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은 88세 노인이다. 그만 괴롭히자. 이 글을 읽고서!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를 넘은 민주주의 국가는 다시 독재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다면 1인당 국민소득을 높인 사람이 민주주의 건설자라는 이야기가 된다. 전두환을 독재자로 몰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집권과정에서 비민주적 방법을 취한 점은 있지만 6.29 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建國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 민주국가의 든든한 버팀목인 중산층을 육성한 공이 더 크다.  


韓日 경제 성장률 비교

(월드뱅크 통계)


연도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일본

4.2

3.4

3.1 

4.5

6.3

2.8

4.1

7.1

5.4

한국

7.4

8.3

12.2

9.9

7.5

12.2

12.3 

11.7

6.8

연도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일본

5.6

3.3

0.8

0.2

0.9

1.9

2.6

1.6

-2.0

한국

9.3

9.7

5.8

6.3

8.8

8.9

7.2

5.8

-5.7

연도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일본

-0.2

2.3

0.4

0.3

1.7

2.4

1.3

1.7

2.2

한국

10.7

8.8

4.5

7.4

2.9

4.9

3.9

5.2

5.5

연도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일본

-1.0

-5.5

4.7

-0.5

1.8

1.6

-0.1

0.6

 

한국

 2.8

0.7

6.5

3.7

2.3

2.9

3.3

2.7

 


위의 통계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1. 全斗煥 盧泰愚 집권기 12년 동안 克日이 이뤄졌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 反日을 넘어 克日, 즉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약속은 실천되었다. 1981~1992년 사이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 운동의 熱風이 분 때이지만 튼튼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 직선제 改憲과 평화적 정권 교대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도 好況이었지만 한국은 성장률에서 세계 최고였다.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 餘勢를 몰아 10년 내 한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한다.

2. 일본은 1992년부터 경제 상장률이 急落, 20년이 넘는 장기간의 버블 붕괴 경제침체를 겪고 있다. 한국도 2015년에 수출 감소와 2%대 저성장을 기록, 일본형 장기침체의 초입부에 들어갔다.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이 침체는 오래 끌 것이다. 일본은 장기침체를 잘 견딘 편이다. 축적된 국내외 자산이 어마어마하고, 기술력이 강한데다가 한국과 달리 선동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였고, 국민들의 교양이 분열을 막았다. 한국은 선동세력이 강하고 국민들의 교양이 약하며, 核위기까지 같이 왔다.

3. 1981~2015년의 35년간 성장률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선 해는 한국이 外換위기를 겪던 1998년 한 해뿐이었다.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李明博 정부의 공이다. 기획재정부 姜萬洙 장관은 당시 '이 위기만 잘 넘기면 한국은 경쟁국들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는데 적중하였다.  

4. 민족사 2000년 역사상 國富를 가장 많이 키워 韓日 격차를 줄인 시기의 통치자 全斗煥 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


 *제5공화국 관련 경제정보: 朴正熙 정권 마지막 해와 全斗煥 정권 마지막 해의 비교표
  
   1. 1979년 1인당 GN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개 국가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70년대엔 외채 망국론이 강했지만,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對外자산 253억 달러로 개선되었다가 1989년에는 純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全斗煥 정권은 1980-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되었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최고 수준에 달했다. 1980년대 全斗煥 정부는 통신망 설치와 전자산업 육성을 國策사업으로 추진하여 1990년대 이후 한국이 세계적 인터넷-전자산업 强國으로 도약하는 조건을 만들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쿳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 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反證이다.
  
   경제 성공의 功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金在益 경제수석한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金在益씨를 잘 부린 사람이 全 전 대통령이었고, 金수석은 1983년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 그 뒤의 경제관리엔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全斗煥이다. 이런 호재로 安保면에서도 對北우위를 확보했다.
  
