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도 우리 민족끼리 똑같이!
북한과 한국은 서로 너무 닮아 있는 것 같다

朴承用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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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all mankind minus one, were of one opinion, and only one person were of the contrary opinion, mankind would be no more justified in silencing that one person, than he, if he had the power, would be justified in silencing mankind. (J.S. Mill)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찬성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하더라도, 인류가 그 한 명을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하지 않는 것은, 그 한 명이 (설혹 그런 권력이 있더라도) 모든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정당하지 않는 것과 같다.]

국가나 사회가 개인에게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권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역사의 대부분은 권위와 자유 사이의 투쟁이었다. 민주주의시대 이전에는 이러한 투쟁은 백성과 정부 사이의 투쟁이었다. 자유라는 것은 정치지배자의 독재에 대항하는 보호 장치였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통치하는 피지배자와는 적대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지배자들은 통치자 또는 통치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의 권력은 세습적이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압제적 권력행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공동체의 보다 강한 자들이 보다 약한 자들을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강자들을 누르고 질서를 잡아줄 최고 지배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의 권력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臣民(신민)들에게는 매우 위험하기도 하였다. 지배자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백성의 시대에서 국민의 시대가 왔다. 이제는 통치자는 대중과 동일시되었다. 통치자의 이익과 의지(will)는 국민의 이익과 의지와 일치 되어야 한다. 국민은 자기들의 의지에 반해서 지도자를 보호자로 삼을 필요가 없다. 지도자는 국민에게 책임을 지어야 하고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물러가야 한다. 지배자의 권력은 국민의 권력이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이다. 선출된 정부는 국민의 관찰이나 비판을 받아야 한다. 국민이 권력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국민의 의지는 다수의 의지이고 국민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의 의지이다. 즉 다수로 인정받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이다. 그 결과 다수 국민의 의지는 국민의 일부를 압제하려는 욕망을 가질 수도 있다. 인간은 다수의 대표자로서 국민을 억압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독재나 다른 권력 남용에 못지않게 이런 종류의 폭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즉 다수의 독재는 사회가 항상 경계해야 되는 惡 중의 하나이다. 독재자의 폭압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독재도 공포의 대상이 된다. 사회 자체가 폭군이 되어 명령을 하고 집행하게 된다. 사회가 집단에게나 개인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리게 되면 어떤 독재자나 어떤 종류의 정치적 압제보다도 더 무서운 사회적 독재를 자행하게 된다. 극단적인 사회독재는 삶의 구석구석까지 훨씬 더 깊이 침투하여 영혼자체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로부터 탈출할 수단이 더 적다. 그래서 독재자의 폭정에 대한 보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가 부과하는 주도적인 의견이나 감정의 독재로부터 개인의 보호도 필요하다. 사회 자신의 사상(ideas)이나 관행(practice)에 이견을 보이거나 반대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사회의 관행(ways)에 反하여 개인적인 생각이나 관념을 형성하는 것을 봉쇄하고 오로지 모든 사람들을 사회자신의 틀에 맞추어 형성하려는 경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자유는 정부로부터는 물론 사회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한다, 사회적 통념과는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가진 奇人(기인)이나 이단자도 용납되어야 한다. 기인이나 이단이 많을수록 창조적 파괴의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문화발전의 핵심인 혁신이 가능해 진다.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 문화의 생성이 가능하다. 이견을 억압하고 이견이 없는 사회는 소나 양들의 사회처럼 100년이 가고 천 년이 흘러도 전혀 변화가 없는 정체된 사회가 될 뿐이다. 진리나 사실은 이견의 도전이 없으면 고인 물처럼 진부하게 되고 생기를 잃고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짓도 지속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거짓에 대조되는 진실과 사실의 색채는 더욱더 선명하게 될 것이다. 거짓의 도전이 있어야 진실의 생명력이 더 강해진다는 말이다.

연세대의 柳(류)모 교수가 강의시간에 “일본군에 대한 위안부의 性(성)접대는 매춘의 일종이며 매춘은 오래된 산업이고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위안부의 일은 일본민간인이 주도하고 일본정부가 방치한 것이다.” 라며 종래의 위안부 성노예설을 부인하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위안부는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무임으로 혹사당한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를 “극악한” 일본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순교자”로 확신하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異說(이설)이고 異端(이단)적인 관점이 된다.

이로 인해서 柳교수는 한국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를 친일 매국노라며 파면하라는 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대부분의 신문방송은, 특히 좌파매체는 그에게 연일 집중적으로 비난의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집권여당의 국회의원들은 학교를 직접 찾아 가서 그의 파면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회독재의 행태이다. 다수의 의견이나 감정과 다른 것을 표현하는 개인을 폭압하고 징벌하는 것은 정치적 독재보다도 더 사악한 전체주의적 대중독재이다.

개인의 자유가 아예 없는 북한이나 개인의 자유가 심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한국은 서로가 너무 닮아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우리는 같은 문화공동체의 같은 민족이라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민족끼리” 국제무대에서 문화적 퇴행을 자초하며 사악하고 멍청한 코미디를 잘들 연출하고 있다.

참고: J.S. Mill, On Liberty


[ 2019-10-22, 09: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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