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이사 갈 수 없는 두 나라의 숙명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 인종적, 문화적, 지리적 관계에서 한국과 일본은 세계에서도 가장 공통점이 많다. 영국과 프랑스 관계에 비견된다.
  2. 지리적 인접성을 감안하면 세계사에서 가장 전쟁이 적었던 관계이다. 삼국시대, 고려와 몽골의 일본 침공, 임진왜란 정도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20회 이상 전쟁을 했다.
  3. 고대엔 불교와 유교, 19세기 말 이후엔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가 두 나라의 문명적 공통분모이다.
  4. 자유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지난 150년간 전쟁이 없었다. 韓美日 동맹 체제에서 무력충돌은 불가능하다.
  5. 韓中日은 세 가지 원칙에 합의해야. 국민친선의 원칙, 政經분리의 원칙, 武力불사용의 원칙.
  6. 한반도가 분열되거나 약해지면 중국 일본도 전쟁에 휘말려들고, 통일되고 강력하면 동북아에 평화가 온다. 신라가 삼국통일 한 이후 동북아에 찾아온 250년간의 평화, 그리고 한국전쟁 러일전쟁 청일전쟁 임진왜란 몽골의 침략 등.
  7. 따라서 한국 주도의 한반도 자유통일이 일본의 國益에도 부합한다.
  8. 일본은 전통적으로 한반도 남쪽에 敵對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전략개념이 있다.
  9. 대한민국에 친북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일본의 안전도 해친다.
  10. 韓美日 동맹은 자유가치동맹이고, 세 나라 자유민들의 동맹이다. 세 나라의 어디서든지 反자유적 정권이 들어서면 3國 자유민들이 공동대응해야 한다.
  11.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반공투쟁,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쟁취한 것이다.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선동세력에 속아넘어가지만 文明의 저력과 반격, 즉 자유의 반격이 일어날 것이다.
  12. 한국과 일본인들은 종족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세계시민으로 성숙해야 한다.
  
  
  ////////////////////////////////////////////////////////////////////////
  
  *韓日관계 메모(2015년 작성)
  
  
  1. 韓日관계에서 한국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國益(국익)은 무엇인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이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장을 無力化시키며,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에 일본이 도움을 주든지, 적어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2. 영토 및 역사관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어렵다. 영토문제를 무리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武力(무력)을 쓰든지, 斷交(단교)하게 된다. 역사관의 차이는 상호 이해를 통하여 합일점을 찾을 수 있으므로 시간이 걸린다.
  
  3. 그렇다면 영토 및 역사관 문제의 해결은 시급한 것인가?
  급하지 않다. 일본이 武力으로 獨島(독도)를 점령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독도에 대한 일본의 무력 공격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대상이다) 역사관의 차이가 한국의 安保 및 國益에 당장 위협이 되지도 않는다.
  
  4. 영토 및 역사관 문제의 해결을 韓日관계 改善(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삼을 것인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해결을 전제조건으로 삼으면 긴급한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5. 영토 및 역사관 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하나?
  한국의 주장을 계속 설득력 있게 천명해 나가되 과거문제에 집착하다가 오늘과 내일의 友好(우호)협력 관계를 희생시켜선 안 된다. 영토와 역사관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풀기 어렵다. 어려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쉬운 문제부터 풀어야 시험을 잘 친다. 북한인권 문제 및 北核 공동 대응 문제는 쉽다. 쉬운 문제부터 풀다가 보면 어려운 것도 절로 풀리는 수가 있다.
  
  6. 한국 언론의 일본 보도는 正常(정상)인가?
  사실보도와 論評(논평)을 구분해야 한다.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보도를 하고 난 다음 논평이 따라가야 한다. 기사문의 경우 ‘망언’ ‘극우’ '군국주의화' 같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은 先入見을 심어주어 사실 파악을 어렵게 한다.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의 국방파괴자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이라고 표기하는 언론이 天皇(천황)이라 하지 않고 日王(일왕)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한국정부의 공식 호칭은 천황).
  
  7. 일본은 한국에 害(해)만 끼치고 있는가?
  北核 대응, 북한의 人權탄압, 조총련 압박, 경제교류, 문화교류, 관광분야에선 협력 관계이다. 특히 미국을 매개로 하여 韓美日 동맹체제가 작동중이고 이것이 동북아의 安全瓣(안전판)이다. 한국이 북한군의 남침을 받으면 일본은 싸우는 韓美軍의 후방기지 역할을 한다. 유엔군후방기지가 있는 일본이 돕지 않으면 한국은 남침당하였을 때 전쟁수행이 어렵다.
  
  8. 아베 총리와 자민당 정권의 생각은 무엇인가?
  ‘脫戰後(탈전후) 체제에 의한 보통국가화’이다. 패전 후 미국의 지도하에 만들어진 헌법체제를 수정하여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明文化하고, 집단자위권을 갖는 정상국가로 변모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른바 自虐史觀(자학사관)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경기부양책의 성공으로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고, 美日동맹의 강화로 주변국가의 반발을 누르고, 여론이 뒷받침되면 改憲(개헌)을 추진하려는 戰略(전략)이다.
  
  9. 아베 총리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했나?
  아베 총리는 2013년 2월 일본 參議院(참의원) 본회의 답변에서,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多大(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인식은, 歷代(역대)내각의 입장과 같다”. 즉,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는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아베 총리는 같은 해 3월 초 필자와 한 인터뷰에서도 ‘한국인들에게 筆舌(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끼쳤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도 수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10. 집단자위권은 한국에 불리한가?
  유엔헌장도 인정하고, 어느 나라나 행사하는 집단자위권(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은 일본이 국내 사정 때문에 유보해 왔던 것이다. 이를 헌법 개정이 아닌 헌법해석의 변경으로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집단자위권은 우리의 主權을 침해할 수 없으며, 유엔군의 후방기지로서 일본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므로 한국에 유리하다. 韓美日 동맹의 원활환 작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국 정부도 반대하지 않는다.
  
  11. 영토 및 역사관 문제에서 한국이 중국 및 북한과 손을 잡는 게 가능한가?
  한국이 안보상의 敵(적)인 북한정권 및 그 북한의 군사동맹국인 중국과 협력, 일본을 압박하는 형국을 보이면 일본 여론은 물론이고 미국도 반발할 것이다. 그 결과는 한국의 安保上 손해로 나타날 것이다.
  
  12. 북한정권의 韓日관계에 대한 戰略은 무엇인가?
  韓日관계를 악화시키면 자동적으로 韓美日 동맹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김일성은 韓美동맹, 韓日우호 관계를 양반이 쓴 갓의 두 끈으로 비유한 적이 있다. 두 끈을 자르면 갓(한국)이 바람에 날아간다는 뜻이었다. 남침 때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가 한국군을 지원할 수 없도록 일본인의 反韓감정을 악화시켜 한미일 동맹의 정상적인 작동을 막겠다는 의도이다.
  
  13. 아베 총리의 한국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視覺(시각)은 어떠한가?
  
  “일본과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로 일한(日韓)관계는 지극히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은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도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습니다. 즉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는 데 있어 일본과 한국, 그리고 미국 등 3개국이 연계해 나가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봐도 일한(日韓)이 긴밀히 연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한의 인적 교류도 연간 550만 명에 달합니다. 경제관계에 있어서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됐습니다. 兩國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늘 염두에 두면서 장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두 나라의 번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필자와 한 인터뷰 중에서)
  “저는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어 민주적이며 자유롭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 통일국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필자와 한 인터뷰 중에서)
  
  14. 韓日관계의 優先(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안보 및 통일 문제, 특히 北核 문제 해결에서 韓日은 협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韓美日 미사일 방어망 구축에 참여하고, 韓日 군사 정보 교류 협정도 맺어야 한다.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에 일본이 협조하게 해야 한다.
  -경제 관계와 국민친선의 확대
  -영토 및 역사관 갈등의 최소화
  
  15. 韓日문제 해결의 원칙은?
  국민 對 국민감정의 악화를 경계하면서 <政經(정경) 분리, 武力 불사용, 국민친선의 강화>를 원칙으로 삼는다. 과거의 갈등과 차이를 미래의 협력으로 해결하려는 슬기를 발휘할 때이다. 국가간 관계에서 힘을 쓰는 건 감정보다는 國力이다. 國力 안에는 국민들의 교양,언론의 양식도 포함된다.
  
  /////////////////////////////////////////////////////////////////////
  
  
  *韓日수교 40주년 기념강연록(2005년 6월)
  
  오늘은 1965년 6월 韓日(한일) 수교 이후, 40년 동안 한일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약 20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체의 한일 관계 속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이 관계를 잘 지속시켜 나갈 수 있겠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韓과 日, 숙명적인 관계
  
  한일 관계에는 기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를 가지 않는 한, 그리고 일본이 침몰하지 않는 한, 한국과 일본은 영원히 이웃나라로 존재해야 하는 숙명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절대로 적대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적대관계로 가면 양쪽이 다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기도 참 어려울 겁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치고 친하게 지내는 나라가 별로 없죠. 더구나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한 역사가 더 많지 않습니까?
  
