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武器여 잘 있거라': 전쟁은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
모든 생명체는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으며(built for the kill) 살해와 被殺(피살)이, 그리고 가해와 희생이 삶의 방식이며 자연은 거대한 鬪技場(투기장)으로서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혼돈의 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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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그의 걸작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인간을 모두 戰士(전사)로 그리고 있다. 전쟁터의 군인이든 夜會(야회)의 신사숙녀이든 모두 전투하고 있는 전사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항상 싸우고 있는 존재라는 사상(idea)이 소설의 핵심적 주제이다.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다양한 시각에서 전사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라는 두 단어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일선의 전쟁터 뿐 아니라 평화스러워 보이는 후방의 사회도 전쟁터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평화도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전쟁하는 존재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두 상시 전쟁상태에서 살아간다.
  
  한국은 지금 전쟁 중이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교활하고 잔인한 남북한 공산 반란 집단과 70년 동안 전쟁 중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평화가 온 것처럼 천하태평이다. 아마도 전쟁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평화에 대한 갈망이 너무 오랫동안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가 보니, ‘가짜 평화 환상’에 빠지게 된 것 같다. 여기에다 한국의 반역좌파들의 전술적 평화공세의 선전선동이 加勢(가세)하여 나라가 멸망 중에 있는데도 오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세상이 된 것처럼 太平歌(태평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여, 안녕!’ 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전쟁하는 자세로 대비하지 않고 있으면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理想(이상)은 평화적이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역좌파의 평화 사기극에 속아서 夢遊(몽유)하고 있는 국민들을 각성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전쟁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전쟁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소개하려고 한다.
  
  
  전쟁은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1899년 시카고(Chicago)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학교 생활의 모든 면에서 활동적이고 성공적이었지만 두 번이나 가출했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參戰(참전)해 이탈리아 戰線(전선)에서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활약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그는 그 후에도 從軍記者(종군기자)로서 스페인內戰(내전)을 취재했다.
  
  <武器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는 이러한 전쟁경험이 만들어낸 절망과 환멸의 小說(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헤밍웨이는 전쟁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暴力性(폭력성)으로 인해 사랑과 희망과 삶에 대한 인간의 애달픈 갈망도 모두 허망하게 霧散(무산)되어버리는 과정을 냉엄하게 그리고 있다. <태양은 또다시 뜬다: The Sun Also Rises>,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武器여 잘 있거라> 등 헤밍웨이의 전쟁소설에서 전쟁은 혼돈과 무질서와 맹목적 파괴와 喪失(상실)의 象徵(상징)이다.
  
  인간은 문명을 일으키고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神性(신성)에 근접하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존재이지만 또한 수시로 전쟁을 일으켜 相互屠殺(상호도살)을 일삼을 만큼 獸性(수성)도 가진 모순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희한하게도 當代(당대)의 최첨단 과학과 기술을 총동원해 무기를 만들고 또 당대의 가장 뛰어난 지혜를 끌어 모아서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킨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문명과 문화가 발달할수록 전쟁은 더 잔인해지고 殺傷(살상)의 정도가 더 커진다.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인간의 생존조건에서 일어나는 모든 잔혹하고 無意味(무의미)한 것과 同一視(동일시)되며 인간성에 內在(내재)하는 惡魔性(악마성)에 대한 핵심적 이미지이다.
  
  
  相互屠殺(상호도살, mutual butchery)이 생존조건
  
  악마성은 인간성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생존방식이 악마적이다. 어떠한 생명체도 다른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모든 생명체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숙명적으로 먹이사슬의 한 부분이 된다. 작은 고기는 큰 고기가 잡아먹고 큰 고기는 좀더 큰 고기나 사람들이 죽인다. 작은 새는 큰 새의 밥이 된다. 큰 나무는 햇빛을 가려서 작은 나무를 죽게 만든다. 모든 생명체는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으며(built for the kill) 살해와 被殺(피살)이, 그리고 가해와 희생이 삶의 방식이며 자연은 거대한 鬪技場(투기장)으로서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혼돈의 場(장)이다.
  
