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독서 수준이 김용옥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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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일 "금요일 하루 연가를 낸 덕분에 주말 동안 책 세권을 내리 읽었다"며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의 책 3권을 추천했다. 그는 이날 소셜미디어 글에서 김 교수의 저서 '슬픈 쥐의 윤회',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통일·청춘을 말하다'를 소개하며 "우리의 인식과 지혜를 넓혀주는 책들"이라고 過讚했다. 문 대통령은 "쉬우면서 무척 재미가 있다. 물론 약간의 참을성은 필요하다"면서 "일독을 권한다"고 했다.
  
  '통일·청춘을 말하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10·4 선언 12주년을 맞은 지난 10월 4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김 교수가 유튜브 방송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진행한 대담을 재구성한 것이다.
  
   '슬픈 쥐의 윤회'는 철학적 요소가 담긴 13편의 단편 소설집이며,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는 김 교수가 20대 때 반야심경을 처음 접했던 때부터 시작해 반야심경의 의미를 해설한 책이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지난 봄 방송된 KBS1 TV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의 '괴뢰'라고 지칭하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에 찬성했으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는 망언도 전파를 탔다. '도올아인 오방간다'는 KBS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1월 시작한 강연 프로그램으로 김용옥 교수와 배우 유아인이 진행했다.
  
  '해방과 신탁통치'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방송에서 김 교수는 "김일성과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인물들"이라며 "일종의 퍼핏(puppet), 괴뢰"라고 말했다. 방송 중 한 방청객이 "(이 전 대통령이) 지금도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김 교수는 "당연히 파내야 한다, 우리는 이 대통령 밑에서 신음하며 자유당 시절을 겪었고, 4·19혁명으로 그를 내쫓았다, 그는 역사에서 이미 파내어진 인물"이라고 답했다. 한 언론은, 방송을 본 시청자 윤삼현(78)씨가 "공과(功過)가 모두 존재하는 전직 대통령을 술자리에서도 함부로 꺼내지 못할 말로 깎아내리는 공영방송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KBS는 신탁통치에 대한 김 교수의 허위성 발언도 여과 없이 내보냈다. 김 교수는 이날 "찬탁은 합리적 사유의 인간이고, 반탁은 변통을 모르는 꼴통의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소련이야말로 한국을 분할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이 분할 점령을 제시한 것에 대해서 소련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독립시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등 사실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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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注: 이 글은 1904년에 출간된 ‘독립정신’에 포함되어 있다. 아래 글은 추천자인 박근씨가 발췌한 것이다.
  
  
  옥중에 지루한 세월이 거연히 7년이 된지라 천금광음을 허송하기에 애석하여… 수년 동안 논문 논설 짓기로 적이 회포를 말하더니… 러·일 전쟁이 벌어지는지라 비록 세상에 나서서 한 가지 유조한 일을 이룰 만한 경륜이 없으나 이 어찌 남아가 무심히 들얹았을 때리오. 강개 격분한 눈물을 금치 못하여… 양력 2월 19일에 이 글 만들기를 시작하니… 지명과 인명을 많이 쓰지 않고 항용 쓰는 쉬운 말로 길게 늘여 설명함은 고담 소설같이 보기 좋게 만듦이요, 전혀 국문으로 기록함은 전국에 수효 많은 인민이 보기 쉽게 만듦이요, 특별히 백성편을 향하여 많이 의론함은 대한의 장래가 전혀 아래 인민에게 달림이라. 대저 우리나라에 소위 중등 이상 사람이나 여간 한문자나 안다는 사람은 거의 다 썩고 물이 들어 다시 바랄 것이 없으며 또한 이 사람들이 자기 몸만 그럴 뿐 아니라 이 사람들 사는 근처도 다 그 기운을 받아 어찌할 수 없이 되었나니 이 말이 듣기에 너무 심한 듯하나 역력히 증험하여 보면 허언이 아닌 줄을 가히 믿을지라. 오직 나의 깊이 바라는 바는 국민 중에 더욱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 자매들이 가장 많이 주의하여 스스로 흥기한 마음이 생겨 차차 행하기를 시험하며 남을 또한 인도하여 날로 인심이 변하며 풍속이 고쳐져서 아래서부터 화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며 죽은 데서 살아나 그를 원하고 원하노라. 건국 4237년 6월 29일 한송 감옥서 죄수 리승만 기록(‘독립정신’ 序)
  