   그에게는 물론 12.12사태의 책임이 있고, 비자금 모집의 과오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2년간 백담사 귀양,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들 과오를 한쪽으로 놓고 그 반대편에 경제적 성공과 튼튼한 안보, 그리고 단임실천 및 6.29 민주화 선언(직선제 개헌이 핵심)과 서울올림픽 성공을 놓으면 저울은 어디로 기울 것인가. 한국 민주주의 건설의 결정적인 계기(6.29선언)를 만든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게 공정한가?   물론 광주 사태 시의 군 발포와도 그는 관련이 없다. 발포 명령 자체가 없었다. 위험을 느낀 군인들의 자위적 발포가 시작이었다.   

   *하나 덧붙인다면 전두환 정권은 前 정권을 격하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했던 식으로 前 정권 비리를 캐기 시작했더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현재의 국민적 평가는 매우 달라져 있을 수도 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를 남긴 사람'이란 대목을 검토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에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아니면 대단한 일인가. 한 국가가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평화적 정권교체의 역사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성숙도 지표이다. 유럽에선 영국이 1688년의 명예혁명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했다. 미국은 1776년 건국시부터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프랑스는 1871년 普佛전쟁에 져서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쫓겨난 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정권교체기에 들어갔다.

 독일과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부터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가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스페인은 철권통치자 프랑코가 죽은 2년 뒤인 1977년부터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舊소련과 동구권 나라들은 1989년경부터 이 시기로 들어갔다. 필리핀은 1986년 마르코스 추방 이후 그렇게 되었으나 아직도 불안해보인다. 한국은 1988년 全斗煥 퇴임으로부터 이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놓고본다면 민주주의의 발달사는 길지만 의외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은 길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30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 역사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충분히 다져졌다고 볼 수 없는 조건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북한과 중국은 아직도 정권교체의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다. 정권교체는 옛날엔 전쟁이나 암살, 쿠데타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민주주의 시대엔 선거가 전쟁을 통해서 했던 일을 대신한다. 그만큼 선거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정권교체의 전통을 국민 모두가 소중히 가꿔나가야겠다. 동시에 全斗煥 정권이 만든 이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

 6월29일은 31년 전 全斗煥 대통령-盧泰愚 후보 팀이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 6.29 민주화 선언이 있었던 날이다. 1987년 6.29 선언이 민주투쟁 시대를 민주실천 시대로 바꿀 수 있었던 힘은 高潮(고조)된 국민여론을 업었기 때문이다. 全盧 팀은 유연한 共助플레이로, 유도의 업어치기처럼 자세를 낮추어 밀려오는 여론의 힘을 받아내면서 그 고삐를 잡아챙겨 자신들의 승리로 만든 셈이다. 6.29 선언 3일 전에 있었던 대시위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나 全斗煥 정권의 공권력 또한 강력했다. 무교동 거리로 나서던 金泳三씨가 간단하게 경찰에 들려 닭장차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 6월18일의 대시위에선 부산시청이 밤중에 몰려든 군중에 의해서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군부대 출동준비 명령을 내렸고 오후엔 '오늘 저녁에 비상계엄령이 내린다'는 소문이 언론계에 돌았다. 그러다가 릴리 미국대사가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러 들어간다고 하더니 밤이 되니 '비상조치는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과 권위주의 정권의 물리력이 거의 대등한 힘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였다. 이 순간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 의하여 발표된 것이 월요일의 6.29 선언이었다.
 
  그 내용이 우선 야당과 국민들이 원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全面的 민주화였다.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金大中씨 사면복권 등 거침 없는 약속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가장 미움 받던 사람이 가장 사랑 받는 정치인으로 변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29 선언과 兩金 분열 때문이었다.
 
  이 6.29 선언은 盧泰愚 대표의 외로운 결단으로 알려졌으나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제안을 盧 대표가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뤄졌음이 月刊朝鮮의 취재로 밝혀졌다. 물론 盧 대표도 직선제 개헌 수용밖에는 사태해결의 방도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全 대통령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을 때였다. 全 대통령이 자신의 功이 될 수 있는 직선제 수용발표를 후계자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1, 2인자의 이런 콤비 플레이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全斗煥, 盧泰愚 두 사람의 협력과 金泳三, 金大中의 분열이 대조되면서 盧泰愚 정부를 만들어냈다. 全斗煥 기획-연출, 盧泰愚 주연의 6.29 선언 합작은 5.16을 성공시킨 朴正熙-金鍾泌 콤비의 협력관계를 연상시킨다. 5.16 성공 뒤 朴正熙-金鍾泌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全-盧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盧 대통령이 인간적인 의리와 정치력과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全斗煥 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느냐의 여부는 쟁점이다. 1988년 3월 선거에서 與小野大가 된 날 나는 농담 삼아 '이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야 하겠군'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全씨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않고 山寺로 들어갔다.
 
