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그의 시대(2) - 불운과 불만의 계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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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와 그의 時代② - 不運과 불만不滿의 계절
  
  가장 존경했던 형의 죽음, 해방 뒤의 혼란, 여순반란사건, 대숙군의 회오리, 투옥, 파면, 어머니의 쇼크사, 6·25…. 1946∼51년의 격동기를 맞바람을 받으며 헤치고 나간 朴正熙는 좌절과 불운의 골짜기에서 어떻게 탈출했던가.
  
  <1987년 2월 월간조선>
  
  「영웅시대」의 피해자
  
  이번 기사에서 다루려는 朴正熙의 생애는 1946∼51년에 걸친 부분이다. 혼란과 전란, 사상투쟁과 동족상잔으로 상징되는 이 격동의 시대를 30대 초반의 朴正熙는 맞바람을 맞으며 헤쳐가야 했다. 친형의 피살, 투옥, 고문, 파면, 어머니의 죽음, 아내와의 이별 등 재앙의 연속 속에서 비록 상처투성이긴 했으나 朴正熙는 어쨌든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이 시대의 그에게 가장 큰 소득은 살아남았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대는 朴正熙의 가장 큰 비밀을 안고 있다. 여순반란사건 직후 숙군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선 약간의 사전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해방에서부터 6·25가 터지기까지의 혼란기에 이었던 한 인간의 행위를 지금의 판단기준으로 파악하고, 지금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당시의 사회상을 무시하고 그 행동만 떼내어 1980년대의 도마 위에 얹어놓고 분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시대는 일제시대 독립투사를 고문하던 고등경찰관들이 군정경찰관으로 변신, 권력의 실체를 장악했던 시대였다. 형은 좌익에게, 동생은 우익에게 맞아죽던 시대였다.
  
  어느날 갑자기 숙군대상자가 되어 재판을 받던 장교가 어느날 갑자기 풀려나 바로 다음날부터 공비토벌에 참여했던 시대였다. 무엇보다도 6·25를 통해 공산주의의 실상과 사상전쟁의 처참함이 드러나기 전의 시대였다. 이 혼란기의 주도적 인물 중의 하나인 張澤相(미군정 경찰의 수도청장) 조차 상처를 받지 않고는 이 시대를 넘길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항일독립조직원에게 피살되었고, 그는 친일경찰을 부려 공산당을 소탕했으며, 그의 딸은 월북하여 金日成에게 숙청되었다. 장택상(張澤相)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었던 朴正熙는 이 시대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는 뱃길 수 없었을 것이다. 朴正熙는 한번도 그의 사상적 전력에 대해서 공개적인 해명을 하지 않았지만 완결된 그의 생애로써 당당히 투철한 반공주의자였음을 입증했다.
  
  이제는 朴正熙에게 『당신은 과연 반공인가』란 의문을 던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 전제가 있기에 그의 과거를 기록하는 데도 부담이 덜 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비약일까. 그의 과거를 기록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따지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한시대가 한 인간에게 어떤 나이테를 남기며, 朴正熙가 사상적인 방황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선 어떤 전력(前歷)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은폐하려는 기도가 더 큰 부작용을 부르는 법이다. 그런 부작용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朴正熙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도 사실은 제대로 정리,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고구마로 배 채우며 훈련
  
  朴正熙는 1946년 9월 24일에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입시경쟁률은 약 2대 1. 입학생은 2백63명이었다. 광복군·중국군·일본군·만주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경력자가 35명이었다. 2기생들은 나이나 경력 차이가 가장 많은 생도들이었다. 나이분포는 20∼30세였고 평균은 22∼23세였다. 그때 29세이던 朴正熙는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다. 생도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조병건(趙炳乾.당시20세), 오일균(吳一均)정위(당시 21세)였다. 해방 때 일본육사 60기 생도였던 두 사람은 朴正熙보다도 8∼9세나 아래였다.
  
  이 두 중대장은 2년 뒤 숙군 때 걸려들어 총살된다. 교장은 나중에 朴正熙의 생명의 은인이 된 원용덕(元容德)참려이었다. 2기생 중엔 나중에 그의 생명을 빼앗아간 金載圭도 있었다. 朴正熙의 덕도 있고 해서 2기생 가운데서는 朴正熙 문형태(文亨泰) 심흥선(沈興善) 이세호(李世鎬) 이소동(李召東) 한신(韓信) 등 여섯 명의 대장, 金載圭 등 9명의 중장이 배출되었다. 사람이 누구와 같은 그룹에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2기생의 경우다.
  
