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 웃었던 사람
[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8)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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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注―‘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연재 후, 1987년 한길사에서 나온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 포함되었다가 2011년 조갑제닷컴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현재는 절판)되었다. 조갑제 기자가 가장 애착 가는 기사로 꼽은 이 글을 조갑제닷컴에 재연재한다.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4장 공소시효 끝나다 ⑤

  
  
  드라마의 연출가 김금식, 입을 열다
   “세상이 또 한번 깜짝할 일이 있을 겁니다”

  
   마지막에 웃었던 사람

  
   김금식. 그는 진정한 勝者(승자)였다. 엎치락뒤치락한 근하 사건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거의 모든 관련자들이 상처를 입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여덟 명의 피고인들과 그 가족은 물론이고 김태현 검사를 비롯한 검찰 측 관계자들도 결국 평생 잊지 못할 패배를 경험하고 말았다. ‘유괴 수사의 베테랑’이란 명성이나 이 사회의 엘리트란 권위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한 前科者(전과자)의 농락으로 크게 손상 받았다.
  
   김금식 씨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와 패배를 딛고 홀로 그 폐허에서 온전하게 살아 돌아왔다. 그는 목적하던 바를 모두 성취했다. ‘감방 생활을 편하게 보내겠다’는 첫째 목표는 무난히 달성되었다. 수사와 재판 과정을 통해 그는 복역수로는 꿈에도 꾸지 못할 술·음식·여자 대접을 받았으며 그 흔한 뺨 한 대도 맞지 않았고 출소할 때는 피둥피둥 살찐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가 끌어들인 김기철씨가 廢人(폐인)이 되어 출소, 요절한 것과는 너무나 선명한 대조가 된다.
  
   ‘법을 우롱하겠다’는 목적도 적당히 성취되었다. 그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대중매체를 갖고 놀았다. 재판의 흐름은 그의 말 한마디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다. 그를 뒤쫓아 다니던 검사들은 막판에 가서 그의 버림을 받았고 지워질 수 없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렇게 해놓고서 김금식씨는 또 다른 법의 구원을 받아 ‘영광의 탈출’을 했다. 저승의 문턱까지 다가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는 그 아찔한 쾌감을 그는 의식적으로 즐겼다.
  
   1982년 9월2일 서울 신설동의 어느 술집에서 내가 만난 그는 아직도 그 쾌감, 그 추억을 맛있게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조 선생님은 누가 정말 이겼다고 생각하십니까?”란 대답이 뻔한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던 것이다.
   외모에 있어서 마흔다섯 살의 그는 완숙한 중년신사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확인하듯 무겁게 떼어놓는 걸음걸이, 느릿느릿한 우렁찬 목소리, 180 센티미터에 가까운 큰 키에 어울리는 단단하게 살찐 몸통, 예나 다름없이 짧게 깎은 머리카락, ‘부티’나게 만드는 금테 안경…한마디로 그는 늠름한 경상도 사나이였다.
  
   “세상이 한 번 더 놀랄 일이…”
  
   조갑제: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퍽 안정된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김금식: 밥은 먹고 살지요. 어머님도 모시고 아이도 기르며 그럭저럭 살고 있지요. 작은 가게도 하나 갖고요.
   조갑제: 모친께서는 옛날에 재혼을 하셔서 김 선생과 같이 살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요.
   김금식: 몇 해 전에 아버지(繼父)가 돌아가셔서 제가 모시게 되었지요. 아이를 길러보니까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는 걸 느낍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사건을 다루었던 판사나 검사들이 어떻게 살아가나 하여 그들의 변화해가는 모습들을 일일이 지켜보곤 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요. 그러니 제가 많이 변한 것 아닙니까, 허허.
  
