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강만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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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의 神 앞에서「나는 金正日의 인질이 아니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李柱天 원광大 사학과 교수
  
  1953년 부산 출생. 고려大 사학과 졸업. 고려大 문학박사. 원광大 사학과 교수. 저서·논문 「루즈벨트의 친소정책」, 「미국전쟁사」, 「김정일의 인질이 된 대한민국」(얼과알), 「미국공산주의의 비밀세계」(譯書), 「미국공산주의운동의 사학사적 검토」,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한정책: 신탁통치 안을 중심으로」 등.
  
  
  恩師 姜萬吉
  
  
   최근 국내 역사학자들 중에서 가장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 있다. 고려大 명예교수이자 前 상지大 총장 姜萬吉(강만길) 교수이다. 그는 현재 국무총리 산하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委」 위원장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委」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다.
  
   姜萬吉 교수는 필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두 스승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꿈 많은 청년기에 학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도록 知的 호기심과 동기를 부여해 준 분이다. 姜萬吉 교수와의 인연은 필자가 1973년 고려大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필자에게는 高大 선배이자 스승인 것이다. 필자의 대학시절, 그는 하나의 우상과 같았다. 그의 성의 있는 강의는 「名강의」로 소문이 났었다. 그는 休講(휴강)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민중주의적 통일사관으로 한국사 왜곡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제 시간보다 일찍 강의실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사학과가 아닌 他학과 학생들도 수강신청을 했기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앉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서양근대사를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그분의 강의를 들었다.
  
   당시 「고대신문」에 게재된 그의 時論 「한글 창제에 대한 세종대왕의 동기」는 지금도 필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에 의하면, 『世宗이 한글을 창제한 목적이 문자를 몰라서 불편해하는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한글을 창제한 것이라기보다는, 「용비어천가」를 만든 그의 열성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祖父인 李成桂(이성계)의 쿠데타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글에서 필자는 커다란 知的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 필자는 모든 역사적 사실을 일단 의문을 가지고 접하게 됨으로써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워 갔다.
  
   아직도 인상 깊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넉넉한 인품이다. 소탈하고 솔직하며, 특히 제자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그의 가르침으로 수많은 훌륭한 한국 근·현대사 전공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려大를 정년퇴임한 이후, 姜萬吉 교수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는 2000년 6월 남북頂上회담에 민화협 공동의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 이후 「金日成의 독립운동 인정」 발언을 했다. 언론을 통해 강만길 교수의 사회활동과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의 역사 인식과 통일관에 많은 우려를 갖게 되었다.
  
   그의 「민중주의적 통일史學」은 「민족」이라는 美名下에 북한의 세습 공산독재정치와 무자비한 인권유린까지 애써 감싸고 있다. 그는 21세기를 사는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理性(이성)보다는 感性(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광복 전 독립운동 시절에 유행하던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마침내 대한민국의 正體性을 해체하고 이념적 혼돈을 유발시켰다.
  
   大家(대가)의 반열에 오른 스승의 학문세계를 제자가 감히 비판한다는 것은 동양적 학문 풍토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1999년 초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젊은이들이 내 책을 읽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이여) 나를 밟고, 넘어서라』고까지 했다. 필자는 큰 용기를 내서 그의 역사인식과 통일관을 비판하기로 했다. 이 글을 쓰기까지 수없이 주저했음을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지난 6월17일 訪北時 金正日과 사진을 찍은 姜萬吉 교수. 왼쪽부터 김민하 前 평통수석부의장, 박용길 장로, 金正日, 姜萬吉 교수.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
  
   「대한민국은 실패한 歷史」
  
   우선, 姜萬吉 교수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본다.
  
   李承晩의 장기집권과 朴正熙-全斗煥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30년 동안의 통치는 정통성이 없으며, 反민주정권으로서 남북의 평화통일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한의 역대정부가 親日派 청산을 게을리 했다는 사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는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委」 위원장으로서 역사청산을 주도하고 있다.
  
   親日派 숙청 문제에서 그는 프랑스의 나치 附逆者(부역자) 청산을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는 『앞으로 남북의 교류가 좀더 활성화되려면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북쪽은 이미 親日문제를 청산한 반면, 우리는 청산이 안 됐다고 하면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도 親日청산이 빨리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姜萬吉 교수는 「이제 문제는 冷戰세력이다」에 실린 「冷戰세력의 정체와 극복방안」이라는 글에서 『남북 간 평화로운 통일을 저해하는 것이 冷戰세력』이라며, 『지금 시점에서 冷戰세력 극복의 길은 우선 冷戰세력의 뿌리라 할 수 있는 親日세력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철저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소위 左翼들이 「冷戰세력」이라고 지칭하는 右翼 척결을 위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親日派 청산을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日帝의 한반도 식민통치와 프랑스 비시 정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간은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프랑스는 우리처럼 분단 상황도 없었으며, 6·25와 같은 전쟁의 비극도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거의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서 「親日행동」과 「反日·애국행동」의 경계를 아주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무인도에서 살아야 했다. 이를 따르지 않은 조선인이 거의 없었다.
  
