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의 동상 철거 狂風에 대한 반론
‘제퍼슨은 독립선언문 때문이지 노예를 부려 기리는 것이 아니다’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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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촉발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유럽 등 일부 지역으로 번졌다. 미국의 이 시위대는 미국에 시스템적인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다 과거 미국의 역사적 인물들 중 일부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며 이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타깃은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군의 사령관으로 남부연합의 대통령을 지낸 로버트 리 장군부터 시작됐다. 리 장군의 동상을 철거해야 하며 그의 이름을 딴 학교와 지명(地名)을 바꿔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은 다른 남부군 출신 인사들을 공격하다 이제는 북부군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율리시스 그랜트의 동상도 철거해야 한다고 한다. 이 시위대는 보수성향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물론 노예를 해방시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동상도 철거해야 한다고 한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27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대학원’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다.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공격의 대상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으로도 퍼졌다. 윈스턴 처칠 등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세력이 있다고 한다. 언론에는 흑인 시위대 지도자급이 ‘예수는 백인이 아니었다’ 등의 주장도 하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 문화가 예수를 백인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주입시켰다는 주장이다.

이런 가운데 캐나다 온타리오의 킹스턴 퀸즈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제프리 콜린스는 26일 월스트리트저널에 칼럼을 썼다. 칼럼의 제목은 ‘훼손행위를 멈추고 동상을 다시 생각해보라’이다. 콜린스는 동상 철거를 주장하기 전에 이 동상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동상이라는 것은 완벽한 한 인물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 불완전한 인물이 이룬 특정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지금 시대의 잣대로 과거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의 칼럼을 전문 번역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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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에 대한 훼손 행위를 막으려 하는 미국의 시장(市長)과 주지사들은 런던 시장 사디크 칸으로부터 하나의 교훈과 주의해야 할 점을 배울 수 있다. 칸 시장은 최근 시민들의 훼손 행위를 막기 위해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을 나무 합판으로 둘러쌓았다. 현재는 동상 철거 문제와 관련해 공청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칸 시장이 나무로 막은 동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제임스 2세 왕(王)이다. 제임스 2세 동상은 트라팔가 광장에 설치돼 있다. 1685년부터 1688년까지 권좌에 올랐던 제임스 2세를 칸이 걱정해야 하는 데에는 황당한 이유가 있다. 물론 제임스 2세는 현재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때 이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동상은 그가 노예 무역에 투자를 했다는 이유로 철거될 수 있다. 그는 왕이 신적인 존재라고 믿던 폭군이기도 했다. 그는 경찰을 개혁하려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범죄자들을 밖으로 끌어내 사지를 절단하는 처형을 선호했다. 제임스 왕은 요즘 시대의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셀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일 수 있다.

만약 대중이 역사에 비열할 정도로 무지했다면 이 동상은 칸 시장의 개입 없이도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몇 세기 전의 인물들은 너무 오래 전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체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 제임스 2세의 동상의 경우는 역사적 기록 이상의 상징을 갖고 있다. 이는 1686년 화이트홀 궁전 마당에 처음 설치됐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왕의 권한을 상징했다. 동상의 제임스는 로마 황제 복장을 하고 있다. 무한(無限)한, 그리고 반신(半神)적인 존재의 정당성을 상징한다. 이런 개념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그러나 제임스의 정적(政敵)들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에도 동상을 남겨두었다. 이런 점은 그들의 관용을 보여준다. 이 동상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야 했고 버려졌지만 한 번도 부숴진 적이 없었다.

