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람들 보기에 부끄럽다
반공자유-교양영어(3): For king, then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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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king, then country(The Economist, May 5th 2016)

 India at War: The Subcontinent and the Second World War. By Yasmin Khan. Oxford University Press; 416 pages; $29.95. Published in Britain as The Raj at War: A People's History of India's Second World War. Bodley Head; £25.
India’s War: World War II and the Making of Modern South Asia. By Srinath Raghavan. Basic; 554 pages; $35. Allen Lane; £30.

*해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식민지가 독립 할 때에 인도에서는 독립하는 것보다는 영국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위대한 비폭력 독립운동가 간디가 지도하는 국민회의黨 멤버들도 독립파와 反독립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독립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자나 매국노로 낙인 되는 것도 아니었다. 1857년 10만 명이나 죽은 세포이(sepoys) 亂(난)의 요인도 독립을 위한 것보다는 주로 종교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反軍 진압에 인도의 지방 호족과 인도인 용병들이 자진해서 대거 참여하였었다.

인도인들은 영국이 수행하는 많은 전쟁에도 영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싸웠다. 간디도 1900년 보아전쟁에 참전하여 훈장까지 받았고 제1차 세계전쟁 때는 ‘입대 호소문’까지 만들어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며 인도인들의 참전을 독려하였다. 150만의 인도인들이 영국군에 지원하였다. 간디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나치스와 싸우는 영국군에 ‘비폭력적, 도덕적 지원’을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인도인 대표자와 상의 없이 영국이 일방적으로 인도의 참전을 결정하였다며 반발하자 간디는 숙고 끝에 “자유를 위해 싸운다면서 인도에게는 자유를 주지 않는 전쟁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 당원들과 많은 정치집단이 나치 독일과 싸우는 영국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제2차 세계전쟁에서 인도인 250만 명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인도인들은 또 많은 물자도 지원하였다. 인도군은 北아프리카와 중동 전선에서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도군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도 일본에 史上(사상) 최대의 패배를 안겨주었다. 인도병사들의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였다.

인도는 영국과 독립전쟁을 하지 않고도 영국의 축하를 받으며 독립하였다. 독립 후에도 영국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지금도 친영파(Anglophile)들이 많다. 인도의 상류층 자녀들은 거의 전부 영어전용학교에 다닌다. 인도경제 발전에 영어능력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의 기업들이 언어의 장벽이 없고 임금이 저렴한 인도에 투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또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친목단체인 英聯邦(영연방: Commonwealth) 창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 런던에는 간디의 동상도 있다. 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은 물론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공직자로, 기업인으로, 전문직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영국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재무부장관도 인도계 영국인이다.

3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영국이 어려울 때 영국을 도와가며, 영국의 축하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순리적으로 독립을 획득하고, 간디처럼 영국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이나, 영국과 싸운 사람들이나 모두 애국자로 기리며, 全세계 사람들에게 善한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키고 있는 인도인들이 존경스럽다.



BBC의 인도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세련되고 우아하게 보이는 영국인 女기자가 거대 도시 콜카타의 시장거리에서 시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질문을 하는 기자도, 질문을 받는 인도 군중들도 모두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기자는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영국인들이 당신들의 자원을 착취하고, 당신들을 깔보고 지배한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아요? 우리는 항상 죄의식을 느끼고 있답니다.”
인도 아줌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40대 초반쯤 되는 허름한 복장의 남자가 역시 웃으면서 기자의 말을 되받았다.
“그런데 당신들은 우리 인도에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기자도 인도사람들도 모두 웃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은 한반도 전역에 철도와 신작로를 건설하였다. 부산·인천·원산·청진 등 많은 항구도 건설하였다. 북한 지역에 최첨단 거대 생산 공장도 150개나 건설하였다. 남한에도 중소 공장을 많이 건설하였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 기업은 1만 개가 넘었다고 한다. 일본은 공업뿐 아니라 농업에도 많이 투자하였다. 낙동강 하구에 제방을 건설하여 삼각주 습지를 모두 비옥한 평야로 만들었다. 전북 만경강 하류 지역에도 바다를 막고 제방을 쌓아 지평선이 보일 만큼의 넓고 넓은 곡창지대를 조성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농업용 저수지도 건설하였다. 해방이 되자 한국은 일본인 소유의 공장, 가옥, 토지 건물 등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일본인들은 투자금의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알몸으로 쫓겨 갔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보다 주어야 할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일본에 대해서 돈 더 내 놓으라고 악을 쓰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서 청구금액을 받았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돈 더 내라고 악을 쓰고 있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는 데도 대통령까지 나서서 晝夜長川(주야장천) 일본 증오에 광분하고 있으니…. 인도사람들 보기에 부끄럽다. 세계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럽다.