   일제下 유명 인사들의 공식적·형식적 親日행위와 非공식적 애국행위를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姜萬吉 교수의 저서들.
  
  
   북한은 親日 청산한 게 아니라 지주계급을 숙청한 것
  
   북한의 경우, 소련군 장교로 북한에 진입한 金日成은 국내 권력기반이 全無했었다. 金日成은 북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20일 만에 전격적으로 실시된 토지개혁을 통해 기존의 親日 지주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민중들의 자주적 개혁이 아니라, 소련軍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서 地主·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親日派 청산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親日派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姜교수의 주장에 대해 지난 9월29일 연세大에서 열린 「교과서포럼」에서 이주영(건국大·미국사) 교수가 적절한 비판을 제시했다.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은 反共국가, 자유주의 국가로 출발하였다. 그것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일본인 통치 밑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美 군정 밑에서 성장한 엘리트도 있었다. 그러한 엘리트는 전문 지식을 가진 관료·군인·기업가·교육자·기술자·종교인·예술인들로서, 신생국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人材들이었다』
  
   姜萬吉 교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역량이 과소평가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남측에서 강조하는 右翼 주도론과 북측에서 강조하는 左翼 주도론 모두를 배격하고, 통일전선운동 주도론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학자라 할 수 있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성립된 시기까지는 국민주권체제를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했다. 그 이후 좌우익의 대립으로 혼선과 대립을 빚다가 식민지시대 말기로 접어든 1930년대 후반기 이후에는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그것이 지향한 政體(정체)를 분명히 밝힐 수는 없지만, 「부르주아」 계급과 종교단체와의 협력을 모색한, 적어도 「노동계급 독재」는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중국지방 독립운동전선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의 左派노선과 임시정부 중심의 右派노선 모두 정치체제는 보통 비밀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하고,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한 일종의 민주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 1978년)
  
  2000년 6·15 남북頂上회담 환송 오찬에 참석한 姜萬吉 교수(왼쪽에서 다섯 번째).
  
  
   광복 전후 좌우익 갈등 과소평가
  
   姜萬吉 교수는 『민족주의적 합일점에의 접근은 그것이 미처 정착되기 전에 일본의 패망과 이어서 연합군의 분할점령과 東西冷戰(동서냉전)의 심화로 인해 민족분단은 고정화했다. 이 때문에 분단시대 민족주의의 최대 과제는 그대로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식민지 시대 말기의 민족주의가 지향한 방향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만약 일본의 패망이 늦어졌다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左右翼의 민족주의적 합일점이 가능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左右翼의 사상과 독립방법論을 둘러싼 대립이나, 광복 직후 남한사회에서 左右翼의 대립을 경험한 한국인들이라면 日帝의 패망이 늦추어졌더라도 그렇게 쉽게 左右翼의 대립이 해소되었을 것으로 낙관하지는 못할 것이다.
  
   중국에서 西安사변(1937) 이후 벌어진 여러 차례 國共합작의 비극적 결말을 상기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姜萬吉 교수는 日帝 강점기에 통일전선운동에서의 金九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金九가 광복 후 평화로운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와 암살당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金九가 평양行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남한에서 간첩으로 암약하던 공산주의자 성시백의 권유가 있었다.
  
   성시백은 臨政 시절부터 金九를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948년에는 국회 「工作」에도 힘을 쏟았고, 金九에게 남북연석회의에 와달라는 金日成의 초청장을 직접 전달한 인물이다. 그는 1950년 5월15일 체포되었고, 6·25가 터지고 이틀 뒤 처형되었다. 金日成은 그를 통일혁명열사로 인정했다. 金九의 평양行은 북한의 對南공작의 결과라는 점을 姜萬吉 교수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채택된 ① 외국軍 즉시 철수, ② 외국軍 철수 후의 內戰 발생 부인, ③ 全조선 정치회의 구성과 그 주도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와 정부 수립, ④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의 내용은 당시 국내외 상황으로 보아 실현이 어려운 것들이다.
  
  
   金日成의 전쟁 책임 외면
  
   姜萬吉 교수는 6·25 전쟁 발발에 대한 金日成의 책임 문제를 회피하면서, 남북 양측이 적대감을 버리고 화해 협력할 것을 강조한다.
  