  盧泰愚 대통령 시절 5년간이 나의 기자생활중 가장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텔레비전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물태우'란 말이 나오고,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돌아갈 때 국내 신문을 읽으면 하늘에서 뛰어내리고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정치적 기사로 해서 기자들이 안기부에 연행된 적이 없는 첫 시기였다. 盧 대통령과 측근들은 비판적인 기자들을 누르는 대신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 5년간 盧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누구보다도 많이 썼던 필자가 證人이다.
 
  6.29 선언의 탄생과정에 全斗煥 대통령의 역할이 컸지만 결국 그 선언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盧泰愚 대통령이었다. 김대중-김정일의 반역적 합작품인 6.15 선언은 그나마 실천도 되지 않았다. 6.29처럼 철저하게 실천된 정치선언도 달리 없을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盧泰愚 대통령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민주화 세력은 盧泰愚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그 정체성을 드러냈다. 나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그를 찍지 않았으나 '국민의 선택으로 뽑힌 정부이므로 민주 정부,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정리할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일부 민주화 세력은 盧 정부를 군사정권의 연장이라고 해석하고 타도를 외쳐댔다. 그 속엔 從北좌익세력이 있었다. 이 시기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던지고도 무사했던 盧武鉉 전 대통령까지도 제6공화국을 민주정부로 이해하지 않는 듯한 논법을 자주 썼다.
 
  31년 전 새 시대를 연 6.29 선언, 그 주인공 노태우 전 대통령은 病席에 있다. 역사에서 그가 차지할 자리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6.29 선언-서울올림픽의 성공-북방정책-북한정권의 고립을 추진하면서 국내의 민주화 소용돌이를 관리하였던 노태우 정부는 국가 대전략을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사의 흐름에 맞춘 사람이다. '인간은 역사의 大勢를 만들 수 없다. 다만 이용할 뿐이다'고 비스마르크가 말하였다는데, 민주화의 大勢, 공산권 붕괴의 大勢를 만드는 데 1980년대의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기여한 바도 클 것이다. 

,,,,,,,,,,,,,,,,,,,,,,,,,,,,,,,,,,,,,,,,,,,,,,,,
 
盧泰愚가 말한 '6.29 선언의 진실'