3-1-17
AT THE close of 1945 the British Raj could congratulate itself. Despite growing impatience for independence, the empire had still managed to muster a 2.5m-man Indian army, the largest all-volunteer force in history. Indian troops had served loyally at home to crush an incipient insurrection in 1942. They proved crucial to British victories in Ethiopia, north Africa and the Middle East; in Burma they eventually inflicted the biggest land defeat ever suffered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India also contributed materiel and money: by the war’s end Britain owed its prized but impoverished colony £1.3 billion, an eighth of British GDP.

Yet the war was also catastrophic, both for the Raj and for India. The relatively small scale of India’s direct war casualties—some 90,000 soldiers killed in six years of fighting on three continents, 6,000 sailors lost and 1,400 civilians killed by Japanese bombs—belied far wider suffering. The Bengal famine of 1943, the prime cause of which may have been inflation fuelled by the printing of rupees to cover wartime deficits, left as many as 3m dead. Ignominious defeats in Malaya, Singapore and Burma undermined British prestige. Of the half a million Indian civilians who joined a chaotic exodus from Burma in 1942, perhaps one in ten also perished.

1945년 말경에 大英(대영)인도제국(the British Raj)은 스스로를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에 대한 점증하는(growing) 조급증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여전히 역사상 최대의 모두 지원병으로 편성된 250만명의 인도인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인도인 부대는 인도국내에서 1942년 초기의 반란군을 진압(crush)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참전(serve) 하였다. 그들은 Ethiopia와 북 아프리카와 中東(중동)에서 영국군의 승리에 결정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버마에서 결국 인도군은 일찍이 일본제국 군대가 입은 최대의 지상전 패배를 가하였다(inflict). 인도는 또 물자와 자금도 제공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쯤 영국은 소중하지만 가난한 식민지(인도)에게 영국 국민총생산의 1/8에 해당하는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또한 인도제국은 물론 인도에게도 파멸적이었다. 인도의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死傷者(사상자)―3개 대륙에서 6년간의 전투에서 전사한 90000명의 육군, 6000명의 해군失踪者(실종자), 일본군의 폭격에 죽은 1400명의 민간인―는 훨씬 더 광범위한 고난을 숨기고 있었다. 1943년에 있었던 Bengal지역의 飢餓(기아, famine)는, 기아의 주된 원인은 戰時(전시) 재정결손을 카버하기 위하여 찍어낸 rupee貨(화)에 의해 불이 붙었을 것인데, 3백만명 만큼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다. Malaya와 Singapore와 Burma에서의 수치스러운 패배는 영국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1942년 혼란스런 Burma탈출에 동참하였던 50만의 인도민간인들 중에서 아마도 10명 중 1명의 비율로 실종되었을 것이다.


3-2-18
Far from securing the jewel in the British empire’s crown, the war rendered India’s independence inevitable. Distress caused by the wartime doubling of prices, the bare-knuckle crushing of dissent, the requisitioning of land and goods, the militarisation and mobilisation of large chunks of Indian society and Britain’s divide-and-rule manipulation of India’s sectarian rifts all contributed to a combustible atmosphere. In 1947, two years after the war ended, it exploded in the bloodletting of partition.

Few had foreseen or wanted this outcome at the war’s onset. The brutal logic of partition, as two new histories of India and the second world war make clear, evolved in large part as a result of decisions made by a fateful triangle of actors: British officials desperate to keep a lid on India, a secular Congress movement that wavered between Gandhian pacifism, support for the Allies and collaboration with the Axis, and a hitherto unpopular Muslim League that exploited the turmoil to push for dividing the subcontinent along religious lines. Pakistan’s founding father, Muhammad Ali Jinnah, later admitted that this “war which nobody welcomed proved to be a blessing in disguise.” To him, at least.

대영제국의 왕관의 보석(인도)을 지키기는커녕 전쟁은 인도의 독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두 배나 오른 戰時(전시)물가로 인한 고통,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crushing), 토지와 물자의 징발, 인도사회 대부분의 군사화와 기동화, 인도의 종파분열에 대한 영국의 분리와 지배의 조종(정책) 모두가 可燃(가연) 분위기조성에 기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947년에 그 분위기는 분할(힌두교지역과 회교지역으로 분단)의 流血(유혈) 상태로 폭발하였다.

전쟁이 시작했을 때는 거의 아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거나 원하지도 않았다. 인도및 2차 세계전쟁의 두 새로운 역사가 밝혀주는 것과 같이, 분단의 잔혹한(brutal) 논리는 운명적인 세 명의 배우들이 내린 결정의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다(evolved): 세명의 배우는 인도사태를 필사적으로 수습하려는 영국 관리들(A), 간디의 평화주의와 동맹군(영,미, 프랑스)에 대한 지원과 樞軸(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과의 협조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세속적인 국민회의파(Congress)(B)와 혼란을 이용하여 종교적인 경계선(lines)에 따라 인도亞大陸(아대륙,subcontinent)의 분단을 추진하는 지금까지 인기가 없던 회교동맹(C)이다. 파키스탄의 國父(국부)인 Muhammad Ali Jinnah는 후에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던 이 전쟁은 위장된 축복인 것으로 판명되었다.”라고 인정하였다. 적어도 그에게는 축복이었다.
 

