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한국전쟁기,김일성의 인민군 및 좌익의 학살만행 사례 분석과 고찰

이승현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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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 글은 디펜스 코리아(www.defence.co.kr) 의 '전쟁사 일반' 게시판에 올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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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말부터, 이른바 '진보'라 자칭하는 '말'지나 '한겨레'로부터 시작된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의 우익측의 '학살'에 대한 증언록이나 취재기사가 너무나도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로 일반 대중들에게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그러한 상당부분 조작이 가해지고 당시의 상황설명을 좌익의 관점에서만 해석한 '우익학살'에 대한 논문과 선전들이 학계와 일반여론매체의 대세를 장악하면서 마치 50여년전 일어났던 학살사건들이 전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세력들만이 저지른 학살인양, 좌익 학살은 단 한건도 없었던 양, 아니면 좌익의 학살은 학살이 아니라 마땅히 죽여도 시원치 않을 '민족반역자 및 반동분자'들을 '응징'한 것인 양 거짓왜곡하는 작태가 한국 현대사학계를 뒤덮고 있고, 또한 이것들이 일부의 청년층을 비롯하여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개탄할 만한 현실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비단 이 한국전쟁에 대한 의도된 왜곡뿐만 아니라, 수십만 파월장병의 피와 희생정신을 모독하는, 한겨레21을 필두로한 악의에 가득찬 한국군의 월남참전 비하와 월남인에 대한 날조된 '학살'기사들이 더더욱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월남전과 관련한 한겨레 21의 구수정을 비롯한 기자(?)들의 기사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는 추후에 논하기로 하고 일단 김일성 정권의 한국전쟁기 학살극의 전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만연한 수정좌파들의 주장들을 다시 한번 고찰해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역사인식이며 친북좌익측의 '우익학살만행'의 주장이 얼마만큼 왜곡되었는가, 오히려 좌익의 학살이 그 드러난 양태상 학살의 원뜻에 가장 충실한 것이었고, 그 잔인성 또한 우익의 보복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심각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단, 당시 극심한 제로섬게임을 지향하던 냉전구도의 한복판에서 좌우양측이 무차별 보복을 벌일 것이 뻔히 보이는 '한국전쟁'을 과연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책임문제가 학살을 거론함에 있어서 선결되어야만 할 과제일 것입니다..한때 북침설이니 남침유도설이니 하며 주사파계열에서 악을 쓰며 떠들어대던 쓰레기같은 논리들은 이미 소련의 비밀문서 공개와 북측에서 탈출한 당시 참전장교들의 증언으로 완벽한 허구이자 기만극이었음이 만천하에 공개된 만큼, 굳이 여기에서 가타부타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MBC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룬 바 있었던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은 당시의 첨예한 냉전대립의 역사적 상황과 대한민국의 존립위기 자체가 허물어질 위기에 있던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없는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적이 있지요...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상세히 살펴보시면 알겠지만, 최근 재야사학을 하는 이도영씨가 미국문서보관서에서 찾아냈다는 일부 한국전쟁기의 남침으로 인한 후퇴의 전황을 기록한 문서에 첨부된 '센세이셔널'한 자극적 총살장면사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간간이 몽타쥬기법으로 도배하며 당시 총살된 좌익들의 가족들의 증언만을 토대로 전황의 전후사정을 거의 생략해 버린채로, 오로지 '좌익'측이 재판없이 처형되었다는 '무고함'만을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가는 바이나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있을런지...
  
  지금의 관점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을 그 당시 상황에 직접 투영하여 생각해봅시다. 김일성과 남로당을 추종하는 좌익이 아니라면, 6월 25일 새벽, 그것도 평화로운 휴일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단란한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 때, 소련이 전폭적으로 지원한 탱크와 중화기 등을 동원해 수십만 군대로 불법침략하여 파죽지세로 적이 밀고 내려오는 그때, 선량한, 올바르고 성숙한 의식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심한 분노, 그 외에는 결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적치하에 가족들을 남겨둔채로 홀홀단신 남으로 남으로 쫓겨내려가는 그 무렵, 비록 전향 또는 과거 잘못을 뉘우치겠다고는 했지만 불과 1년전만 해도 서슬퍼런 죽창과 무기를 들고 대한민국 파괴를 위해 광분하던 좌익들의 일시적 집합체인 '국민보도연맹'을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물론 아무리 전시하라지만 재판과정이나 정식적인 절차없이 대량으로 처형했던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두고두고 비판받아 마땅할 일입니다...그에 대한 충분한 자기반성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미 그 때는 '대한민국'이란 용어 자체가 사라지기 일보직전입니다..법적 정의 및 법적 인권은 국가란 것이 존립할 때나 성립하는 용어입니다..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가족은 커녕 자기 한목숨마저 보장해 줄만한 아무런 국가적 보호장치나 장래가 불투명한 그 시점에 과연 오늘날식의 인권개념의 적용이 가능했을까요?
  