  「내무생활은 일본군대식을 꽉 짜인 일과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상급생이 없어 자치제가 많이 허용되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빈병으로 내무반 마루바닥을 닦아 번쩍 번쩍 빛이 나도록 했다. 마침 흉년이 들어 강냉이 밥이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고구마 몇 개로 하루 세 끼니를 대신해야 했다. 그래서 변비로 고생하는 이들도 많았다. 겨울에 거행된 졸업식에는 여름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만큼 피복보급이 원활치 못했다. 당시 무엇보다도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몇몇 교관·중대장·사관후보생들 중에 불온한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 때 조선지원병훈련소였던 사관학교의 시설이나 대우는 형편이 없었다. 교사건물은 창은 있으나 유리는 붙어있지 않았다. 도끼가 없어 돌로 장작을 패어 취사를 해야 했다. 모포엔 이가 버글버글했다. 朴正熙와 함께 같은 군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이로는 손선희(孫熙善.육군소장 예편·육본인사참모부장 역임)이 있다. 『저는 키가 1백61㎝, 朴대통령은 저보다 2㎝가 더 컸어요. 저와 그분, 그리고 沈興善(육군대장 예편·총무처장관 역임)은 대열의 맨 끝에서 같이 따라 다녔지요. 저보다도 일곱 살이나 많으신 분인데도 아무런 불평없이 훈련을 받고 늘 꼿꼿한 몸가짐을 흐트리지 않더군요. 이런 인연도 있고 해서 대통령이 된 다음 그분은 沈興善을 무척 총애하여 2기생 출신들의 궂은일을 처리하도록 했지요』
  
   여동생의 증언 : 相熙오빠의 최후
  
  朴正熙가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훈련을 받고 있던 1946년 9월말 대구에서 좌익들의 주동으로 큰 파업이 일어났다. 10월1일 파업을 지지하는 군중의 데모가 격화됐다. 경찰이 발포하고,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 폭동으로 발전했다. 일제시대의 경찰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대구의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50명의 경찰관들이 군중에게 붙들려 그중 38명이 상해되었다. 「주한미군사」에 따르면 「그들은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거나 껍질이 벗겨진 채 신음하다가 죽어갔다. 살해된 경찰관의 가족도 공격대상이 되었다」 폭동은 경북전역으로 번져갔다. 구미에서는 10월3일 약 2천 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접수, 경찰관들을 가두고 경찰관·관리들의 집 86채를 박살냈다(미군방첩대 보고).
  
  1946년 10월 2일 새벽 朴正熙의 신변에 일어난 사건은 그 뒤 朴正熙의 생각과 행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며 그를 일생일대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相熙오빠의 죽음」에 대한 여동생 朴在熙의 기억은 생생하면서도 약간 애매한 구석이 있다. 『나는 열병의 치료를 한다고 누워지낼 때였습니다. 새벽이었는데, 새까만 옷을 입은 경찰들이 저의 집에 들이닥쳤어요. 나를 보고, 상희씨와 어떻게 되느냐고 묻길래 동생 된다고 했더니, 걱정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 오빠가 공의한테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해요. 남편이 나갔다가 곧 이불로 둘둘 말린 피투성이의 오빠를 업고 왔어요. 숨은 붙어 있는데 정신은 없습디다. 총 세발을 맞았다는 데 옆구리와 배꼽 밑의 상처는 제눈으로 봤지요. 제가 녹두를 다려 그 물을 떠멱이는데 한 모금만 마시고는 곧 숨이 넘어갔지요. 그 전에 오빠 가족은 피신해서 임종도 못했어요.
  
