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그의 시대(1) - 만주에서 돌아오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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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밀 광복군이었나?
  
  석 달 뒤 이들은 다시 신경군관학교로 돌아가 현지부임을 위한 2주간의 교육을 또 받았다. {교육 마지막 날에 연회가 있었읍니다. 朴正熙는 술을 마구 마셔 댑디다. 잔뜩 취해서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울부짖듯 말했읍니다. 나는 해내고 말테야, 반드시 하고 말거야, 라고요. 나는 5·16뉴스를 텔리비젼을 통해 보고 그 말이 생각나서, 기어이 해내고 말았구나, 하고 중얼거렸답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생활 4년이 朴正熙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테마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인식이었다.
  
  朴正熙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은 만군장교 시절과 여순반란 직후의 숙군 시절이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중대한 고비였던 이 두 시기의 그림자는 죽을 때까지 아픈 상처가 되어 그를 따라다녔다. 이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선거 때 시비거리가 되기도 했고 그의 철학이나 사상을 엿보게 하는 자료로써 인용풉竪?했다. 이 두 시기에 朴正熙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사실 관계는 그것이 정치 문제가 된 때문에 오히려 더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버렸다. 정치 사건에서는 항상 [사실의 확정]보다는 [해석과 선전]이 앞서 버리기 때문이다.
  
  朴正熙의 만군장교 시절 활동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견해가 맞서 왔다. 첫째 견해는, 정보장교인 다까기 마사오가 독립 투사들을 잡아넣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둘째 견해는, 朴正熙가 만군장교 시절에 비밀 광복군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 가운데서 朴대통령 치하에서 구체적으로 발전이 되어간 것은 둘째 견해였다. 그에 대한 관변측의 전기류에선 [만군에 들어간 것은 독립운동 할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독낢봇?가담하려고 만주에 가 보니 독립군은 소멸돼 있었다. 그래서 만군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실렸다.
  
  高모와 朴모의 저서에는 [朴正熙가 신현준(申鉉俊)·이주일(李周一)과 함께 비밀 광복군 조직에 들어가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1945년 5월부터는 철석부대 사병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교육을 시키면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되기 며칠 전에는 申鉉俊과 함께 북경의 광복군 거점 덕경루로 잠입, 접촉했다] [해방직후엔 팔로군의 포위망을 탈출, 북경으로 와서 광복군 제3지대의 중대장이 됐다]는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 내용은 객관적 사실과 너무나 배치된다. 朴正熙는 철석부대(한국인들로 조직된 만군산하 간도 특설대의 별명)에 있어본 적이 없다. 朴正熙는 만군의 보병 제8단에서 중국인 사병들만 데리고 있었으니 민족정신을 고취할 수도 없었다. 申鉉俊(초대 해병 사령관)은 {朴正熙와 같이 있었던 1년동안 그가 비밀 광복군이란 사실도, 같이 독립운동을 하자는 권고도 들어본 바가 없다. 8단에 온 뒤에 나는 단 하루도 휴가를 간 적이 없다}고 북경 잠입설을 딱 잘라 부인했다. 朴正熙가 만군때 정보 장교였다는 얘기도 잘못이다.
  
  해방 뒤에는 육본 정보국에 근무했지만(그의 병과는 포병) 만주군 시절엔 보병 병과를 갖고 보병 연대에서만 근무했을 뿐이다. 朴正熙가 독립 투사를 잡아넣는 일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申鉉俊 方圓哲은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부인했다. 朴正熙는 단장의 부관으로 일해 전투나 수사 업무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재8단의 상대는 毛澤東의 8로군이라 한국인 독립 운동가와는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朴正熙가 [일제의 앞잡이]라는 주장과 [비밀 광복군]이란 주장은 다같이 배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운형(呂運亨)·박승환(朴承煥)·朴正熙의 연결점
  
  의도성 책자와는 전혀 다른, 송남헌(宋南憲 : 김규식. 金奎植 비서실장 역임)이 쓴 [해방 3년 사(1권)](까치사 발행)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해방 전부터 세계 정세에 밝았던 呂運亨은 1943년 출옥 직후부터 해방에 대비한 국내외 조직 규합에 나섰다. 朴承煥을 만주 사관학교에 보내 한적장교들을 규합하게 했고 1944년 8월 10일에는 조동우(趙東祐) 등 국내외 노장 사회주의 일파와 함께 조선 건국 동맹을 조직했다. 呂運亨은 朴承煥과 상의하여 군사 행동을 계획했다. 우선 만주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백두산을 넘어 국내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중국 연안에 있던 무정(武丁. 함북 출생. 중국 하남군관학교 졸업. 192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 중·일 전쟁중 8로군 포병사령관, 북한 인민군 창설에 참가. 6·25 뒤 숙청됨. 성은 崔 또는 金, 무정. 武亭이라고도 함)과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만주의 전체 유격대를 총 지휘케 함이 좋으리라는 점에 대체적인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
  
