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8일 日本의 진주만 공격 배경
기사 原題 : 진주만의 誤算, 日本과 美國은 왜 開戰에 이르게 되었나?…만주에서의 日美 대립으로 불씨 촉발)

펀드빌더(회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2015. 4. 23. 산케이(産經)신문

1941년 12월8일, 구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여, 태평양을 무대로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한
다. 당시, 미국의 생산력이 日本의 10~20배나 되었기 때문
에 日本 군부내에서도 對美戰에 소극적인 목소리가 많았는
데도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원인은, 진주만 공
격 36년 전에 있었던 日露전쟁의 강화를 중개(仲介)한 미국
과의 갈등(인식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타깃은 만주(満州)
1900년 6월, 유럽의 열강이 차례로 청나라로 진출하는 가운
데, 산동성(山東省)에서 발생한 배외운동(排外運動) '의화단
의 난'(義和団の乱)이 순식간에 북경(北京)으로까지 확산되
었다. 이 때문에 日本 등 8개국이 현지에 거주하는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난(乱)을 평정한 것까지
는 좋았는데, 이후 각국이 병력을 철수시킨 것에 반해, 러시
아는 자신의 군대를 만주로 파견했다.
이러한 러시아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낀 것은 日本과 미국
이었다. 남북전쟁 후, 유럽에 맞서 지배력을 넓히고자 한 미
국이, 하와이, 필리핀에 이어 노린 곳은 만주였고, 日本도 본
토를 러시아로부터 지키는 방어선으로서 만주를 필요로 했
다. 그리고 러시아의 진출을 억지하기 위해, 1904년 발발한
日露 전쟁에서 日本을 자금 지원한 미국이, 日露 양국의 강
화체결에 적극개입한 이유도 만주에서의 이권을 노렸기 때
문이다.
강화체결 후 미국의 철도왕 에드워드 핸리 해리먼은 日本이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권익 중에, 신경(新京, 長春)으로부터
대련(大連) 구간을 달리는 철도(南만주철도)의 공동경영을
1억엔(円)의 재정지원과 함께 맡게 해달라는 요청을 日本
에 제안하게 된다. 1903년 日本 국가예산이 약 2억6000
만엔(円)이던 시절의 1억엔(円)이다. 가쓰라 타로(桂太郎)
수상은 해리먼의 제안을 환영하며 받아들인다.
그런데, 해리먼과 길이 엇갈귀국한 외상(外相) 고무라
주타로(小村寿太郎)는 반대한다. 많은 국민의 희생을 지불
하고 얻은 권익을 미국과 나누게 되면 나중에 후환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는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최종적으로는
이권을 미국에게 빼앗기게 될 우려가 있음을 염두에 두었
던 것으로 보인다.
가쓰라(桂) 수상은 결국 고무라(小村) 외상의 의견에 따르
게 되는데, 갑작스러운 日本의 방침 파기에 해리먼은 극도
로 분노하게 되었고 이후 日本과 미국은 갈등 양상으로 접
어들게 된다.