   姜萬吉 교수는 1999년 1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민족문제에 주역이 되면 통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6·25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침략전쟁으로 보면 그 뒤에는 반드시 원한과 보복심 같은 것이 따르게 됩니다. 통일은 기어코 해야겠는데 민족의 다른 한쪽에 대한 원한과 보복심을 가진 채 통일하려 하면 결국 평화통일이 아닌 전쟁통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6·25는, 우리 땅은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되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줬다고 생각게 됐습니다』
  
   姜萬吉 교수의 저술 어느 곳에서도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6·25를 도발한 金日成의 책임을 묻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6·25는 전쟁통일의 방식으로 실패한 통일전쟁』이라고만 주장하면서, 金日成의 전쟁 발발 책임은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그는 현대사 강의 「20세기 우리 역사」 속의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라는 章에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新수정주의의 입장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자료가 좀더 공개되어야 그 진실이 더 많이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의 태도는 한반도를 달나라에서 망원경으로 보거나 수백 년 전 中世 조선의 사료를 뒤적이듯이, 아주 객관적으로 조망한 것처럼 보인다. 6·25가 발발했을 때, 그는 고등학생(당시 17세)이었을 것이다. 누가 기습 南侵을 했는지, 어떻게 해서 서울이 일거에 함락되었는지, 왜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줄 지어 갔는지를 들어서 알 수 있는 세대이다.
  
   그런 그가 마치 6·25가 北侵인지 南侵인지도 모르겠다며, 「증거자료 부족」을 근거로 전쟁의 진상을 얼버무리고 있다.
  
   서방세계와 공산권에서 그만큼 자료가 공개되고 연구되었으면 충분하지 얼마나 더 공개되어야 하는가?
  
   姜萬吉은 한국 전쟁 이후 李承晩이 독재정권으로 변질되어 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北의 金日成이 박헌영을 미제의 앞잡이로 몰아서 전쟁 敗戰(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一人 우상숭배의 공산독재로 간 현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朴正熙의 근대화 업적 부인
  
   姜萬吉 교수는 지난 세월 대한민국이 쌓아 올린 경제성장, 즉 근대화에 부정적이다.
  
   그는 朴正熙 정부의 경제성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朴正熙 정권의 경제개발은 한국을 만성적 무역적자국, 외채과잉국, 식량수입국으로 전락시킨 데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재벌중심 경제체제는 엄청난 외채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경제의 對外종속성을 심화시키고, 경제적 민주주의에 크게 역행했으며, 농업을 철저히 희생시켜 「만성적 식량수입국」으로 만들고 소득분배 구조를 악화시켜 국내 각 계층의 격심한 갈등을 빚어 냈다』
  
   이같은 시각은 『朴正熙 정권이 우리 경제를 非민주적 방향으로 오도한 결과, 1990년대의 IMF 관리체제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궤변으로 이어진다.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朴正熙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민주화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무관심과 파당정치, 무분별한 국민들의 소비행태, 과격한 급진 노동운동이 야기한 勞使갈등 등이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본질적 위기였음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姜萬吉 교수가 의도하는 과거 청산의 대상은 親日派에서 멈추지 않는다. 朴正熙·全斗煥 군사정권에서 일했던 보수·기득권층도 자연히 포함된다.
  
   지난 9월10일, 「민족화해」와의 인터뷰에서 姜萬吉 교수는 현재의 보수·右翼 세력을 「反민주」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는 『과거의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中世의 양반의식을, 아니면 日帝 강점기의 反민족 상황과 의식을, 아니면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민족상잔의 상황을 유지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과연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中世와 日帝의 잔재물, 군사문화들뿐인 것인가? 보수주의자의 元祖이면서 프랑스혁명의 과격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보수주의자들은 급진적 개혁을 거부하는 것이지, 변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군사정권 好시절에 권력의 단물만 빤 기득권 층이라는 姜萬吉 교수의 단정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흑백논리다.
  
  
   [姜萬吉의 위험스러운「평화적 협상통일론」]
  
   金正日 「평양잔치」에 푹 빠진 姜萬吉
  
   姜萬吉 교수는 유엔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유엔군이 6·25 당시 赤化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했는 데도 유엔을 「외세」라고 규정하면서, 유엔을 멀리하는 통일방안을 「자주통일」·「협상통일」이라고 긍정 평가한다.
  
   姜萬吉 교수는 2000년 6월 金大中 대통령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측의 민화협 공동의장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리고 6·15 남북 頂上회담에 함께 했다.
  