   조갑제: 그때 교도소를 나와서 택시 운전을 하셨지요? 그러다가 10여 년 전에 사고를 냈던가요?
   김금식: 예.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다쳤지요. 새벽이었지요. 부산 수영동에서 망미동으로 빠지는 간선도로상이었습니다. 전날 밤 술을 많이 마셔 만취 상태에 있었습니다. 좌회전을 하여 달리는데 퍽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번호를 감추기 위해 뒤쪽 라이트를 껐지요, 그러면서 더 속력을 높여 지나치려고 액셀러레이터를 막 밟는 순간, 그때 속력은 시속 100 킬로미터를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잡아라!”는 소리와 함께 저의 차 앞으로 두 사람이 뛰어들어 가로막고 나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브레이크를 밟을 시간도 없었어요. 그대로 들이받았지요. 두 사람이 하늘로 붕 퉁겨 올라갔다가 아스팔트에 떨어졌지요. 차를 세우고 내려가 보니 맨 먼저 받쳤던 사람은 경상이고 뒤에 받친 두 사람 중 하나는 이미 숨이 끊어졌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리가 깨어져 죽어가고 있더군요. 초소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예비군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가까운 파출소에 가서는 신고를 하고 파출소 대나무 의자에 누워 자버렸습니다. 오전 9시까지 푹 잠이 들었죠. 모든 걸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 사고로 또 1년 남짓 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
  
   조갑제: 그때도 서윤학 변호사 신세를 졌지요?
   김금식: 그랬습니다.
   조갑제: 음주 운전이라 實刑(실형)을 무겁게 받은 겁니까?
   김금식: 저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논박을 잘해 음주 운전 부문의 적용을 받지 않았어요. 저는 주장했습니다. 술을 마신 것은 하루 전이었다. 사고를 낸 그날에 음주한 게 아니다. 하루 전에 마신 술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고 해서 음주 운전으로 처벌한다면 하루 놀고 하루 일하는 운전사들은 평생 술 마시지 말란 소리 아닌가? 저는 법정에서도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들이 자살하려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조갑제: 자살이라니? 혼자도 아니고 셋이서 집단 자살을 해요?
   김금식: 그 사람들은 6차선 넓은 길 위 비횡단로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받친 곳은 1차선이었습니다. 바로 옆에 횡단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죽으려고 뛰어든 것이 아닌가, 바로 자살 행위가 아닌가 하고 말했지요.
   “재판장님,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택시를 몰고 인도로 뛰어들어 가로수를 받고 차를 부수었다면 누가 보상해 주겠습니까? 38선으로 갈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국토에 횡단로 내주고 인도, 차도까지 구별해놓은 게 무엇을 위한 겁니까?”
  
   판사는 내 말이 맞기는 맞는 이야기인데 외국에선 그렇게 하지만 한국에서는 국회에서 그런 법을 안 만드는 한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검사는 사람을 둘이나 죽게 하고도 뉘우침이 없는 저에게는 무거운 벌을 주고 싶으나 법에 형의 한도가 있는 게 안타깝다면서 法定(법정) 최고형인 금고 3년6개월을 때렸죠. 선고는 1년6개월. 난 항소했으나 기각을 당했습니다.
  
   부산교도소에서 대전교도소로 옮겨져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저 때문에 근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여 교도관을 만났지요. 그분은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 주임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혹시 보복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찾아오라”고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조갑제: 근하 사건의 公訴(공소) 시효가 다 되었는데….
   김금식: 며칠 전에 남산도서관에 가서 옛날 신문을 들추어보았죠. 혼자서 쿡쿡 웃었어요. 여직원이 뭐가 그렇게 우스우냐고 물어 “그런 일이 있다”고만 했습니다만….
   조갑제: 새삼 그 사건을 되새기는 이유라도?
   김금식: 있지요. 공소 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나에게 이상한 편지를 계속하는 사람도 있고요. 공소시효가 끝나면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 한 번 더 일어날지 누가 압니까?
  
   조갑제: 누군가가 ‘내가 범인이었다’하고 튀어나와 소설 같은 手記(수기)라도 쓸지 모르겠지만, 글쎄 누가 그를 믿어줄까요? 지금은 진짜 범인이라 해도 자신이 범인임을 物證(물증)으로 입증해보일 방법이 없을 겁니다.
   김금식: 그럴까요? 일단 기다려봅시다.
  
   “나는 金 검사의 추리를 먼저 읽고 있었다.”
  
   조갑제: 이야기는 옛날로 돌아갑니다만 김금식씨는 정말로 법에 앙갚음하려고 그런 각본을 쓰게 된 겁니까?
   김금식: 그렇습니다. 내가 그때 구속된 것은 정말 억울했습니다. 술집에서 싸웠는데 내가 더 많이 얻어터졌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나만 가해자로 되고 나의 진단서는 떼지도 못하게 하고…. 단지 전과자라는 걸 약점으로 하여 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어요. 弱者(약자)만 조지는 이런 법을 한번 갖고 놀아보자고 한 겁니다.
  