■日美 대립의 심화
만주를 향한 미국의 태도는 집요했다. 1909년 日本과 러시
아 양국이 보유한 만주내 철도 권익을 중립화시켜 미국 자
신을 포함하는 공동관리 체제로 할 것을 제안하는 외에,
존 만주철도 구간에 새롭게 병행하는 철도의 건설 등도 계
획하지만, 미국은 모두 실패하게 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
은 미국은, 1922년 워싱턴으로 주요 9개국을 불러 군축 회
의를 개최하여, 日英 동맹의 파기와, 청나라 붕괴후 성립한
중화민국에 대한 일본의 진출 억제 등을 포함하는 '日本 弱
體化'를
목적으로 하는 합의(合意)를 이끌어 낸다.
아울러, 미국은, 만주를 다스리는 장작림(張作霖) 정권과
만주철도에 대항하는 철도건설과 동시에, 만주철도와 연결
되는 대련항(大連港)에 대항하여, 대련(大連)과 발해(渤海)
만을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호호도(葫芦島, 후루타오)에 무
역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한다. 중국의 對日 저항도, 미
국의 지원하에 점차 강해져 갔다.
그러던 중에 1931년 봉천(奉天) 교외에서 발생한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중국과의 무력충돌(만주사변)에
이어, 6년 후에는 북경(北京) 교외의 노구교(盧溝橋)에서
중국・국민당軍과의 분쟁이 발발하는 등 戰線은 확대되어
만 갔다.
여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전혀 물러섬이 없는 日本에 대해,
드디어 미국은 <중국에서의 미국 이익이 일본군에게 침해
당했다>며 1939년에 日美통상항해(通商航海) 조약의 파기
를 일본측에 통보한다. 즉, 자원이 빈약한 日本을 향한, 석
유와 철(鉄) 등 전쟁지속 수행에 필요한 물자의 수출을 금
지함으로써 日本 弱體化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日本은 초반에 동요했지만, 이내 東南아시아
의 자원지대로 눈을 돌렸다. 당시, 협조 관계에 있었던 독일
이 프랑스를 이겨, 프랑스령(領) 인도시나(仏印=現베트남,
라오스,캄보디아)가 마침 일본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
되었다.
그런데, 미국에게 있어서도 인도시나(仏印)는, 중국쪽으로
자원을 이송하는 수송 루트에 해당했기 때문에 미국은, 日
本軍의 인도시나(仏印) 주둔에 강경하게 반대한다. 1940년,
日本軍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를 간파하는 가운데, 북부 인
도시나(北部仏印)에 주둔하면서, 독일, 이탈리아와 군사동
맹을 체결한다. 1941년에는 남부인도시나(南部仏印)에
출한 일을 두고 미국과의 갈등이 더욱 선명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
本五十六, 1884~1943) 대장(大将)은, 미국과 싸울 것이라
면 우선 하와이의 미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지 않고는
그 이후로 전세를 우세하게 가져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항공기에 의한 공격을 계획한다.
항공모함 6척과 항공기 400기(機)라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기동부대를 편성하고, 진행중이던 對美교섭의 결과
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선전포고(宣戦布告) 직후의
기습공격을 위해 11월22일, 하와이를 향해 진로를 잡는다.
그리고 10일 후에 해당하는 12월2일, 사나운 파도의 태평
양을 항행하는 항공모함 '아카기'(赤城)의 함교내(艦橋内)
에서, 기동함대의 지휘를 맡은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1944) 중장은 진행중인 對美교섭 결과를 신경쓰고
있었다.
교섭 결과에 따라 기동부대를 회항시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오후 5시반에, 본토 야마구치(山口)
에 위치한 연합함대로부터 온 전문을 보고받게 된다.
<本文, 니이타카야마노보레 1208>이라고 된 전문이었다.
12월8일 개전하라는 내용이었다. 니이타카야마(新高山)는
당시 日本이 통치하던 대만의 산(山)으로서(현재는 玉山)
표고가 3952미터로 후지산보다 높은 日本의 최고봉이었
다.
1941년 12월, 하와이로 향한 항공모함 여섯 척으로 구성
된 기동부대에 대해, 8일 개전(開戦)을 명령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大將)은
'선전포고'로부터 30분 후에 공격한다는 모험적 스케줄
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외교적
절차를 확인해 둔 것은, 부임(赴任) 경험을 통해 미국의
힘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공기를 이용한 진주만 공격 검토
야마모토(山本)가 항공기에 의한 진주만 공격을 처음으로
입에 올린 것은 1940년 3월 합동훈련 당시였다. 항공기에
의한 對艦 어뢰공격의 성과에 만족한 야마모토(山本)는,
<하와이에 대해서도 가능하지 않겠나>하며 연합함대 참
모장 '후쿠도메 시게루'(福留繁, 1891~1971) 소장(少将)
에게 말을 건넸는데 후쿠도메(福留) 소장은 당시 미심쩍
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日本이 애초 의도한 對美戰은 日露전쟁 당시의 海戰과 같
이 진주만으로부터 출항해 나온 美軍 함대를, 여러 겹으로
대열을 이룬 잠수함과 항공기를 동원하여 공격함으로써
美함대에 큰 타격을 준 후, 日本 근해에서 결정적으로 요
격하여 승부를 낸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학과 해군 무관으로 미국에 부임한 경험을 갖고
있는 야마모토(山本)는 일찍이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으로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것 외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1930년 이후로 개발에
몰두해 온 항공기에 의한 공격이었다.
야마모토(山本)는 1941년 1월,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
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郎, 1891~1945) 소장에게 작전
연구를 명령한다. 오니시(大西)는, 특공대의 창설자로 알
려져있지만, 애초부터 야마모토(山本)와 함께 해군內에
서 제일가는 비행기통(通)이었다. 야마모토(山本)로부터
작전 입안(立案) 가능성 여부 검토를 명령받은 오니시(大
西)와, 오니시(大西)가 발탁한 제1항공전대(航空戦隊) 항
공참모 '겐다 미노루'(源田実) 중좌(한국 중령格) 등은
전 검토 결과, 진주만의 수심이 문제가 된다는 결론을 얻
는다.
통상, 어뢰를 장착한 뇌격기(雷撃機)가 고도 100미터 상
공에서 투하한 어뢰는 일단 수심 60미터까지 밑으로 가
앉을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진주만의 수심은 12미터
밖에
안된다.
이대로라면 어뢰는 해저에 부딪쳐버리기 때문에,
유일한 대안은, 항공기가 해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낮
게 날면서 어뢰를 떨어뜨려 어뢰가 곧바로 전
진하도록 하
는 식의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에, 진주만과 지형이 비슷
한 가고시마(鹿児島)・긴코
만(錦江湾)에서 민가 지붕 정도
높이
까지 고도를 떨어뜨린 상태로 뇌격기(雷擊機)를 조종
하며 어뢰를 투하하는 훈련을 하게 되었고, 이런 비행기
모습을 보게 된
주변의 주민들은 <요즘 해군은 군기가 빠
져 비행이 엉망이다>는 이야기를 하
게 될 정도가 되었다.