  폭동이 났을 때 오빠는 구미 경찰관들이 안 다치도록 어떤 창고로 피신시키고 바깥에서 문을 잠갔고, 죽을 때도 그 열쇠를 갖고 있었대요. 죽기 직전에 경찰서장과 같이 있었는데, 서장이 이제는 집으로 가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서는 데 경찰관들이 덮치길래 논두렁으로 피했다가 총을 맞았답니다. 총을 쏜 경찰관들이 오빠를 업고 공의한테 데리고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명령하더랍니다. 오빠는 가족을 불러달라고 했고, 내가 좋은 일을 했는데 왜 죽어야 하느냐는 말도 하더랍니다』 朴相熙의 장례는 3일장이었다고 한다.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부모, 큰형, 동생가족과 처자식들만 참여, 구미 앞산에 묻었다. 일제 때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여 이곳에선 얼굴이 널리 알려진 朴相熙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할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가족들은 일찌감치 피란 가 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朴正熙는 대통령 시절에 측근에게 『형(相熙)이 피살된 사정을 알아보려고 장교 복장으로 고향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숙군 때 金昌龍으로부터 그 점을 추궁 당했다』고 말하더라고 한다. 형제 중에서 지식수준이 가장 높았고, 朴正熙를 반체제 쪽으로 끌고 가는데 주요한 요인이 된다. 朴正熙는 육사2기생 훈련 중에 형의 피살 소식을 들었을 것이지만 장례식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동기생 孫熙善에 따르면 그는 그런 비극이 일어난 것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아 동기생들은 몰랐다고 한다. 2기생 1백96명은 1946년 12월14일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성적은 1등이 신재식(辛在植.육군소장 예편·군수기지사령관 역임), 朴正熙는 3등이었다.
  
   친일경찰에 반감 컸던 경비대
  
  朴正熙 소위가 발을 디뎌 놓은 조선경비대는 그에게 있어선 만군, 일군, 광복군에 이어 네 번째 군대였다. 미군정하의 조선경비대는 그러나 경찰의 보조병력에 불과했고 충성심을 모으고 사상적 통일을 기할 만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정하에서 권력의 상징은 주한미군, 권력의 실체는 경찰이었다. 문제는 이 경찰의 주력이 일제시대의 조선인 탄압에 앞자어 왔던 친일경찰이란 점이었다. 대구 10·1폭동 뒤 수습책을 토의하기 위해 군정청이 주최한 조·미공동회의에서 매그린 대령은 경사급 이상 간부 경찰관 가운데 약 80%가 친일경찰 출신이라고 보고했다.
  
  특히 수사·사찰지금의 정보 등 경찰의 공안기능을 장악한 것은 일제 사상경찰, 즉 고등계형사 출신이었다.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崔能鎭)까지도 조·미 공동회의에서 『국립경찰은 친일경찰과 민족반역자 및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부패경찰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증거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민중의 80%는 공산주의로 돌아설 것이다』고 경고했다. 미군정청의 한 보고서도 「경찰은 일제 경찰의 수법을 답습하여 한국인의 정치적 사고를 좌익으로 돌려 놓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Foreign Relations 1946).
  
  이런 상황은 조선경비대의 분위기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육군대령 충신인 한용원(韓鎔源)교수(청주교원대학·정치학 박사)는 「창군」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입대시 신원조사를 안 했기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입대한 좌익불순분자나 범법자들이 섞여, 이들은 경비대원이 경찰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도록 자극하였다. 일부 경비대 요원은 경찰에 대해 질투와 증오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일부 권위적인 경찰간부가 경비대원을 경시하고 미군정이 경찰을 우대하는 데 대해서, 또 일제치하에서 친일경찰이 동포들에게 자행한 무자비한 직권행사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경비대는 해방직후의 사설군사단체 요원들로 구성되어 정치철학이 보수적인 경찰과 비교할 때 상당히 진보적인 데도 반목의 원인이 있었다」
  
  1946년 11월 1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김춘근(金春根.뒤에 특무부대 장교)은 당시의 군내 사정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구 10·1폭동 직후여서 사회에서는 좌익으로 쫓기고 있던 청년들이 피난처 삼아 군대로 대거 자원해 왔습니다. 18, 19세의 미성년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장교들도 사상문제로 부하들을 단속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좌경화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하사관그룹이 드러내놓고 순진한 신병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연대는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밤엔 전기공급이 되지 않아 촛불을 켰어요. 병영에 촛불만 켜지면 좌익세포들이 쏘다니면서 포섭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군내 남로당 세력의 거두 최남근(崔楠根)은 「군내의 좌익은 약 32%다」고 진술했다는데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38선 소대장으로
  
