金春秋의 성공과 淵蓋蘇文의 실패를 말한다
  
  北核 감시 기능 정지
  
  최근 한반도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북한은 작년 연말을 전후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단원 3명 전원을 축출함으로써 北核 감시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게다가 朴義春 駐러시아 북한 대사는 『미국 측의 위협 때문에 핵확산 금지조약(NPT) 의무를 더 이상 이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金大中 정권 햇볕정책 5년의 성과는 북한의 核개발로 나타났고, 이제 햇볕 정책의 총성적표를 받아든 국민은 왠지 불안하기만 하다. 이제 북한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핵무장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金正日은 과연 무슨 속셈에서 초강경 노선을 택했을까? 아무래도 그의 정치 형태가 고구려 말(642년) 쿠데타로 절대 권력을 쥔 연개소문을 닮아 가고 있는 것 같다.
  햇볕정책의 수혜자인 金正日과 시혜자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金大中 대통령은 과연 어떤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까? 「성공한 정치가」일까, 아니면 「실패한 정치가」일까? 그리고, 우리 역사상 성공한 정치가는 누구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국 고대사, 특히 고구려 발해사에 조예가 깊은 서울大 국사학과 盧泰敦(56) 교수를 만났다.
  
  연개소문은 「부정적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
  
  盧교수는 우리 역사가 停滯(정체)와 被侵(피침) 그리고 수난으로 이어졌다는 종전의 역사계 인식에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과연 우리 역사가 그런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민족의 내일, 희망과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물음이 그의 한국사에 대한 穿鑿(천착)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그는 고대사를 통해 이 해답을 찾으려 했고, 특히 연개소문과 金春秋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웅장한 용모에 걸출한 담력과 위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연개소문은 5~6세기 東北亞의 覇者(패자)로서 군림하려던 고구려의 영광을 자기 代에 재현하려는 야망을 가졌고, 이를 위협하는 唐제국과 雌雄을 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호기스러운 기대와 야망은 낭만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정책은 對內的으로 국가적 결속력을 높이지도 못했고, 對外的으로 국제 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여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키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부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盧교수는 연개소문을 「무모한 對外 강경론자이자 포악한 정치인」으로, 결국 부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 정치가가 비록 현실의 정치에선 패배하였지만 그가 추구했던 목표와 이상은 그 當代의 결과를 뛰어넘어 後代에 큰 영향을 끼친 최영 장군이나 임경업 장군 같은 그런 인물이다. 그의 활동 시기가 민족과 사회의 진로를 새롭게 가름하는 격동기일수록, 그의 정치적 命運이 그 진로의 설정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고 여겨질수록, 「실패한 정치가」의 죽음은 장엄한 한 편의 비극으로 묘사되고 많은 이들에게 靈感(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가의 행위는 개인적 의도나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로서 평가되어야 하며, 역사서가 도덕책이 아니듯 세계는 당위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金春秋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성공한 정치가」이다. 그의 廟號(묘호: 죽고 난 뒤에 왕에게 붙이는 시호)가 말해 주듯 太宗(태종) 무열왕이다. 太宗이란 묘호는 창업 군주인 太祖 이후 한 왕조의 가장 으뜸이 되는 큰 업적을 이룬 오직 한 사람의 왕에게만 올리는 묘호이다.
  金春秋는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냉정한 판단력을 갖춘 현실 정치가였다. 그가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였던 7세기 전반은 안팎으로 난관에 봉착한 시기였다. 신라는 6세기 중엽 이래로 백제와 계속된 전쟁으로 경제적인 몰락을 초래했고, 왕실은 眞骨 貴族 중심의 정치운영에 불만인 세력과 결합하여, 강력한 왕권 체제의 확립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측근으로 활약한 그는 579년 귀족 회의에 의해 폐립된 바로 眞智王의 손자다. 요즘말로 치자면 정치 엘리트이긴 하지만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그가 신라 내부에서 권력 투쟁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것은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면이 있어 보인다.
  그는 청소년 시절의 벗이요, 평생의 知己인 金庾信과 정치적으로 깊이 결속하였다. 金庾信의 동생(문희)이 그의 아내이며, 金庾信은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금관 가야의 왕손으로서 경주로 옮겨 살게 된 뒤 진골의 신분에 편입됐으나, 정통 진골 세력으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그의 집안은 조부 이래로 신라 武將으로서 세운 무공에 의해 그 정치적 비중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자연 金庾信의 문하엔 유능한 귀족이나 지방 출신 인사들이 많이 결집했다.
  