■미국의 절연장(絶緣狀)
당초, <투기적(投機的)이다>라는 이유로, 항공기를 이
한 對艦공격 효과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해군군령부(海軍
軍令部)는, 야마모토(山本)의 작전에 난색을 보였
는데,
<작전을 승인해 주지 않으면 연합함대사령관 자리를 내놓
겠다>는 야마모토(山本)의 강경한 태도에 놀
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승인한 것이 1941
년 10월19일이었
다.
일부 인원 외에는 알리지 않고 실시한 맹훈련의 결과, 어뢰
가 수심 10미터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투하할 수
있을 정도
까지의 기량에 도달하게 되었다.
출격에 즈음하여 고안한,
어뢰 양쪽에 붙인 베니어판(板) 필레
(살)가 부력효과를 높
여 준 것도 문제해결에 큰 도움
이 되었다.
작전은 극비였던 만큼, 가고시마(鹿児島)에서 훈련을 마친
함대는 오이타(大分)県・사이키만(佐伯湾)에 집
결 후, 북방
사도(北方四島)의 에토로후섬(島) 히토갓
푸만(単冠湾)으
로 향했는데
일부 함대 수뇌부 외에는 작전과 관련한 사항
이 비밀에 부쳐졌다.
11월22일, 기동부대인 20척 이상의 전함이 히토갓푸만(単
冠湾)에 입항했다. 마지막으로 항공모함 '가가'
(加賀)가 도
착한 23일 이후 비로소 탑승원 및 승조원
전원에게 작전이
공지되었다.
한편, 일본과 미국간 교섭도 당시 막바지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으로부터 日本軍의 철수 △만주국(満州国) 승인
△통상관계 정상화 등이 주요 이슈였는데, 日本이 1941
7월, 프랑스령(領) 인도시나에 주둔한 것을 계기로,
영국
과 중국, 네덜란드 또한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에
나섰다.
그리고 11월27일, '코델 헐' 美국무장관이 내민 '헐 노트'
는, 日本軍이 중국으로부터 완전 철수하는 것 외에
도, 미
국이 지원하는 (일본을 대적하는) 장개석(蒋介
石) 정권의
승인과
日獨伊 삼국동맹의 폐기를 요구하는 등의 내용으
로 되어 있는 절연장(絶縁状)과 다름
없는 수준이었다.