  결국 한일 관계는 경쟁 속에서 협력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西歐(서구) 유럽에서 그런 관계를 찾는다면, 프랑스와 영국, 또는 프랑스와 독일간의 관계가 있겠죠. 특히 프랑스와 독일은 요새 가장 친한 나라가 됐습니다. 유럽에서 프랑스 사람에게 ‘어느 나라가 가장 친한 나라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면 독일이 나오고, 독일 사람에게 물어보면 프랑스에 가장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는가. 두 나라가 싸워서 스코어가 2대 2가 된 겁니다. 나폴레옹 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폴레옹 시대에는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독일을 짓밟았습니다. 그 뒤인 1870년 普佛戰爭(보불전쟁) 때는 비스마르크가 복수를 했죠. 빌헬름 1세는 파리를 점령한 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때는 다시 프랑스가 이겨서 알사스(Alsace), 로렌(Lorraine) 지방을 되찾고 복수를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초장에 독일이 이겼는데, 드골의 지휘 하에 반격에 성공하여 프랑스가 패전국에서 전승국으로 바뀌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스코어가 비슷해졌죠. 치고받으며 서로 화풀이하는 과정에서 兩國관계가 성숙한 셈이죠.
  
  자유통일 돕는 것이 일본이 빚 갚는 길
  
  한일관계가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대마도를 점령하든지 해서 일본과의 싸움에서 한 번 이겨야 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어떻게 건전한 관계로 갈 것인가. 먼저 한국이 남한 뿐 아니라 북한까지 자유화를 해서 한반도에 강력하고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를 확립하고 일본과 대등한 국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바탕에서 일본에 대해 열등감을 갖지 않고 과거의 원한에 집착하지 않는 건강한 정신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통일은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북분단은 일본에 상당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패전 후 일본 식민지를 戰後(전후)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북쪽을 차지하고 미군이 남쪽을 차지하면서 분단이 시작됐기 때문에 남북분단의 50% 이상의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가 없으면 분단이 없었어요. 우리가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戰後처리에서 분단이 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 사람들을 만나면, 일본이 한반도가 자유통일을 하도록 돕는 것이 한국에 빚을 갚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여기에 선뜻 납득하지는 않습니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 있어서 일본이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들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韓-美-日 삼각형을 완성하기 위해 독촉받은 韓日수교
  
  1965년의 韓日(한일)수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시는 冷戰體制(냉전체제)였죠.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소련을 저지해야 되는데, 아시아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남한이 자유의 前哨基地(전초기지)로 10만 km2를 확보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의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시아 대륙은 전부 빨갛게 됐고, 적화된 유라시아 대륙의 꼬리표처럼 남아있었던 것이 한국이었어요. 6·25 때 유엔군의 도움으로 국제 공산주의의 확장을 휴전선에서 저지했기 때문에 남아있게 된 전초기지였습니다.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남한과 일본과 미국을 연결하는 삼각동맹을 맺어야 극동이 지켜질 수 있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막을 수 있겠다 하는 絶體絶命(절체절명)의 명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953년, 韓美(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미동맹이 만들어졌고, 그 뒤에 美日(미일) 동맹이 만들어졌습니다. 삼각형을 그리려면 변이 세 개가 되어야 되는데 두 개밖에 없죠. 한미동맹과 美日동맹은 있지만, 한일 동맹이 없으니까 삼각형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李承晩(이승만) 정부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제발 일본과 수교를 해 달라고 오랫동안 부탁을 했습니다.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을 당시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일본하고는 절대 相從(상종) 안 한다’는 것이었죠. 때문에 한일 회담은 계속됐지만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나왔을까.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산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아직 戰後 복구가 안 되고 경제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일본과 수교를 하면 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갈 것이다, 이런 일은 내 세대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國力이 팽창된 후의 다음 세대에서는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교를 귀신처럼 잘했다고 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단지 고집 때문에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외교의 달인’ 이승만, 평화선 그어 후세 협상카드 제공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대 朴正熙(박정희)가 對日(대일) 수교 협상을 할 때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카드를 하나 만들어 두었습니다. 바로 평화선이죠. 1952년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동해에 평화선을 딱 긋고는, 이 안에 들어오는 일본 배를 다 잡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국제법 위반에 가까운 것이죠. 일방적으로 한 것이니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魚族(어족)자원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통통배 정도뿐이었는데, 일본 어민들이 우리나라 근해까지 와서 다 잡아가니까 어족자원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또 하나는, 후에 한일 수교협상을 하게 될 때 이 평화선이 아주 유용한 협상 카드가 돼서 이것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우리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현실화 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지만 평화선 덕분에 얻은 우리의 국가 이익도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독도를 영유하고 있는 것도 평화선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反日(반일)외교에 이러한 의미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일 수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공산주의 팽창에 대해 저지선을 친다, 곧 韓美日(한미일) 동맹이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삼각형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을 저지하는 데 있어서 일본이 중요한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데, 일본은 헌법상의 제약 때문에 외국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직접 참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駐日(주일) 미군의 작전이 마음대로 진행되려면 韓日 관계를 정상화하는 국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이런 경제적 계산도 있었을 겁니다. 한국과 일본을 경제적으로 수직적인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일본의 상품이 한국으로 들어가고, 일본의 기술이 한국으로 들어가도록 해서 한국 위에 일본을 놓겠다는 계산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65년부터 2004년까지 40년 동안의 한일 간의 무역성적표는 어떤가. 단 한 해도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해 무역흑자를 본 적은 없습니다. 40년 동안 일본이 한국에 물건을 팔아서 2,414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봤습니다. 2,414억 달러가 얼마나 큰돈인가 하면, 작년에 우리나라의 수출 총계가 2,500억 달러였으니까 그만한 흑자를 본 셈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일본에 무역수탈을 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선진 기술이나 중간재, 기계, 엔진 등을 수입해서 완제품을 만들고 이것을 중국 등지에 팔았죠. 중국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작년에 244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봤어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의 40년이 결국 한국과 일본을 경제적으로 묶는 역할을 한 겁니다.
  
  세계무대에서 한국에 날개를 달아준 韓美 동맹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1953년의 韓美(한미)동맹은 미국과의 유대관계입니다.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험프리 부통령이라는 사람이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어요. “한국의 힘은 미국과 한국의 힘을 합친 것처럼 강하고, 미국의 힘 역시 한국과 미국의 힘을 합친 것처럼 강한 것이 한미동맹이다”
  
  한미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한국이 자유세계 어디에서든 미국의 배경을 믿고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든다면, 1977년에 피아니스트 白建宇(백건우)와 尹靜姬(윤정희) 두 사람이 당시 공산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에 가서 피아노를 치려고 했는데, 북한 공작원이 그들을 납치하기 위해 함정을 파놨습니다. 그것을 알고 기적적으로 탈출을 한 두 분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그 나라에 있던 미국 영사한테 피신을 했고, 미국 영사는 부부를 비행기에 태워서 탈출하도록 도와줬습니다. 말하자면 급할 때 미국의 힘을 빌리는 것, 미국의 무대에서 우리가 공짜로 놀 수 있었다는 것이 한미동맹 덕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딛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을 지나지 않으면 미국으로 갈 수 없고, 또 동남아시아로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共助(공조) 관계가 이루어져야 해양 문화권에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한국은 한일 수교와 한미 동맹으로 韓美日의 동맹 체제를 완성했고, 이것은 선진-해양-자유 동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진국과의 동맹관계이지 후진국과의 동맹관계가 아닙니다. 북한이 망한 이유는 소련이라는 후진국, 중국이라는 후진국과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미국, 일본, 유럽이라는 자유진영, 선진국과 손잡았기 때문에 흥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와 손잡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두 개의 동맹관계 또는 우호관계에 의해서 확실하게 선진국 대열에 소속이 됐는데, 이 나라들은 해양문화권입니다. 흔히 대륙문화권과 해양문화권으로 크게 나누는데, 대륙문화권은 쉽게 말하면 유라시아 대륙, 러시아, 중국 같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들은 역사의 발전에서 뒤떨어져서 독재국가가 됐고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로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후진국이 되어버렸죠.
  
  역사적으로 보면 대륙문화에 소속되어 있을 때 한국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해양국가群에 소속되어 있을 시기에만 발전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가 미국과 일본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세계의 선진국인 해양문화권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해양문화권은 어떤 나라인가. 영국, 미국, 유럽과 같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만들어 낸 나라가 해양국가입니다. 해외와 교류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무역을 하고, 나라를 개방하고, 외국과의 접촉을 통해서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을 가진 나라, 그런 나라가 시장경제도 발전시키고 자유민주주의도 발전시켰습니다.
  
  한국-미국-일본과의 동맹관계는 선진국과의 동맹관계, 해양문화권과의 동맹관계 그리고 자유진영과의 동맹관계였습니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넓어졌죠. 우리나라는 38선으로 북쪽이 막히는 바람에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섬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북쪽을 포기하는 대신에,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한을 잃은 대신에 세계를 얻은 거죠. 세계를 얻도록 한 것이 韓美동맹과 韓日수교였다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65년 6월에 서로 사인한 한일 기본조약의 全文(전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양국의 공통의 복지 및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 및 안전을 유지하는데 국제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 이 내용이 한일 간 기본 조약의 정신입니다.
  