   조갑제: 당신이 쓴 假名(가명)의 투서, “근하 사건을 잘 아는 김금식이란 사람이 부산교도소에 있다”는 편지를 받은 서부경찰서에선 수사를 하다가 곧 손을 뗐는데 무슨 까닭이라도 있었습니까?
   김금식: 그 投書(투서)를 받은 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날 찾아왔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처음엔 딱 잡아떼었습니다. 그 다음번엔 형사들이 왔을 땐 일부러 머뭇머뭇했지요. 그러니까 형사는 웅변조의 설교를 합디다. 의리를 깨야 한다는 거죠. 어린아이를 죽이는 그런 놈은 이 사회의 公敵(공적)이다. 그런 놈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열변을 토합디다.
  
   저는 고민하는 시늉을 하면서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지요. 그런 큰 사건의 정보를 단숨에 얘기해버리면 노련한 형사들은 대번에 거짓말임을 눈치를 채거든요. 그래서 슬슬, 조금씩 정보를, 물론 엉터리 정보였습니다만, 흘렸습니다.
   경찰에선 나의 정보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보더니 내가 장난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에요. 어떤 형사가 오더니 “너, 이 새끼 이번엔 우리를 갖고 놀았는데 교도소에서 나오기만 해봐라, 다른 건으로 얽어 넣어 혼을 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디다.
  
   저는 이거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꾀를 내었지요. 교도소의 어느 직원을 찾아갔습니다. 근하 사건의 범인들을 정말로 잘 알고 있는데 경찰엔 이야기하기가 싫다. 이왕이면 검사한테 불겠다고 했지요. 그 직원이 이 정보를 김태현 검사에게 가져다준 모양이에요. 그렇게 해서 金 검사와 인연을 갖게 된 것입니다.
  
   조갑제: 그 유능한 김태현 검사가 김금식씨의 각본에 얹혔다는 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데 정말 김 선생 말만 믿고 그런 수사를 했을까요?
   김금식: 얼마 동안은 틀림없이 믿었습니다. 나중엔 속은 걸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고요.
   조갑제: 김 선생이 처음에는 근하군 살해는 공산당원인 황 선생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수사가 對간첩작전 쪽으로 흘렀지요?
   김금식: 간첩 지령설은 저만의 창작품은 아닙니다. 저는 왜 근하군을 죽였느냐고 추궁 당했습니다. 말문이 막힙디다. 저는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얼렁뚱땅 주워대지 않습니다. 묘안이 떠오를 때까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살해의 이유를 지어내지 못해 고민하는데 구영근씨가 근하군의 가족관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하 아버지가 월남했다느니 어쩌고 합디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공산당의 지령이라는 着想(착상)을 한 겁니다. 이 사건의 主犯(주범)이 부산 민락동 비석 앞에서 접선하여 이북으로 올라간다는 거짓 정보를 金 검사에게 주어 대대적인 작전까지 벌어지기도 했지요.
   김 검사는 나의 말 한 마디에 7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합디다만 생각해보십시오, 간첩이 나 같은 사람한테 신고하고 월북하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머리 좋은 검사도 별 볼일 없구나 하고….
  