  제8연대는 1946년 4월1일 강원도 춘천에서 창설되어 춘천―원주―강릉선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그해 11월에 元容德대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해 왔고, 이듬해 초 육사 2기를 졸업한 朴正熙 송석하(宋錫夏) 한웅진(韓雄震) 소위 등이 배속되었다. 그 직후인 4월5일 강릉에 있던 8연대 제3대대에서 항명사건이 났다. 대대고급 하사관들이 주동이 된 54명의 병력이 송요찬(宋堯讚) 대대장에게 불만을 품고 밤에 대대장 사무소·병기고를 습격, 파괴하고 장교들을 두들겨 팼다. 강릉 주둔 미군들이 출동, 사태를 진압했다. 1947년 2월 38선 경비를 맡고 있던 미군 경비부대의 일부 병력이 철수하게 됨에 따라 8연대가 경비를 맡게 되었다. 한국군이 38선 경비를 맡아 북괴와 직접 대치하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경비중대장은 김점곤(金點坤중위.육사1기 출신·육군소장 예편·경희대 교수)였다. 그의 밑에 5개 경비소대가 있었다. 제4소대장은 朴正熙소위로서 송천 지역의 정면을 맡았다. 8연대에서 38선을 지킬 朴正熙 등 다섯 소대장이 결정되고 지휘소(CP)의 위치를 정하게 되었다. 元容德연대장 이하 간부들이 모여 의논을 하는데 브라운이란 미군 고문관이 참견하여 소대장들의 서열순으로 지역을 배당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할 경우 朴소위가 가장 나쁜 지역을 맡게 되어 있었다. 朴소위는 벌컥 화를 내더니 『미국놈이 왜 간섭하느냐』고 내뱉았다.
  
  브라운 고문은 「미국놈」이 욕이라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디에다가 욕이냐』고 연대장에게 항의했다. 元대령은 「미국놈」이 애칭이지 결코 욕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브라운은 『내가 타이피스트한테서 들어 아는데 욕이라고 하더라』면서 朴소위의 징계까지 요구하는 소동을 벌였다. 金點坤에 따르면 그때의 朴소위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로서 거의 생리적으로 미국을 싫어하는 것 같더라는 것이다. 金點坤중대장은 송천에 있는 朴正熙 소대장의 지휘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朴소위가 막걸리를 대단히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터라 정종 한 병을 갖고 갔다. 朴正熙는 그러나 지휘소가 있는 폐광촌에서 막걸리를 자가제조하여 마시고 있었다. 놀란 金중위가 『술을 담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朴소위는 『내가 교사시절에 문경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여주인이 주막을 했던 사람이라 그 여자로부터 막걸리 담그는 기술을 배웠다』고 하더란 것이다. 朴正熙는 중대장이 돌아갈 때 막걸리를 병에 넣어 선물했다. 그때 38선 CP의 주임무는 북한에서 월남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것이었고, 가끔 멧돼지 사냥도 했다.
  
   최초의 야외 기동 훈련 주도
  
  8연대의 38선 경비업무는 1947년 5월에 끝났다. 朴正熙소위는 연대작전참모대리(직제상 참모는 대위였으므로 대리 발령)로 보직되어 춘천에서 근무하게 됐다. 작전참모대리로서 朴正熙는 연대장교단 특별교육을 진행했다. 朴소위가 직접 계획을 짜고 교안도 만들었다. 그때의 장교들은 속성교육을 받고 임관된 이들이 많았다. 일제 때의 군 경력이 있다 해도 사병 및 하사관 출신자들이 대부분이라 부대단위의 지휘엔 미숙했다. 朴소위가 주도한 1주일 간의 장교단 교육 내용은 각개 전투, 수류탄 교육, 분대·소대 전투 훈련이었다.
  