  슬프다!나라가 없으면 집이 어디 있으며 집이 없으면 나의 일신과 부모처자와 형제자매며 일후자손이 다 어디서 살며 어디로 가리오. 그러므로 나라에 인민된 자는 상하귀천을 물론하고 화복안위가 다 일체로 그 나라에 달렸나니 비교하건대 만경창파에 배를 탄 것 같아서 바람이 순하고 물결이 고요할 때는 돛 달고 노질하기를 전혀 사공들에게 맡겨두고 모든 선객들은 각각 제 뜻대로 물러가 잠도 자며 한가히 구경도하여 직분 외에 일을 간섭할 바 없으되 만일 풍랑이 도도하며 풍우가 대작하여 돛대가 부러지고 닻줄이 끊어져서 허다한 생명이 사생존망의 시각에 달릴진대 그 안에 앉은 사람 뉘 아니 정신차려 일심으로 일어나서 돕기를 힘쓰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합심하여 조금도 사사 생각 없이 사공들의 힘을 도와 다 같이 살려고만 할지니 이는 사공을 위함이 아니요 곧 자기 몸을 위하는 도리라, 설령 사공된 이들이 각각 제 직책을 다하여 갈지라도 선객들은 각기 제 몸을 위하는 도리에 차마 그저 있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선객들이 술도 취하며 잠도 못 깨며 혹 눈도 멀고 팔도 부러져서 동서를 분별치 못하여 위태함을 깨닫지 못하여 점점 움직일수록 더욱 위태하여 만들어 널판이 쪽쪽이 떨어지고 기계가 낱낱이 상하여 물이 사면으로 들어오며 인명이 차례로 빠져들며 이웃 배에서 급히 와서 대신 건져주려하면 이 배의 선객들은 종시 남에게 밀어두고 무심히 앉아 죽기만 고대함이 도리라 하겠는가, 지혜라 하겠는가?…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이 곧 삼천만 생명을 싣고 풍파대해에 외로이 가는 배라, 생사존망이 急急奄奄(급급엄엄)함이 조석에 달렸나니 이는 삼척 동자라도 다 짐작하는 바라, 어떻게 위태함과 어찌하여 이러함은 다음에 다시 말하려니와 우리가 지금 당장에 빠져 가는 중에 앉았으니 정신차려 볼지어다.(총론 19~20쪽)
  …이 대의를 아는 사람은 임금을 낯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뜻으로 섬겨서 군명을 거역하고라도 백성을 이롭게 하며 종사를 편하게 하여 국가가 태평안락하게 하매 임금의 옥체가 스스로 태산반석의 편안함을 누리실지니 이것이 곧 나라에 신하된 본의라, 이 본의를 알진대 비록 군명을 항거하고 역명을 실어 千斬萬戮(천참만륙)하는 화를 당할지라도 달게 여기고 백성에게 해될 일은 일호도 행치 않아 옳을 것이어늘 잠시 이목의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히 종사에 위태함을 돌아보지 아니함이 어찌 참 충성의 반대됨이 아니리오.(총론 36!37쪽)
  
  
  故 金溶植(김용식) 외무장관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년)엔 이런 대목이 있다. 1955년 그가 일본 주재 한국 대표부의 대표로 있을 때 진해에서 휴양 중이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金대표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이를 구술시킨 후 늦여름의 조용한 진해만을 내려다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李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金 전 장관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5, 86년에 李 대통령의 예언을 회상하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고 했다.
   <86년도의 아시안 게임이 서울의 잠실에서 개최될 때, 관람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30년 전 李 대통령이 한 말을 회상하였다.>
  