3-3-19
Despite the importance of India’s role in the war and its critical impact on India’s own destiny, few popular histories have treated the subject. These two new books for the general reader neatly fill the gap. Better yet, they are complementary rather than competing accounts. (A third superb recent work, Raghu Karnad’s “Farthest Field: An Indian 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which traces one family’s dramatic war years, also deserves mention.)

Yasmin Khan, a historian at Oxford, offers a richly researched social history of wartime India that is peppered with fascinating detail. Her sources range from official accounts and court records to the diaries and letters of Indian and British soldiers and officers, upper-class colonial women and rebellious Indian housewives. All this she weaves into a flowing narrative that touches on such forgotten aspects as India’s acceptance of stranded European refugees as well as of Japanese civilians transported from Singapore, whose squalid internment influenced Japan’s own ugly treatment of captured civilians.

전쟁에서 인도의 중요성과 인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전쟁의 결정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취급한 대중적인 역사책은 거의 없다. 일반 독자를 위한 이 두 新書(신서)가 그 공백을 깔끔하게 채워 준다. 더욱 더 좋은 것은 두 책이 경쟁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세 번째 아주 뛰어난 최근의 저술(work)인 Raghu Karnad의 “가장 먼 전장: 2차 세계전쟁에 관한 한 인도인 이야기”는 한 가족의 극적인 전쟁기간을 추적하고 있는데 또한 언급할 가치가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인 Yasmin Khan는 매우 재미있는 세부묘사로 양념이 되어 있는, 풍부하게 조사된 전시 인도 사회역사를 제공한다. 그녀의 자료는 공식 記述(기술)과 법원기록으로부터 인도와 영국 장병, 식민지의 상류여성(영국), 반항적인 인도가정주부들의 편지와 일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이 모든 것을 그녀는 싱가포르로부터 수송된 일본 민간인은 물론 낙오된 유럽인 難民(난민)들을 인도가 수용하는 것과 같은 잊혀 진 사실(aspect)을 유창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로 짜낸다. 그리고 일본민간들에 대한 비열한 감금정책(internment)이 포로가 된 민간인(영국)에 대한 일본의 학대에 영향을 끼쳤었다.


3-4-20
Describing the slow erosion of discrimination between British and Indian officers in the army of the Raj, she notes that it was only mid-way through the war that Indians were allowed to sit on courts-martial for British soldiers, and that after the capture from Italy of the Eritrean city of Asmara, separate brothels were maintained for British and Indian soldiers.

Ms Khan picks out ironies, such as the discomfort caused to the Raj by Britain’s chief ally. When American diplomats placed advertisements in Indian newspapers proclaiming the right of all men to freedom, British censors quietly confiscated those editions. Yet the Raj went along with a softer American propaganda ploy, the distribution of pin-ups of Hollywood starlets. “Images of women and the promise of sex, whether real or imagined, were hitched firmly to the war effort,” writes Ms Khan. “The Raj had to jettison, or at the very least reformulate, the old ways of protecting the prestige of women.”

인도제국軍 소속 영국인 장교와 인도인 장교 사이의 차별의 완만한 해소(erosion)를 기술하면서 그녀는 전쟁 중반에 가서야 영국병사에 대한 군사법정에 인도인들이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리고 Asmara의 Eritrea市를 이탈리아로부터 점령한 후에 영국병사와 인도병사를 위한 분리된 遊廓(유곽)이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Ms Khan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미국)에 의해서 인도제국에 가해진 불쾌한 일과 같은 그런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다. 미국 외교관들이 인도 신문에 자유에 대한 모든 인간의 권리를 선포하는 선전광고를 내었을 때 영국 검열관들은 신문(광고물이 실린)판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인도제국은 Hollywood 인기 여배우들의 사진(pin-ups)이 실린 신문의 배부(distribution)같은 미국의 보다 온건한 선전책략과 동행하였다. Ms Khan은 “여성들의 이미지와 섹스에 대한 약속은 사실이든 상상적이든 전쟁노력(effort)과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인도제국은 여성의 권위를 보호하는 옛날 방식을 버리거나 적어도 개혁해야 했다.”
 

3-5-21
There is irony, too, in a comment she unearths from an intelligence report on the mood among British troops in India. “The British Tommy...does not understand Indian politics,” it stated confidently. “To him it appears foolish to fight for a country that does not want to be helped and from which we are clearing out after the war.” This generic soldier seems better attuned to Indian politics than his superiors.