제임스 동상은 1947년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과거 동상을 만들 때의 이념적 목적이 사라진 지 오래된 뒤였다. 그럼에도 이 동상은 역사적 중요성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동상은 위대한 영국의 조각가인 그린링 기븐스의 작업실에서 만들어졌다. 이 동상을 철거하겠다는 이유를 가장 좋게 표현하면 불필요한 일이며 가장 나쁘게 표현하면 악의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공인(公人)의 동상을 파괴하려는 데에는 얼마나 더 큰 불필요하며 악의적인 감정이 필요한 것일까? 칸 시장이 나무로 막아 놓은 또 다른 인물인 윈스턴 처칠을 예로 들자. 이 위대한 총리는 제국주의자였으며 특정 인종에 대해 의문이 가는 태도의 행동을 보인 사람이다. 그는 서방세계를 이끌어 파시즘과 맞섰던 사람으로 가장 크게 기억돼 있다. 그가 제국주의자였으며 토리당원이었다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잊었다. 수천 개의 길 이름과 공원, 학교들은 처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대중들로부터 사라지게 하려는 데에는 엄청나게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결과가 무엇인가? 반(反)파시즘을 상징하는 이 동상의 목적보다 처칠 개인의 인간적 실수를 심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스템적인 인종차별과 성별을 대상으로 한 차별이 광범위하고 무의식 중에서 이뤄진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이런 의식을 품고 있는 개개인에 낙인을 찍는 행위로 이런 죄악을 속죄하려는 시도가 있다. 앞서의 주장과 이런 시도를 연관 짓는 데에는 오류가 있다.

이런 식의 잣대를 두고 판단을 내린다면 피해자는 좌우를 막론하고 나오게 될 것이다. 마거릿 생어(注: 미국의 여성 인권운동가)는 우생학자(注: 유전 법칙을 응용해 인간 종족의 개선을 연구하는 사람)가 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일본인) 강제수용 등의 일을 한 사람이 된다. 또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작은 행동 하나로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동네에 있는 토마스 제퍼슨 동상을 무너뜨려야 한다면 (워싱턴에 있는) 제퍼슨 기념관은 그대로 놔둬도 되는 것인가?  일부 기숙사 이름이 노예주의나 여성차별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이름을 바꿔야만 한다면 예일대학교 전체는 그냥 놔둬도 되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특정 인물의 동상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린다는 주장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질문이 있다. ‘이 동상이 만들어진 목적은 무엇이었나? 무엇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는가?’ 제임스 2세의 경우처럼 이런 목적이 역사적으로 이미 의미가 없고 이에 따라 누군가에게 공격적이지 않을 수가 있다. 처칠의 경우처럼 역사적 의미가 아직 있고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이들을 비난하는 관점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왜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은 스탈린 동상을 향해 응용해볼 수 있다. 스탈린 동상들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이상(理想)을 상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도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남부군 동상의 일부를 인정해줄 수 있지만 노예나 반역을 치켜세우는 동상은 인정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이런 사고 방식은 동상들이 평화롭게 유지되도록 할 수 있다. 율리시스 그랜트를 기념하는 것은 그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지 원주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 아니다. 제퍼슨은 그가 노예를 부렸던 이유 때문이 아니라 독립선언문을 만든 사람으로서 존경받는 것이다.

동상들은 눈 먼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같은 정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동상은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룬 특정 성과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선조(先祖)들의 오점을 교육시키는 역할을 하는 다른 방식이 있다. 학교와 다큐멘터리, 박물관들이 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 개인이 느끼는 관점을 묻는 질문을 선호한다. ‘이 동상이 나나, 나의 커뮤니티를 어떻게 기분 나쁘게 하는가?’, ‘특정 인물의 오점을 간과하고 동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불쾌한지 아는가?’ 등의 질문을 좋아한다.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왜 크롬웰을 기리지 않으며 인도 사람들이 처칠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남을 모욕하는 흐름이 빠르게 커져간다면 지금 우리의 가치관에 맞는 사람들 소수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끊임없는 논쟁의 문화가 생기게 될 것이다. 나르시즘에 빠진 사회가 된다. 이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든 신앙(信仰)을 받아들이지 않는 과거나 미래 모두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 2020-06-28, 08: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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