   姜萬吉 교수는 6·15 南北공동선언이 남북의 평화통일·협상통일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7·4 공동선언은 南北 기득권 세력의 자기 권력 연장을 위한 속임수」였고, 「2000년 6월 남북한의 공동합의서는 南北의 평화통일에 획기적 기원을 이룬 진정한 역사적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아직도 姜萬吉 교수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생애 최대의 영광』이라고 감격해하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평양에 가서 頂上회담을 하는 代價로 5억 달러 이상이 비밀리에 金正日에게 헌납되었고, 현대그룹이 무리하게 금강산 관광사업 등 對北사업을 해서 그룹이 공중분해되었고, 그 과정에서 鄭夢憲 현대회장이 자살한 비극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는 아직도 金正日이 베푼 평양잔치의 평화무드에 푹 빠져 있다. 남북한의 각기 다른 체제와 이념이 접근하는 데 따른 후유증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이 없다.
  
   姜萬吉 교수는 「남북이 협상통일을 이루어 제3의 세력권을 형성하자」고 주장한다. 중립국도 아니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제3세력의 위상 확보를 거론한다. 東아시아 평화의 지렛대 역할을 자임한다. 東아시아의 지역공동체를 주창하면서, 그 조건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전제한다.
  
   姜萬吉 교수는 「反共·反北 의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남쪽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면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을 지향하던 시대의 反共의식이나 反北인식을 가지고 협상통일을 수행해 나갈 수 없음은 말할 것 없고, 예를 들면 6·25 전쟁을 체험한 기성세대에게는 민족의 다른 한쪽이 분명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敵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敵이 아니고 同族일 뿐이다. 그리고 敵이 아닌 동족으로 볼 때 평화통일·협상통일이 가능하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의 다른 한쪽을 敵으로 간주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남북교육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교육마당」 2000년 8월호)
  
   1948년 8월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반세기 동안 金日成·金正日이 이끄는 북한 공산주의 집단과 처절한 체제경쟁을 벌여왔다. 이 체제대결은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분배와 균등」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적 생산방식 사이의 투쟁이었다. 그 싸움에서 공산주의적 생활방식은 패배했다. 이게 냉전의 본질이었다. 反共은 우리 국민들에게 하나의 일체감을 형성시켜 온 이데올로기였다. 아직도 냉전的 대치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反共을 포기하라니 대한민국은 자연히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金日成·金正日 독재 비판 없어
  
   姜萬吉 교수는 全斗煥 군사정권下에서 1980년 학생선동죄로 1984년까지 해직교수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姜萬吉 교수는 어느 사학자들보다 李承晩 독재, 朴正熙·全斗煥의 군사독재를 증오한다.
  
   그러나 그의 글 어느 구절에서도 남한의 군부독재보다 훨씬 더 지독한 金日成·金正日 父子의 권력세습과 공산독재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없다. 그저 민족주의와 동포애로 얼버무리고 있다.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이루어진 남북한의 체제전환에 대해 姜萬吉 교수는 정반대되는 태도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維新체제에 대해서는 『저 악명 높은 維新체제』, 『발악적인 維新체제』라는 말로 원색적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金日成이 1인 독재체제를 강화한 데 대해서는 「북녘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자신의 기반을 한층 더 튼튼히」라는 표현으로 슬쩍 비켜가고 있다.
  
   姜萬吉 교수가 대부분의 저술에서 북한 체제를 「공산주의」라고 기술하지 않고 「사회주의」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수많은 저술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별 차이 없이 혼용된다.
  
   姜萬吉 교수는 「공산주의」라는 표현을 슬쩍 「사회주의」라는 말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북한 체제에 대한 경계심을 희석시킨다. 北의 체제를 「金日成 정권」으로 기술하지만, 결코 「金日成 공산독재정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姜萬吉 교수는 북한의 경제난과 혹심한 기근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북녘은 東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 그 위에 계속된 미국의 경제봉쇄에다 잇따른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여기에다가 그는 「金日成의 갑작스런 사망」을 핑곗거리로 대고 있다.
  
   미국의 對北 봉쇄가 왜 초래되었나? 姜萬吉 교수는 미국의 「對北 압박정책」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고 주장할 뿐, 金正日의 마약밀수·납치·달러 위조·장거리 미사일 및 핵개발 등이 對北 압박정책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자연재해가 있었다고, 혹은 미국이 경제봉쇄를 했다고, 지도자가 급사했다고 해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나라는 북한 밖에 없다.
  