  <老人(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에서 나오는 극히 평범한 어부인 산티아고(Santiago) 노인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존재를 죽인다.”는 넋두리는 사실이다. 노인의 낚싯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작은 새도 육지에 도달하기 전에 독수리의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 우주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이들의 죽음을 알리는 弔鐘(조종)은 우리들 주변에서 항상 울리고 있다. 죽음이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세계는 무의미하게 죽은 자들의 屍身(시신)으로 가득 차 있는 죽음의 惡夢(악몽) 같은 세계이다. 비를 맞고 있는 죽은 여인들, 퉁퉁 부어 오른 군인 시체, 침몰된 상선의 舷窓(현창)을 통해서 보이는 무수한 屍身 등 그의 소설은 시체 展示場(전시장)을 연상케 한다. 그의 소설에는 또한 얕은 물에서 익사하고 있는 다리가 부러진 노새, 쇠뿔에 관통상을 입은 투우장의 말, 자신의 창자를 물어뜯고 있는 하이에나 등 고통받고 있는 동물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강펀치를 맞고 비틀거리는 권투 선수들, 전쟁에 지친 군인,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제대군인들, 레즈비언, 色情狂(색정광), 신경이 절단된 투우사 등 삶의 투기장에서 상처입고 落伍(낙오)된 사람들도 자주 등장한다.
  
  
  교수대의 밧줄을 끄는 말처럼…
  
  인간이 당하는 이러한 죽음과 고통에 대해 우주는 무심하다. 우주는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교수대의 밧줄을 끄는 말처럼 우주는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 무심하다. 죽음에 대한 선악의 기준도 없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포탄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죽이듯이 우주는 그 운행 과정에서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삶은 외로운 奮鬪(분투)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삶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무심하고 무의미하고 공허하며 파괴적인 우주에서 인간은 분투하다가 허망하게 죽는다. 죽음이 끝이며 죽음 저편에는 허무만 있을 뿐이다.
  
  헤밍웨이의 이러한 虛無主義的(허무주의적) 우주관은 그가 소위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에 속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慘狀(참상)을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문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상실했다. 문명은 〈태양은 또 다시 뜬다〉의 戰傷(전상)으로 性不具(성불구)가 된 제이크(Jake)처럼 생식능력을 상실하고 不毛(불모)의 황무지로 변했다.
  
  
  神에게 버림받은 세대
  
  문명의 황무지에는 救援(구원)의 神(신)이 보이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작품 속 인물들은 神의 加護(가호)를 받지 못하는 迷兒(미아)들이다. 전쟁 중의 인간은 神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다. 神은 생명수가 말라버린 황무지에 재생과 구원을 가져오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神은 지옥의 전쟁을 막기는커녕 악마의 대리인들이 전쟁을 일으켜 수 백만 명을 屠戮(도륙)해도 무심한 傍觀者(방관자)로서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들의 대부분은 神의 존재를 믿지 않는 無神論者(무신론자)이거나 神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不可知論者(불가지론자)였다.
  
  헤밍웨이의 작품 세계에서는 神은 할 일 없는 백수 같은 존재이다. 神의 가호가 없는 인간은 보호자를 잃은 미아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작품 속 인물들의 생각이나 정서 및 행동계획에 神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의 인물들은 神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神은 無所不在(무소부재)의 존재가 아니다. 또한 神은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인간을 악의적으로 대하는 존재도 아닌 그저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때때로 神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결코 神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산티아고 노인은 거대한 마린과 24시간의 死鬪(사투) 후에 “나는 신앙심이 없어.” 그리고 “성모마리아(Marys)보다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Our Fathers)가 말하기에 더 수월하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기계적으로 또 자동적으로 하늘의 도움을 청한다. 48시간 후에 그는 “이제 저놈이 너무나 멋있게 저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 제가 저놈과의 싸움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백 번이나 부르겠으며 성모마리아님도 백 번이나 부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싸움 중이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神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의 말투이다. 노인은 무엇이 자신을 패배하게 했는가를 自問(자문)한 후 “아무것도 없어… 내가 너무 멀리 갔었어.”라고 답한다.
  
  
  패배하더라도 싸워야 한다
  
  헤밍웨이에게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에 너무 의존하거나 그래서 다른 외부의 원조를 기대하는 사람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인간은 쟁투의 끝은 패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압박해 오는 세력과 싸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투쟁 그 자체이다. 헤밍웨이의 주인공은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장애물”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맞서야 한다.
  
  산티아고 노인은 상어와의 無望(무망)한 싸움을 혼자서 堪耐(감내)해야 한다. 〈패배하지 않는 사람들: The Undefeated〉의 투우사 마뉴엘(Manuel)은 허리가 부러지고 치명적으로 찔리는 상처를 입고서도 소와 여섯 번을 겨룬 끝에 소의 뿔을 받아들인다. 제이크는 압도적인 좌절 속에서 “정직”하고, “진실”되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의 조던은 죽을 줄 알면서도 단독으로 적군과 맞선다. 그리고 각자는 고독한 개인으로서 외부의 도움 없이 도전에 정면으로 응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듯이 패배가 불가피한 도전에 정직과 성실로 대응할 때 인간은 神性(신성)에 근접해 간다.
  