Srinath Raghavan, a fellow at the Centre for Policy Research, a Delhi think-tank, usefully supplies the facts, in charts, figures, maps and details of military operations, which Ms Khan elides. He also gives thorough, fascinating and revealing accounts of the economic transformations generated by the war, and of the debates and decision-making in wartime politics.

No one comes out of this looking very good. Mr Raghavan lets the cynicism and occasional outright racism of British officials speak for themselves. Winston Churchill, for instance, told his cabinet in 1940 that troubles between Hindus and Muslims were “a bulwark of British rule”, and later dismissed famine in Bengal as less important than famine in Greece.

그녀가 발굴한 인도주둔 영국군부대의 士氣(사기)에 관한 정보보고서의 어떤 논평(언급)에도 아이러니가 들어 있다. 그 보고서는 “영국 병사(Tommy)는 인도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논평하였다. “그(영국병사)에게는 도움을 원하지도 않으며 전쟁이 끝나면 떠나갈 나라(인도제국)를 위해 우리가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이 일반적인 (전체를 대표하는) 병사는 그의 상급자들보다는 인도정치에 더 잘 동조하고 있는 것 같다.”

Delhi에 있는 정책연구 센터의 특별연구원인 Srinath Raghavan은 사실을 도표와 수치와 지도와 군사작전의 세부사항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usefully) 제공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Ms Khan는 생략한다. 그는 또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변형에 관한 철저하고 아주 재미있고, 처음으로 밝혀주는(revealing), 이야기와 戰時(전시) 정치에서의 의사결정과 논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공해 준다.

아무도 이런 상황(this)으로부터 훌륭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Mr Raghavan은 영국관리들의 냉소와 가끔씩 들어나는 인종주의를 그들 스스로 폭로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서, Winston Churchill은 1940년 內閣(내각)에게 힌두교도와 회교도 사이의 분쟁은 “영국 지배의 堡壘(보루)”라고 말하였고 그 뒤 Bengal의 飢餓(기아)를 그리스의 기아보다는 덜 중요하다며 가볍게 처리하였다(dismiss).


3-6-22
But the author also offers a corrective to later Indian accounts that have exaggerated the strength of pro-independence feeling and glorified the Japanese-sponsored Indian National Army, made up of Indian POWs and defectors. No more than 9,000 of these soldiers actually fought against the Raj in Japan’s ill-fated invasion of India in 1944, Mr Raghavan notes. More remarkable in retrospect was the loyalty shown by many Indian soldiers: a British censor’s log from Tunisia records a soldier’s letter to his family declaring proudly, “Our beloved king (God save him) has conquered this country.”

Both books argue persuasively that the war not only consolidated India’s sense of self, but generated many of the institutions and attitudes that framed independent India. Mr Raghavan quotes a British staff officer of the 19th Indian division describing its drive to capture the Burmese capital, Rangoon: “Twenty races, a dozen religions, a score of languages passed in those trucks and tanks. When my great-great-grandfather first went to India there had been as many nations: now there was one—India.” Sadly, this would not be so true by 1947, and the Raj cracked into two parts.

그러나 저자는 또한 독립찬성감정의 强度(강도)를 과장하고 인도인 포로와 전쟁포로와 탈영병으로 구성된, 일본이 지원한, 인도국민군을 찬양하는 전후(later)인도인들의 말(accounts)에 교정을 제공한다. Mr Raghavan은 1944년 일본의 不運(불운)한 인도침공에서 이들 인도국민군 병사 중에서 겨우 9000명이 인도제국군에 대항해서 싸웠다고 기술한다. 회고해 보면, 많은 인도제국군 병사들이 보여준 충성심은 더 놀라울 정도다: Tunisia전선의 영국 검열관의 日誌(일지)는 “우리의 사랑하는 국왕(신이여 폐하를 보호해 주소서!)께서 이 나라(튀니지)를 정복하셨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면서 가족에게 보내는 한 병사(인도인)의 편지를 기록하고 있다.

두 저서는 전쟁(2차 세계전쟁)은 인도의 자신감을 공고히 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인도의 뼈대를 만든 많은 제도와 자세를 생성하였다. Mr Raghavan은 제19인도사단의 버마 수도 Rangoon 점령 작전(drive)을 기술하고 있는 영국인 참모장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20개의 종족, 12개의 종교, 20(score)개의 언어가 저들 트럭과 탱크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나의 고조부가 인도에 처음 갔을 때는 20개의 나라가 있었다. 지금은 하나의 인도가 있다.” 슬프게도, 이것은 1947년경에는 사실이 아니게 될 것이었고 그리고 인도제국은 두 부분(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 2020-07-21, 15: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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