  대한민국만을 한반도 내 유일한 정통국가로 인정한 韓日 수교
  
  다음으로 韓日기본조약에서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결의 제195호에 따라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입니다. 한일 수교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주권국가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협상과정에서 오랫동안 시비가 붙었죠. 일본 측은 ‘북한도 있으니까, 북한을 놓고 어떻게 대한민국만 정통성 있는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며 여러 가지로 발을 뺐는데, 우리 정부는 양보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된다면 이 조항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뿐이라는 것은 우리 헌법에 정해진 바입니다. 이 헌법의 정신을 한일 기본조약에 포함시키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애를 썼고 그것이 성공을 했다는 점, 이것이 한일 기본 조약의 두 번째 의미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한일 기본조약을 만드는 데 있어서 시비가 가장 많았던 부분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액수 문제였습니다. 요새 일본과 북한이 수교를 하면 북한에 얼마를 줄 것이냐 하는 액수를 가지고 여러 가지 논의가 있는데, 50억 달러 아니면 100억 달러라는 설이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은, 3억 달러의 무상지불과 2억 달러의 차관 제공, 그 외에 3억 달러의 상업차관 제공까지 합쳐서 8억 달러였습니다. 이는 1962년에 金鍾泌(김종필) 정보부장과 오히라 외무장관이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대충 합의된 내용이었습니다. 요새는 이 액수가 너무 적지 않았느냐며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많은 액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8억 달러는 요즘 가치로 계산하면 아마 100억 달러 이상이 되는 돈인데, 당시 일본의 외화 보유고는 몇 십억 달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회담을 할 때 미국은 오히려 일본 편에 서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지어놓은 공장 등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새삼스럽게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평화선은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對日(대일)수교를 해서 이 정도 얻어낸 것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왜 그 때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느냐 등등 여러 가지 시비가 붙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런 비판을 할 수 있죠. 1965년 당시 상황에서 우리가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었겠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교 서두른 것은 한국, 일본은 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일수교를 제일 서둘렀던 것은 미국이기도 하지만, 일본보다는 朴正熙(박정희) 정부가 더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외화 보유고가 떨어져서 1963년에는 거의 부도상태가 됐고, 경제개발을 해야 되는데 內資(내자)를 동원하려고 화폐개혁을 해보니 돈이 별로 없는 상태였습니다. 外資(외자)를 끌어 들여와야 되는데 미국의 對韓(대한) 원조 역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 일본 밖에 없지 않느냐’ 해서 우리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일본은 급한 편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미국이 계속 일본에 빨리 수교하라며 등을 미는 상황이었지, 일본은 한국과 수교하지 않으면 당장 부도가 난다든지 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약한 입장에서 진행된 것이 한일 수교였다는 이야기죠.
  
  이 수교협상에서 독도문제는 정식의제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논의하자고 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일관되게 독도는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962년 9월 3일 예비 접촉 당시, 일본 외무성의 이세키 아시아 국장은 ‘독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섬이다. 히비야 공원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이것은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에는 아주 재미있는 의미가 있는데, 성경에 보면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게 있죠. 한 아기를 놓고 두 어머니가 서로 자기 아기라고 하니까, 솔로몬은 ‘그러면 아기를 두 동강 내서 나누어 가지라’고 했고, 그러자 진짜 어머니는 ‘차라리 저 어머니에게 주겠다’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독도가 자기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폭파시키겠다는 말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죠.
  
  어쨌든 한일 수교 협상에서 일본은 독도문제를 계속 카드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우리 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분쟁지역화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독도 문제를 끄집어내니까 우리가 과잉대응 하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독도를 국제분쟁지역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독도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긋하게 대해도 됩니다.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는 한 독도를 가져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 신경질적으로 대응을 하면 결국 우리에게 손해가 온다는 말입니다. 잘못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는 여론까지 일어날지도 모르죠. 물론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는 것은 어느 한 쪽이 갈 수 없고, 쌍방이 합의를 해야 됩니다만, 독도는 명백하게 우리 영토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문헌적으로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방방 뜨면 오히려 약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청구권 자금의 최대 수혜가 된 포항제철
  
  1965년은 우리나라에 중요한 해입니다. 1965년에 최초로 월남파병을 했고, 또 한일 수교를 했습니다. 이것은 朴 정권이 해외 개방 정책을 써서 한국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그만큼 넓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1960년대에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돈을 많이 끌어와야 했는데, 특히 두 군데에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월남戰線에 가서 건설을 하고 용역을 하는 과정에서 현금이 많이 들어왔고, 또 하나는 한일수교 협상에 의한 請求權(청구권) 자금으로 돈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양쪽에서 돈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1960년대의 경제성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포항제철이죠. 포항제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금을 얻으려고 유럽, 미국 쪽으로 뛰었는데, 그 쪽에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종합제철의 규모가 기껏해야 年産(연산) 30만 톤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 조건으로는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 수가 없다고 해서 고민을 하던 중 마지막으로 일본에 부탁을 잘 해서 청구권 자금을 쓰자는 대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일본 쪽에 로비를 했죠. 결국 일본의 철강회사로부터 설비와 기술면에서 도움을 받고, 초기 1억 달러 이상의 청구권 자금을 쓸 수 있게 되면서 포항종합제철이 만들어졌습니다.
  
  포항종합제철 社史(사사)에 보면 ‘민족의 血債(혈채)를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피로 산 채권이란 뜻입니다. 청구권이라는 것이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서 피로 산 것이 아닙니까? 8억 달러는 일제시대 고생했던 사람, 징용에 끌려갔던 사람, 종군위안부로 고통당한 사람 등 이런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든 것인데, 박정희 정부는 이 돈을 허비하지 않고 잘 썼습니다. 이 돈을 허비했으면 그만큼 억울한 게 없을 텐데, 8억 달러를 일종의 seed money(종잣돈)로 한국경제 개발에 썼습니다. 그래서 한일 수교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있지만, 8억 달러를 왜 낭비했느냐, 8억 달러를 왜 뇌물로 썼느냐, 왜 가로챘느냐는 등의 시비는 없죠. 민족의 혈채로 만든 것이 포항종합제철이라고 보면 한일수교 40년의 의미가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구권 자금 8억 달러를 받으면서 우리는 ‘양쪽 관계에서 그 이외의 권리, 이해관계에 대한 시비는 이것으로 끝낸다’고 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從軍慰安婦(종군위안부) 문제로 다시 보상을 청구할 수는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천 여 년의 역사상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현재의 韓日
  
  이렇게 해서 지난 40년간의 한일관계는 그 전의 한일관계와는 다르게, 독립국가와 독립국가 간의 대등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 걸친 兩國 역사상 지금의 한일관계가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시기입니다. 전쟁과 갈등, 침략과 저항의 관계가 너무 길었는데,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할 말을 다하는 지금은 우리 역사상 두 번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언제인가. 한일 관계가 좋았던 때가 고대사에 한 번 있었습니다. 삼국통일 직후였는데,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한 것이 676년이죠. 신라는 唐(당)나라를 평양에서 쫓아낸 후 한반도 전체는 아닙니다만 평양-원산선 이남의 통일을 이뤘습니다.
  
  일본은 신라의 통일을 막으려고 했죠. 그 때 일본은 백제와 동맹관계였는데, 660년에 신라와 羅唐(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니까 3년 뒤인 663년에 倭가 약 400척의 배에 3만 명을 태워서 백제에 구원군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羅唐 연합군과 결전을 벌여서 일본의 大(대)함대가 전멸했습니다. 이 일을 일본 역사에서는 白村江의 해전이라고 합니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해 버렸고, 또한 걱정이 많아졌습니다. 당나라와 신라가 손을 잡고 일본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생각에 곳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대마도에 다녀와 보신 분은 아실지 모르겠는데 대마도에 가면 그 때 쌓은 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규슈 같은 곳 역시 바다에 방벽을 쌓아서 신라군이 쳐들어올 경우에 대비했습니다.
  
  670년에는 일본에서 쿠데타, 즉 壬申(임신)의 亂(난)이 일어나서 天武天皇(천무천황)이라는 사람이 집권을 하게 됩니다. 천무천황은 일본에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유명한 천황입니다만, 천무천황의 집권 과정에서 신라가 그를 지원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와 있던 신라 渡來人(도래인) 세력의 힘을 빌어서 쿠데타에 성공한 것입니다. 백제 세력을 누르고 천무천황이 집권하자 일본은 親(친)신라정권이 됐습니다. 친무천황은 일본 역사에서 고대국가를 완성한 천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국가의 기본적인 체제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 때 국호를 倭에서 일본으로 바꾸죠.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사신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당나라에 보내는 사신을 遣唐使(견당사)라고 했죠. 그런데 일본은 천무천황이 집권한 30년 동안 견당사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싸워서 서로 적대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당나라 편을 들지 않고, 대신 30년 동안 자신의 집권을 도와준 신라에 사신을 몇 백 명 단위로 계속 보냈죠. 사신들이 통일국가를 건설한 신라의 국가운영방식 등을 배워 가서 일본의 그때 헌법인 大寶律令을 반포했다는 것은 우리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한 30여 년 동안 한일관계가 굉장히 좋았는데, 그 뒤 成德大王(성덕대왕) 때부터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하죠.
  
  韓國이 강력할 때 韓日관계도 좋아진다
  
  통일신라나 대한민국이 강한 나라가 됐기 때문에 한일 관계가 이렇게 서로 말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대등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반대로 한반도가 분열된다든지 한반도가 약해지면 반드시 일본이 한반도에 참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국도 가만있지 않게 돼서 한반도가 국제 전쟁터로 변하는 경우가 우리 역사에는 많았습니다.
  
  삼국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삼국으로 나눠지니까 일본 군대도 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들어와서 한반도는 국제 전쟁터가 됐습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몽고 군대가 자꾸 쳐들어와서 고려를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그 뒤 고려군과 몽고군이 손을 잡고 일본을 치기 위해 두 번 원정을 했습니다. 물론 다 실패를 했지만 말입니다.
  