趙甲濟   
 
 *월간조선 1999년6월호 노태우 전 대통령 인터뷰에서 발췌
 
 <당시 全대통령의 지론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혼란을 막고 보자는 것이었다. 타협이나 대화보다는 물리적인 힘으로 막아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全대통령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全대통령은 6월22일 오후 尹潽善(윤보선), 崔圭夏(최규하) 전 대통령을 만난 데 이어 이틀 뒤인 6월24일에는 金泳三 민주당 총재, 李敏雨 신민당 총재, 李萬燮 국민당 총재를 잇따라 만났다. 나는 그 회담을 지켜 보면서 「무슨 변화가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질 수는 있었다. 全대통령은 6월24일 저녁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올라가 시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全대통령은 불쑥 『직선제를 해도 마, 이기지 않겠소?』 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선제로서 이긴다고요? 안될 말씀입니다』 하고 부정적으로 반문했다. 全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왔으므로 나는 全대통령이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全대통령의 이야기를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마음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反語法(반어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에서 내가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는 이유가 된 것 같다. 하여튼 全대통령은 내가 반문하자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金大中씨를 사면 복권시킨다 해도 盧대표가 그 동안 국민들에게 심어 놓은 좋은 인상으로 보아서는 이길 것 같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밀어줄 테니까 직선제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변함없는 생각이십니까』하고 全대통령의 말을 재확인했다. 그랬더니 『그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서 『알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지 모르겠지만 이왕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앞으로의 문제에 대한 책임은 모두 다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각하의 뜻을 알았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나한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의 운명은 제가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 자리에 全대통령의 아들 宰國(재국)이든가 영부인(李順子 여사) 이 두 사람 모두, 아니면 한 사람은 배석했던 것 같다. 그 날 재국이가 나에게 큰 절을 했는데, 그 자리였는지 그 대화 이전이었는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는 다짐 받아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87년 들어서서 나는 줄곧 여러 사람들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만약 全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와 金大中씨 사면 복권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결단을 全대통령에게 밝혀 그의 동의를 얻어야겠다고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全대통령은 나의 이런 배경을 모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여튼 그 자리에서 6·29 선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는 「직선제를 한다, 金大中씨를 사면 복권한다」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선 『전부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국민들이 제대로 받아들인다』고 다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극비로 보안조치를 취하고 중간 중간 선언문 초안 내용을 검토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한 후 최종 문안은 6월27일에 결정을 보아 李丙琪(이병기) 당 대표 보좌역에게 淨書(정서)를 시켰다. 일부 보도에는 내가 발표 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6월24일 이후 6·29 선언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 선언 직전 주말인 6월27일 청와대에서 내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도 올라가지 않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청와대의 몇몇 비서관이 『어떻게 이것을 盧대표 단독으로 하게 합니까. 합작품 내지는 全대통령 각하의 작품으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全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중대선언이 금명간에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全대통령에게 『기자들이 집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어 갈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애당초 (내 책임하에 추진하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했지 않습니까』하고 말했고, 全대통령도 『알았다』고 해서 전화 통화만으로 끝냈다. 그리고 선언 내용을 (우리 쪽에서) 청와대에 보낸 일도 없었다. 6·29 선언과 관련해 청와대와의 관계는 이것이 전부였다. 선언 당일 아침 나는 안채 2층 서재에 올라가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必死卽生」(필사즉생)을 붓글씨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서재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집사람에게 『여보 미안해. 내가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 나가는 희생물로서 역사의 제단에 오르려 하니 거두어 들일 준비를 하세요』 하고 말했다>
 
  1987년 6월29일.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는 오전 8시30분 연희동 자택을 출발, 8시50분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민정당 중앙당사에 도착했다. 이어 9시3분에 대표위원실을 나서 9시5분,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에 나타났다. 이날 회의실에는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마이크 앞에 앉은 盧대표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됐습니다』라고 서두를 뗀 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金大中 사면 복권 등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 선언) 8개항을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선언문을 읽고 나니 홀가분했다. 발표장에서 나오면서 어느 기자에겐가 『나는 이제 완전히 발가벗었다. 또 다른 아무런 마음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국민들 뜻대로 한다는 생각뿐이다』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국립묘지에 가서 헌화하고 묵념하면서 수십만 영현들에게 『여러분들은 목숨을 던져 戰火(전화)에서 조국을 구하셨습니다. 이제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내 몸을 희생해 이 나라에 민주화의 꽃을 피우고자 합니다』 라고 독백했다. 나는 현충사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李丙琪(이병기) 보좌역에게 『내 인생의 최고 절정이 오늘 이 순간인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李보좌역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고 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에 돌아와 보고를 받아 보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정계, 종교계, 학계 할 것 없이 각계각층이 환영일색이었다. 특히 金大中 民推協(민추협) 공동의장이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생긴다』, 金泳三 총재가 『훌륭한 결정이다. 이 시대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발표로, 전적으로 환영한다』고 논평한 것을 보고 가슴이 뿌듯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金宗輝 교수가 가장 먼저 직선제 건의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6·29 선언에 대해 「상황에 밀려 마지못해 받아들인 결과」 또는 「全斗煥 대통령의 작품을 낭독한 데 불과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나의 심정은 「선거에서 지더라도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면 기꺼이 내 몸을 바치겠다」는 확고한 것이었다. 나중에 보도를 보니 金容甲(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이 내게 직선제를 건의했다느니, 金復東(김복동)씨가 나를 설득했다느니 하는데, 그들 말고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정작 직선제를 내게 제일 먼저 건의한 사람은 선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金宗輝(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였다.
 