  나중 일이지만, 국민보도연맹 출신으로서 처형되지 않고 감옥에서 나오거나, 숨어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인민공화국의 치하가 되자마자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의 색출, 학살에 미쳐날뛰었던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수도 서울에서 있었던 12만명을 상회하는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학살은 인민군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 밑에서 수족노릇을 하던 이들 보도연맹원 출신 남한 출신 좌익들이 주로 행했습니다..게다가 국민보도연맹이란 것은 각 지역별로 조직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살던 지방의 우익은 누구이며 좌익은 또한 누구인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자기 가족들의 신상을 잘알고 있는 '위험요소'들을 내버려 둔채, 후퇴한다는 것은 감정과 생존본능을 가진 인간인 이상,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특히 오랜 역사적 기록들을 봐도 전쟁 하의 인간은 '이성'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극히 '생존'에만 집착하는 동물적 성향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좌익측이 벌인 학살은 미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기 훨씬 전인 6월말부터 9월사이에 자행되었습니다.(단, 남한지역의 학살에 한정할 때 그러하고, 북한지역은 그 이후) 그 무렵은 국군이 부산까지 후퇴하여 좌익측 입장에서는 이제 남한은 완전 적화되었다며 득의양양해하고 있던 시점입니다...한마디로 절대로 인민군과 좌익측 입장에서는 '절박한 위기'로 사태를 인식하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그렇게 대대적인 무참한 학살극을 벌였던 것입니다.. 좌우익의 행태가 겉보기에는 같아 보여도, 정세를 면밀히 따져보면, 실상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익은 '생존'을 위해, 좌익은 '보복'과 '인민길들이기'를 위해 학살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무리가 많을까요? (물론, 모든 인명은 귀중한 것이며, 학살자체가 잘못된 것이다라는 보편적 인류애와 절대가치를 제기한다면 저는 할말이 없습니다.)
  
  좌익측의 학살 유형은 주로 '비무장한 적'에 대한 보복적 처벌로써 대량으로 행해졌습니다. 그 형태는 대개 '인민재판' 혹은 '처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인민군의 무단점령은 각 지역사회 안의 역학관계, 즉 정치적 상황 자체가 하루아침에 뒤바뀐 것을 의미했습니다.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지방 좌익들이 활개치면서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말이 재판이지, 법적 요건도 형식도 완전히 무시하고 위원장이 처형을 지시하고, 동원된 좌익들이 인민사이에서 감시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동의를 끌어내는 '인민길들이기'였습니다)을 거쳐 죽창이나 칼, 낫 등 원시적 무기로 난도질하여 처형하거나 고문 및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자체에서도 미처 피난을 못간 경찰이나 군인, 그 가족들을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인민군은 공무원이나 지식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고, 특히 그 가운데 경찰 가족이나 지방 유력가들을 그들의 진지로 닥치는 대로 연행하여 차마 야수도 하지 못할 참혹한 고문(구체적으로는 휘발유를 손, 발 등에 끼얹고 불을 붙이는 사례도 있었습니다)을 가한 다음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 대상에는 연약한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친척까지 몰살당하기도 했습니다.(인공치하에 잔류했던 유진오 박사의 학살 목격담 '고난의 90일'이란 책에도 나오지요)
  
  또한 더욱 잔인한 양태를 보인 것은 국민보도연맹에 관련되어 처형된 좌익들의 가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민재판이란 형식도 거치지 않고 산이나 강가에서 대량으로 보복학살극을 벌이는 최일선에 서있었습니다.
  
  좌익학살이 활개쳤던 것에는 미대사관의 실책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6.25 직후, 미대사관에서는 한국인 직원의 서류를 소각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도망갔기 때문에 미국인 밑에서 일했던 한국 사람은 남김없이 확인적발되어 무조건 처형되었습니다.(미대사관에 근무했던 페렌바하가 지은 '한국전쟁-이 특수한 전쟁(현암출판사)'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길)
  
  그래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후에 벌어졌던 대량학살극에 비하면 이 무렵의 학살은 양반이라 하겠습니다. 1950년 9월 20일 김일성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살려둔 수감인사들에 대한 '제거' 조치를 전체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습니다. 후송을 하되, 후송곤란시에는 즉결처치하라는 것이 주내용입니다..허나, 당장 먹을 군량미도 다 떨어져가는 마당에 어떤 인민군이 우익을 먹여가며 재워가며 후송하겠습니까? 이것을 모를리 없는 김일성이고 보면, 사실상 '전면적 학살'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일면 국민보도연맹원 처형과 비슷한 면이 나오는 것은 이 시점입니다..
  