   李承晩 대통령은 독립투사 시절부터 한국인의 저력을 확신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의 박사였고, 미국의 一流(일류)대학 3개(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를 다닌 그는 엘리트 의식에 함몰되지 않고 민족의 고민과 꿈을 항상 자신의 것으로 느끼면서 살았다.
   그는 한국인의 우수한 잠재력을 살리는 길은 언론과 학교를 통한 교육과 각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립투쟁을 주로 언론과 학교를 통해서 했다. 그는 자신을 민족의 교육자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민중도 자신들에 대한 李承晩 대통평의 이런 호감과 기대를 알고 반응했다. 그에 대한 지식인들의 바판은 거셌으나 국민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이 民心(민심)이 그를 建國(건국)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李承晩과 국민 사이의 義理(의리)관계인 것이다. 1945년 직후 지식인들이 하자는대로 했으면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위대성을 알아본 대중의 지혜가 지금도 한국을 살리고 있는 原動力(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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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이 판매금지 시킨 이유
  
   우리나라의 가장 거대한 인물에 대해 가장 위대한 문장가가 쓴 傳記(전기)는 가장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이 되고말았다. 대시인 徐廷柱(서정주)의 《雩南 李承晩傳(우남 이승만전)》이 그 책이다.
  
   이 책은 1947년 아직 대한민국이 출범하기 전에 徐廷柱 씨가 「전기의 집필자로 위촉되어 매주 두 차례씩 (雩南을) 만나뵙고 그분 생애의 이야기들을 그분에게서 직접 口授(구수)받아 노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에서 다른 전기와 크게 다르다. 「李承晩이 말한 李承晩의 생애」란 밀도와 實感(실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정보가치는 매우 무겁다. 더구나 大詩人(대시인)의 안목에 잡힌 巨人(거인)의 초상이란 점에서 이 散文(산문)의 깊이는 남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이 傳記는 출간되자마자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로 판매금지가 되고말았다는 점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여름에 三八社(삼팔사)에서 출판된 徐廷柱 著의 전기를 받아보고는 경무대에 근무하던 金珖燮(김광섭) 시인에게 한 마디했다고 한다.
  
   『徐廷柱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
   『좋은 시인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
  
   徐廷柱 씨는 「서양에서 반세기 이상을 사시며 공부도 많이 하신 우남 선생이시니 잘 이해해주실 걸로 알고 이분의 이름 밑이나 딴 누구의 이름 밑에서도 두루 존칭 붙이는 걸 생략했던 것인데, 이분의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전통적인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李대통령은 특히 아버지 李敬善(이경선)의 이름에 경칭을 생략한 데 대하여 대단히 화가 나서 직접 경찰에 지시하여 서점에 깔린 책들도 압수해버렸다.
  
   글쓰는 사람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자신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럼에도 徐廷柱는 이 전기의 재간행(1995년)에 붙인 서문에서「나는 내 일생에서 나를 낳게 하신 내 親父(친부) 외에 두 분의 정신적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왔다」면서 「한 분은 내 교육을 바로 이끌어주신 朴漢永(박한영) 스님이시고 다른 한분은 徹天(철천)의 民族自主獨立魂(민주자주독립혼)을 각성시켜주신 우남 이승만 어른 바로 그분이시다」라고 썼다.
  
   기자는 徐廷柱 씨의 初版自序(초판자서)의 첫 문장을 명문으로 꼽는다.
   <여기 그의 70여의 생애를 한 거찬 意志(의지)로써만 貫徹(관철)하였고, 또 관철하면서 있는 한 朝鮮(조선)사람이 있다. 舊한국 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世紀(세기)에 가까운 이 민족의 변화 많은 세월 속에 있어,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사람으로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一生(일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일생쯤 소비된대도 아까울 게 없다. 그만큼 그는 저 뭇 묏부리와 丘陵(구릉)들을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한 峻嶺(준령)이 되기 때문이다.>
  
   약 40년간 미국생활을 했고 미국의 일류대학들만 골라서 공부를 했지만 李承晩의 魂은 가장 조선적인 조선사람의 것으로 남아 있더란 徐廷柱의 이 말은 인간 李承晩을 논할 때 결론으로 삼을 만하다.
   徐廷柱 씨가 왜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1995년 3월호에 그가 쓴 글('雩南과 나'. 월간조선)이 답해준다. 이 글에 따르면 李承晩은 매주 찾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한시)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
   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번 오갔나
   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데만
   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 내 가슴 속이 문득 복받쳐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李朝(이조)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도록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가슴속에 못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한남산! 그 한남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徐廷柱 씨의 속에서도 어느 사이인지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서 확인하는 『아버지!』하는 감동이 안 솟아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承晩은 광복된 뒤 돌아와 추억의 남산을 찾아 이런 漢詩를 남겼다.
  