  淸日戰爭(청일전쟁) 역시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올해(2005년)가 일본 입장에서는 러일전쟁 승리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만, 러일전쟁은 한반도가 약해지니까 사방에 있던 강대국들이 개입하면서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6·25전쟁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반도가 강하지 않으면 한국만 전쟁에 휘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이 진공상태에 공기가 들어가듯 개입을 해서 한반도가 국제전쟁터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해서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동북아시아, 나아가서 이 세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韓日수교 40년의 의미를 통해서 강력한, 통일된, 민주화된 한국을 건설하는 것이 우리민족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날의 한일관계를 숫자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2004년 작년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간 관광객,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관광객을 합치면 400만 명입니다. 상호 방문자가 400만 명이니까 하루에 만 명 이상이 되는 셈입니다.
  
  1965년에는 양국 방문자가 1년에 만 명도 안됐습니다. 40년 사이 왕래객이 400배가 늘어난 것이죠. 제주도 가는 시간이나 히로시마 가는 시간이나 비행시간은 비슷합니다. 부산에서는 오히려 대마도에 놀러가는 것이 서울로 오는 것보다 더 편해요. 쾌속선을 타면 규슈까지 세 시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物的·人的 교류를 통해서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무역액 면에서 일본은 우리나라 제1의 수입국이죠. 작년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461억 달러의 수입을 했습니다. 일본으로 217억 달러를 수출했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제1의 수입국이자 제3의 수출국입니다. 우리나라가 제일 수출을 많이 한 나라는 중국이고, 두 번째가 미국, 세 번째가 일본입니다.
  
  무역을 통한 韓中日 관계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작년의 경우, 한국은 일본에 대해 244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고, 일본은 중국에 대해 204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중국은 한국에 대해 202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서로 엮여 있는 것이죠. 중국은 한국과 장사해서 손해를 보고, 한국은 일본과 장사해서 손해를 보고, 일본은 중국과 장사해서 손해를 보는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사실 아주 이상적인 경제구조죠.
  
  美를 능가하게 된 韓中日의 경제규모
  
  韓中日(한중일)의 국력을 합하면 어떨까요? 2003년 통계인데, GDP 기준,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하면 세계에서 가장 경제규모가 큰 나라는 11조 달러의 미국이었습니다. 2등은 6조4460억 달러의 중국이고, 3등이 약 4조 달러의 일본, 한국은 약1조 달러입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경제규모를 합치면 미국과 같아집니다. 2005년부터는 韓中日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능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경제성장이 빠르니까, 韓中日 세 나라의 경제규모가 미국과 점점 격차를 벌여가게 되고, 세 나라의 국력을 합치면 세계에서 미국, 유럽 전체를 능가하게 될 겁니다. 엄청난 경제성장이죠.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우리 옆에 있고, 또 일본에 대해서 감정이 있으니까. 축구 같은 것 하면 대충 우리가 이기니까. 그런데 수치로 보는 일본의 국력은 어마어마하죠. 일본의 GDP는 독일하고 프랑스를 합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나라를 우리가 이웃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또 하나 있는데, 세계 185개국의 국민 평균 아이큐 랭킹을 보면, 韓中日이 1, 2, 3등입니다. 이 통계는 아일랜드 교수가 만든 것인데, 세계에서 국민 평균 아이큐 1위를 차지한 나라는 홍콩으로 IQ가 107입니다. 2위는 한국으로 106, 3위가 105를 기록한 북한과 일본이고, 중국 본토는 100으로 15등을 차지했습니다. 세계에서 IQ가 제일 좋은 나라가 韓中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이큐만큼 잘 살고 있지는 않죠. 아이큐가 좋다는 것은, 언젠가 그만큼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큐가 높다는 것은 정보화 사회에서 바로 高附加價値(고부가가치) 생산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요새 경제구조를 보면 머리가 좋은 사람은 리어카를 끌지 않고 컴퓨터를 두드려서 돈을 많이 벌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합쳐진 韓中日은 결국 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경제지역으로, 앞으로 100년, 200년 이상 번영할 것이라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여기에 미국을 합해야죠. 韓中日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까? 반드시 미국과 합쳐서 태평양 연안 4개국인 韓美日中(한미일중)이 서로 의논을 하고, 안보를 유지하고, 민주화를 해나가면서 잘 먹고 잘 살아야 공동 번영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현재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입니다. 韓中日은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데 거꾸로 가고 있는 유일한 집단이 북한입니다. 북한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韓中日과 미국의 공동번영도 유지가 안 된다는 것을 이제 국가 지도층은 다 알 수 있을 겁니다. 주변 국가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는 나라가 되고 있는데 김정일 정권이 암덩어리처럼 딱 중간에 끼어서 발전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결국은 북한을 자유화, 개방화 시키는 쪽으로 역사의 大勢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언론에서는 일본이 헌법을 고쳐서 軍國主義(군국주의)로 가려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말이 맞느냐. 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늘날의 일본은 도조 히데키(東修英機)의 軍部가 지배하던 1930년대, 1940년대의 일본이 아닙니다. 민주화된 일본이죠.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國家끼리는 전쟁이 없다
  
  민주주의 국가가 군국주의화된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통계가 있다고 합니다. 지난 150년 동안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국가 사이에 전쟁이 있고, 독재국가와 독재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있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150년 동안 하나의 원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결심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전쟁이라는 것은 기습전을 하고 국민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지도자 몇 사람끼리 작당을 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함부로 전쟁하는 정권은 선거로 교체됩니다.
  
  지금의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때처럼 군국주의화 될 것인가. 일본이 보수화, 우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있는 한 군국주의화는 어려울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일본은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일본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은 인종적으로 가장 가깝습니다. 한국 사람과 인종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중국 사람이 아닌 일본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종적인 뿌리는 본래 북쪽의 몽골 인종입니다. 몽고 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까지 들어갔습니다. 물론 남쪽으로부터 올라온 남방계통 민족도 섞여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압도적으로 몽골系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한국과 일본 사람이 만났을 때 가장 친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의 여성 저널리스트 사쿠라 요시코 씨가 쓴 책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일본은 몽골과 한국의 分家(분가)다. 일본 사람은 항상 本家(본가)인 몽골과 한국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本家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찬란한 문명을 만든 일본 사람들의 진취성을 평가해줘야 한다.”
  
  한글 專用으로 漢字 문화권에서 이탈 조짐
  
  우리가 같은 인종인 것을 인정하고, 또 서로 다른 것 역시 인정한다면 싸우더라도 조금 덜 각박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전제는 우리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힘이 없이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것이죠. 힘없는 사람이 강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겠다는 것은, 강한 사람 밑에 가서 屈從(굴종)하겠다 하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경쟁하면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운명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漢字(한자) 문화권에 간이 몸담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韓中日이 한자 문화권 아닙니까? 요새 우리가 한글전용을 하는 바람에 한자 문화권에서 이탈하려고 합니다. 韓美동맹에서 이탈하고 韓日 관계가 나빠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우리나라만 한자를 쓰지 않아서 한자 문화권에서 이탈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한자를 쓰지 않는 것은 한자 문화권에서만 이탈하는 것이 아닌, 우리 조상들의 전통문화로부터 이탈하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적혀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전통문화는 거의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2,000년 역사 중 1,900년 동안의 공용어는 한자였습니다. 한글이 공용어였던 것은 최근 100년 사이의 일입니다.
  
  한자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린다면, 이제 한자는 중국의 문자가 아니라 韓中日의 공통된 문자입니다. 라틴어가 이탈리아 사람들만의 문자를 넘어 유럽사람 전체의 문자가 된 것처럼 한자는 한국, 중국, 일본의 공통된 문자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민주주의라는 말은 중국 사람들이 만든 단어가 아니라 일본 사람이 만든 단어입니다. 요새 우리가 쓰는 현대적인 단어는 거의 전부가 明治維新(명치유신) 이후 일본사람들이 작명한 겁니다. 民主主義(민주주의), 資本主義(자본주의), 市場(시장), 電波(전파), 기준을 세운다 할 때의 基準(기준), 哲學(철학), 學校(학교), 이런 말 전부가 옛날부터 있었던 한자가 아니고 일본 사람들이 만든 한자입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북한의 국호입니다. 여기에서 조선이라는 말만 빼면 나머지는 전부 일본 사람들이 만든 漢字 용어입니다. 민주주의, 일본 사람이 만든 용어입니다. 人民(인민)과 共和國(공화국), 역시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大韓民國(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는 일본 사람이 만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民國(민국)은 중국, 즉 中華民國(중화민국)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日帝(일제)를 淸算(청산)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국호에서부터 日帝를 청산한 셈이죠.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도 ‘中華’만 빼면 전부 일본 사람들이 만든 용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毛澤東(모택동)이 그 국호를 싫어했다고 해요. 먼저 선진화된 일본 때문에 중국에서 만든 한자와 일본에서 만든 한자가 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한자 문화권을 이탈하면 韓中日의 공동번영 대열에서 탈락한다는 점을 강조드립니다.
  
