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인물의 20세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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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인물의 20세기(4)
  
  마틴 루터 킹 목사도 20세기의 20대 지도자로 뽑혔습니다. 그도 간디처럼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서 미국 백인들의 양심을 움직였습니다.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미국 백인들이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도와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간디처럼 암살되었습니다. 간디나 킹 목사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해줍니다. 좋은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란의 호메이니도 20대 지도자들 중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그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저항을 조직화하여 중동에서 가장 서구화되어 있었던 이란을 다시 이슬람체제로 복귀시킨 사람입니다. 이란 혁명은 이슬람과 기독교문명 사이의 오랜 대립을 재연시켰습니다.
  
   기독교 문명권 국가의 자존심에 큰 타격과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11년간 영국을 이끌었던 마카레트 대처 전 수상도 20세기의 20대 지도자로 뽑혔습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그녀는 최초의 여성총리였습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신봉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노동조합과 대결하여 국민들을 나태하게 만드는 사회보장제도를 과감하게 개혁하였고 레이건 대통령과 손잡고 소련을 붕괴시키는 데 앞장섰던 자본주의의 챔피언이기도 했습니다.
  
  20세기의 20대 지도자들의 반열에 왜 우리나라 지도자는 없는지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구적인 시각으로 인간을 평가하니까 이승만,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자신의 고향에서조차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미국 언론이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는 고향에서 핍박 받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타임지가 뽑은 20세기 아시아의 위대한 인물 20명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갔습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은 위대한 정치인 20명중에 뽑힌 세 명의 여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둘은 여성의 피임법 확산을 주도했던 마가렛 생거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사회사업을 많이 했던 엘리너 루스벨트였습니다. 마가렛 대처는 상점 주인의 딸로 태어나 장학금을 받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법학부와 화학부에서 두 가지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서른네 살에 보수당의 하원 국회의원으로 뽑혔습니다. 부지런하면서도 여자다운 면모를 잃지 않았던 대처는 마흔네 살에 보수당의 교육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대처의 상승곡선에서 꼭지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판단은 오판이었습니다.
  
   1975년 대처는 히드 당수에 도전장을 내고 경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당내의 우파에서 나올 후보가 없어 대처가 마지막 순간에 입후보한 것인데 그의 이념에 동조한 대의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보수당에 여성당수가 탄생했고 4년 뒤 총선에서 승리하여 영국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습니다.
  
   대처가 들고나온 정책은 영국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노조와 대결하고 시장원리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노조는 어떤 정권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막강하여 연속해서 세 번이나 노조와 不和하던 정부가 무너졌습니다. 대처는 영국에 팽배했던 노조에 대한 국민감정을 자극하여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자 노조의 특권과 노조에 대한 특혜를 제한하는 법률을 연속으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누가 영국을 통치하는가 노조인가, 의회인가라고 외치면서 양자택일을 국민에게 요구한 것이 대처였습니다. 노조의 횡포를 눌러놓으니까 영국의 경제가 활기를 찾았습니다. 대처는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유행인 시장경제의 원리를 가장 많이 써먹은 정치인일 것입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노조의 특권을 약화시켜야 노동시장에 경쟁이 도입되어 시장기능이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논리에서 그는 독과점 형태의 정부기업도 민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영국의 국영기업은 아무리 적자라도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고 감원이 안 되는 聖域이었습니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니 그런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적자행진을 계속하던 브리티시 항공사는 세계에서 가장 흑자를 많이 내는 항공사로 변모했고 철강회사 브리티시 스틸은 민영화 후 유럽에서 가장 큰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것이 바로 대처였습니다. 대처를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뽑은 타임지는 대처의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이래 인류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982년 대처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크랜드 섬을 점령하자 이 섬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켜 성공했습니다. 대처는 전쟁의 목표를 군인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한 다음 그들의 재량권에 맡기는 식의 전쟁지도를 했습니다. 대처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것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습니다.
  
