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박정희는 이런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운명을 예감한 듯 깐깐한 목소리로 김일성의 도발을 조목조목 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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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 박정희 대통령 치사 중 발췌

한국 현대사의 회고-공산당이 신탁통치 반대했더라면…

(상략) 아직도 광복의 참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을 단순한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해방의 기쁨을 통일의 기쁨으로 승화시키려는 결의와 민족중흥의 역사를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맹세의 제전(祭典)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동포 여러분!

여기서 잠시 지난날의 역사를 회상해 볼 때, 우리가 해방과 함께 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더냐 하면 결코 그렇지도 않습니다.

1945년 12월에 만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三國外相會議)의 신탁(信託)통치안을 거족적으로 반대하였던들, 우리는 그때 이미 통일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건마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태도를 표변하여 반민족적인 신탁통치안을 찬성 지지했기 때문에 불행히도 이 땅에는 민족 분열의 씨가 뿌려지고 말았습니다.

김일성. 유엔 감시 하 남북 총선거 거부

뒤이어서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우리 민족의 의사를 존중하여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 실시를 건의하고 선거의 감시 임무를 맡을 임시 위원단까지 파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또다시 이를 거부함으로써 총선거에 의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최초의 기회를 무참히도 봉쇄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는 한편, 북한 지역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면서 소위 인민군을 창설하는 데 광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1948년 5월에는 남한에 대한 송전(送電)을 중단했고, 같은 해 6월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예성강의 물줄기를 끊어 막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토와 민족을 양단(兩斷)하는 반민족적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총선거로 정부 수립
유엔이 한국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

그와 같은 정세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부득이 겨레의 여망에 따라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유엔은 우리 정부를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唯一) 합법 정부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6·25동란-유엔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

그러나, 그로부터 2년도 지나기 전에 그들은 악랄하게도 당초에 기도했던바 그대로 한반도를 적화(赤化)할 목적으로 기습적인 무력(武力) 남침을 감행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1950년 6·25동란입니다. 그들의 반민족적 만행으로 동족의 귀중한 인명 희생은 막대하였고, 전(全) 국토는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침략은 국제 여론의 규탄을 받았고, 드디어 유엔은 그들을 ‘침략자’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오직 반공 구국의 일념으로 일치단결해서 공산 침략을 물리쳤고, 세계의 많은 자유 애호 국가들은 우리의 이 투쟁에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북한, 민주적 평화통일 제안 거부

휴전이 성립한 뒤 1954년에 있었던 제네바 정치 회담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우리가 제의한 민주적 절차에 의한 평화적 통일 방안을 또다시 거부함으로써 조국 통일의 기회를 짓밟고 말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적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이른바 4대군사노선을 강행하여 군비(軍備)를 계속 증강하는 한편, 우리에 대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력 도발을 자행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는 또다시 긴장이 날로 격화되고 전쟁 위험마저 감돌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긴장과 도발의 양상이 이 이상 더 격화된다면, 그것은 남북을 가릴 것 없이 그야말로 우리 민족 전체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위기 속에서도 이 땅에서 전쟁 재발을 막고 긴장을 완화하여 5000년 동안 연면히 유지되어 온 우리의 민족사를 단절이 아니라 이를 더욱 빛나게 계승 발전시켜야 할 엄숙한 각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남북대화, 내가 먼저 제의”

그래서, 나는 그 사명을 수행하는 첫 길이 남북 간의 대화와 교류에 있다는 판단하에 1970년 광복절에 북한에 대해서 무력 적화 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서로 발전과 번영을 위한 평화적 노력을 다하자고 촉구하는 ‘8·15 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에 남북 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또한 72년에는 온 겨레의 여망을 받들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데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다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4반 세기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 간에는 비로소 대화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남북 대화의 과정에서 쉽고 실천 가능한 문제부터 해결해서 상호 간에 신뢰를 회복하고 남북 간에 가로놓인 장벽을 점차적으로 제거해 나간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모든 성의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北의 일방적 대화 중단 및 비방 재개에도 불가침 협정 제의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통일의 기회를 저해하기만 해 온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도리어 우리의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할 억지 주장만을 되풀이하면서 대화의 진전을 방해하였고, 마침내는 남북 대화를 교착 상태로 몰고 가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나는 작년(1973년) 6월23일 평화 통일의 대전제인 항구적인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키고 평화 통일의 실질적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 평화 통일 외교 정책을 내외에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꾸준한 평화 노력에 대해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남북 대화를 갑자기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고 우리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방 중상을 더욱 노골화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서해 5도 수역과 휴전선 근처에서 각종 군사적 도발 행위를 격화시켰습니다. 이러한 긴장 고조의 위기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 간의 전쟁 재발(再發)을 막기 위해 금년(1974년) 초에는 북한 측에 대해서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의 체결을 제의한 바가 있습니다.

북한 도발 지속

이처럼 우리는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그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절실한 염원이요 지상 명제인 평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성실하고도 일관성 있는 노력을 꾸준히 다각적으로 계속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가 발전을 질시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의 불가침 협정 제의마저도 외면해버리고, 최근에는 서해와 동해와 기타 공해상에서 또다시 비인도적이고도 불법적인 만행을 계속 자행해 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말로는 평화 통일이니, 무슨 민족의 단합이니, 또 요즘에 와서는 대민족 회의니 하고 있으나, 그 실에 있어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략)


정리/ 李知映(조갑제닷컴)

[ 2019-08-14, 12: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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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19-08-15 오전 7:21
文세광은 박정희 대통령 저격하고, 文재인은 박근혜 대통령 잡아 넣고…文가와의 악연. 文세광, 文재인, 文정인, 文성근, 文정현…文가가 문제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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