  교육이 끝난 뒤 대대진지공격 훈련을 실습시키고 7월22일부터 3일간 강릉∼원포 지역에 대대단위의 야외 훈련을 실시했다. 이것은 조선경비대 창설 이후 최초의 야외기동훈련이었다. 훈련을 계획, 통제, 강평한 것도 朴소위였다. 이 훈련계획서와 강평원고는「한국 전쟁사」에 실려 있다. 朴소위는 장교들의 자질을 혹평하고 있다. 「장교로서 실병지휘 능력이 너무 저열함. 장교의 품성도야가 급선무. 야비한 언어, 저급한 취미를 가지고 장교로서의 위신을 훼손하는 점이 많음. 울진방면 연습에 있어서 병사는 한 명의 낙오자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장교가 먼저 낙오한 것은 장교의 권위의 실추, 이에 더함이 없으리라. 패기만만하고 씩씩한 지휘관을 볼 수 없었던 것은 통탄지사야(痛嘆之事也)」
  
  朴正熙는 金點坤과 대단히 친하게 되었다. 나이는 金중위가 여섯 살 아래이지만 서로 이야기가 통할 만한 지적 수준이었다. 朴소위는 속마음을 스스럼 없이 털어놓았다. 가장 좋아했던 형의 죽음은 朴正熙를 요즈음 표현대로 한다면 반체제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金點坤은 그때 朴正熙가 『경찰, 우익,미군으로 대표되는 체제세력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相熙씨의 유가족을 부양하느라고 그는 자기 봉급을 거의 다 송금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술은 주로 우리가 받아주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5·16의 원동력이 된 인연
  
  朴正熙가 8연대에서 육사 중대장으로 옮긴 것은 1947년 10월이었다. 朴正熙의 육사 중대장 시절은 5기생부터다.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교육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 5기부터였다. 교육기간도 배로 늘어 여섯 달이 되었고 체계도 어느 정도 잡혔다. 5기생은 민간인만 대상으로 하여 모집한 첫 기였다. 5기생의 약 3분의 2는 월남한 북한청년들이었다. 1947년 10월23일 4백20명의 5기생이 입교했을 때 朴正熙는 교장 金白一중령, 생도대장 최창언(崔昌彦) 소령, 형정처장 장도영(張都暎) 중령 밑에서 제1중대장이었다.
  
  제1중대 2구대장 황택림(黃澤林) 중위, 제2중대장 강창선(姜昌善) 대위, 2중대 2구대장 김학림(金鶴林) 대위는 1년 뒤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 조식으로 기소돼 사형된 이들이다. 金鍾泌은 최근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姜昌善이 군대 내의 좌익 두목이었는데, 朴대통령을 포섭하려고 자꾸 끌고 다니면서 술을 같이 마시고 해서, 술 좋아하는 분이 술 얻어먹다가 의심을 받게 된 걸로 압니다』고 했었다. 金鶴林은 3기생부터, 姜昌善은 4기때부터 숙군될 때까지 줄곧 육사에서 중·구대장이나 교관요원으로 근무, 생도들이나 동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자리에 있었다.
  
  韓鎔源은 「창군」에서 「당시 대부분의 군간부들은 공산주의자를 증오했으면서도, 중공의 주은래(周恩來)가 황포군관학교 교수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생도들을 오염시켜 4기생을 주축으로 공산폭동을 일으키게 했던 역사적 전례를 알고 있으면서도, 감수성이 예민한 생도들의 포섭에 용이한 교수부장, 생도대장, 중대장들 일부를 공산주의자로 보직시켰다」고 비판했다. 朴正熙 중대장은 진술한 교관이기도 했다.
  
  5기생 출신인 金在春(육군 소장 예편·중앙정보부장 역임)은 육사중대장으로서의 朴正熙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한산성으로 야영훈련을 갔을 때 그분의 지휘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지요. 엘리트 코스를 거친 장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전술학교관으로써 그의 강의를 들어보니 이분은 엉터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5기생들이 朴장군에게 느낀 존경의 마음은 5·16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5·16때 직접 병력을 동원한 것은 채명신(蔡命新), 박춘식(朴春植), 박치옥(朴致玉), 문재준(文在駿), 이원엽(李元燁), 박기석(朴基錫) 같은 5기생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5·16에서 물리력을 제공한 것은 朴正熙와는 사제지간이었던 5기생들이었고, 두뇌역할을 한 것은 육군 정보국의 민간인 시절에 그가 데리고 있었던 8기생 출신들이었다. 5기생 출신 김경옥(金景沃 .육군준장 예편·주일공사 역임)은 대위가 정신훈화를 통해 군인의 기본자세를 강조하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했다. 생도들은 주로 교관 및 구대장과 1차적인 접촉을 하고, 중대장과는 야외훈련이나 정신훈화 시간에 만날 정도였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4: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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