   어쨌든 처음에는 제가 시키는 대로 수사를 합디다. 저는 삼화고무공장에 다니는 옛날 애인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름과 나이, 고향만 대고 그런 여자가 이 사건과 관계있는 투로 이야기를 했지요. 다음날 새벽에 옛 애인이 남편과 함께 잡혀왔더군요. 저는 그때는 야, 한국 검찰 수사 참 잘한다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조갑제: 김기철씨와 정대범씨도 김 선생이 끌어들인 것 아닙니까?
   김금식: 거기에 대해선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근하 사건에 대해 아는 지식은 신문을 통한 것뿐입니다. 그걸 믿고 거짓말을 계속하니 막히는 데가 많아집디다. 저는 한영식과 정기영이란 두 가공인물을 나의 共犯(공범)으로 설정했습니다. 저는 정기영을 전경렬(가명)로 몰로 가려고 했습니다. 전경렬은 근하 살해 진범이라 하여 경찰에 붙들려갔다가 물증이 없어 며칠 뒤 풀려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경찰에선 상당히 혐의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기영이 바로 전경렬이다’고 연결시켜버리면 수사가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 같았지요. 그런데 구영근씨가 오더니 난데없이 “정기영이가 바로 대신동에서 노는 정대범이지?”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정대범을 저는 전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 사람들이 이름을 대는 것 보니까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수사를 시켜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 거지요. 그렇게 수사하다가 정말 범인을 잡으면 더 좋고, 여하튼 그렇게 생각하니 양심에 찔리는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김기철이도 마찬가지였죠. 한영식이 내 친구라고 했더니 具씨는 내 주변을 샅샅이 뒤진 모양이에요.
   어느 날 “한영식이 바로 김기철이지?”라고 캐물어요. 저는 이번에도 기철이가 의심받을 점이 있는 모양이구나 싶어 그렇다고 해버렸죠.
   具씨는 金 검사와 저를 중계하는 역할을 했어요. 본인은 의식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를 잘 이용했습니다. 구씨는 김 검사가 수사 방향을 이렇게 저렇게 추리하고 있다고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저는 그를 통해 김 검사의 추리 방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백도 그 추리 방향에 맞추어 조금씩 조금씩 하니까, 검사는 자기 추리가 기막히게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착각해서 더욱 깊게 제가 판 함정에 빠져든 모양이에요.
  
   毒種(독종)이라 불렸던 김기철
  
   조갑제:
기철씨는 고문을 받아도 끝까지 부인했지요?
   김금식: 그는 무서운 고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기철이가 고문 받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만 저렇게 당하면 제 에미하고 붙어먹었지 하고 추궁해도 ‘그렇다’고 대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기철이는 끝내 부인했는데 고문하던 수사관들도 저런 毒種(독종)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릅디다. 그 때문에 기철이는 몸을 크게 다쳤고 출소 뒤 성불구가 됐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를 하겠습니다.
  
   조갑제: 구영근씨는 김 검사가 시키는 일만 수행할 뿐 독자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된다는 얘기가 있는데….
   김금식: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만들어내는 데는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갑제: 具씨가 당신의 자백이 거짓말임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일까요?
   김금식: 저는 나중에 허위 자백을 몽땅 취소시킬 수 있는 비장의 묘안을 하나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벌인 장난 판에서 스스로 탈출하여 조작극을 뒤집어엎을 때 이용하려는 무기였지요. 제가 근하군 살해에 가담했다는 그날에 실은 대구교도소 안에서 복역 중이었지 않습니까? 이것만 있으면 아무리 내가 근하 살해 조직의 일원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마음만 먹으면 자백을 깨끗이 번복시킬 수가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具씨가 대구에 갔다 오더니 이 사실을 알아왔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나를 다그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저는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얻기 위해 범행 당일에 불법 출소하여 일을 저지른 뒤 그 다음날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불법 출소할 수 있었느냐고 하기에 추가 출정(재판 받으러 피고인이 교도소를 나가는 경우)하는 식으로 감방을 나와 교도소를 벗어났다고 거짓말을 했죠. 일이 묘하게 되려고 하니까 그랬는지 검찰이 대구교도소에 가서 조사를 했더니 그날 인원 점검표에 실제 출정 인원은 6명인데 7명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착오였지요. 이건 완전히 우연의 일치였는데 金 검사가 저의 말을 더욱 믿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나의 불법 출소를 도왔다고 해서 교도소 직원 네 명이 구속됩니다. 이 시점에서 具 씨만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고 이제부터는 사건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조갑제: 김 검사는 언제부터 당신의 허위 자백을 눈치 챘을까요?
   김금식: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박영태가 자수했을 때 확실히 알지 않았나 짐작합니다. 살해범 조직의 괴수라고 내가 말했던 그 인물이 ‘나는 무관하다’면서 제 발로 기어들어왔으니까요. 그러나 김 검사도 그때는 이미 발을 뽑기가 어려운 상태가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이미 범인 일당 체포 사실을 공표한 뒤였으니까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조갑제: 박영태를 잡기 전에 서둘러 범인 체포 사실을 발표한 이유는?
   김금식: 그때 검사장이 서울로 榮轉(영전)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영전 선물로 이 사건 해결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 며칠 전부터 김태현 검사는 나에게 “이왕 털어놓을 걸, 빨리 이야기 좀 하라”고 독촉을 여러 번 했으니까요.
  