   姜萬吉 교수는 북한에서 수백만 명의 餓死者(아사자)가 발생하게 된 자연재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는다. 金正日의 一人 수령독재와 사회주의 폐쇄경제가 가져온 폐단이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땔감이 부족하여 산의 나무를 베어서 불을 때거나, 식량이 부족하여 산 기슭을 개간하여 지나치게 경작지로 이용하다가 홍수피해를 당하게 된 과정을 외면하고 있다.
  
   朴正熙 정권 시절의 인권탄압을 소리 높여 비판하던 姜萬吉 교수는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생존권이 더 시급하다」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이 脫北者가 발생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지원을 역설한다. 북한의 경제난이나 인권문제는 기본적으로 「자유」의 문제라는 것을 姜교수는 외면한다.
  
  
   韓美동맹 부정
  
  2000년 6·15 남북 頂上회담차 訪北했을 때 동명왕릉을 돌아보는 姜萬吉 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
  
   姜萬吉 교수는 韓美동맹의 존속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韓美동맹은 非정상적인 국제관계이고, 미국인들이 세금을 많이 물고, 해외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미군의 해외주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미국 내에서 철수를 거론하여 언젠가는 미군철수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東北亞공동체가 형성되어 한국·중국·일본이 평화롭게 살면 駐韓美軍이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美軍이 주둔해야 東아시아의 평화가 보장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東아시아가 평화롭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東아시아인들의 자존심 문제다』(「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姜萬吉 교수는 앞으로 南北공조가 韓·美·日의 3각 공조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지난날 韓·美·日 공조체제와 朝·中·蘇 공조체제의 대립은 우리 땅의 통일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남녘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오면서 정치·외교·경제·문화적으로 긴밀할 대로 긴밀해진 韓·美·日 공조체제를 곧바로 깨뜨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협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북공조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姜萬吉 교수의 이런 주장들은 최근 언급된 盧武鉉의 「자주국방론」이나 「東北亞균형자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미래한국신문」(2005년 8월23일자)은 그를 『親北史觀을 유포시키는 대표적인 親北 사학자』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민중주의적 통일史學」은 다음과 같은 치명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첫째, 姜萬吉 교수의 역사인식은 감상주의적·관념주의적·非현실주의적 명분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姜萬吉식의 역사인식이 널리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된 이유는 한국적 풍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국인들은 대의명분에 약한 전통이 있고, 日帝 강점기·광복·분단·한국전쟁으로 이르는 불행했던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이 접목되었다.
  
  
   非현실주의적 낭만론 득세하는 풍토도 문제
  
   레닌의 지침을 충실히 본받아, 「민족통일전선」으로 공산통일이 이룩된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대륙과 베트남의 공산화이다.
  
   만약 金正日의 對南공작이 먹혀들어서 駐韓美軍 철수→연방제→공산통일로 가는 길에 접어들 때 姜萬吉 교수가 『북한의 金正日이 그렇게 나올 줄은 나도 몰랐다. 남한의 민중들에게 정말 미안하다』라고 사과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둘째, 姜萬吉 교수는 「협상통일·대등통일을 인내와 협력을 통해서 추진하라」고하지만 통일한국의 이념과 체제에 대해서는 얘기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대한민국이 평화통일을 추진할 때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은 자유·민주적 질서에 의한 통일인 것이다.
  
   姜萬吉 교수는 통일한국의 체제와 이념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떤 체제와 이념을 담고 있는 통일된 나라를 원하는지를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는 줄기차게 독점화의 폐단과 빈부격차 등 자본주의의 積幣(적폐)를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통일 후의 체제는 과연 무엇일까?
  
   姜萬吉 교수는 「민족주의」와 「통일사학」이라는 방패막이 속에 자신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자신의 이념적 正體性을 밝혀야 할 것이다.
  
  
   『「역사의 神」 앞에서 떳떳한가』
  
   셋째, 姜萬吉 교수는 「일어났던 그대로의 사실」을 규명·해석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서 사회변혁을 유도하고 나아가 협상통일·대등통일을 위한 도구」로서의 국사학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침소봉대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姜萬吉 교수는 金日成의 抗日운동을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구사하여 韓美군사동맹을 체결해 낸 李承晩의 외교적 업적이나, 소득 1만 달러 시대와 세계 경제 12위 국가의 기초를 닦은 朴正熙 정권의 근대화 기여를 심하게 폄훼하고 있다.
  
   姜萬吉 교수는 스스로를 역사의 진보를 신봉하는 이상주의자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 그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恩師인 姜萬吉 교수께 묻고 싶다.
  
   『스승님은 金正日의 인질이 아니라고 「歷史의 神」 앞에서 떳떳이 말할 수 있으십니까?』●
  
  
  
[ 2005-10-23, 10: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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