  대처는 자신의 경제개혁 경험을 레이건에게 자주 설명해주었습니다. 영국과 비슷한 문제로 시달리고 있던 미국경제에 대해서 레이건이 개혁의 칼을 들이댄 데는 대처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앵글로 색슨 계통의 두 나라 영국과 미국은 대처와 레이건의 돈독한 인간관계에 힘입어 소련에 대한 정책에서도 보조를 같이 했습니다. 대처와 레이건은 공산주의는 인류의 적이요 사라져야 할 악의 제국이라는 데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소련제국은 빨리 해체될수록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자 대처는 그에게 개혁을 끝까지 밀고나가라고 충고합니다. 대처를 마치 누님처럼 따랐던 고르바초프는 정말로 소련의 개혁을 끝까지 추진하다가 소련제국을 해체하는 데까지 가고말았고 그 바람에 자신도 권력을 놓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의 붕괴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다섯 사람이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20명에 들어갔는데 대처, 레이건, 고르바초프, 바웬사, 그리고 교황 바오로 2세였습니다.
  
   대처의 정치신념은 자유로운 시장이 자유로운 인간과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기본이란 확신이었습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가 대처 같은 지도일지도 모릅니다. 강력하면서도 민주적인 지도자 말입니다. 우리는 강력한 지도자 하면 우리 현대사에서 보았던 이승만, 박정희 같은 지도자를 연상합니다.
  
   물론 두 사람이 건국기와 근대화시기에 강력한 지도력으로써 우리나라를 만들고 구하고 키워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였지 요사이 시대에 맞는 지도자는 아닙니다. 이승만, 박정희는 카리스마와 총구의 뒷받침을 받은 권위적 지도자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대처처럼 신념과 논리, 그리고 비전과 실천력을 갖춘 지도자입니다. 의지력과 비전이 결합할 때 정치인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대처가 여성으로서 수상이 되고 12년 동안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한 비결은 자신의 논리와 의지력을 믿고서 반대세력과 정면대결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여 자기 편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20명에 낀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은 지금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퇴임한 뒤에 인기가 높아진 경우입니다. 1981년부터 89년까지 재임하면서 그는 소련을 붕괴쪽으로 몰고 갔고 미국경제를 개혁하였습니다.
  
  그 뒤 클린턴이 미국경제의 부흥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그 바탕은 레이건이 만들었습니다. 이른 살에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좋은 인간성 때문에 국민들의 애호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이 때문인지 대통령으로서 일정을 아주 가볍게 잡았습니다. 언론이 이를 꼬집으니까 레이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일을 많이 하다가 죽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더라. 그러나 아무리 확률이 낮다고 해도 뭣하러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그는 1981년 암살미수범으로부터 권총저격을 받고 가슴에 총히 박혔습니다. 수술을 받고 살아났습니다만 레이건은 아내에게 「여보 내가 덕킹하는 것을 잊어버렸어」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언론은 그를 그레이트 컴뮤니케이터라고 불렀습니다. 국민과 의사소통을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레이건은 신사였습니다. 신사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定義로서 이런 게 있습니다. 신사란 우연히라도 타인을 모욕주지 않는 사람, 또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모욕주지 못하는 사람. 레이건은 신사였지만 소련에 대해서는 엄중한 표현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소련을 이블 엠파이어라고 불렀습니다. 악의 제국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김정일이나 북한당국을 상대로 악의 집단이라고 공칭한다면 북한뿐 아니라 우리나라 안에서도 냉전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강도를 보고 강도라고 부르는 것을 냉전적이라고 비판하는 게 지식인의 한 징표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생소하게 들릴 표현이지만 레이건은 이 악의 제국이란 용어를 아주 유용한 무기로 써먹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이미 소련을 망해야 할 나라로 규정했기에 레이건은 소련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덕이 무기가 된 셈입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공산권이 붕괴한 것은 레이건의 후임인 부시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만 그 공을 레이건에 돌리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소련은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중동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포드, 카터 대통령 시절에 월남전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0여 명의 미국 대사관 요원들이 테헤란에 납치 억류되어 있는 것도 구출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카터는 구출 특공대를 보냈지만 도중에 사막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집권한 레이건은 소련에 대한 군비경쟁을 선언했습니다. 스타 워즈란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적의 미사일을 완벽하게 파괴할 수 있는 방공 시스팀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니 경제력과 기술력이 딸린 소련은 군비경쟁을 중단하자고 애원하고 나왔습니다. 소련은 미국과 본격적인 군비경쟁을 하다가는 경제가 망가지겠다고 우려합니다만 레이건은 스타 워즈 계획을 강행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 무렵 소련에서는 개혁 마인드를 가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를 가차없이 몰아부쳤습니다. 상대방에서 유화적으로 나오면 이쪽에서도 유화적으로 나오는 것이 외교의 정상인데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의 유화 제스처를 묵살하였습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붕괴시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소련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야 고르바초프는 내부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이고 이 개혁은 필연적으로 소련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레이건은 어슬픈 선심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레이건의 이런 對蘇정책은 우리의 對北정책에도 참고가 될만한 것입니다. 우리 정책 당국자도 김정일 정권을 악의 집단으로 단정하는 데 서스럼이 없어야 합니다. 김일성 - 김정일 집단에 대한 엄정한 역사적, 도덕적 판단은 대한민국의 힘이 되는 것이며 몇 개 사단의 화력보다도 더 유력한 군사력의 근원인 것입니다. 이런 도덕적 규정을 깔고서 북한의 내부 개혁쪽으로 몰고가는 갖가지 압력이 작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압력의 수단은 많습니다.
  
