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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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
  
  그를 체포한 이대용(李大鎔)공사, 그를 조사했던 홍필용(洪弼用)국장등 당시 정보부 간부들이 털어놓은 20년만의 진실―『그것은 김형욱(金炯旭)의 조작이었다』
  
  <1989년 3월 월간조선>
  
  
  이대용(李大鎔)씨의 말 한 마디에서..
  
  위장 귀순하여 여교수와 결혼, 잘 먹고 잘 살다가 느닷없이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뒤 위조여권을 갖고 국외로 탈출했으나 중앙정보부의 활약에 의해 사이공 공항에서 붙들려 와 사형집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전 북한중앙통신사 부사장 李穗根. 죽을 때의 나이가 만 45세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 일본제국군대 지원, 북한 노동당 입당, 북한 탈출, 남한 탈출 등 세 번의 체제변화를 겪었던 이 「언론인」에 대해 기자가 한 번 제대로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 묵은 탁상일기를 뒤져보았다.
  
  1986년 1월8일 오후에 기자는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이 있던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이대용(李大鎔)씨를 찾아갔었다. 李씨는 1969년 1월31일 오전 사이공의 탄손누트공항에서 이수근(李穗根)을 비행기로부터 끌어내렸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의 공사직함(육군 준장)을 가진 중앙정보부 월남책임자였었다. 이대용(李大鎔)씨는 이수근(李穗根)을 체포한 사람으로는 별로 유명하지 않다.
  
  李공사는 1975년 4월에 사이공이 함락될 때 탈출하지 못하고 2명의 대사관 직원과 함께 억류돼 감옥생활을 했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이스라엘 상인 아이젠버그의 중계에 의한 비밀접촉 끝에 李공사일행은 1980년 4월에 풀려나 귀국하였었다.
  
  억류 5년간 베트남 당국과 북한측의 집요한 회유를 받고도 사상적 변절을 거부했다고 하여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돼 있는 그는 「사이공 억류기」란 책도 냈고, 이 책은 텔리비전의 미니시리즈로 극화되었다. 육사 7기 출신인 그는 6·25 전쟁 때는 6사단의 중대장으로서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변인 초산에 맨 처음 당도한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월남 패망 때는 미군 헬리콥터에 타고 철수할 수 있었지만 대사가 먼저 가버린 상황에서 남아 있는 한국교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일부러 헬기를 타지 않았던 사람이다. 「위장간첩 이수근(李穗根)」은 해외여행자 소양교육장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으니 두 李씨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반공교육에 상당히 기여를 한 셈이다. 3년 전 그 날에 기자가 이대용(李大鎔) 이사장을 찾은 것은 이수근(李穗根)의 체포작전에 미국 CI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기자는 월간조선 그해 2월 호에 「한국내 미 CIA」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취재를 하고 있었다. 李이사장은 두툼한 메모 책을 펴놓고 당시의 상황을 시간별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정보부와 주월 한국대사관 사이를 오고간 수십 통의 전문 내용, 이수근(李穗根)과의 대화내용 등등이 적힌 메모책을 덮으면서 李회장은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이수근(李穗根)이가 간첩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지요』
  
  『언젠가는 제가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그는 간첩이 아닙니다』
  
  李회장은 『여기에 다 적혀 있다』는 듯 메모 책을 가리켰다. 어리둥절해진 기자는 궁금증을 나타내며 캐묻고 들어갔다. 李회장은『지금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면서도 몇 마디 참고가 될만한 얘기를,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자신만의 비밀로 안고 있기에는 좀 안타까운 듯, 뱉어내었다. 퍼뜩 기자의 뇌리에 스친 이수근(李穗根)의 이미지는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위장간첩이 아니라 최인훈(崔仁勳)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李明俊)이었다.
  
  사형 때 『김일성 만세!』 안 불러
  
  李씨가 기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런 말을 들어도 기자가 기사화 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을지 모른다. 기자도 그 말을 기사화 하려는 취재작업을 벌이지 않았다. 진실을 알아도 어차피 못 쓸 기사인데 취재를 해보았자 무얼 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수근(李穗根)사건을 기사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 당시의 언론상황이었던 것이다.
  
  李사장을 만난 지 석 달쯤 되는 날에 기자는 또 우연하게 이수근(李穗根)과 부딪쳤다. 한국의 사형집행 실상에 대해 취재하고 있던 기자는 화양동 성당의 사무장 고중렬(高重烈)씨를 만났다. 高씨는 서울구치소에서 20여 년간 사형수 교화담당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백 명의 사형집행에 참여한 이다. 퇴직 뒤에는 「서울구치소」라는 책을 쓰기도 했었다. 高씨가 먼저 이수근(李穗根) 이야기를 꺼냈다. 이수근(李穗根)은 사형집행 때 많은 간첩들이 그러했듯 『김일성 만세!』를 부르지도, 신문이 보도했듯『자유대한 국민들을 배신하여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신부님이 천주교 식의 영세를 받겠느냐고 했더니 이를 거절했어요. 신부님이 안타까와서 눈물을 쏟던 기억이 납니다. 이수근(李穗根)이는 신부님의 권유하는 말을 막고 자기 말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집행관이 도중에 중단시키고 집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언은 구체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뜻이「나는 북도 남도 싫어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
  