  
  고통을 우아하게 감내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
  
  헤밍웨이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패배의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무심하다. 사람들은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거나 보더라도 그의 苦難(고난)과 그가 고난을 감내하는 용기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노인과 바다>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카페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산티아고 노인이 잡아온 마린의 거대한 척추와 꼬리를 지켜보는 장면으로서 끝난다. 그들 중의 한 여인이 웨이터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에 말한다.
  
  《“상어가 저렇게 핸섬하고 아름답고 잘 생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그녀의 남자 친구가 말했다.
  
  길 위쪽 오두막에서 노인은 다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자고 있었고 소년은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들에 대해서 꿈을 꾸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노인의 고통과 용기를 전혀 모르는 무심한 대중을 대변한다. 관광객들은 또한 개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무심한 우주에 대한 상징이 되기도 한다. 노인의 고난에 무지한 관광객들의 무심한 반응은 노인의 고통의 통렬함을 강화시키고 독자들에게 깊은 연민의 情(정)을 일으킨다.
  
  群居(군거)를 하면서 강력한 연대 속에 살아가는 사자에 대한 꿈도 노인의 고독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헤밍웨이의 군인, 어부, 웨이터, 그리고 외견상으로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은 도살장 문 앞에서 되새김질하고 있는 소처럼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은 차갑고 공허한 우주에서 고통을 우아하게 감내하고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 보통 사람들이 패배에 맞서는 용기에서 동정과 敬畏(경외)를 느끼게 된다.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非情的 文體
  
  헤밍웨이는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넣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를 전달할 때 형용사, 특히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는 가능한 한 排除(배제)한다.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계가 감정이 없는 것처럼 헤밍웨이의 소설에는 감정의 표시가 없다. 생존조건의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패배하는 인물들의 통렬한 비애와 고통을 감정의 개입이 전혀 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헤밍웨이는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우리 시대: In Our Time>의 한 장면이 좋은 예가 된다.
  
  《우리는 몬즈의 정원 안에 있었다. 영 버클리가 순찰대와 함께 강 건너에서 돌아왔다. 내가 본 첫 번째 독일군이 정원의 벽 위로 올라왔다. 우리는 그놈이 다리 하나를 벽에 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놈을 쏘았다. 그놈은 너무나 많은 장비를 짊어지고 있었고 깜짝 놀라면서 정원 안으로 떨어졌다. 그 후 세 놈 더 벽을 넘어 왔다. 우리는 그들을 쏘았다. 그놈들도 모두 똑같이 떨어졌다.》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전쟁의 공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비판도 없다. 첫 번째 독일군의 “깜짝 놀란” 표정 외에는 어떠한 감정표현도 없다. 그러나 작가의 객관적 서술태도가 이야기의 事實性(사실성)을 증가시켜 독자에게 더욱 더 큰 감정의 회오리를 일으키게 하는 힘이 된다. 독자는 영국군 저격수나 아니면 죽음의 담을 오르는 독일군의 입장에서 전쟁의 非情(비정)함과 악마성과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정원의 벽 자체도 너무나 생생한 이미지로 다가와서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대한 隱喩(은유)가 된다.
  
  
  잃어버린 세대 프레데릭과 캐서린의 만남
  
  <武器여 잘 있거라>의 프레데릭 헨리(Frederic Henry) 中尉(중위)는 이탈리아 북부전선에서 부상병 後送(후송)을 담당하는 앰뷸런스 수송장교이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자원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전선에 가까운 고리지아(Gorizia)에 주둔해 있었고 부대장인 소령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소령 외에도 부대의 장교 중에는 군의관 리날디(Rinaldi)와 神父(신부) 및 대위 한 명이 있었고, 이들은 營內(영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를 즐겼다. 소령은 눈 때문에 당분간 공격은 없을 거라면서 헨리를 휴가 보낸다. 소령은 프레데릭에게 로마나 나폴리로, 신부는 자신의 고향인 애브러지(Abruzzi)를 방문할 것을 권유한다.
  
