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발리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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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현대미술 전시실 창으로 바라본 파리의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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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屋上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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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옥상 공원의 비둘기와 멀리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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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의 옥상 조각. 화를 참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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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조각상과 즐기는 청춘(퐁피두 센터 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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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는 샤갈(▲사진), 마티스, 피카소 등 20세기 대표 작가들의 그림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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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에서 본 에펠탑. 쇠를 주된 資材(자재)로 썼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사의 획기적 건물이다. 1889년 파리의 세계박람회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324m의 이 철탑은 돈을 내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건물이다. 2011년엔 710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이 철탑 전망대를 올라 파리를 둘러 보았다. 이 건물을 지은 구스타프 에펠은 자유의 여신상 내부도 만들었다. 퐁피두 센터는 1997년에 건축되었다. 영국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와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미래형 건물이다. 바깥으로 파이프와 철근을 노출시켜, 정유공장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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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는 승강기와 통로를 외부에 배치하고 파이프와 철근 등 內腸(내장)을 다 드러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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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전에 지어진 노트르담 성당은 유럽 최고의 고딕 건축물이다. 프랑스의 전성기인 13세기를 대표한다.
클 뿐 아니라 완벽한 造形美를 갖춘 성당이다. 1163년 루이 7세 시절에 건축이 시작되어 200년간 걸렸다. 내부는 길이 130m, 폭 48m, 천장까지 높이가 35m이고, 두 탑의 높이는 69m이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때 과격파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였다. 종은 녹여 쇠로 쓰고, 성당 내부는 음식 창고로 이용되었다. 빅톨 유고가 1831년에 쓴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가 한 계기가 되어 20년간 복원 사업이 펼쳐져 오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성당 앞에는 관광객들을 노려서 무슨 서명을 받는 소녀들이 있는데 소매치기들인 경우가 있다. 성당 마당에 프랑스 도로의 元標(원표)가 있다. 모든도로 길이는 이 점을 기준으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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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전쟁이 超人的 건물을 만든다. 구원받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만든 건축물은 위대하다.
(노트르담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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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느강에 걸린 37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산더3세 다리 입구.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관계를 기념하여 니콜라이 2세가 선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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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군사박물관 앵발리드. 상이군인 구호시설을 개조한 것이다. 무기박물관, 戰史박물관이 있는데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에 드골 기념실을 추가하였다. 약50만 점의 전시품목을 자랑한다. 1789년 파리의 군중은 이곳에서 2만6000정의 총기를 탈취,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큰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이다. 많이 이기고 많이 졌다. 富가 있으니 强兵을 길러 전쟁을 하고, 그 富를 지키기 위하여 또 전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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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軍事박물관 앵발리드에 있는 성당 안의 나폴레옹 棺. 나폴레옹은 1815년 6월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진 5일 뒤에 퇴위하고, 영국 해군에 붙들려 센트헬레나 섬에 유배당하여 1821년 5월5일 51세에 죽었는데 1840년에 유해가 조국으로 송환되어 1861년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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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棺을 내려다보는 돔의 장엄한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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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三色旗는 혁명의 상징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7월혁명, 2월혁명, 파리코뮌 등 流血(유혈)의 이념 갈등이 많았던 나라이다. 左右 대결의 元祖 나라이다. 국기를 삼색기로 쓰는 나라는 거의가 혁명이나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거나 공화국을 세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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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지하철 역이름엔 미국의 루즈벨트, 케네디, 영국의 조지5세 등 외국인이 등장한다. 고마움을 멋지게 표현할 줄 아는 이들이다.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에 선물한 나라가 프랑스이다. 여신상의 내부는 에펠탑을 지은 에펠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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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연간 관광수입의 3배를 버는 회사가 삼성전자이다. 역시 國力(국력)은 제조업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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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나무위키 글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43134c30bf6f9534b77992ef3a8b282.jpg
Les Invalides (Hôtel des Invalides) http://www.invalides.org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건축물. 오늘날엔 팡테옹과 함께 대표적인 파리의

위인 추모시설이 되었다. 앵발리드는 군사적 업적을 가진 위인들을 위한 묘지 및 예배당, 군사 박물관 등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으로 치면 현충원전쟁기념관

합쳐서 같이 놓은 셈이다.

처음에는 루이 14세 시대인 1671년에 착공하여 1706년에 완공한 부상병 간호 시설이었다. 1670년 11월에 루이 14세가 노병들과 불우한 퇴역군인들을 위한 시설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시초.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리베랄 브뤼앙(Libéral Bruant)이 건축을 맡았다.

1800년 9월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역사적 영웅인

튀렌 자작[1]의 시신을 앵발리드의 돔 교회로 옮겨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래 영묘로서 쓰이기 시작했다.

 원래 튀렌 자작의 시신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생 드니 대성당

안치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역대 국왕과 왕비의 무덤을 파괴한

과격한 혁명파들도 그의 시신만은 보전해 주고자 파리 식물원에 따로

옮겨놓은 상태였다. 1808년에는 루이 14세 시기의 명장인 보방(Vauban)

후작의 심장이 안치되기도 했다.

이후 세인트헬레나에서 숨을 거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신이

1840년 12월 15일에 거국적인 국장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자,

이곳으로 이장하여 전용 영묘로 삼게 되어 20년이 넘는 공사 끝에

1861년 4월 2일에 나폴레옹 1세의 시신이 지금처럼 안치되게 되었다.

나폴레옹 1세의 적갈색 관은 대놓고 예배당의 주인공처럼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로부터 제롬 보나파르트, 조제프 보나파르트 등 나폴레옹 1세의

 형제들과 페르디낭 포슈 등의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지휘한

장군들이 안장되었으며, 라 마르세예즈의 작곡가이자 군인인

루제 드 릴의 시신도 1차 대전기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어

나폴레옹 가족과 프랑스의 군사적 영웅들의 영묘로서 사용되고 있다.

 1940년에는 오스트리아 에 있던 나폴레옹 2세의 시신도 아돌프 히틀러

명령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앵발리드로 이장되어 사후에나마

그의 아버지와 함께하게 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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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프랑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후,

1940년 6월 28일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6월 28일 새벽 5시 30분에 파리를

방문하여 겨우 3시간 동안 머물렀는데, 이것이 그가 총통에 오른 이후의

처음이자 마지막 파리 방문이었다. 이 때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들러 말없이

나폴레옹 1세의 관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특히 앵발리드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고 한다. 이후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나폴레옹 2세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2월 18일에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하라는 총통 명령 21호를 군부에 하달한다.

[ 2019-05-14, 16: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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