  남북 양 체제에서 생활한 경험을 살려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흐름이었습니다』 이수근(李穗根)이 남겼다는 마지막 말은 그가 이대용(李大鎔) 공사에게 붙들린 직후 자포자기 상태에서 쏟아놓았다는 말과 거의 일치했다. 高씨를 만난 지 두 달쯤 지나서 기자는 또 우연히 이수근(李穗根)과 만났다.
  
  김형욱(金炯旭) 아래에서 정보부 국장을 지낸 金모씨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이수근(李穗根)을 거론했던 것이다.
  『내가 李를 맡아 관리했던 적이 있었지요. 사이공에서 붙들려 와서 조사를 받는 자리에 내가 갔더니, 그는 나를 붙들고 펑펑 울면서 감찰실장 방(方)모씨 욕을 하더군요. 方실장이 하도 그를 괴롭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겁니다. 수시로 그를 불러내, 권총을 들이대고, 「너 간첩이지」하면서 위협을 했으니…』
  
  기자는 지난 3년간 이수근(李穗根)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자가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한 달쯤 전부터였다. 이제는 「이수근(李穗根)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한국민주화의 한 산물인 셈이다. 이수근(李穗根)의 삶과 죽음이 분단상황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집행간여 검사의 증언
  
  기자가 첫 취재대상으로 잡은 이종효(李宗孝)신부(서교동 성당)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사형집행의 집례를 본 경험이 짧은 때인데, 그를 영세 받게 하지 못해서 안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대한 선입감 때문에, 당연히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유언을 했으나 태도는 태연자약했어요.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수근(李穗根)이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당한 것은 1969년 7월2일 오전 11시쯤이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서울지검 김병하(金炳河) 검사가 이름, 생년월일 등을 물어 사실확인을 했고 李가 『따뜻한 환대를 저버리고 탈출하려 한 데 대해서는 온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최후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는 김병하(金炳河)씨는 『그때 신문에 보도된 李씨의 유언은 모두가 엉터리다. 오전에 이미 사형을 집행한 뒤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신문에 추측기사가 실려 있더라』고 했다. 金변호사는 사형 집행장에서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수근(李穗根)과 이런 문답을 나누었다고 기억했다.
  
  김병하(金炳河) 검사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털어놓아라. 그러면 집행을 연기할 수도 있다.
  이수근(李穗根) : 없다.
  
  김(金)검사 : 왜 대한민국에서 도망갔는가?
  이수근(李穗根) :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하여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였다.
  
  金검사 : 더 할말이 있는가?
  이수근(李穗根) : …
  
  (金변호사는 『그는 가족에 대한 말을 남기지 않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담담했었다』면서 『그가 남한에서 감시를 당하는 등 자유를 속박 당한데 불만이 많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정보부, 李의 행방 이틀간 몰라
  
  이수근(李穗根)이 아내 이강월(李江月)씨(당시 36세)에게는 알리지 않고 북에 있는 본처의 이질인 배경옥(裵慶玉)씨(당시 29세)와 함께 서울 성북구 삼양동 233의 3번지에 있던 자기 집을 나와 위조여권의 주인 오제녕(吳濟寧)씨 행세를 하면서 행선지를 태국으로 하여 김포 발 홍콩 행 케세이퍼시픽 항공사(CPA)의 여객기에 몸을 실은 것은 1969년 1월27일 오후 5시30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다음날 밤에야 비로소 이수근(李穗根)이 자취를 감춘 사실을 알아냈다. 李穗根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감찰실 직원이 27일에 실시된 부내 승진시험에 참여하느라고 이틀간이나 李의 행방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정보부는 이수근(李穗根)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던, 李穗根의 누이 이신성(李信星)씨(당시 사망)의 아들 김세준(金世埈)씨(당시 22세·연세대 재학)를 28일 밤에 연행하여 李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金씨는 삼촌 李穗根을 김포공항까지 전송하여 李가 간 곳을 알고 있었으나 다음날(29일)까지 행선지를 대지 않아 정보부에서는 李穗根이 국내에 있는지 해외로 나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공의 대사관에서 이대용(李大鎔)씨가 본부(정보부)로부터 긴급 전문을 받은 것은 29일 새벽이었다. 그 내용은 이수근(李穗根)과 처조카 배경옥(裵慶玉)이 해외로 탈출했으니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李공사는 직원들을 탄손누트 공항과 여관 촌, 이민국으로 보냈다.
  