   도원고구산여연(桃源故舊散如煙)
   분주풍진오십년(奔走風塵五十年)
   백수귀래상해변(白首歸來桑海變)
   사향휘루고사전(斜向揮淚故祠前)
   (복삿골의 옛벗들 연기처럼 흩어져
   어수선히 지나간 오십년이여
   모두 변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
   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뿌리다니)
  
   기자는 1996~1997년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 대학에서 머물면서 李承晩이 이곳 대학원을 다닐 때 하숙했던 집(在美동포가 살고 있다)에 가 보았다. 기자는 徐廷柱 씨가 가졌던 경탄의 수수께끼를 풀고싶었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살면서 어떻게 조선인의 魂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는 미국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기자의 결론은 다음 세 가지였다. 李承晩의 타고난 인간의 그릇, 미국의 일류대학(조지 워싱턴 대학-하버드 대학-프린스턴 대학)을 다닌 학력,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詩心(시심)이 그를 으뜸 가는 조선인으로 남아 있게 하였던 것이리라. 반면에 徐載弼(서재필)은 미국 생활속으로 들어가 정착하면서 점차 조국과 멀어져갔고 한국어도 서툴게 되어갔다. 徐廷柱의 이승만 傳記에 두 사람을 비교한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徐載弼이 일시 귀국하여 協成會(협성회) 모임에서 강의할 때였다. 서재필이 토론 도중에 문득 생각난듯이 청중들에게 박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 잘하면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 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보시오.』
  
   그러나 이때 이승만에게는 『아무리 미국이 좋다 하여도 이런 것까지는 흉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또 한번 徐박사를 고쳐보면서 『자, 그럼 우리 박수 합시다』라고 큰소리를 내어버렸다. 李承晩은 못마땅한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두고 徐廷柱 씨는 傳記에서 「이 두 사람의 그 뒤의 생애는 『손뼉을 칠 수 있는 사람』과 『칠 수 없는 사람』의 사이와 같은 차이가 없지 않았다」고 썼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웁스!(oops!)』라는 말은 어색하여 『아!』라고 하고, 아무리 일본어를 잘해도 『하이』라는 말은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 한국인의 습관과 미풍양속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 이런 토착성을 李承晩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에 조선인의 혼을 가장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이 土種(토종) 조선인됨에서 李承晩의 무서운 주체성이 우러나온 것이다.
  
   徐廷柱 씨의 전기는 李承晩의 생애의 매듭이 된 가장 극적인 장면들을 정확히 잡아낸다. 李承晩이 여섯 살 때[그 때 그의 이름은 承龍(승용)]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적이 있었다. 이 소년의 눈을 틔어준 것은 서울 진고개의 일본인 의사였다. 이 병원으로 업혀 들어간 이승만 소년은 이제껏 맡아보지 못했던 쌩긋한 내음새에 코를 찡그리고는 『왜내 난다. 가자』라고 했다고 한다. 「왜(倭)내」는 李承晩이 처음으로 접한 개화의 문명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守舊(수구)세력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번 낙방하면서도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그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科擧(과거)가 폐지되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서당 친구 신긍우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파의 길을 걷게 되는 대전환이다. 이때 이승만은 이미 결혼한 나이 스물의 청년이었다. 李承晩의 급제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면서 無爲徒食(무위도식)하던 아버지 李敬善은 낙담한다.
  