  金교수는 1987년 초 우리 집에 새해 인사를 하러 와서는 『직선제를 받고 金大中씨를 사면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軍 연구원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은가』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이 친구가 아주 용기가 있구나』 하고 감동해마지 않았다. 李鍾贊(이종찬) 의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李의원은 여러 차례 내게 여론을 전하면서 직선제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직선제 건의를 수없이 들었지만, 무언가 결론을 내려고 하면 『올림픽이다, 혼란이다』 해서 걸리적거리곤 했다.
 
  6·29 선언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자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는 자신도 뭔가 6·29 선언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신문, 방송, 잡지 등에 인터뷰를 하곤 했다. 그러니까 6·29 선언이 발표된 후 「내가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도 전혀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6·29 선언이나 5共청산에 관련된 글을 보면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구차스런 변명을 하는 것 같아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다>
 
  극적인 효과 위해 演技한 것 없다
 
  6·29 선언에 대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에 이어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全대통령이 金聲翊(김성익)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에게 술회한 내용 중에는, 『일단 盧후보께서 全대통령에게 직선제를 건의하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처음에는 全대통령이 그것을 거부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全대통령이 『그것은 좀 곤란하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뭔가 演技(연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민주화의 祭壇(제단)에 내 스스로를 던져버린 겁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盧 전 대통령께서 6월27일 安家(안가)에서 全대통령을 만나 최종적으로 6·29 선언내용에 합의한 것으로 나옵니다.
  『바로 그 부분이 사실과 달라요. 6월24일에 내가 全대통령을 만나 가장 중요한 사안을 논의했고, 그 후에는 (全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6월27일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온 적은 있습니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지시였는데, 내가 안 갔지』
 
  배석한 孫柱煥 전 장관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6월27일 두 분의 만남 계획은 그 당시 청와대 참모들 몇 사람만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안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도 盧후보가 안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니까, 그날 모임을 알고 있었던 몇몇 참모들은 두 분이 6월27일에 만난 것으로 알고 기정사실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해 봅니다』
 
  全대통령 가족이 나를 밀었다
 
  ─그 당시 盧 전 대통령께서 작성한 6·29 선언 문안은 발표 전에 全斗煥 대통령에게 전달이 됐습니까.
 
  이 질문에 孫柱煥 전 장관이 답했다.
  『문안을 최종 정리한 분이 李丙琪 보좌역입니다. 李보좌역의 증언에 의하면 6월28일 오후에 安武赫(안무혁) 안기부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에게는 좀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6월28일 저녁에 安부장에게만 선언문 복사본 한 부를 보냈답니다. 그 외에는 청와대쪽으로도 일체 보낸 것이 없어요』
 
  盧 전 대통령은 『安부장에게 전달된 것이 청와대에도 보고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도 내가 선언을 발표하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몰랐어요. 내가 청와대에도 일체 알리지 않았으니까』
 
  ─盧 전 대통령께서 全대통령과 金大中씨 사면 복권문제를 논의할 때 兩金(양김)씨가 단일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의가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全대통령은 내가 1985년에 당에 들어와 3년 동안 이미지를 닦아 왔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겠느냐. 또 직선제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다가 전격적으로 받은 데 대한 반대급부로 인기가 높아질 테니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의견이었죠』
 
  ─6월29일 오전에 선언을 하신 후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 7월1일인데요. 그 때 全대통령과 어떤 이야기가 오갔습니까.
  『내가 6·29 선언을 하면서 全대통령에게 미안했던 것은 「이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표현을 썼어요. 이건 국가원수에 대한 결례인 셈이라 마음에 걸렸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반이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에 부담을 덜었습니다』
 
  ─全대통령 아들 全宰國씨가 盧 전 대통령에게 절을 한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全대통령이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가 많이 들려오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측근 중에서 나를 후계자로 진지하게 건의한 사람이 全대통령 가족이었어요. 재국이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자기 아버지에게 「盧대표가 최선의 길」이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 아들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절을 시키지 않았나 생각돼요』
 