  일본인과 일본 정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인과 일본 정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못된 짓을 참 많이 하고 있어요. 특히 일본 지도층 중에서 한국에 대해 오만한 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본 전체는 아닙니다. 良識(양식) 있는 日本 국민들이 더 많죠. 때문에 일본 정부 또는 일본 지도자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일본 사람 전체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에도 우파와 좌파가 있는데, 이게 아주 묘합니다. 일본의 우파는 현재 일본의 주도권을 잡고 있어요. 자민당이라든지, 신문사로 치면 요미우리 신문사 등이 우파입니다. 김정일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때문에 일본 사회가 더 우경화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편을 많이 들었던 아사히신문 같은 언론은 좌파인데, 이쪽의 영향력은 많이 줄었습니다. 최근 요미우리신문, 산케이신문 같은 우파가 힘을 얻게 된 것은 김정일 때문입니다.
  
  일본의 우파는 과거사 부분에서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일수교를 한 사람들이 이 우파였습니다. 박정희 정부 때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제일 많이 도와준 것이 이 우파입니다. 남북과의 관계에서 남한 편에 서서 북한을 흡수 통일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파에요. 교과서 문제나 과거사 문제에서 우리 편같이 여겨지는 좌파는 오히려 북한 편을 듭니다. 지금도 김정일 편을 들고 있어요. 우리가 순진하게 ‘아, 교과서 문제나 독도문제에 대해서 우리한테 유리하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편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오해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일 관계는 굉장히 이중적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일관계가 갑자기 나빠진 2005년 3월에도 한국에 들어온 일본 사람들의 숫자가 작년 동기에 비해 20%가 늘었고, 4월에도 13%가 늘었습니다. 이 현상은, 정부와 정부는 싸우더라도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 믿는 구석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는 구석은 뭐냐. 일본 사람이 한국에 와서 중국에서처럼 얻어터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안전하게 관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역시 한국 사람도 일본에서 어이없는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일관계의 제일 중요한 자산입니다. 지난 40년 동안의 교류가 양국 국민 사이의 신뢰·협력관계를 만들어 놨습니다. 정치적인 분쟁을 오히려 민간인 간의 관계가 중화시키고 완충시키고 있는 셈이죠.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외교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했지만, 외교전쟁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외교전쟁을 제대로 하려면 우리가 일본상품 불매 조치를 취하든지, 일본 사람이 입국할 때 비자를 받고 오라든지 하는 조치를 취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가 손해 아닙니까? 일본도 마찬가지죠. 한국에 대해서 강경조치를 취하면 자기들이 손해입니다. 이처럼 딱 엮여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韓日 상호 신뢰관계의 끈은 바로 ‘民主主義’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서로 상호 신뢰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사실입니다. 일본 사람 입장에서 중국에 관광하러 가는 것은 위험하고 한국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은 민주주의이고 중국은 一黨(일당)독재라는 점 때문이죠. 한국에서는 法治(법치)가 있으니까 일본 사람이 봉변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중국은 법이 안 통하는 곳이기 때문에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중국에 들어가는 일본 관광객은 최근 줄었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고, 일본도 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킬 때 한일관계가 진정한 장기적인 협력체제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의 민족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게 있습니다. 첫째,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 우월감은 무엇이냐. ‘명치유신을 해서 우리가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선진국이 됐다, 특히 조선과 비교해서 우리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주장하기 위해서 한국의 후진성을 강조합니다. 우월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는 아주 잘못된 심리구조가 있습니다.
  
  명치유신을 하면서 일본이 제국주의로 변했습니다. 근대화를 해서 민주국가를 만들면 좋았을 텐데, 일본 사람들이 뒤늦게 서양의 제국주의를 배우더니 아시아 주변 국가를 침략해서 이웃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근대화를 추진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라고 하면 일본에서는 제일 인기가 있는 大 정치인인데, 한국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 하면 征韓論者(정한론자), 나쁜 놈입니다. 일본의 영웅은 한국에 오면 逆徒(역도), 나쁜 사람이 됩니다. 伊藤博文(이등박문)은 명치유신의 大 정치가이지만 한국에서는 韓日合邦(한일합방)을 가져온 元兇(원흉)이 됩니다. 반대로 안중근 義士(의사)는 우리나라에서는 義士이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이처럼 근대화의 과정에서 일본이 제국주의로 가는 바람에 주변국가에 큰 재앙을 불렀습니다. 일본이 1945년의 패망으로 가는 발단이 한국 침략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닙니까? 한국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배제시키기 위해서 淸日 전쟁을 했습니다. 그 후에 더 욕심이 나서 만주로 간 것이죠. 만주를 확보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싸우게 됐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사실, 러일 전쟁 때 일본이 이긴 것은 대단하죠.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미국과 대등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세계 제1의 육군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화를 한 지 30년밖에 안된 일본이 그런 러시아와 싸워서 이겼다는 것, 그리고 황인종이 이겼다는 사실의 파급효과는 대단했습니다. 간디나 네루 같은 인도 사람들도 일본이 러시아에 이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열심히 하면 독립할 수 있겠다’면서 고무됩니다. 제3세계의 독립운동에 러일전쟁의 승리가 상당한 자극제가 된 것이죠.
  
  일본은 러일전쟁을 이기는 과정에서 두 나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일 큰 도움을 준 나라는 英日(영일) 동맹을 맺은 영국이었는데,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해줬습니다. 러일 전쟁은 오래 계속되었으면 일본이 결국 질 전쟁이었어요. 일본은 國力을 다 쏟아 부어서 초장에 끝내려고 했는데, 전쟁이 질질 끌게 되면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계속 물자와 군대를 보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면 러시아가 이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나서서 중재를 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의 휴전협상을 중재해서 조기에 전쟁을 끝내도록 만들어줬습니다. 결국 미국, 영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이 러시아에 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서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먹었고, 한 걸음 더 나가서 中日(중일)전쟁을 일으켜서 중국을 점령하겠다고 하니까 일본을 도와줬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저지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견디지 못한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하면서 터진 전쟁이 태평양 전쟁입니다. 일본이 패망하는 과정을 보면, 그 원인은 한국에 대한 야욕으로부터 출발해서 결국 1945년의 패전으로 끝났다는 것이 큰 흐름입니다.
  
  일본 공사와 깡패의 작당으로 明成皇后(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사체에 모욕을 보이는 짓까지 한 결과가 결국 자신들의 패망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 중에서는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는데, 요새는 변명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변명의 논리는 뭐냐. 한반도는 일본을 향한 短刀(단도)와 같아서 한반도가 적대국가의 영향권에 들면 일본의 안보는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반드시 일본과 친한 국가가 있어야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전쟁을 했다는 것인데, 변명이 안 되는 내용이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남을 침략해도 좋다는 면허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外敵에게 한 번도 침략 당해본 적이 없는 日本
  
  일본은 外敵(외적)으로부터 한 번도 침략 당해본 적이 없는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그런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일본은 외국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점령되어 본 적이 없어요. 물론 미국에 항복해서 맥아더가 점령군 사령관으로 온 적은 있지만, 그 때도 초토화되면서까지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본토는 안전하게 유지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쟁의 패전 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일본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일본 사람들의 논리는 가해자 또는 강자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피해를 많이 당해서인지 피해자의 논리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둘이 대화를 해 보면 평행선상을 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가 제대로 되려면 한 번 우리가 승리자가 되고 일본이 패배자가 되어야 되는데, 그럴 수도 없고.
  
  문제는 통일입니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서 강력하고 자유로운 국가를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에 대해 계속 열등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통일이 되면 7,000만의 인구를 가지게 됩니다. 일본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서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나라와 인구가 비슷해질 수도 있어요. 국력 면에서도 우리가 7,000만 시장을 가지게 되면, 프랑스 정도가 돼서 세계 6~7大 경제 강국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됐을 때 일본과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죠.
  
  지금도 한국 사람들 중에서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더 자신 있게 일본을 대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통일이 관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한일기본조약에 조인을 한 1965년 6월 22일 그 날 박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한일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 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오늘의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對日(대일) 불신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두는 바입니다.>
  
  40년 뒤인 지금 읽어봐도 이 경고 혹은 충고가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일본인에 대한 패배의식은 상당히 사라졌는데, 일본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우월감 같은 것은 아직 지도층에 상당히 남아있다고 봅니다.
  
  지금 일본에서 우파 또는 보수 본류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거에는 親韓派(친한파)라고 불렸던 사람들입니다. 남북 간의 대결에서 항상 한국 편을 들었기 때문인데, 친한파로 불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反韓派(반한파)로 가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일본은 ‘천황이 나오고 수상이 나서서 한국에게 열여섯 번 정도 사과를 했는데, 또 사과를 하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불평을 합니다. 그럼 우리 쪽에서는 ‘아니, 천황이 나오고 수상이 나와서 사과한 것은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장관들이 나와서 창씨개명은 한국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했다느니,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것은 러시아의 조선 정복을 미리 막아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잘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소위 망언 시리즈를 계속한다. 총론은 사과하면서 각론적으로는 변명만 하기 때문에 우리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사실이죠.
  
  세계적으로도 드문 해방 후의 조용한 결별
  
  저는 한일 간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1945년 8월 15일 安在鴻(안재홍)선생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안재홍 선생은 우리 민족지도자 중 한 분이신데, 조선일보 사장을 지내시고 해방 후 軍政(군정)시절에 민정 장관도 하시다가 납북되어 북한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물러간 이들이 한 150만 명 됐습니다만, 이 분들이 안재홍 선생에게 매우 고맙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1945년 8월 15일 천황이 항복방송을 한 다음, 안재홍 선생이 지금의 KBS인 경성방송에 나와서 이런 당부를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고맙게 생각한 부분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시어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 간의 총독정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 일본 양 민족의 정치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국민으로서 엮여있는 국제조건 아래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하여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 조선 동포가 일본 국민들과 똑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으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미군에 항복한 일본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있을 때니까 틀림없이 보복의 선풍이 불게 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맞아 죽고 했습니다.
  