■선전포고와 開戰
이에 대해, 日本은 12월1일, 천황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에 대한 開戰을 결정한 후, 선전포
고 시간
을 워싱턴 시간으로 12월7일 오후1시(日本시간
8일 오전
3시)로 정하고, 開戰은
선전포고 후 30분으로 하기로 했
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6일 오전 6시半(日本시간 6일 오후
8시半),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외상
(外相)은 駐美 일본
대사관을 향해, '헐 노트'에 대한 각
서(覚書)를 14部 나누
어서
보내는 전문(電文)을 발신했다. 정오를 넘기기까지
시간을 소요하며 13部를 보
냈는데, 방대한 암호전문이었
기 때문에 독해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날은 南美로 전근을 가는 일등서기관의 송별회
가 예정되어 있었던 관계로 저녁 때까지 8통을 번
역한
상태에서 全員이 사무실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14부를
수취한 것은, 다음 날인 7일 오전 7시로서, 공
격예정 시
간으로부터 6시간 前이었다.
선전포고문에 해당하는 14
部는 短文이지만, 문서작성할 때 타이피
스트를 쓰지 말
고 대사관내 담당 외교관이 직접하라
는 일본 정부의 지
시 때문에 문서작업은 느리게 진행
되어, 전날 도착한 13
部도 미처 작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로부터 4시간半 後인 日本시간 8일 오전 1시半(워싱
턴은 오전 11시半), 진주만 북방 약 460킬로미
터 거리까
지 육박한 기동부대 항공모함 및 함대는,
탑재한 공격기
중 171기(機)를 그 시각
로부터 1시간 15분 후에 발함
(発艦)시킨다.
야마모토(山本) 대장은 그때, 히로시마(広島)・하시라
(柱島) 앞 바다에 정박중인 연합함대 기함(旗艦)
'나
토'(長門)의 작전실에 있었다. 야마모토(山本)는
對美각
서를 미국 정부에게 전달하는 시간에 대해 참모
에게 再
확인을 한 후 눈(目)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공격기
가 항공모함으로부터 발함(発艦)했다는 電
文을 받은 상
태에서, 8일 오전 3시 19분, 갑자기 작전
실의 문이 열리
고 <전군돌격 명령입니다>라는 참모
의 긴박한 보고 목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하와이 공격기 지휘를 맡은 '후치
다 미쓰오'(淵田美
津雄, 1902~1976) 중좌(중령)가 탑승
한 공격기로부터 발신된
電文이었다.

日本시간 1941년 12월8일 未明, 하와이 근해에 위치한 日

기동부대로부터 발함(發艦)한 171機의 제1진 공격대는
저공
으로 하와이에 침입한 오전 2시 52분에, 기습공격
성공을 의
미하는 電文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
를 발신한다.
완전히 허를 찔러 습격한 日本 항공기는 정
박중인 미군 전
함과 비행장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런데,
최대 공격 목표
였던 미군의 항공모함은 없었다. 아울러,
공격 30분전에 공
표될 예정이었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
가 늦어진 것을 알
게 된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
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대장은 화려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 도라 도라 도라

현지시간으로 7일 오전 5시55분(일본시간 8일0시55분) 日
기동부대는, 美태평양함대가 정박하는 진주만으로부터
460킬로미터 거리까지 육박하자, 후치다 미쓰오(淵田美
津雄,
1902~1976) 중좌(한국의 중령格)가 이끄는 제1진 공
격대를
발진시키고, 한 시간 10분 후인 7시5분에는 제2진
공격대
170機를 발진시킨다.
이날은 평온한 날씨였지만, 상공에 퍼진 두꺼운 구름층
때문에 공격대는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하와이 방송국으
로부터 흘러나오는 하와이언 송을 방향으로 삼아 정확한
항로로 날아 가고는 있었지만 구름 때문에 바다(海)나 섬
(島)이 전혀 안보이는 답답한 상태였다.
후치다(淵田) 중좌가 <이쯤이 하와이 상공일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구름이 뚫린 사이로 눈에 확 들어온 것은,
공격 목표인 하와이 오아후섬(島)이었다. 만(湾) 내에는
2열(列)로 정박 중인 戰艦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진주
만에는 미군 전함 8척을 포함하여 모두 94척의 함정이 정
박하고 있었다.