  혈맹을 이룬 金春秋와 金庾信
  
  647년 말 귀족 회의의 의장 격인 상대등 비담(毗曇)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왕실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무력 투쟁이 벌어진다. 이 무력 정변에서 金春秋가 이끈 왕실 측이 승리함에 따라 眞德女王이 등극한다. 여왕의 후원 아래 金春秋 라인업이 구축돼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세계의 戰史上 50여 년간의 세월에 걸쳐 수십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무패를 기록한 장수는 金庾信을 제외하면 발견할 수 없다. 7년 전쟁에서 신라에 패전한 唐은 요동방면으로 물러났으나, 대동강 이남의 옛 고구려 땅에 대한 신라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唐의 中宗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시비를 건다.
  삼국사기 신문왕 12년(692) 기사에 의하면 『우리 태종 文皇帝(문황제=이세민)는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廟號를 太宗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라의 선왕(金春秋)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僭濫(참람)한 일이니 조속히 고쳐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신문왕이 응수했다.
  『생각컨대, 우리 선왕이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良臣 金庾信을 얻어 同心爲政(동심위정: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으로 一統三韓을 이루었으니 그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신라는 끝내 金春秋의 廟號인 太宗을 고치지 않았다.
  鄭淳台씨는 그의 책 「金庾信 시대와 영웅」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金春秋, 金庾信의 동업에 의한 것이다. 金庾信이 신하의 몸으로 우리 민족사상 唯一 無二하게 興武大王으로 추존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편다.
  
  金春秋가 삼국통일의 최고 공훈자
  
  그는 『金春秋와 金庾信은 인간적으로도 서로 믿고 의지하는 문자 그대로 血盟이었으며, 이것이 삼국통일을 견인했던 기관차였다. 그렇다면 이 혈맹을 주도한 쪽은 누구인가? 그것은 金春秋라기보다 金庾信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元勳(원훈)을 굳이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나는 金庾信을 지목할 수 밖에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盧泰敦 교수에게 『삼국통일의 元勳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 명료했다.
  『당연히 金春秋죠. 金庾信은 그의 신하였죠』
  642년 겨울, 金春秋의 평양성 방문을 盧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淵蓋蘇文과 마주 앉아 양국 간의 相爭을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金春秋가 오랜 相爭國인 고구려를 방문하려 하였을 때, 신라 조정에서는 위험함을 들어 반대하는 의견이 강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春秋는 돌아오지 못할 경우 뒷일을 金庾信에게 부탁하고 비장한 각오로 평양성을 찾은 겁니다』
  金春秋가 평양성을 찾아 연개소문과 독대한 구체적인 동기는 「신라의 국가적 위기와 金春秋 개인의 원한 때문」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金春秋의 제1차 목적은 백제와의 전쟁을 잘 수행하기 위해 고구려와 휴전하려는 데 있었죠. 왜냐면 642년 여름, 백제군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신라의 서부지역을 공략, 40여 개 성을 함락시켰고, 그 중 金春秋의 사위와 딸이 있던 대야성(오늘의 합천)이 포함됐던 것이죠. 이에 따라 신라는 낙동강 서쪽 영역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고, 개인으로선 딸과 사위를 잃은 원한과 신라의 국가적 위기가 결부되어 그의 평양行이 감행되었던 겁니다』
  盧교수는 642년 「겨울 담판」을 가장 아쉬워했다. 만약 제 발로 평양성에 찾아들어 온 金春秋의 손을 연개소문이 잡았더라면, 신라와 평화조약을 맺었더라면, 고구려는 주력을 唐과의 전쟁에 효율적으로 쏟을 수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역사에 假定은 있을 수 없다.
  고구려가 竹嶺 이북 지역 땅, 즉 한강유역을 돌려 주면 신라의 요청을 들어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金春秋는 일개 사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결국 그는 구금되었고 협상은 결렬됐다. 金春秋는 석방돼 귀국했으나 7세기 중엽 한반도 역사의 두 주역, 연개소문과 金春秋의 역사적 만남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26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고구려는 金春秋의 아들 文武王에 의해 망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연개소문과 金正日의 공통점
  