  <武器여 잘 있거라> 전편에 걸쳐서 죽음의 이미지가 되는 비가 끊임없이 내려 질척한 전선지역과는 달리 애브러지는 “깨끗하고 차갑고 건조하며 눈은 말라서 가루 같고 눈밭에는 토끼의 발자국이 있고 농부는 모자를 벗으면서 당신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고 사냥하기 좋은” 곳이다. 애브러지는 아직도 현대적 절망이 엄습하지 않은 ‘깨끗한 자연과 신앙심 깊은 사람들의 선한 땅’(the good place)을 상징한다. 헨리는 에브러지로 가기를 원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는 《중심을 잃어서 현기증으로 방이 빙빙 도는 것 같고 그래서 현기증을 막기 위해서 벽을 쳐다 보아야 하는 카페의 연기가 있는 곳, 밤마다 술에 취해서 잠이 들고, 그리고 밤은 그런 것이 전부이고, 잠에서 깨어 날 때 옆에 누워 있는 자(여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데서 오는 이상한 흥분이 있는 곳, 세상은 어둠에 싸여 非實際的(비실제적)이 되고 너무나 흥분한 상태여서 다시 아무것도 모르면서 잠이 들고, 밤에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그래서 이렇게 지내는 것이 전부인》 도시에서 휴가를 보낸다.
  
  여기에 프레데릭의 고뇌와 困窮(곤궁)이 있다. 그는 그가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전통과 확신이 있는 세계와 현대의 불확실하고 흥분에 들뜬 세계라는 두 개의 相反(상반)된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모든 것이 중심을 잃고 현기증 나게 빙빙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시선을 고정시킬 실질적인 것을 찾는 것이 어려운 시대이며,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간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시대이며, 진리는 감각을 통해서만 포착되는 시대이며, 질서는 可變的(가변적)인 그런 시대이다. 프레데릭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현대인의 표상이다.
  
  휴가에서 전선으로 돌아온 후 프레데릭은 리날디를 따라 영국군병원에 갔다가 미모의 영국인 간호사 캐서린 버클리(Carherine Barkley)를 만나게 된다. 캐서린은 약혼한 남자가 있었지만 그는 전사했다. 캐서린은 죽은 약혼자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자신의 병원에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있을 만큼 낭만적인 사랑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여인이었다.
  
  
  사랑이 종교인 캐서린과 사랑이 게임인 프레데릭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곧 프레데릭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도 “당신은 나의 종교입니다. 당신은 내가 가진 것의 전부입니다.”라고 말할 만큼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반면에 프레데릭은 아직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문명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잃어버린 세대의 전형으로서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감은 두 눈에 키스했다. 나는 그녀가 아마도 약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미쳤다 해도 나쁠 게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할 바 없었다. 저녁마다 장교전용 遊廓(유곽)에 가는 것보다 이것이 더 좋았다… 나는 캐서린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사랑할 생각도 없었다. 이것은 브리지 같은 게임이었다. 브리지 게임에서는 카드 대신에 말로 한다. 돈이나 다른 판돈을 따기 위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죽음의 비로 마비된 프레데릭의 의식
  
  프레데릭의 의식은 軍(군)의 職務(직무)에 맞지 않았다. 그는 비전투원으로서 안락한 숙소에 거주하면서 잘 먹고 잘 마시고 가끔씩 장교전용 遊廓에 들르고 부대장의 호의로 장기 휴가도 갔다 왔지만 그의 마음은 불만스럽고 우울했다. 그의 이러한 의식상태는 전쟁으로 瓦解(와해)된 문명의 암울한 파노라마의 반영이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프레데릭의 이야기는 아이로니컬하다. “겨울이 시작되었을 때 장마비가 내렸고 비와 함께 콜레라도 왔다. 그러나 콜레라는 저지되었고 결국 군에서는 ‘겨우 7,000명만’ 죽었다.” 프레데릭은 몸은 건강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의지가 마비되어 있었다. 전쟁이라는 죽음의 비를 오래 맞으면서 그의 의식은 냉소와 회의와 무감각으로 채워졌다. 그가 캐서린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은 性的(성적) 遊戱(유희) 이상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인류문명에 대한 프레데릭의 환멸은 전쟁이 가져오는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문명이 인간의 업적이라면 이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전쟁도 인간의 삶의 조건이며 전쟁은 단지 인간성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강조할 뿐이다. 프레데릭은 참호에서 부하와 나누는 대화에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토로한다.
  
  《“우리는 전쟁을 극복해야 된다고 믿어.”라고 나는 말했다. “한 쪽이 싸움을 중단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그만 둔다면 그것은 단지 상황을 더 악화시키게 될 뿐이다.”
  
  “더 나빠질 것 없습니다.”라고 파시니(Passini)가 진지하게 말했다.
  
  “전쟁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패배는 더 나쁘다.”
  