제1진 공격대는 섬(島)의 북단 곶(岬)을 통해 저공으로 섬
(島)으로 침입하여 해안선을 따라 진행하며 여섯 갈래로
나누어 제각각 만(湾)과 비행장으로 향했다.
오전 7시49분, 섬(島)의 남단 가까이에 위치한 진주만을
확인한 후치다(淵田)가 탑승한 비행기는 '全軍돌격 명령'
을 내리고 난 후 3분이 지나도록, 진주만 상공에 敵의 전
투기 모습도 안보이고, 대공포 진지로부터의 공격도 없
는 것을 확인하고, 기습성공을 의미하는 '도라 도라 도
라' 電文을 쳤다. '도라'라는 것은 '돌격'(도쓰게키,突撃)
과, 뇌격(라이게키,
雷撃)을 조합한 암호로서, 제1항공함
대 旗艦인 항공모함
아카기(赤城)로 전송된 전문은, 동
시에 히로시마(広島) 앞
바다에 정박중인 연합함대 旗艦
나가토(長門)에게도 수신
되었다.
아카기(赤城)의 함교(艦橋)에 있었던 제1항공함대
사령
관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1944) 중장과, 참모
장(参謀長) 구사카 류노스케(草鹿龍之介, 1892~1971)
소장
은 서로 손을 잡고 기뻐했지만, 전함 나가토(長門)
의 작전
실에 있었던 야마모토(山本) 사령관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
이지 않았다.

미국측은 공습을 받기 전, 일본으로부터의 공격 징후를

악했다. 현지 시간으로 12월7일, 오아후섬(島)으로부
터 10
~20킬로미터 위치로 접근한 日本 잠수함에서 발
진한 특수
잠항정(特殊潜航艇) 5척 가운데 1척을, 만(湾)
의 입구 부근
에서 초계중이던 미군 구축함 '워드'가 발
견했던 것이다.
특수잠항정은 2인승으로 全長 약 24미
터, 배수량은 49톤이
다. 두 발의 어뢰를 발사할 수 있는
공격능력을 갖추고 있
다.
오전 6시40분, 구축함 '워드'의 함장인 'G・E・데이비스'
위는 국적불명의 소형잠수함을 향해 포격을 가하여
잠수
함의 함교(艦橋)를 파손시켰지만, 잠수함이 물 속
으로 잠
항했기 때문에 폭뢰(爆雷) 공격을 가했다. '데
이비스' 대
위는 곧 함대사령관에게 보고했으나, 당시,
고래 혹은 어
선을 敵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보고가 최종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아울러, 섬(島)의 북단에 설치된 레이더가 日本공격기
을 포착했지만, 이것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기지에
도착
하기로 되어 있던 미군 폭격기 편대로 착각하여
보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日本에게 있어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미국측의 실책이
이렇게 겹친 것이다.
오전 7시55분, 급강하로 진주
만으로 들어선 한 대의
공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자 '호일
러', '휘컴' 두 군
데 미군 비행장을 향하던 일본 폭격기들
이 본격적으
로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아울러 어뢰를 장착한
뇌격 공격기가 해면을 아슬아슬하
게 스치듯 비행하
면서 투하한 어뢰는 정확히 직선 항로를
그리며 정
박중인 미군 함정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여기
저기
서 커다란 물기둥이 솟구쳐 오르고 굉음(轟音)이 울
려퍼졌다.