  ―6·29 선언 후 13대 大選(대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기간 중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軍에서 일부 강경파들이 일종의 친위 쿠데타 비슷한 것을 일으켜 대통령 출마한 분들을 다 배제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것이 끝나면 병영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盧 전 대통령께서 그들을 설득해 좌절시켰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루머 수준에 지나지 않는 얘기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軍 지휘관들은 6·29 선언의 성격을 알고 공감했어요. 이제 軍이 정치에 이바지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었지요. 우리 軍이 너무 권위주의적인 집단으로 국민들의 거부감을 조성한 데 대한 반성,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런 것까지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때문에 군부에서 나에게 「全대통령이 권위주의자로 매도를 당했는데, 그 분을 올바르게 받들지 못한 몇몇 사람은 6共에 참여시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탄원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나에게 反하는 친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는 분위기였지요』
 
  너무 쉽게 5년제 單任에 동의
 
  盧 전 대통령은 준비된 자료를 꺼내 13代 大選과 관련된 육성증언을 이어갔다.
 
  <당과 정부는 바쁘게 돌아갔다. 우선 헌법개정을 위해 여야가 개헌 협상을 위한 전담기구를 구성해서 개헌작업에 들어갔다. 당시로는 野(야)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수용을 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헌법 개정작업에 들어갔으므로 서로의 이해가 엇갈려 다툴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대통령 임기가 4년 重任(중임)이냐, 아니면 6년 單任(단임)이냐』 하는 의견을 냈더니 여야 모두가 『다소 불합리하긴 해도 5년 단임으로 결론을 냈다』고 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여당은 權翊鉉(권익현) 의원이 8인 정치 회담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좀 더 토론해서 조정할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내 생각으로 임기 5년은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등과 주기·간격이 맞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金大中씨와의 운명적인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駐韓(주한) 미대사관저에서 리셉션이 열렸다. 닉슨 전 대통령도 참석해 국제정세에 대한 연설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곳에서 나는 金大中씨 부부를 처음으로 만났다. 사람들이 많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매우 의미 있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던 李姬鎬(이희호)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라고 하자 李여사는 깍듯이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정중히 인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사람과의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金大中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금상태에 있었던 데다 오래 전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되어서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날도 참석인사들과 언론인들이 나의 주위를 둘러싸다시피 했다.
 
  나는 힘이 솟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利點(이점)을 모두 다 던져버린 빈털터리인데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이제 정권은 민간 출신에게 이양해 줄 시기라고 보았는데, 하늘은 오히려 그 시기를 늦추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국민들은 『盧泰愚 선언 잘 했다. 이제는 깨끗이 물러날 준비를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 스님이 들려주던 말씀, 그리고 6·29 선언 직전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이 해 주던 말씀, 즉 『비워라, 그러면 얻어진다』는 얘기가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야당의) 단일후보가 굳혀지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YS건 DJ건 누가 포기하겠는가. 모든 것이 어떻게 하면 民心(민심)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金鍾泌(김종필)씨 역시 비운을 겪었지만 공화당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심을 기대해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6·29 선언을 한 시점에는 많은 당원들이 동요하고 자신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선언 이후에 일어나는 현상은 그 반대였다. 나는 아무리 우리편이 수적으로 많더라도 명분이 약하고 떳떳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든 유리한 점을 다 털어버리고 불리한 입장에 서니 오히려 엄청난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이 평범한 진리를 과거 정권과 정치인들은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나는 어디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떳떳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레이건과 부시 만나다
 