   “만들어재끼는 데는 도리가 없다니까요”
  
   조갑제: 그런데 검찰 측의 공소 사실을 뒷받침한 수많은 증인들은 또 어떻게 된 겁니까?
   김금식: 아까 말한 具 씨의 비상한 능력이 바로 그런 거지요. 徐 아무개란 증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대구교도소 출소(1967년 11월) 뒤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검찰에서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법정에 나와서는 저를 1967년 10월17일에 만나 술을 마셨다고 증언을 하는데야 어떻게 할 겁니까?
  
   기철이도 원래 알리바이가 성립되었다 말입니다. 근하군이 피살된 그날 기철이는 검찰 기소장대로라면 대구에 있어야 하는데 부산 개금동의 버스 주차장에서 配車(배차) 일을 본 것이 배차기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었고 식당에서 외상 식사를 하고 사인한 장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철이의 동료 배차원은 검찰이 여러 번 족치니까 “그 배차 기록은 내가 대신 써 주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알쏭달쏭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만사가 이런 식으로 증인을 만들어내는 데는 도리가 없는 거지요.
  
   제가 범행에 쓴 노끈과 칼을 어디서 샀다고 거짓말하면 그걸 나에게 팔았다고 말하는 증인을 만들어내는 데야 못 말립니다.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새벽엔 대구 태평로의 어느 참새구이집에서 잤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김금식이와 함께 내가 그날 같이 잤다. 그날은 집세 주는 날이기 때문에 분명히 날짜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증인을 만들어 재끼는 데야 도리가 있습니까.
  
   조갑제: 그러면 당신은 시나리오 작가이고 검찰은 그 엉성한 각본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며 具 씨는 무대장치와 배역을 설정한 셈이군요. 이 재판극은 금식 씨와 具 씨의 합작품이군요.
   김금식: 具 씨가 사진을 책상 위에 여러 장 늘어놓고 나나 대범이 보고 이 가운데 용의자를 찍으라고 합디다. 우리야 뭘 알아야 찍지요. 그러면 먼저 구씨가 암시를 줍니다. 여러 장의 사진 가운데 한 장을 가리키며 넌지시 이게 누구 누구 아닌가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면 되는 겁니다.
  
   조갑제: 교도소 안에서 상당히 편했지요.
   김금식: 호화판이어지요. 官食(관식)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군요. 점심이나 저녁은 김 검사가 주로 사주었고 검사가 감방에까지 들어와 직접 나에게 담배를 건네주기까지 했지요. 검사와 술 마시고 검사실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어요. 교도관이 따라붙으면 김 검사가 “내가 책임진다”면서 내보내고 나만 있게 했지요. 나의 전용 私服(사복)도 있었습니다. 그걸 입고 몇 번 외박도 했고 여자와도 잠자리를 같이한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일 테고….
   조갑제: 설마 공판 중에는 외박을 못했겠지요?
   김금식: 했지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수사와 재판은 내가 좌지우지했지요”
  