미국측에게는 당시 이러한 어뢰공격이 가장 충격적인

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수심이 얼마 안되는 진주
만에서
의 어뢰공격은 불가능하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군은 제대로 된 방어책 하나
없이 속수무책
으로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제1진 공격에 이은 제2진 공격까지 약 두 시간에 걸친
격으로 미군은 전함 4척 침몰을 포함해 모든 함정이
손상
을 입었으며, 비행장의 경우, 300機 이상의 미군
항공기가 파
괴되었다.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린 것에 대해, 기동부대와 히로
시마
연합함대 사령부는 무척 고무되었지만, 사령관인
야마모
토(山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주요 공격 목표
인 '엔터
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라는 항공모함
세 척 모두가,
정비 혹은 항공기 수송 등의 임무에 투입
되는 바람에 공습
시에는 진주만에 없었기 때문에 아무
런 손상도 입지 않은
것이다.
제공권을 장악하는 쪽이 향후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가
된다고 예상하고 있었던 야마모토(山本)는, 미국의
항공
모함을 無力化시킴으로써 결정적 우위에 올라서고,
미국
이 생산력을 본격 회복하기 이전에 조기 和平(강화)
에 들
어간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원래 공격 30분 이전에 미국 정부에게 통보되었어야 할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對美각서'는, 공격 개시로부터 55
분 경과한 7일 오전 8시50분(워싱턴 시간으로 오후 2시
20분)에야 비로서 미국측에 통보되었다. 14부로 나누어
져 암호전문으로 발송된 對美각서를, 번역과 함께 타이
피스트를 쓰지 말고 직접 담당 외교관이 작성하라는 일
본 본국의 지시가 원인이었는데, 일본의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하던 주미 대사관 소속 일본 외교관의 방
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야마모토(山本)에게 있어 그 원인은 어떠하든
상관이 없었다. 유학과 무관 자격으로 미국 부임 경험
을 갖고 있는 그가 아는 한, 미국인의 국민성을 감안하
면, <비겁한 기습 공격>으로 밖에 비쳐질 수 없는 이러
한 외교적 실수는 전쟁 수행에 있어 두고두고 큰 짐이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전의를
상실케 하고자 계획했던 작전이, 오히려 잠자는 사자
를 깨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桜島での雷撃訓練(イラスト)
진주만 공격을 맡은 일본 뇌격기(
雷擊機)가, 開戰 前에 뇌격훈련을 하는 모습(
일러스트).

 

零式艦上戦闘機(零戦)
태평양전에서 출격하는 제로센(零式) 함상 전투기.

旧日本海軍の戦艦「長門」 
     일본 전함 '나가토'(長門).

1941年12月7日、日本軍のハワイ真珠湾攻撃で、炎上して沈む米戦艦(ロイター=共同)

日本의 진주만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美전함.


日本軍の空爆で爆発炎上する米'366;逐艦「ショー」。9月11日発生の米国同時多発テロ事件と比較される(AP)
하와이 진주만에서 일본군의 공습으로 폭발을 일으키는 美구축함 '쇼'.

昭和16年12月8日のハワイ真珠湾攻撃に参戦した航空母艦「加賀」の元乗組員が公開した「炎上する米軍施設」の写真(共同)

진주만 공격 참전 함공모함 '가가'(加賀)의 前승조원이 공개한 진주만 공격 당시
'폭격받는 미군 시설' 사진.


  일본 전함 무쓰(陸奥).


  일본 전함 휴가(日向). 


  일본 전함 야마시로(山城).

  일본 항모 아카기(赤城). 

   일본 항모 가가(加賀). 

  일본 항모 쇼카쿠(翔鶴, 앞쪽)와 즈이카쿠(瑞鶴, 뒤쪽).

    일본 순양함 가코(加古).

  일본 순양함 묘코(妙高). 

  일본 순양함 다카오(高雄). 

   일본 순양함 모가미(最上).

   일본 순양함 스즈야(鈴谷).

   일본 순양함 유바리(夕張). 

  스라바야 해전에서 영국 순양함 '에그제타'가 일본 구축함으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아 피격되는 순간. = 1942년3월 촬영.

 일본 66式 잠수함.
 
   솔로몬 해전에서 일본함대의 대공포화. = 1942년11월 촬영.

  일본 항모 소료(蒼竜).


  일본 항모 히료(飛竜).

  미드웨이 해전에서 '요크타운'호를 공격하는 일본 함재기. = 1942년6월5일 촬영.


  진주만 공격을 위해 이동하는 연합함대 함모. = 1941년12월 촬영


真珠湾攻撃に加わった特殊潜航艇=広島県江田島市の海上自衛隊
진주만 공격에 참가한 일본의 특수잠항정(特殊潜航艇).



真珠湾で撃沈された後、引き揚げられた戦艦オクラホマ=1943年5月(AP)
진주만에서 침몰된 후 인양되는 전함 오클라호마. = 1943년 5월

山本五十六・連合艦隊司令長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舊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https://youtu.be/-ZJ3T7PBO6Q
 
 
[ 2018-12-05, 08: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이중건     2018-12-05 오전 9:23
풍부한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