  盧泰愚 후보는 大選(대선)을 앞둔 1987년 9월13일 워싱턴을 방문, 다음날 레이건 미 대통령을 만났다. 레이건 대통령은 『盧총재의 6·29 선언에 감명을 받았으며, 한국에서의 긍정적인 발전과정을 통해서 한국인의 소망이 성취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訪美(방미)와 관련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레이건과 만날 때 레이건의 뒤를 이을 부시 부통령이 배석했다. 대화는 주로 레이건 대통령과 나누었기 때문에 부시 부통령과는 별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는데, 헤어지면서 악수를 할 때 둘이 『파이팅』을 외치면서 『다음엔 승리한 입장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부시 부통령과는 이틀 뒤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9월16일 아침 7시 NBC 텔레비전의 「투데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방송국에 갔더니 부시 부통령이 와 있었다. 그는 내 직전에 인터뷰를 하고 나오고, 나는 들어가면서 마주쳐 다시 한 번 『파이팅』을 외쳤다. 백악관에서 나온 나는 워싱턴 포스트 本社(본사)를 찾아 회장인 캐더린 그레이엄 여사를 비롯한 간부진들과 오찬 겸 간담회를 가졌다. 그들은 나의 방문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앞으로 내가 워싱턴에 들를 때면 한 가족처럼 만나자고 했다. 오래 전부터 교분을 가졌던 돈 오버도퍼 기자는 이제는 중진 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6·29 선언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訪美 사흘째인 9월15일 낮 내셔널 프레스 클럽의 오찬연설 및 간담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을 상대로 하는 정치성 있는 국제행사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어려울 것 같았다. 반대로 쉽다고 생각하니 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단전호흡을 몇 번 하고 회담 장소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아서 차분해졌다. 13代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복병이 터져 나왔다.
 
  鄭昇和(정승화·前 계엄사령관)씨가 12·12 사건을 가지고 거세게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복병이 초기에 나타나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선거 막바지에 나타났다면 큰 곤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여튼 鄭昇和씨와 金泳三씨의 합류는 내게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다. 여론조사 결과 상승 추세에 있던 나의 인기가 갑자기 하강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다행히 그 무렵에 나를 초청하는 관훈클럽 토론회가 열렸다. 그 토론회에서 마치 검사의 심문을 받듯이 12·12 사건의 전모 등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당당히 대응해서 그들에게 나의 신념을 평가받았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농담을 한 마디 했다.
  『내가 (12·12 사건으로) 검사에게 조사를 받을 때도 이 얘기를 했어요. 「당신들 1987년 대선 당시 관훈클럽에서 나에게 따진 것보다 더 약한 것 같다」 이렇게 말이야』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토론회를 계기로 내 인기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정치인으로서 이런 토론회는 처음이었지만 「나는 던져진 몸이다. 희생되어도 아깝지 않다」는 신념으로 임한 것이 하늘이 도왔는지 예상 외로 좋은 반응이 왔다. 여담이지만 어느 패널리스트가 『盧후보가 옛날에 헤르만 헷세의 詩(시)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시 한 구절을 들려 달라』고 주문한 일이 있다. 나는 갑자기 받은 주문이라 잠시나마 『큰일 났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계절이 가을이라 가을을 소재로 한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숲가의 나뭇가지가 금빛으로 타오를 때/오솔길을 따라 나는 혼자 걷는다/사랑하는 님과 함께/수없이 거닐었던 이 길을…」 하고 읊어 나갔다.
 
  국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되고 보니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대단했다. 가장 힘들었던 유세는 전라도 광주(1987년 11월29일)와 군산(12월10일)의 유세였다. 특히 광주에서의 유세는 유세라기보다는 전쟁터에서 적진 깊숙이 포위된 상태와 같았다. 나를 지지하는 군중도 기만을 넘었으므로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들을 연단 가까이에 자리잡게 했다. 유세장에서 연단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게 올라갔다.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돌과 쇠붙이 등이 수없이 날아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세를 시작했다. 돌과 쇠붙이는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나를 막고 있던 경호원의 머리에 맞아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도저히 유세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애국가를 부르자』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친애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애국가를 부릅시다』 하고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先唱(선창)을 했다.
 
  아수라장의 光州 유세
 
  단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부르자 연단 밑의 청중들도 따라 불렀다. 그 순간 빗발처럼 날아오던 돌이 잠시 멈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을 이용해 유세를 계속했다. 상황으로 봐서 유세를 계획대로 전부 할 수는 없으므로 요약해 한 5분 이내로 끝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애국가를 마치고 연설을 하니 다시 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경호원들이 나를 에워싼 가운데 요약된 연설을 마쳤다. 끝내고 밑으로 내려와 보니 나를 지지하는 청중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반대편 청중들로부터 각목으로, 돌로 무참히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열을 흐트리지 않고 우리가 단상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길을 확보해 주었다. 그 사이에도 우리를 향해 돌이 무수히 날아왔다. 겨우 빠져 나와 교외에서 현장보고를 받아 보니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나를 지지한 청중들이 많이 다쳤다고 했다.
 