  전국적으로 자행된 이 대량학살극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대전형무소였습니다. 1,724명의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이 대전형무소에 있었는데, 총알세례를 용케 피해 시체로 위장했던 단 한명만 살아남고 모두 학살되었습니다.(이 생존자에 의해 그 만행의 구체적 내용이 입증될 수 있었죠)..처음엔 총살을 하다가, 총알이 아깝다며 깊이 파내려간 공동우물터에 손발을 묶어 수장시키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국군이 수복하고 나서 시체썩는 냄새가 인근 수십리길에 퍼져 있어 한동안 우물터들에 접근을 주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잔학한 방법을 취한 것은, 6월에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보도연맹원 처형사건에 대한 보복심리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전남에서도 800명이 무참하게 떼죽음을 당했는데, 전북 무안에서는 퇴각하는 인민군이 주민 80명을 묶어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태워죽이기도 했습니다. 목포시의 경우 목포시 연동의 미곡창고에서 3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김대중씨가 내란음모사건으로 보안사에 잡혀가 썼던 자술서에도 언급됩니다. 김대중씨는 자신이 여기에서 알던 친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다고 했지만, 그 경위를 두고 이후 끊임없이 김대중씨는 색깔론 공방에 시달리게 됩니다), 전남 임자도의 경우 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서울에서도 인민군의 퇴각과 함께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조병옥 박사의 증언에는 학살된 시체가 종로에서만 1,000여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군에서도 일부 일어나긴 했지만, 인민군은 거의 모든 부대에서 포로를 뒤에서 감시하는 번거로움을 없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국군포로들을 죽여버렸습니다.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시,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이 일어났습니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예비검속'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그 악명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진행했습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마 모조리 이들을 학살했습니다.
  
  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후에야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우물 속(이북에는 관개용수가 부족해 이런 우물터가 남한보다 배이상 많았습니다)이나 창고, 방공호에 차곡차곡 쌓아놓았습니다. 평양에서는 감옥 우물에 처박아 넣거나 근처의 방공호에 끌고가 학살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 평양의 기림 공동묘지터와 용산 공동묘지에서도 학살이 있었습니다.
  
  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명이 학살당했습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함흥 학살의 생존자 박계주씨가 저술한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이란 책의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사건의 전모'에 기록된 숫자입니다)
  
  학살의 모습에 있어서도, 우익측은 대개 총살을 취했지만 좌익측의 학살은 총살 뿐만 아니라 죽창,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돌 등 원시적 무기를 애용(?)했습니다. 이는 좌익 측에는 학살에 앞장 선 이들이 대개 민간인으로서 총이 없었던 것에서도 기인합니다.
  
  호남지역에서는 후퇴하는 인민군이 총탄이 없어서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을 곡괭이와 삽으로 찔러 죽이는 일이 잦았고, 전북 정읍에서는 유치장에 갖힌 이들에게 휘발유를 뿌려서 그대로 소사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민군보다는 이렇다할 무기를 갖고 있지 못했던 지방좌익들의 보복방법이 훨씬 잔인성이 컸습니다.
  
  전남 광양에서 체포되어 임자도 감옥에 갇혔다가 살아남았던 농부 '엄항섭'씨의 증언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으로 우악스러운 악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괴로운 것은 몽둥이로 정갱이를 때릴 때였습니다. 구타 중에서도 이런 우악스러운 구타는 참아 배겨내기 힘드는 형벌이었습니다.......날마다 눈앞에 벌어지는 것은 체포와 학살이었습니다. 마을마다 고함과 곡성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총소리가 요란히 일어나면 몇 십명이 죽었다는 끔찍한 소문이 순식간에 좁은 섬 안에 퍼집니다. 총살 뿐 아니라 타살, 자살, 생매장 등을 일삼으로 시체는 바닷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어떤 부락은 이 통에 끼여 부락민의 반수 이상이 희생을 당한 데가 있으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정도를 짐작할 것입니다.' (김삼웅의 '해방 후 양민학살사' 중에서)
  
  민간좌익의 대부분이 근대적 무기를 소지하지 못했던 고로 학살은 마치 원시부족의 집단난투전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6.25이전에 이승만정권의 좌익탄압으로 원한을 품고 있던 경찰이나 군인, 우익인사들에게 가한 남한 좌익들의 테러와 학살은 가장 극한의 잔학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예로 44명의 치안대원이 경찰관과 그 가족들을 살해한 경남 남해군이 있습니다. 치안대원들은 경찰관들을 살해 한 후,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질겅질겅 씹어대거나 절명한 경찰가족의 배에 1척이 넘는 소나무 말뚝을 박아놓기도 했습니다. 개인적 복수심이 이데올로기라는 것과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극단적인 사례이겠지요..
  
  다소 산만한 글이 되었지만, 어쨌든 위와 같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좌익들의 학살과 그 고찰을 시도함으로써 현재 팽배할 대로 팽배한 좌익수정주의 사관에 의한 좌익학살사건의 전적인 부정현상이나 우익의 잘못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장왜곡 공격선전의 행태들을 시정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국전쟁기 좌익학살의 극히 일부의 전모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천인공노할 인민군과 좌익의 학살만행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김일성이 져야 합니다. 비록 죽었지만, 통일후에도 이 문제는 평양에 전시되어 있는 김일성이의 방부처리된 시신을 갖고 와서라도도 전범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역사적 심판은 그 후에 뒤따라야 하겠지요...
  
  아래에 김일성의 대량학살책임을 보여주는 전시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들을 몇가지만 적시하겠습니다...
  
  
  -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도피분자, 요언 전파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중에서
  
  -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 /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중에서
  
  -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 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 /'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저'에서 인용)
  
  
  게시자 : 이승현
출처 :
[ 2003-01-24, 13: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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