   <『새로 된 시험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마는···』
   승만은 자기의 침묵이 하도 딱하여 거의 억지로 한 마디 되뇌어 본다. 그러자 아버지의 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와지며 『뭐? 시험제도라니? 그깐놈들에게 붙어서 그래 개화당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선비는 죽어도 군색해선 안되느니라. 가령, 백이숙제같이 산채를 씹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그 까짓 왜놈배들에게 부동한단 말이냐?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에라도 너는 그따위 시험제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이 난세에 性命(성명)을 보존할 생각을 해라. 고르지 못한 때에 묻혀서 사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길이다. 알겠느냐?』>
  
   李承晩의 漢學(한학) 실력은 과거를 재수, 삼수, 四修(사수)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것이다. 배재학당에서 일단 서양문물에 접하자마자 순식간에 李承晩은 가장 급진적인 개화파로 돌변한다. 漢字실력이 바탕이 된 덕분인지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영어도 빨리 배웠다.
  
   1899년 만 24세의 中樞院 議官(중추원 의관) 이승만은 고종을 李堈(이강)에게 讓位(양위)시키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개화파 朴泳孝(박영효)를 맞아들여 혁신내각을 수립한다는 일종의 쿠데타 계획에 관계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처지까지 갔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救命(구명)운동으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 뒤 약 6년간 한성감옥에서 생활했다. 이 獄中(옥중)이야말로 그 뒤의 李承晩을 만들어낸 단련과 극기의 교육장이었다. 여기서 남긴 잡문, 詩, 번역문 등은 獄中雜記(옥중잡기)로 불리는데 최근 연세대 柳永益(유영익) 교수에 의해 정리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는 142首(수)의 漢詩가 있다. 秋夜不寐(추야불매)란 제목의 산문은 李承晩의 뛰어난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 글의 번역문은 이러하다.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책을 본다. 저녁 종소리가 그치자마자 작은 창살에 어둠에 깃든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등에 불을 켜니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니 고요하기가 승방(僧房)에서 참선(參禪)에 들어간 스님과 같다.
  
   창살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니 뜰에 있는 나무가 침침하게 보인다. 약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와 볼을 스쳐가니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호소나 하듯이 귓가에 요란하다. 어느 집에선가 시름에 잠긴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담장 너머에선 순시하는 야경꾼의 징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성긴 버들가지가 서늘함을 보내오고 그윽한 난초가 향기를 풍긴다.
  
   밤은 어찌하여 이리도 깊어가기만 하는가? 종소리 북소리 멀리서 들리는데 누구의 시름인가? 날은 추워지는데 편지는 늦어지고 임금의 교사(사면장)도 다소 더디나 보다. 작년이고 금년이고 백발은 늙어감을 재촉하니 남은 날이 며칠이던가? 황가(皇家)에 일은 많은데 이 한 몸 왕옥(王獄)에 갇혔구나. 그만 두어라. 말해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아! 명(命)이로다. 운수에 달렸구나.
  
   무릇 선비로서 혼란한 나라에 처한 자가 참으로 능통한 권도(權道)로 헤쳐나가지 못할 바에는 다만 자기 한 몸이라도 잘 가누어 기미(機微)를 살피고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걱정해서 무엇하리오. 나도 이제부터 쉬리로다.>
[ 2019-12-02, 02: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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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idn     2019-12-04 오후 10:12
위 두 놈이 무얼 얼마나 안다고,
이 놈들아 지식이 중한 것이 아니니라
내면의 참 마음이 선한 것이어야 하느니 ...

바퀴벌레는 튀겨서 먹을 수도 있다더구나.
   白丁     2019-12-02 오후 11:00
‘문재인의 독서 수준이 김용옥 수준’ - 칼럼 제목 한 줄로 도올(돌멩이) 김용옥 수준을 평가하다.
문재인 수준에 비교하다니, 김용옥이 황공해했을지 모욕감을 느꼈을지, 그것이 궁금타.
   조고각하     2019-12-02 오후 5:17
비툴어진 시각이 인생을 파멸의 길로 안내하듯이, 글도 잘못 읽으면 인생을 망치게하는 법이죠....그러면 위 두사람이 유유상종이라고 해도 될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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