  왜 연개소문은 金春秋의 제의를 거부했을까?
  盧교수는 『왕을 살해하는 등 대규모 유혈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으로서는 대외적인 강경 노선이 대내적인 입지를 강화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에 의거하였음을 배제할 수 없다』고 推論한다.
  이는 오늘날 현실에서 북한이 수백만 명의 백성이 굶어 죽었는데 10억 달러가 넘는 비용을 투입해 가며 핵을 개발해,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대내적인 입지를 강화하려는 金正日의 속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金正日은 왜 연개소문 흉내를 내는 것일까?
  연개소문이 당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듯이, 金正日 역시 오늘의 국제사회의 흐름과 특히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닐까. 오랜 기간 동안 폐쇄된 사회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절대 권력, 독점적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온 그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아무튼 642년 「겨울 담판」에서 『金春秋의 평화 제의를 거부한 연개소문의 판단은 고구려의 국익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는 오산이었다』고 盧교수는 주장한다.
  金春秋가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성공한 정치가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국제적인 감각과 냉정한 판단력을 갖춘 현실 정치인이란 점이다. 역사는 當爲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세계임을 직시할 줄 아는 慧眼을 가진 그런 정치인이 격동기엔 필요한 것이다.
  
  격동기의 리더는 기품이 있어야 한다
  
  연개소문과의 담판에 실패한 金春秋는 그 후 唐太宗을 방문하게 되고, 여기서 그는 최고의 예우를 받고 동맹관계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다. 645년 고구려 공격에 실패한 唐은 이제 신라와 새로운 동맹을 맺음으로써 고구려로 하여금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唐의 가장 큰 약점인 긴 보급선의 안전을 확보하게 된다. 군량미 등 군수품의 조달에 있어서 신라의 도움은 뒷날 겨울철 唐의 평양성 공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그 전초가 마련된 셈이다.
  물론 唐의 세력을 끌어들여 통일한 후, 그 다음 전개된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지만 金春秋의 아들인 문무왕이 唐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676년)하는 데 성공한다.
  盧교수는 고구려 멸망 이후, 對唐 전쟁 수행時 文武王의 탁월함을 특히 높이 평가한다. 당시 세계제국인 唐과의 전쟁을 치밀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치러 내는 것도 어려웠지만, 백제·고구려 유민, 일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함수 관계가 얽혀 있는 가운데 전쟁을 수행한, 文武王의 리더십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는 『격동기에 있어 한 시대의 리더는 기품이 있어야 한다. 기품은 곧 신뢰성과 통한다. 그리고 절제력과 규범성이 요구된다』고 했다.
  화제를 바꾸어 신라 삼국통일의 意義를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한국인의 正體性, 민족을 정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신라의 통일 이후 역사 전개에 있어서 예컨대 고려의 영역, 문화의 대부분은 통일신라 시대를 이어받았고,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 한국 문화」의 동질성을 확보하였으며, 우리의 민족 형성 토대를 이룬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고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씨(金, 李, 朴, 崔, 鄭씨 등)가 통일신라 시기에 이미 있었고, 당시 사용되었던 행정구역도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걸 볼 때 역사적으로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唐을 끌어들인 것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늑대를 몰아 내려고 호랑이를 끌어들인 엄청난 모험을 했던 게 아닌가 한다. 솔직히 고구려의 영역을 포용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이런 假定은 역사적 현실엔 별 의미가 없다』
  고구려는 尙武精神(상무정신)이 강한 나라였고, 70여 년간 중국의 수, 당과 전쟁을 치른 국가였다. 당시 수나라의 양씨나 당나라의 이씨 등 지배층은 북위의 피를 잇는 선비 탁발족 계통의 사람들로, 이들은 왕조가 바뀌어도 고구려를 쳐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70여 년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연개소문은 외교적 전략과 수단을 동원, 고구려를 살리는 지혜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盧泰敦 교수의 지적처럼 「실패한 정치가」란 낙인을 씻을 수 없다.
  盧교수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민족 뿌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한다.
  통일신라는 8세기 중엽 이후부터 귀족 문화가 서서히 나약해지기 시작한다. 盧교수는 石塔에서 「문화를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千年古都인 경주엔 삼층 석탑이 많이 있는데, 석탑에서 그 시기의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우선 「感恩寺塔」은 둔중한 듯하나 장중한 맛이 있고, 경주박물관에 있는 「고선사 삼층석탑」은 좀더 세련미가 돋보인다. 불국사의 석가탑은 좀더 정제되고 세련된 군형미가 돋보이는데 이런 아름다움이 8세기 중엽 이후엔 왠지 장중하거나 강건한 맛이 없어진다. 균형미와 정제된 아름다움이 약화되고 볼륨 자체가 빈약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下代로 내려오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고 사치 풍조가 만연해져 경주엔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숯을 사용하는 등 호사가 극에 이르게 되는데 숯을 사용한다는 건 번영의 상징이라기보다 귀족 문화의 타락이요, 건강미의 상실이다』
  