  안재홍 선생이 여기서 핵심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여기서 일본 사람들을 때려죽이든지 하면, 일본에 남아있었던 사람들 -500만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한 250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 또한 당하지 않겠느냐’는 지적과, 일본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서로 도와가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으니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안재홍 선생의 이 방송은 영향이 있어서, 남한에서 일본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었습니다. 강제결혼을 했다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이 정도로도 매끄럽고 조용하게 헤어진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어요. 독일이 1945년 패전한 후 러시아나 東歐(동구)에 있던 독일의 민간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300만 명이 학살됐습니다. 이 부분은 기사로 다뤄지지 않았고, 역사학자들이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수천만 명을 죽인 독일이니, ‘뭐, 너희 300만 명 죽은 것쯤이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독일을 점령한 소련 군대는 그 동안 워낙 소련 군대가 독일군에게 많이 당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약탈, 강간 등을 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한일 관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헤어졌습니다. 잘 헤어졌다는 것은 역시 민족적으로, 인종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자 문화를 공유했다는 경험이 위기 때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을 보면, 일본 사람들에 대해 호평을 한 경우가 꽤 많습니다. 호평의 내용을 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부드럽다, 일본 사람들은 서로 겸양한다, 서로 겸손하다는 뜻이죠. 러일 전쟁 전후의 글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요새 이 말을 인용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이 과연 그 때의 일본처럼 겸손하고 부드러운가에 대해 반성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죠. 일본이 요새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웃나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한국과 중국으로부터의 평가 없이, 이웃에서 인심 못 얻은 국가가 어떻게 세계의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끔씩 일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만, 겉으로는 예예 하지만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라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남의 설득이 잘 안통하고, 스스로 생각해서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바꾸는 것이 일본 사람이라는 것이죠.
  
  오늘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날 한일관계가 정치상에서나 신문에 나오는 것처럼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관계이고, 또한 東北亞의 경제발전 때문에 이 관계는 계속 지속될 것인데 다만 문제는 북한입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韓中日의 공존, 공영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가 판명나게 되어있습니다.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람들이 반드시 남한 편을 들어 주어야 한일관계가 좋아질 것입니다.
  
  며칠 전에 중국의 어선이 우리 영해로 들어와서 단속하러 온 해양경찰대 경찰관들을 쇠파이프로 폭행하고 한 사람을 바다로 내던지고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反中(반중)데모가 일어납니까? 일어나지 않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일본이나 미국 배가 그런 짓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미국 대사관이나 일본 대사관을 점령했을 겁니다.
  
  왜 중국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렇게 굴욕적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反日(반일)과 反中(반중)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反美(반미)와 反北(반북)이 균형이 맞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균형이 안 맞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행패에는 화가 나지 않지만, 일본의 행패에는 화가 난다는 것은 한국이 오랫동안 중국의 문화적인,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 심리적으로 무장해제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민주화된 나라입니다. 중국은 민주화된 나라가 아니고, 중국은 지금도 북한 편입니다. 1950년 10월에도 통일을 이루려던 찰나에 중공군이 들어와서 우리의 통일을 저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국 편을 들어서 과연 국가 이익이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다시 대륙세력으로 돌아가서 중국, 러시아, 북한과 유대를 맺고, 일본, 미국과 대항을 해서 우리의 국가 이익을 지킬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하나의 화두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시간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역사 메모: 韓日감정의 源流
  
  盧泰敦(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亡國(망국)의 恨(한)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정사)인 日本書紀(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도 비슷한 글을 자주 썼다. 역사를 놓고 벌이는 오늘의 韓日갈등, 그 深層(심층)에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감정이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의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이다.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편파적이고 부정적인 新羅觀(신라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와 이 책에 써진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惡(악)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사 출신의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씨는 1970년대 한국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을 썼는데,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오카자키 히사히코씨는 아베 총리에게도 전략적 助言(조언)을 한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오카자키 대사는 ‘백제의 亡靈(망령)’이란 표현을 했다.
  
  <일본과 신라 사이의 안티파시(antipathy,뿌리 깊은 증오심) 속에는 신라와 백제의 近親(근친)증오적인 안티파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즉, 신라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 속엔 백제에 대한 경계심이 섞여 있고, 일본의 신라에 대한 감정적 혐오 속에는 백제계 遺民(유민)의 영향이 짙은 일본 조정의 新羅(신라)혐오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戰前(전전)에 소학교 때 배운 상식도 그러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문자와 불교를 전해준 좋은 나라이고, 신라는 熊襲(웅습,규슈 남부의 미개 부족)의 오야붕(두목) 같은 나라로서, 일본이 공격하면 즉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일본 조정의 書記(서기) 등은 모두 백제계 인물이므로, 역사 등도 백제에 유리하도록, 신라는 나쁜 것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는 이 백제계 사람들의 신라멸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百濟記(백제기), 百濟新撰(백제신찬), 百濟本記(백제본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百濟의 古記(고기)를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文體(문체)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조정에 제출하기 위하여 써진 것이란 說(설)이 최근에 유력해졌다.>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있고,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주적) 내지 屬國(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日本書紀 欽明(흠명)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임나: 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조길사:귀화 백제인 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屍身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대엽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성상)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영건)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왜인)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왜)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왜)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대가야), 지금의 高靈(고령)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 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 지방)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 계통임을 암시한다.
  
  일본인처럼 국가와 민족의 생성 과정을 비밀로 붙이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일본-한반도 및 아시아 대륙의 관계는 영국-유럽 대륙 관계 비슷하다.
  
   *일본과 한반도, 영국과 유럽
  
   영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가 다 대륙에 아주 가까운 섬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대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대륙에 영향을 주는 과정에서 어떤 공통성을 느끼게 한다. 일본사람들은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영국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자랑한다. 일본과 한반도, 특히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서 영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1. 로마의 침입: 시저가 서기 전 55년에 영국을 정복했다. 이때 원주민은 (셀트 또는 겔트족으로 불리는 인도-유럽계 사람들이었다. 겔트족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도 살았는데 여기서는 골族이라고 불렸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북방 몽골 인종이 건너갔다. 야요이 문화의 주인공들인 이들은 농경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원주민들은 조몬인들이라고 불리는 남방계 사람들이 주류였다.
   2. 유럽 대륙에서 훈族의 西進으로 촉발된 게르만族의 대이동 시대가 4-5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영향은 영국에 미친다. 로마군단이 물러난 직후인 서기 428년부터 약70년간 독일지방에 있던 게르만族 앵글스族과 색슨族이 바다를 건너와 영국을 정복한다. 이들은 원주민들을 북쪽 스콧랜드 지역과 서쪽 웨일스 지역으로 밀어내고 동부와 중앙부, 그리고 남부를 정복한다. 잉글랜드란 말과 앵글로 색슨족이란 말이 이때 생겼다.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훈族과 같은 계통인 흉노-몽골계 북방유목민족들이 중국과 한반도로 밀고내려온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세우고 그 지배층이 된다. 이들 북방기마민족의 일단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가야출신은 규슈로, 신라계는 일본의 서해안(시네마 돗도리 등)으로, 고구려계는 동북지방으로, 맨 나중에 백제계는 나라 교토 지방으로 이주하여 각각의 부족 중심으로 小국가들을 만들다가 5세기경에 통일정권을 세운다.
   3. 서기 597년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영국에 들어와 주민들을 기독교로 改宗시킨다. 비슷한 시기 불교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 확산된다.
   4. 서기 9세기 초부터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바이킹들이 유럽 전체를 침략하여 약탈과 정복을 되풀이한다. 이들은 키에프, 시실리, 南이탈리아, 북부 프랑스를 정복하여 왕조를 세우고 정착한다. 이 민족이동의 흐름을 타고 덴마크에 살던 바이킹의 일족이 영국으로 쳐들어와 先住民들인 겔트족과 앵글로 색슨族을 정복해간다. 이때 알프레드 대왕이 원주민들을 통합하여 덴마크 세력을 저지하고 이들에게 영국의 동부지방을 영지로 떼어준다. 11세기 초 본국인 덴마크 왕국이 노르웨이까지 통합한 여세를 몰아 덴마크 세력은 영국 전체를 점령한다. 영국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를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의 일부가 된다.
   7세기 말 중국대륙을 통일한 唐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 구원군을 보낸 倭의 해군을 한반도 서해안에서 전멸시킨다. 일본은 羅唐 연합군이 침략할 것에 대비하여 대마도, 후쿠오카, 나라 근방에 방벽과 山城을 쌓는다.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唐에 대항하여 통일 및 독립전쟁을 벌이자 일본은 신라와 친선관계를 맺는다. 대륙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內戰이 일어나 親백제 정권이 타도되고 親신라 정권인 天武天皇朝가 탄생한다. 이후 일본정권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고 일본내에서 고대국가를 완성하여 발전시켜나간다.
   5. 11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덴마크 세력이 왕의 자리를 다시 앵글로 색슨族에 넘겨준다. 색슨族 영국왕 해롤드는 노르웨이王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대군을 이끌고 상륙하자 이를 쳐부순다. 바로 이때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에 있던 노르만인들, 즉 바이킹族 출신 윌리엄公이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한다(1066년). 윌리엄公의 노르만 군대는 해롤드왕의 잉글랜드 군대를 해이스팅 전투에서 이기고 정복 왕조를 세운다.
   13세기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元제국은 일본으로 두 차례 대규모 상륙작전을 전개하지만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군대의 勇戰과 태풍 때문에 패배한다.
   6. 잉글랜드는 노르망디公 윌리엄에 정복당한 이후 강력한 행정력 덕분에 國富가 커지고 强兵이 육성된다. 잉글랜드 왕조는 그 餘勢를 몰아 이번에는 프랑스를 쳐들어 간다. 영국군은 한때 프랑스의 북부 및 서부를 점령하고 백년전쟁을 벌이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의 반격으로 프랑스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최종적으로 포기한다. 영국은 그 뒤 유럽 대륙에서 패권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 균형외교를 전개하면서 명예로운 고립을 지켜나간다.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을 선도한 영국은 19세기에 들어가면 세계의 약4분의 1을 식민지로 만들고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을 건설한다.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의 프랑스, 비스마르크와 빌헤름 2세의 독일,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를 효과적으로 견제, 無力化시키면서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다.
   한편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 대한 불개입 정책을 견지하다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를 통일하자 여세를 몰아 한반도에 침입했다가 明과 조선군의 반격으로 다시 섬으로 밀려난다. 그 뒤 도쿠가와 막부시절 약270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제국주의의 東進시절에 주체적인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을 성공시켜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뒤늦게 서구 제국주의의 국가모델을 따르면서 富國强兵에 성공하자 러시아와 결전하여 이김으로써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다. 이들은 만주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다가 미국의 견제에 걸리자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뒤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 非서구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
   *일본인들이 감사하는 장개석과 안재홍
  