  “저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파시니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패배가 무엇입니까? 중위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들은 너를 잡으러 올 거야. 그들은 너의 집을 뺏을 것이다. 그들은 너의 여자 형제들을 납치해서 데리고 가버릴 것이다.”
  
  “저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집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여형제를 집안에서 지키게 하면 됩니다.”
  
  “그들은 너를 목을 매달아 죽일 것이다. 그들은 침입해 와서 너를 다시 군인으로 만들 것이다. 앰뷸런스兵(병)이 아니고 보병으로 만들 거야.”》
  
  
  프레데릭의 重傷과 後送, 그리고 캐서린과의 재회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이탈리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프레데릭은 참호 속에서 저녁밥으로 치즈를 먹던 중에 포탄을 맞고 다리에 重傷(중상)을 입는다. 그는 포탄에 두 다리가 잘린 파시니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본다. 프레데릭이 전선야전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을 때 리날디와 신부가 위문을 왔다. 애국심이 강한 리날디는 프레데릭이 훈장을 받을 거라고 말했다. 프레데릭은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절한다. 또한 훈장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며 전쟁의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神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프레데릭에게 “언젠가는 神을 사랑하고 神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부는 전쟁의 慘狀(참상)을 겪으면서 신앙심이 더 강화되어 있었다. 신부는 “그곳(애브러지)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봉사할 수 있으면 너무나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부는 “여름은 서늘하고 봄이 너무나 아름다우며 사냥감이 뛰놀고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사는 선한 땅”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프레데릭은 현실적이고 무신론자인 리날디와 神의 대리인인 신부 그 어느 쪽과도 同類(동류)가 될 수 없어 不確實性(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방황한다. 理性(이성)과 感性(감성), 형식적인 종교와 “진실한” 종교(기독교), 형식적인 공허한 사랑과 진실된 사랑 사이에서 프레데릭의 의식은 표류하고 있다.
  
  프레데릭은 밀라노(Milan)에 있는 美軍(미군) 병원으로 후송된다. 여기에서 그는 캐서린을 다시 만나고 重傷으로 인한 고통과 병원 생활의 고독 속에서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신다. 나는 어떤 여인과도 사랑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이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 나는 밀라노의 병원에 누워 있었고 모든 종류의 상념이 내 머리를 스쳐갔고 나는 행복함을 느꼈다…》
  
  프레데릭과 캐서린은 밀라노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낸다. 그들은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일상의 삶을 즐겁게 보내고 있는 시민들의 일부가 된다. 이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흑과 백이 倂置(병치)될 때 색깔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죽음과 삶의 병치는 전쟁의 허무와 혼돈을 더 확고하게 浮刻(부각)시키게 된다.
  
  
  사랑의 행복은 執行猶豫(집행유예) 같은 것
  
  프레데릭과 캐서린은 고급식당, 화랑, 카페, 공원, 대성당, 상가 등 삶의 즐거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행복은 執行猶豫(집행유예)처럼 존재론적 혼돈과 그로 인한 절망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해방에 불과하다. 그들은 삶의 指標(지표)가 되는 가치를 상실한 정신적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프레데릭이 전선으로 복귀하기 전날 밤 캐서린과 함께 밀라노 교회 앞에 있는 장면은 그들의 방황하는 정신 상태를 선명하게 말해 준다.
  
  《전찻길 너머 大聖堂(대성당)이 있었다. 성당 건물은 흰색이었고 안개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전찻길을 건넜다. 우리 왼쪽으로는 창에 불빛이 비치는 상점들이 있었고 갤러리아(galleria) 입구가 있었다. 광장에는 안개가 있었고 우리가 성당 앞쪽으로 왔을 때 성당은 매우 크고 전면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아니.” 캐서린이 말했다. 우리는 성당 건물을 따라 걸었다. 돌로 된 성당 버팀 벽 그늘에 한 군인이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서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갔다. 그들은 돌 벽에 꼭 기대어 있었고 군인은 옷깃으로 여자를 가리고 있었다.
  
  “저들도 우리와 같군.” 이라고 나는 말했다.
  
  “아무도 우리와 같지 않아요.” 라고 캐서린이 말했다. 그녀는 즐거운 의미로 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저들이 갈 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저들에게 좋을 것 없을 거예요.”
  
  “모르겠어. 모든 사람이 갈 곳이 있어야 해.”
  