  특히 아들 재헌이의 친구 수백 명이 지원을 나왔다가 수십 명이 다쳤다고 해서 가슴이 아팠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지역 감정에 불을 지른 결과가 도처에서 이런 현상을 일으켰다. 그런데 내가 광주에서 심하게 당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자 반작용이 나타났다. 대구만 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원래 野性(야성)이 강해 나의 지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압도적으로 지지도가 높았다. 군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군산敎大(교대) 흥남 캠퍼스 운동장 유세를 통해 야심찬 공약을 발표함으로써 호남에서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즉 서해안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고 엄청나게 발전하는 서해안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군중들의 갈채를 받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박수는 고사하고 빗발치는 돌만 맞았다>
 
  盧 전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선거유세 당시 선언한 「서해안 시대의 개막」은 지역감정 해소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전에 내무장관 때부터 여러 번 강조했어요. 오래 묵은 지역감정을 해결하려면 노력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발전축은 서울-대구-부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니 호남 푸대접이라 해서 지역감정의 골이 더 깊어진 것이다. 오늘의 사정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생명선이 일본과 미국이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나가자면 결국 서울-대구-부산 축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그 축선이 달라진다.
 
  중국과 우리가 국교 정상화가 된다 했을 때 일본은 인구가 1억2∼3천만이지만 중국은 10억이 넘는다. 열 배가 넘는 우리의 시장이 서쪽에서 다가온다. 이 준비를 하기 위해 내가 「서해안 시대」 개막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엄청난 물동량이 오갈 것에 대비해 서해안에 비행장, 항구,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 발전 벨트가 서쪽으로 옮겨오고 이 지역에 사람이 몰려와 20∼30년 우리가 중국과 교역하면 千年(천년) 지역감정의 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 2019-01-17, 14: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黃葉靑山     2019-01-26 오전 12:47
영남 개돼지들은 각성하고 광주로 진격하라!
방법은 그것 뿐이다. 법은 주사파정권의 장식품이기 때문이다.
   딸부자     2019-01-22 오전 10:40
대체 광주 5.18하고 전두환이하고 무슨관계 인가요? 제 갠적 소견으로는 광주 5.18부터
순수 민주화운동인가 아닌가부터 재조명하는것이 우선이라 봅니다.
   love     2019-01-18 오후 12:21
전두환 전 대통령이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속적으로 단죄 되어야할 '독재자'라면, 우리가 북한 핵무기를 머리에 인채 영원히 핵인질로 살아가야 하는 단초를 제공한 6.15 평양 정상회담의 주역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은 향후 통일 대한민국의 역사가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김대중의 과오는 전두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고난의 행군으로 망해가던 김정일을 '햇빛선물'로 起死回生 시켜,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미국 트럼프 정권의 '핵보유국 인정'을 목전에 두고 있는 북한 3대 세습 독재자 김정은의 '핵 위협'으로 부터 대한민국 안보를 위태롭게 만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제까지 우리 역사의 일부가된 전직 대통령들에게 정치보복을 하려는가?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저지른 마오쩌똥, 천안문 민중 봉기를 유혈 진압한 덩샤오핑에 대한 功過를 균형있게 평가하는 중국을 보라!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 역사적 인물의 공과는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
   白丁     2019-01-17 오후 8:11
全斗煥 대통령 이후 나온 여섯 통령 다 합쳐도 全대통령 한 분만 못하다. 天壽를 감안해도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이전에 인간적으로도 9순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더 이상 괴롭힘은 못할 짓이다. 비인륜적, 비도덕적이다. 각 정권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가장 핍박 받았던 김대중이 가장 너그러웠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오죽해야 김대중 정부시절이 가장 마음 편했다고 했겠나. 직접 당하지도 않은것들이 더 지랄들이다. 고마 해라. 30년 괴롭혔으면 됐다. 살인죄도 공소시효가 15년이라지 않은가. 김정은도 용셔해주자는 놈들이...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