   조갑제: 1심 공판에서도 줄곧 범행 자백을 계속하다가 막바지에 가서 번복을 시작하는데 이런 심경 변화는 무엇 때문이었죠?
   김금식: 그때 나는 김 검사와 흥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형을 징역 7년 정도로 때려주고 형 확정 뒤에는 마산교도소로 옮겨 병보석을 받게 해줄 것을 김 검사에게 요구하고 그 약속으로 각서를 써달라고 졸랐습니다. 김 검사는 각서만은 써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金 검사에게 협박 비슷한 말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당신의 도장과 잉크로써 각서를 만들어두었다.”
   사실 그때는 그러려면 그럴 수가 있었지요. 김 검사는 나를 불러 사무실에 앉혀놓은 뒤 검찰청 앞 천수다방에 커피를 시켜놓고는 바깥으로 나가 버린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책상 위의 도장과 잉크로 그런 각서를 얼마든지 날조할 수도 있었지요. 그런 협박을 한 며칠 뒤 내가 출정간 사이 내가 있던 감방을 누군가 샅샅이 뒤진 적이 있었는데 그 각서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조갑제: 각서를 얻지 못하게 되자 번복을 한 겁니까?
   김금식: 원래 계획도 그 선에서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 혼자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는 自責感(자책감)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계속 퇴짜를 맞으면서도 끈질기게 나를 찾아와 바른말 할 것을 간청한 서윤학 변호사의 집념에 감동했습니다.
   조갑제: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자백을 번복해도 너무 깊게 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김금식: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범죄의 성립 여부는 모두 저 혼자에게 달려 있었고 그것도 교도소 1일 불법 출소라는 한 가지 사항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公判(공판)에서도 저의 진술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라 재판의 흐름이 좌지우지되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몸만 빼면 검사들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조갑제: 자백 번복 뒤에는 대우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김금식: 별로. 그 다음날인가 며칠 뒤엔가, 저는 김 검사에게 또 불려갔습니다. 그날의 장면을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김 검사가 저에게 담배를 피우라고 갑째로 던져줍디다. 피우려는데 따라온 교도관이 저의 손을 붙들었어요. 김 검사가 버럭 소리를 지릅디다.
   “금식이가 내 방에 와서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 이제 알았나!”
   그날 밤 저는 김 검사를 따라 송도로 가서 술대접, 여자 대접까지 받고 다음날 새벽에 돌아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조갑제: 그래도 1심에선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예상했습니까?
   김금식: 김 검사가 그럽디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사형 선고 받는다”고요. 사형 선고가 떨어지자 손가락으로 내 목을 자르는 흉내를 낸 것도 이미 그 정도는 각오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는 증거지요.
   조갑제: 대구고법에 가서도 불안하지 않습디까?
   김금식: 전혀. 재판장도 같은 이름의 김태현 판사였는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더군요.
   “했나, 안 했나? 어느 쪽인가, 분명히 대답하라,”
   저는 이렇게 답했죠.
   “더 농락하고 싶지만 여기가 워낙 중요한 자리라 바른말 하겠습니다. 나는 안 했습니다.”
   그러니 金 판사는 싱긋이 웃더군요.
  
   조갑제: 기철 씨는 출소 뒤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김금식: 몇 번 봤죠. 몸이 무척 말랐고 술을 많이 마십디다. 기철이가 다 죽어간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으나 찾아갈 형편이 안 되더군요. 기철이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최근 윤 노파 피살 사건이나 여대생 피살 사건 수사를 보고 느낀 것은?
   김금식: 저는 친구들과 내기를 했습니다. 범인이라고 발표된 사람들 모두가 무죄 된다고 나는 걸었고 두 번 다 술 얻어먹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또 만들어내는 구나, 또 만들어내’하고 중얼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는 세 시간 동안 아무런 고민 없이 이야기하였다. 나이가 들었고 덩치는 컸지만 유쾌한 청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이상하게도, 김금식 씨로 하여 고통을 당한 사람들 이외에는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金 씨 때문에 고생을 했던 사람들도 具 씨나 김 검사에게 겨누는 만큼의 원한을 금식 씨에게 쏟지는 않는다.
   소행을 보면 분명히 미워해야 마땅할 사람이고 어떤 면에선 검찰 측보다도 더한 원천적인 가해자인데도 그를 대해보면 惡童(악동)과 같은 장난기가 惡意(악의)를 중화시키고 있음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김금식 씨를 惡人(악인)으로 못 박을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우롱하려고 했다는 그 법이 正義(정의)의 법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취재 기자들 가운데서도 “금식이가 속 시원한 연극을 하기는 했다”고 고소해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가 농락한 법이 萬人(만인) 앞에서 평등한, 强者(강자)와 弱者(약자)를 가리지 않는, 법의 힘만큼 집행상의 절차도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법이었다면 김금식 씨는 결코 엘리트 검사를 이긴 소영웅의 대접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존엄한 규범을 욕되게 한 惡人(악인)으로 萬人(만인)의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김금식 씨 같은 사람을 거리낌 없이 나무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김 씨를 마음껏 저주할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의 양심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법의 적용과 법의 집행자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송강이나 임꺽정이나 김금식 같은 사람들이 귀여움 받는 사회는 뭔가 잘못되어 있는 사회임에 틀림이 없다.
  
  
  (계속)
  
[ 2020-07-29, 10: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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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20-07-29 오후 2:33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김금식 씨를 惡人(악인)으로 못 박을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우롱하려고 했다는 그 법이 正義(정의)의 법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취재 기자들 가운데서도 “금식이가 속 시원한 연극을 하기는 했다”고 고소해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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