  “저 사람들은 대성당이 있어요.”라고 캐서린이 말했다.》
  
  군인과 여자는 성당이 있는 반면에 캐서린과 프레데릭이 갈 곳이라고는 호텔방뿐이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세대이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 갈 수 없어 교회 주변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캐서린과 프레데릭이 밀라노에서 사랑을 즐기며 혼돈과 절망의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인간은 우주가 제공하는 생존의 조건에 갇혀 있는 囚人(수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절망은 캐서린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표출된다. 캐서린은 비가 두렵다고 한다. 프레데릭이 설명을 요구하자 그녀는 때때로 죽어서 비를 맞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프레데릭이 믿을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리고 때때로 당신이 비 속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아요.”라고 말한다. 프레데릭은 “그럴 가능성은 더 많아요. 그러나 당신은 죽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살릴 수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덫에 걸린 프레데릭과 캐서린의 운명
  
  여기에 헤밍웨이의 인물들이 처한 “삶의 受動性(수동성)”의 비밀이 있다. 인간은 부여받은 생존조건을 수용할 뿐이지 그것을 인간의 의지대로 변형시킬 수는 없다. 캐서린이 임신한 지 3개월이 되어 곧 아기를 가지게 될 거라고 말한다.
  
  《“당신이 화내는 것은 아니지?”
  
  “응.”
  
  “그리고 당신은 덫에 걸렸다고는 느끼지 않지요?”
  
  “약간은. 그러나 당신 때문에 그런 건 아니오.”
  
  “나 때문에 그렇다는 것 아니에요. 당신은 바보임에 틀림없어. 덫에 조금이라도 걸렸냐는 거예요.”
  
  “사람은 항상 생물학적 덫(biological trap)에 걸려 있다고 느끼지요.”》
  
  “생물학적”이라는 말은 헤밍웨이의 세계에서는 인간사의 모든 일에 해당된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恣意(자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만 인내로써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프레데릭도 캐서린처럼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비가 내리는 날 그들이 카페에 있을 때 프레데릭은 앤드루 마블(Andrew Marvel: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의 詩句(시구)를 암송하면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생각한다.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
  
  그러나 나는 내 등 뒤에서 항상 듣는다
  
  시간의 날개 달린 전차가 가까이 달려오고 있음을.》
  
  캐서린은 출산할 날을 담담하게 기다린다. 생물학적 존재인 프레데릭과 캐서린은 운명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 그들은 전쟁의 덫에 걸려 있고, 사랑의 덫에 걸려 있으며, 그들은 비록 의식은 하고 있지 않지만 죽음의 덫에도 걸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가도 탈출구가 없다. 그것이 인간이 처한 생존조건이다.
  
  
  전쟁의 愚昧와 혼돈-헤밍웨이의 절망
  
  프레데릭이 전선으로 복귀한 이틀 후에 고리지아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포레토(Caporetto)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패해 후퇴하게 된다. 그것은 악몽 같은 退却(퇴각)작전이었다. 카포레토 敗走(패주)에 대한 헤밍웨이의 이 유명한 敍述(서술)은 전쟁의 愚昧(우매)와 混沌(혼돈)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된다.
  
  앰뷸런스 한 대가 진흙에 박혀 꼼짝 못 하게 되어 병사들이 나무를 잘라 와서 공회전하는 바퀴 밑에 까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하사관 두 명이 후퇴대열에서 탈락하는 것이 두려워서 차를 포기하고 도보로 가겠다며 프레데릭의 작업명령을 무시하고 부대를 이탈한다. 전투 중 무단이탈은 총살형이어서 프레데릭은 그 중 한 명에게 총을 쏜다. 총에 맞은 그 병사는 쓰러진다. 그는 부상만 입었을 뿐이지만 프레데릭의 묵인 하에 운전병 보엘로(Boello)에 의해 사살된다.
  
  보엘로는 “하사관 쏘아 죽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몇 시간 뒤에 보엘로도 탈영해 버린다. 이 우울한 코미디의 클라이맥스는 프레데릭 자신의 탈영사건이다. 헌병들이 장교부대이탈죄로 그를 즉결처분하려 할 때 그는 타글리아멘토(Tagliamento)江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구한다.
  
  전쟁행위는 인간생활에 내포되어 있는 잔인하고 무의미한 모든 것과 同一視(동일시)된다. 탈영죄로 사살된 하사관이나 이를 재미 삼아 죽이고 탈영하는 보엘로나 하사관에게 적용되었던 그 군법을 위반한 죄로 자신이 총살형을 당하게 되자 강물에 뛰어드는 프레데릭이나 모두 혼돈과 愚昧(우매)의 表象(표상)인 전쟁이라는 메커니즘의 꼭두각시들이다. 그런데 그 전쟁은 문명을 창조하고 자랑하는 인간들이 일으킨다. 여기에 헤밍웨이의 인간에 대한 절망이 있다.
  