  北核 포기를 위한 국제공조, 국군의 군비강화, 철저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경제원조, 인권향상을 조건부로 한 식량원조 등등 수단은 많습니다. 북한이 약하게 보이니, 북한주민이 굶어죽어가니 북한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을 하자는 태도는 어슬픈 휴머니즘으로서 북한사람들의 고통을 영속시킬 뿐입니다.
  
   소련의 자진 해체를 담당했던 고르바초프도 타임지가 뽑은 20세기의 20대 지도자로 뽑혔습니다. 실패한 지도자가 어떻게 위대한 지도자와 같은 반열에 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고르바초프란 인간을 모스크바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소련이란 악의 제국은 피비린내 그 한 가운데서 탄생하였습니다. 이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저항하는 세력이 있었다면 건국 과정에 못지 않는 유혈사태가 났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소련은 인류를 몇번이나 죽일 수 있는 핵무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인류를 동반자살로 몰고갈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그런 단말마적인 저항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성을 개선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 개혁의 방법으로서 고르바초프는 정치개혁을 먼저 하고 경제개방을 그 뒤에 하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은 鄧小平의 중국이 취한 방법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중국은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의 개방과 사유화, 시장원리의 도입 같은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개혁 개방에는 엄청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한데 중앙 집권적 권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그런 리더십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鄧小平의 판단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거꾸로 80%의 국민들을 고용하고 있는 국영기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산당 지도부의 의식구조를 바꾸는 당내의 민주화를 단행하였습니다.
  
  이 黨內 민주화로 고르바초프는 힘이 빠지고 이와 때를 같이 한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어나 그의 리더십은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또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에 대해서 과거처럼 소련군이 개입하던 정책을 공개적으로 철폐하였습니다. 과거에 헝거리나 폴란드 체코에서 반공봉기가 일어났을 때 소련은 군대를 투입하여 이를 진압했습니다.
  
  그런 강제장치가 철거되니 1989년에 동구권 국가들이 한꺼번에 공산주의의 옷을 벗어던졌던 것입니다. 당내 민주화, 공화국의 소련 연방 이탈 움직임, 동구 공산권의 민주화 등등 이런 움직임은 모두 고르바초프의 정치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는 동독주둔 소련군 50만이란 엄청난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도 이를 헐값에 포기하고 미국과 서독이 하자는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이 독일통일 과정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억지를 부리면 여러 가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그런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 좋은 아저씨 고르바초프는 그러나 군부의 불만을 샀고 군부는 1991년8월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옐친의 영웅적인 저항에 부딫쳐 좌절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서 흑해의 별장에 며칠 연금되어 있다가 풀려났지만 이미 정치적 치명상을 입은 뒤였습니다.
  
  고르바초프보다도 더 개혁적이고 서구적인 옐친이 고르바초프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고 옐친에 의해서 소련은, 즉 악의 제국은 73년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소련해체 과정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르바초프란 한 착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는 레닌, 스탈린과 같은 냉혈한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놓은 악의 제국을 해체할 때는 고르바초프란 선량한 인물을 심부름꾼으로 써먹었던 것입니다.
  
  고르바초프는 1996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1.6%의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고르바초프 때문이라면서 그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국경 바깥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르바초프에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국적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출처 :
[ 2003-01-24, 18: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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