  檀君을 실제 인물로 보면 곤란
  
  평양의 소위 檀君陵에 대해 그는 『5000여 년 전에 실제 살았던 단군의 시신을 묻었던 무덤』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단군을 높이 평가하고 중시하는 것은 좋으나 그렇다고 꼭 실존 인물로 상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얘기다.
  『단군의 의미는 민족의 同源性(같은 뿌리), 상징성이 강한 것이지, 구체적으로 5000여 년 전 실존했던 인물로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단군은 칭호, 일종의 「탱글리(하늘)」, 즉 天君의 뜻으로 보면 좋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 祭司長이란 칭호이지 실존 인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북한이 1993년 단군릉을 발표했는데, 우리는 이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8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어 사회주의 국가가 흔들리고 붕괴되기 시작하는 등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단군을 통한 결집력의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북한 사회의 근대성 결여란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성이란 자주성, 산업화, 민주화, 합리화를 갖추어야 하는데 북한은 전혀 합리적인 사회가 못 된다. 단군릉을 설명하는 데도 전혀 합리적인 설명을 내지 못하고 있다』
  「햇볕정책」을 악용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보내 준 달러를 기껏 핵개발 비용에다 쓰고, 對北 지원식량을 군수용으로 전용하는 등 그들의 非합리적 사고 방식은 근대성의 결여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의 불안은 「北核」 문제에 관한 한 金大中 정부는 물론이지만, 새로운 집권세력도 「대화」 이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 같고, 北核 문제에 혼신의 힘을 쏟아 전력 투구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는 데 있다.
  문득 『金正日을 굴복시키지 않고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요상한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許文道 前 통일원 장관의 얘기가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자리를 뜨며 마지막으로 盧泰敦 교수에게 물었다.
  『새로운 대통령은 어떤 역사관을 가진 인물이어야 할까요?』
  그는 한동안 그저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라가 바로 서야 역사도 바로 섭니다. 우리 민족이 국제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지표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내세워 「强性大國」을 얘기합니다만…, 우리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문화」라면 모르지만 군사적 강대국이 되겠습니까? 적어도 21세기에 건설해야 할 국가적 비전을 제시했으면 합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우리 미래 국가 모습이 어떤 것이냐를 볼 수 있게 말이죠…』●
  
출처 :
[ 2003-01-22, 18: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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