   蔣介石의 以徳報怨
  
  
   中日전쟁을 지도하였던 蔣介石(장개석)은 1945년 8월15일 戰勝(전승) 연설에서 수백 만 명의 중국인을 죽인(중국 측 軍民 사상자는 1000만 명으로 추계)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시켰다.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중국 동포는 '舊惡(구악)을 기억에서 지우고 사람들에게 善을 행한다'는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고귀한 덕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관되게 일본국민을 敵으로 삼지 않았고, 다만 橫暴非道(횡포비도)한 武力을 행사한 軍閥(군벌)만을 敵으로 생각한다고 明言하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동맹국과 함께 敵軍을 타도하였습니다. 그들이 투항의 조건을 전부 충실하게 실행하도록 엄격하게 독려하여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우리는 보복하여선 안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가해선 안 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나치스적 軍閥에 의하여 우롱을 당하고 선동당한 점에 대하여 우리는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대할 뿐입니다. 만약 과거 敵이 행한 폭행에 대하여 똑같은 폭행으로 대하고, 그들의 우월감에 대하여 노예적 굴욕을 가한다고 한다면 원한은 또다른 원한을 부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해온 仁義의 전쟁이 목적한 바가 아닙니다. 이 점을 우리 국민 동포 일동은 오늘에 즈음하여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蔣介石의 이런 태도를, 「以徳報怨(이덕보원)」, 德으로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蔣介石은 일본에 대한 피해 보상 요구도 하지 않았다. 1972년 일본과 國交를 열 때 毛澤東도 보상 요구를 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안에서도 최근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中日전쟁을 지도한 사람은 毛澤東이 아니고 蔣介石이다. 모택동은 抗日戰(항일전)보다는 장개석의 抗日戰을 방해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2. 장개석은 늘 도덕적 성찰에 노력한 사람이었다.
   4. 장개석은 후계자를 잘 두었다. 蔣經國(장경국)이 대만을 성공적으로 민주화시켰다.
   5. 중국의 미래도 장개석 모델(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 아닐까?
   6. 장개석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당시의 미군 사령관 스틸웰과 좌파적 미국 기자의 험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7. 淸朝가 무너진 이후 최초의 근대 국가 틀을 만든 이는 장개석이다. 오늘의 중국도 그 틀 위에 있다.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하도록 하고, 임시정부를 보호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한 점에 대하여는 한국인들이 따로 크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일본인들이 잊지 못하는 安在鴻의 광복 연설
  
   1984년 여름 나는 도쿄 부근 가와사키驛에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를 만났다. 당시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大作이다.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 패전 뒤 철수할 때까지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현대사 연구에 이미 古典이 돼 있다. 그 몇 년 전에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타씨는 京城世話會(한국에 살던 일본인들 모임) 호즈미 회장의 한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타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타씨는 그 뒤 19년 동안 1000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저 혼자 힘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철수민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망자, 受刑者(수형자) 명단을 깨알같이 적어 훈도시 속에, 또는 구두 밑창 속에 감추어 갖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정부에게 무엇인가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 혼란 속에서도 그렇게 한 게 아니겠습니까?』
  
   모리타씨는 군산에서 났다. 合倂(합병)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京城帝大를 나왔으며 그의 부인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경성세화회에서 철수 사무를 보다가 귀환, 日韓 협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그 뒤엔 極東아세아과에서 일하다가 韓日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駐韓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19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성신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御前(어전)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御前회의에서 決死抗戰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人命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赤化되었을 것입니다.』
  
   모리타씨는 『우리 같은 식민지 세대는 패전으로 발판을 잃고 큰 손해를 보았다』면서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50년 전 친구가 있는데, 일본에는 어딜 가도 50년 전 친구끼리의 모임은 없다는 것이다. 모리타씨는 일본에서 잃은 근거지를 戰後의 한국에서 다시 찾은 예이다. 모리타씨는 나에게 『왜 한국에는 귀환의 기록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추궁같기도 했다. 나는 도쿄 근방 사이타마현에서 1945년 10월에 났고 다음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敗戰 철수의 기록은 있으되 해방 귀환의 기록은 없다―유행가는 있지만.
  
   모리타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천황의 종전 방송 직후 경성방송국을 통해 安在鴻(안재홍) 선생(建準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自主 互讓(호양)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안재홍의 연설은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과 언론은 일본에 대하여 보도할 때 일본에서 생활하는 在日동포의 입장을 한 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언론과 정치인도 마찬가지이다. 兩國 관계가 정부 對 정부의 갈등으로 진행되는 것은 회복할 수 있지만 국민 對 국민 감정의 악화로 가면 서로 손해를 본다.
   ////////////////////////////////////////////////////////////////////////
  
   *뉴욕타임스의 문재인 반일정책 비판(2019. 9월1일자)
  
   “집안에서 궁지에 몰린 한국 지도자, 오랜 적개심을 선동하면서 일본에 달려들다.”
  뉴욕타임스 어제 기사 제목이다. 최상훈 서울특파원이 썼다. 요약한다.
  
   <문재인은 5년 임기중 중간점을 지나면서 전례없이 궁지에 몰렸다.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정책은 돈좌되었다. 경제는 침체하고 反정부 시위는 서울에서 강해진다.
  
   이런 곤경 속에서는 일본과 무역전쟁을 격화시키고 한일군사보호협정 종료를 통하여 미국을 자극하는 것은 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한국 정치판의 오래 된 게임의 원리, 즉 일본에 강하게 나가면 득을 본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자극하여 지지세력을 결속시키려 한다. 일본과의 무역전쟁에서 양보하지 않고 독도방어훈련을 한다.
  윤덕민 전 외교연구원장은 “국내문제와 씨름하면서도 그는 일본에 대하여 새로운 전선을 열어 反日감정을 선동함으로써 약해지는 지지세력을 강화하려 한다”고 평했다. 그는 미국이 개입해주기를 원하면서 일본에 대하여 후퇴하도록 압박하는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을 쓰고 있다고 했다. 무역전쟁은 문재인이 공약한 것들이 퇴색하고 있던 참에 벌어졌다. 청년 실업률 개선, 가계부채 줄이기, 북한과의 대화 등 약속은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최저임금 인상은 역작용을 냈고, 대학졸업자들은 일자리 찾기가 어려우며 김정은-트럼프 회담을 중개했다는 문재인의 공적은 벌써 잊혀져가는 기억이 되었고, 북한은 문재인을 조롱한다.
  