  29일 오전 8시에 또 한 통의 전문이 날아왔다. 李穗根이 이세준이란 가명으로 월남에 잠입한 것 같으니 체포하라는 지시였다. 李공사 팀이 월남 이민국의 입국자 명단을 조사해보니 이세준은 28일 오전 9시15분에 CPA편으로 사이공에 도착, 17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다낭으로 갔음이 밝혀졌다. 이세준을 잡아와서 조사해보니 그는 李穗根이 아니라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청룡부대 중대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확인됐다. 29일 오후에 비로소 이수근(李穗根)이 오제녕(吳濟寧)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갖고 출국했다는 전문이 李공사 앞으로 날아왔다. 정보부는 만 2일이 지나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수근(李穗根)과 배(裵)씨는 27일 홍콩에 도착, 이틀 밤을 호텔에서 보낸 뒤 29일에 목적지를 캄보디아로 변경,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그날 오후에 홍콩 공항에 나타났다. 공항을 지키고 있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李를 발견, 격투를 벌였다. 李의 가짜 콧수염이 떨어져나가고 가발도 벗겨졌다. 홍콩경찰은 영사관 직원들과 李 그리고 裵씨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외교관 신분이었으므로 즉각 풀려났다.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은 이병두(李秉斗)차장을 급히 홍콩으로 보냈다.
  
  미CIA 한국지부장 라자스키씨에게는 협조를 요청했다. 홍콩경찰은 1월31일 아침에 홍콩을 출발, 프놈펜으로 가는 CPA기에 이수근(李穗根)과 裵씨를 태워 출국시켰다. 이 여객기는 사이공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영국정보기관은 미국 CIA의 부탁을 받고 李를 일부러 사이공 경유 항공편에 태움으로써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이공 공항에서 붙들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가 있다.
  
  비행기에서 끌어내린 이수근(李穗根)
  
  미CIA는 이수근(李穗根)의 홍콩출발을 김형욱(金炯旭) 부장에게 직접 통보하였다. 金부장은 홍콩에 나가 있는 이병두(李秉斗)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李차장은 李가 아직 경찰서 안에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金부장은 욕설을 퍼부은 뒤, 사이공의 이대용(李大鎔)공사에게 긴급지시를 내렸다. 그때는 이미 李가 탄 CPA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2분 뒤인 31일 오전 10시17분이었다.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는 교통체증으로 1시간쯤 걸린다. 李공사는 보좌관을 티우 대통령에게 보내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李공사는 미국에서, 티우 대통령이 군 장교시절, 그와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李씨가 1963년에 무관으로 부임해 온 이래 절친한 친구가 됐는데, 대통령 관저도 뒷문으로 무상출입 할 정도였다. 李씨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티우 대통령의 지시로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로 뛰어올라갔다. 부하인 이택근씨만을 데리고 갔다.
  
  李공사는 단박에 이수근(李穗根)을 알아봤다고 한다. 李穗根은 앞자리의 창 쪽에, 앉아 있었다. 李공사는 스튜어디스에게 신분을 밝히고 승객 명단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스튜어디스는 미스 장이란 예쁜 한국 아가씨였다. 승객명단 맨 끝에 오제녕(吳濟寧)이라고 볼펜으로 써넣은 이름을 확인했다. 2대 2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끌어낼까 궁리하고 있는데 배경옥(裵慶玉)씨가 다가왔다.
  
  『대사관에서 오셨습니까』
  『너 배경옥이지!』
  배(裵)씨는 기가 푹 죽은 표정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이택근씨에게 裵씨를 꼭 붙들고 있게 했다. 李공사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수근(李穗根)에게 다가가 『이 선생이지요』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야 이놈아! 난 죽을 각오가 돼 있어!』라면서 李공사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태권도 2단인 李공사는 위에서 그의 어깨를 갈겼다.
  
  기장이 달려와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李공사는 신분을 밝히고 티우 대통령의 특명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기장은 물러났다. 그 사이 한국 대사관 직원 대여섯 명이 달려와 합세, 李穗根을 무사히 끌어낼 수 있었다. 수갑을 채워 대사관으로 데려가는 차 중에서 『야, 우리 부장 좋아하시겠구만』 『야, 이 선생은 훈장 타게 됐구먼』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고 한다.
  
  이상의 경위는 이대용(李大鎔)씨가 3년 전 기자에게 털어놓은 내용이었다. 기자는 지난 1월 하순에 李大鎔 생명보험협회 회장을 다시 찾아갔다. 李공사는 69년 1월 31일 오전에 李, 배(裵)씨를 붙들어 대사관으로 데리고 와 그날 밤 11시55분에 C-54 한국공군기 편으로 김포로 보낼 때까지 12시간쯤 같이 있었다.
  
  李공사가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이때의 관찰 때문이다. 李공사는 3년 전에 보여주었던 그 메모 책을 다시 뒤적이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모든 게 분단의 비극이지요. 이수근(李穗根)은 고향이 황해도 서흥군인데 저는 금천으로서 가까운 곳이지요. 그날 이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03: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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