  
  경험의 뒷받침 없는 추상적인 명분의 우울한 코미디
  
  카포레토 후퇴작전은 또 하나의 우울한 코미디를 보여 준다. 즉 추상적 이론과 실제적 상황 사이의 乖離(괴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고 當爲(당위)와 規範(규범)만으로 현실을 恣意的(자의적)으로 裁斷(재단)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비극적 코미디이다.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현실과 遊離(유리)된 정의와 원칙의 강요는 반드시 피를 흘리게 된다. 프레데릭은 헌병들이 이탈리아軍 중령을 처형하기 직전에 심문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 심문자(헌병)들은 사격은 하지만 사격은 받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그 모든 능률성과 침착함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 여단은?”
  
  그(중령)는 대답했다.
  
  “연대는?”
  
  그는 대답했다.
  
  “연대에서 왜 이탈했나?”
  
  그는 대답했다.
  
  “장교는 부대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나?”
  
  그는 안다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헌병장교가 말했다.
  
  “너 같은 놈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조국의 신성한 국토를 짓밟게 만든 것은 바로 너 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중령이 말했다.
  
  “우리가 승리의 열매를 놓친 것은 네 놈들의 반역 때문이다.”
  
  “당신들은 전투에서 후퇴해 본 적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헌병은 총살집행을 위한 총은 쏘지만 전투에 참여해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지는 않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후퇴의 경험도 없다.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죄에 굴복한 자를 斷罪(단죄)하는 성직자와 같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국토”와 “승리의 열매” 같은 애국적인 어구는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것이어서 “후퇴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중령의 말에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헌병들의 용감한 말은 실제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령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행동과 경험으로 받침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명분은 객관적인 사실에 부딪히면 오판을 가져오기 쉬우며 인류사는 너무나 많은 오판의 사례를 보여 준다. 중령은 이러한 오판의 희생자이다.
  
  전쟁의 무의미와 혼돈을 경험하는 프레데릭이 전쟁의 구호들이 토해내는 형식과 명분의 공허함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신성하다, 영광스럽다, 희생과 같은 말(word)과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항상 困惑(곤혹)을 느꼈다. 우리는 그러한 말들을 수없이 들었다. 때로는 비 속에서 거의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 들었기 때문에 고함지르는 말들만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읽었다. 다른 포스터 위에 겹쳐서 붙여 놓은 포스터의 포고문에서 그런 말들을 읽었다. 오랫동안 읽었다. 그리고 나는 신성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영광스럽다는 것에는 영광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희생이라는 것은, 쓸데가 없으면, 고기를 파묻어 버리는 시카고 도축장 같았다. 듣기에 견딜 수 없는 많은 말들이 있었고 地名(지명)만은 최후까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캐서린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타글리아멘토江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구한 프레데릭은 부대로 귀환하지 않고 캐서린이 있는 밀라노로 향한다. 그는 전쟁과 “개인적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쟁에 대해서 완전히 잊기를 원한다. 밀라노의 군병원에는 캐서린이 없었다. 그녀는 湖畔(호반)의 휴양도시인 스트레사(Stresa)에 있었다. 프레데릭은 캐서린의 순진하고 소박하고 따스한 사랑 속에서 탈주자로서의 불안과 공포와 공허를 잊으려고 한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의 가치라고 말할 만큼 캐서린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캐서린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전쟁에 대한 불안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 戰況(전황)을 묻는 바텐더의 질문에 대한 프레데릭의 대답에서 이러한 불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나는 말했다. 전쟁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쟁이라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전쟁이 없었다. 그때 나는 나에게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전쟁이 정말로 끝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학교를 빼먹고 지금 이 시간에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소년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프레데렉과 캐서린이 이탈리아를 탈출해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전쟁은 그들을 뒤쫓아올 것이다.
  
  프레데릭의 이성은 그가 무사히 탈출했다고 말하겠지만 감성은 그가 학교를 빼먹고 있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프레데릭은 민간인 복장을 입고 가장무도회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대세계에서의 행복은 일종의 학교에서의 무단결석 같은 것이다. 그는 캐서린과 함께 전쟁으로부터 무단결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코 고독하지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범죄자 같은 느낌이다. 내가 부대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또는 “범죄자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학교에 무단결석한 아이들이 가지는 불안과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캐서린은 프레데릭이 체포될 걱정이 없는 “어떤 곳”으로 갈 것을 제안한다.
  