   문재인이, 2015년의 한일 간 종군위안부 최종합의를 파기하고, 대법원이 징용공 배상 판결을 하자 일본은 수출규제 강화로 나섰다. 한국은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시위대는 일본 대사관으로 진격하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펼치며, 일본여행을 방해하고, 독도방어훈련을 했다. 그래서 문재인의 지지율이 오르는 듯하다가 최근에는 조국 사태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언론은 조국과 가족의 도덕성 문제를 다루는 기사로 홍수를 이룬다. 청와대는 부인하지만 분석가들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도 조국 스캔들로부터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박철희 교수는 “이것은 조국 구하기이다. 그들은 스캔들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더 큰 충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문재인 외교는 아마추어식이고 감정적이며 민족적 자존심만 강조한다”고 비판하였다. 문재인은 反日감정을 선동함으로써 권력을 잡도록 한 전략으로 돌아가고 있다. 2017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친일, 반공, 산업화, 보수세력을 공격하였다. 그 상징이 박정희 박근혜였다. 조국도 대통령과 법원판결을 비판하는 사람을 친일파라고 공격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 중재를 할 뜻이 없든지, 능력이 없어 보인다. 그 대신에 그는 한국이 미군 주둔비를 더 내야 한다고 압박한다. 트럼프는 한국의 진보세력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미북 대화가 진전하지 못하자 사라지고 있다.>
  
  //////////////////////////////////////////////////////////////////////////
   *애국적 친일파에게 기대하였던 李承晩
  
   1952년 초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日帝 총독부 관료 출신인 任文桓(임문환) 씨를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장관은 차관에는 일본 고등문관 시험 同期인 李泰鎔(이태용)씨를 임명하였다. 任씨는 국회에 인사차 갔다. 국회는 그가 親日派라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회에서 돌아온 장관을 李 대통령이 불렀다. 任씨는 회고록에서 가까이서 본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老志士(노지사)라기보다는 百獸(백수)를 호령하는 老獅子(노사자)의 인상이었다. 위엄이 몸에 붙은, 鐵(철)의 의지를 가진 達人(달인)이었다. 가까이 가면 나보다 키가 작아 보였는데, 떨어져서 보면 뼈대가 굵어 백발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악수를 해보니 굵은 손아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하였다.>
   대통령이 물었다.
   "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 世風(세풍)을 거스르겠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李泰鎔은, 姓名(성명)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그런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손자를 타이르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任 장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얼굴로 돌아온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그러나,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산 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비탈도 논이었습니다. 밤에 지날 때 내려다 보니 전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산과 평야에 이어졌어. 저렇게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오래는 잘 살 수가 없어.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親日派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自重(자중)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任 장관은 '놀라운 술회였다'고 썼다.
   <그때 근엄하기 짝이 없던 노인의 자세와, 저 멀리 바라보던 노인의 眼光(안광)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인과의 대결에 親日派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日帝시절 그들이 맡았던 곡예사로서의 努苦(노고)를 알아준 부탁이 아닌가? 친일파를 일본의 개(犬)라고 보았다면 일본인이 다시 올 때 그들이 原주인에게 다시 꼬리를 흔들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다.>
   滿軍(만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日帝 관료-군인 출신들을 요직에 등용, 경제개발과 국가 근대화 사업을 맡긴다. 이들이 일본을 줏대 있게 잘 다루고 일본도 이들을 믿고 한국을 도왔다. 李 대통령의 예언대로 知日派(지일파)로 변신한 親日派 출신들이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지 않고 발전시키는 데 중심이 되었다.
   任文桓 씨처럼 식민지 관료 생활을 하면서 日帝와 동포 사이에서 곡예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고생을 기억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때 익힌 기술을 국가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준 李承晩과 朴正熙의 위대한 안목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李 대통령이 소련은 공산주의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의하여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무초 미국 대사는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을 소개한다.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창작과 비평’ 잡지에서 먼저 읽었다. …1, 2부는, 누구도 미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을 시기에 미국의 패배와 월남의 패망을 예고했다. 3부는 그 예고가 그대로 실현된 것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면서 결산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글 속에서나마 진실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읽는 나 자신도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재인의 운명 中)
   그가 말한 희열 속에는 월남이 공산화된 데 대한 기쁨도 포함된 것인가?
  
   <친일세력이 해방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떵떵거리고, 독재 군부세력과 안보를 빙자한 사이비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사회를 계속 지배해나가고, 그때그때 화장만 바꾸는 겁니다. 친일에서 반공으로 또는 산업화 세력으로, 지역주의를 이용한 보수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정말로 위선적인 허위의 세력들이거든요.> (대한민국이 묻는다 中)
   박정희와 이승만이 과연 사이비 보수이고 허위의 세력인가?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필요한 사람은 반일파가 아니라 친일파이다. 우호국인 일본을 잘 알아야 애국을 하지 무식하면 동키호테터럼 창을 들고 풍차를 향해 돌진한다.
  
  ////////////////////////////////////////////////////////////////////
   *흥미로운 비유: 한국과 일본, 유럽과 영국
  
  
   영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는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가 다 대륙에 아주 가까운 섬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대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대륙에 영향을 주는 행태에서 어떤 공통성을 느끼게 한다. 일본사람들은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부인하는 데 반해 영국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자랑한다. 일본과 한반도, 특히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로서 영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1. 로마의 침입: 시저가 서기 전 55년에 영국을 정복했다. 이때 원주민은 Celt(셀트 또는 겔트)족으로 불리는 인도-유럽계 사람들이었다. 겔트족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도 살았는데 여기서는 골族이라고 불렸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북방 몽골인종이 건너갔다. 야요이 문화의 주인공들인 이들은 농경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원주민들은 조몬인들이라고 불리는 남방계 사람들이었다.
   2. 유럽 대륙에서 훈族의 西進으로 촉발된 게르만族의 대이동 시대가 4-5세기부터 시작되었다. 西로마가 멸망한다. 그 영향은 영국에 미친다. 로마군단이 물러난 직후인 서기 428년부터 약70년간 독일지방에 있던 게르만族 앵글스族과 색슨族이 바다를 건너와 영국을 정복한다. 이들은 원주민들을 북쪽 스코트랜드 지역과 서쪽 웨일스 지역으로 밀어내고 동부와 중앙부, 그리고 남부를 정복한다. 잉글랜드란 말과 앵글로 색슨族이란 말이 이때 생겼다.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훈族과 같은 계통인 흉노-몽골계 북방유목민족들이 중국과 한반도로 밀고내려온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지배층이 된다. 이들 북방기마민족의 일단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가야출신은 규슈로, 신라계는 일본의 서해안(시네마 돗도리 등)으로, 고구려계는 동북지방으로, 맨 나중에 백제계는 나라 교토 지방으로 이주하여 각각의 부족중심으로 小국가들을 만들다가 5세기경에 통일정권을 세운다.
   3. 서기 597년에 카톨릭 선교사들이 영국에 들어와 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 비슷한 시기 불교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 확산된다.
   4. 서기 9세기 초부터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바이킹들이 유럽 전체를 침략하여 약탈과 정복을 되풀이한다. 이들은 키에프, 시실리, 南이탈리아, 북부 프랑스를 정복하여 왕조를 세우고 정착한다. 이 민족이동의 흐름을 타고 덴마크에 있던 바이킹의 일족이 영국으로 쳐들어와 先住民들인 겔트족과 앵글로 색슨族을 정복해간다. 이때 알프레드 대왕이 원주민들을 통합하여 덴마크 세력을 저지하고 이들에게 영국의 동부지방을 영지로 떼어준다. 11세기 초 본국인 덴마크 왕국이 노르웨이까지 통합한 여세를 몰아 덴마크 세력은 영국 전체를 점령한다. 영국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를 다스리는 거대한 바이킹제국의 일부가 된다.
   7세기 말 중국대륙을 통일한 唐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구원군을 보낸 倭의 해군을 한반도 서해안에서 전멸시킨다(663년 백촌강 해전). 일본은 羅唐 연합군이 침략할 것에 대비하여 대마도, 후쿠오카, 나라 근방에 방벽과 산성을 쌓는다.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唐에 대항하여 통일 및 독립전쟁을 벌이자 일본은 신라와 친선관계를 맺는다. 대륙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親백제 정권이 타도되고 親신라 정권인 天武天皇朝가 탄생한다. 이후 일본정권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고 일본내에서 고대국가를 완성하여 발전시켜나간다.
   5. 11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덴마크 세력이 왕의 자리를 다시 앵글로 색슨族에게 넘겨준다. 색슨族 영국왕 해롤드는 노르웨이王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대군을 이끌고 상륙하자 이를 쳐부순다. 바로 이때 프랑스 북부 노르만디 지방에 있던 바이킹 계열 윌리엄公이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한다. 윌리엄公의 노르만 군대는 해롤드왕의 영국군대를 해이스팅 전투에서 이기고 영국의 정복왕조로 새롭게 등장한다.
   13세기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元제국은 일본으로 두 차례 대규모 상륙작전을 전개하지만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군대의 勇戰과 태풍 때문에 패배한다.
   6. 영국이 노르만디公 윌리엄에 정복당한 이후 국내통합이 이뤄지고 경제가 성장한다. 잉글랜드는 활 부대를 양성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프랑스로 쳐들어간다. 영국군은 한때 프랑스의 북부 및 서부를 점령하고 백년전쟁을 벌이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은 프랑스의 반격으로 프랑스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최종적으로 포기한다. 영국은 그 뒤 유럽대륙에서 패권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 균형외교를 전개하면서 명예로운 고립을 지켜나간다.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을 선도한 영국은 19세기에 들어가면 세계의 약4분의 1을 식민지로 만들고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을 건설한다.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覇者가 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의 프랑스, 비스마르크와 빌헤름 2세의 독일,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를 효과적으로 견제, 無力化시키면서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다.
   한편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 대한 불개입 정책을 견지하다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를 통일하자 여세를 몰아 한반도에 침입했지만 明과 조선군의 반격으로 다시 섬으로 밀려난다. 그 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약270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제국주의의 東進시절에 주체적인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을 성공시켜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뒤늦게 서구 제국주의의 국가모델을 따르면서 富國强兵에 성공하자 러시아와 결전하여 이김으로써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다. 이들은 만주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다가 미국의 견제에 걸리자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뒤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 非서구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7. 영국의 母胎가 프랑스와 게르만族이듯이 일본의 母胎도 한반도이다.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친할수록 더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교류한다.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EU에서 영국이 탈퇴하기로 한 것도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일본도 명치유신 이후 아시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다가 공존이 아닌 침략 노선을 선택, 전쟁과 패망을 불렀다.
  
  
  
  
  
  
[ 2019-10-06, 16: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