  프레데릭은 캐서린과 함께 “전쟁의 덫”이 없는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한다. 그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고 3월이 올 때까지 스위스의 아름다운 곳에서 “전쟁의 덫”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牧歌的(목가적)인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죽음의 덫이 그들의 행복을 빼앗아 가버린다. 캐서린이 難産(난산)으로 인해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후 죽는 것이다. 이로써 프레데릭과 캐서린의 탈출 이야기는 끝난다. 죽음에는 탈출이 없기 때문이다.
  
  캐서린의 虛荒(허황)된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헤밍웨이가 “오랜 세월 후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痛切(통절)한 비애를 자아낸다”고 말할 만큼 독자들의 가슴을 비애로 적신다.
  
  우리를 더욱 더 암울하고 슬프게 하는 것은 캐서린의 죽음에 대해 세상의 무심함이다. 캐서린이 수술대에 누워 있을 동안 프레데릭은 텅 빈 홀에 앉아 있다가 간호사 두 명이 수술실로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한다.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지?”
  
  다른 한 명이 말한다, “시간에 꼭 맞춰 왔군. 다행이지 않아?”》
  
  프레데릭은 캐서린이 죽어 가는 것을 보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병원을 나와서 근처의 카페로 간다. 불빛이 밝은 카페에는 한 남자의 세계가 온통 무너져 내리는 것을 전혀 의식 못 하면서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카드놀이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있다. 프레데릭은 “그녀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절규하지만 세상은 한 개체의 죽음에는 기계처럼 무심하다.
  
  
  불길 속의 개미처럼
  
  프레데릭의 다음 우화는 캐서린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언젠가 부대에 있을 때 나는 통나무장작을 불 위에 얹었다. 그 통나무 속은 개미로 가득 차 있었다. 통나무가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이 몰려 나왔다. 개미들은 처음에는 불이 붙어 있는 통나무 중심부 쪽으로 갔다가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 통나무 끝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나무 끝에서 견딜 만큼 있다가 불 속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개미 중 몇몇은 몸이 불에 타고 굳어져서 불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도망갔다. 그러나 개미들 대부분은 불 쪽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끝 쪽으로 와서는 서늘한 통나무 끝에 떼를 지어 있다가 끝내는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그것은 세상의 종말이고 내가 메시아가 되어서 통나무를 불에서 들어올려 개미들이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곳으로 던져 버릴 수 있는 훌륭한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 생각난다. 그러나 나는 그 통나무 위에다 한 컵의 물을 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을 보태서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서는 컵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타고 있는 통나무 위에 부은 그 물은 개미를 증기로 쪄서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캐서린을 구해줄 메시아는 없다. 죽음이 끝이다. 유일한 가치는 인간은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죽음은 인간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죽음에게는 “죽음이여 잘 있거라”고 작별을 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武器여 잘 있거라>의 제목은 대단히 아이로니컬하다. 전쟁은 인간의 생존조건에서 勃發(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별인사를 고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대인 프레데릭은 생존조건이 부여하는 여러 가지 의무에서 탈출하기를 시도했다. 그는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시도했지만 학교를 무단결석한 학생과 같이 불안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스위스에서의 행복한 생활과 미래의 꿈은 캐서린의 죽음으로 끝났다.
  
  
  최선의 방책은 전쟁에 대비하는 것
  
  <武器여 잘 있거라>에서 헤밍웨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삶의 조건이 부여하는 행동과 투쟁의 의무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기여 잘 있거라”라고 전쟁을 향해서 작별인사를 할 수 없으며 개인적 평화협정을 맺을 수도 없다. 전쟁은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이기 때문에 차라리 전쟁에 대비해 전쟁의 勃發을 가능한 한 막거나 패전의 피해를 당하지 않는 것이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전쟁도 사랑도 모두 생물학적 덫이며 우리에게는 우리의 숙명인 생물학적 덫을 원망할 자격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인내하면서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는 의무만 있을 뿐이다.
  
  
[ 2018-10-12, 08: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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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2018-10-13 오전 11:23
우리나라 자유주의 우파사이트인 조갑제 사이트가 정말로 사회에 임팩트를 갖으려면 이 사이트가 '펀드빌더'같은 일본 쓰레기들만 기생하는 곳이 아니라, 이분처럼 지적인 분도 활동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조금 더 알려져야 합니다. 이 글은 자유주의 우파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한번쯤은 읽고 깊게 생각할만한 훌륭한 글입니다. 이 글을 대문으로 한달쯤 걸어놓을 것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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