  1945년 4월말 呂運亨은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과 협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朴承煥을 건국동맹 대표로 메시지를 지참시켜 연안에 파견하였다. 그해 6월에는 국내 정세보고서, 통계 등 기밀자료를 朴承煥의 부인 金順子에게 맡겨 북경의 이영선(李永善)을 경유, 연안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李永善이 연안으로 가는 도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朴承煥은 당시 일본군 안에서는 최고의 직위에 있던 洪思翊 중장과도, 남방으로 전출되기 직전까지, 긴밀한 유대 관계를 견지하고 만주 국내 한적장교(60∼70명)를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呂運亨과 朴承煥은 독립군과 인근 주재부대와의 호응으로 1개 사단병력을 편성, 국내 진공할 계획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항복이 너무 빨리 와 좌절되었다. 이 비밀 거사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던 장교들 가운데는 朴正熙 전 대통령도 있다] 여기서 나오는 朴承煥은 만군시절의 朴正熙와 그 시대의 인맥과 환경을 이해하는 데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인물이다. 열정에 넘친 짧은 생애를 살고 간 朴承煥과 그의 인맥을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朴正熙의 사상적 좌표를 넓은 시야에서 파악할 수가 있게 된다.
  
   朴承煥의 한적장교들 의식화 공작
  
  朴承煥은 朴正熙보다 1년 뒤인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 영태리에서 났다. 대지주 박우용(朴禹鏞)의 2남이었다. 그는 경복고교의 전신인 제2고보에 다녔다. 스케이트, 수영 선수였다. 훤칠한 키에 힘이 셌고 잘 생긴 학생이었다. 그의 조카 朴明根(대한 투자신탁 사장·전 공화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朴承煥은 제2고보를 졸업하고 1년여를 집에서 쉬었다고 한다. 그는 폐가 나빴다. 이 무렵 朴承煥은 몽양 呂運亨을 자주 찾아가 그의 지도를 받더니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1937년 朴承煥은 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인 봉천군관학교의 제7기생으로 들어갔다. 朴承煥은 졸업과 동시에 기병 소위가 됐는데 얼마 안 있다가 항공과로 바꿔 1년간의 뗍안틔쳄?받고는 만군의 항공장교가 돼 봉천에 있는 비행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한국인 생도들에게 이해심이 깊은 봉천군관학교 교관 간노 히로시와는 계속해서 교분을 유지했다. 봉천에서 근무 중 그는 이곳의 한국인 유지인 김태덕(金泰德)의 딸 김민행(金民幸.金順子의 고친 이름)과 결혼했다. 중매를 한 이는 홍사익(洪思翊)이었다. 洪思翊장군(당시 관동군 군사학교 부교장)이 朴承煥를 친일파로 알려졌던 金泰德의 딸과 결혼시킨 것도, 그런 그늘 밑에서 안심하고 [공작]을 추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박준호(朴俊鎬.당시 만군조종사·육군 대령 예편)는 말했다.
  
  朴承煥은 1942∼44년 사이 봉천비행대에 있으면서 洪장군의 엄호 아래서 만군내 한국인 장교와 하사관들을 상대로 개별적인 의식화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그에게 감화되어 민족독립을 위해 뭔가를 해보자고 기약했던 이들은, 아내이자 동지였던 金民幸의 증언에 따르면, 文容彩(봉천 5기생·육군 소장 예편·작고), 박상열(朴相烈), 최남근(崔楠根.봉천 6기생·해방 뒤 4연대장), 朴俊鎬, 崔昌崙(신경 1기생, 6·25때 전사), 양국진(楊國鎭), 이기건(李奇建.신경 1기생·육군 준장 예편), 朴林恒, 金白一(봉천 5기생, 6·25때 전사), 박동균(朴東均.만군 군의관·육군 소장 예편), 朴正熙 등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군사분맹(軍事分盟)의 2기생 대표로 추천돼
  
  朴俊鎬에 따르면 그때까지 다져놓았던 朴承煥의 인맥을 조직화한 것은 1945년 4월이었다고 한다. 朴承煥, 朴俊鎬, 朴相烈, 崔昌崙, 문용채(文容彩) 등 다섯 명은 [조선 건국동맹 만주분쟁 군사위원회]란 명칭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업무분장은 朴承煥이 대표, 북중국 금주의 만군 헌병대의 대위로 있던 文容彩가 연락책, 제8단 소속이었으나 박임항(朴林恒)과 함께 항공장교가 된 崔昌崙은 군관학교 출신자 포섭 담당 등이었다고 한다. 朴承煥의 아내 金民幸의 언니인 남편인 평양갑부 최기영은 민간인으로 참여, 재정을 맡았다. 이들은 조직 대상으로 할 만한 동지들을 병과와 지역 및 기별로 뽑았다고 한다.
  
  朴俊鎬는 {신경비행대에 있던 崔昌崙이 1기 후배인 朴正熙를 2기 대표로 추천했다. 朴正熙와의 연락은 그가 맡았던 것으로 안다. 朴承煥이 해방 전에는 朴正熙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본다}고 증언했다. 崔昌崙은 군관학교 생도시절에 朴正熙를 호되게 구타하여 눈물을 맺히게 한 적도 있으나 장교가 된 뒤에는 굉장히 친해졌었다. 연락책인 文容彩대위도 朴正熙가 있던 반벽산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어 몇 번 만났다고 한다. 文容彩가 1974년 7월에 金在鴻(효창원 순국선열 추모위원회 위원장)에게 증언한 내용은 이렇다(그때 金在鴻은 朴承煥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朴正熙는 술자리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주 만나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역 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 회포를 풀곤 했다. 그는 제8단의 일본 장교들의 감시하에서도 조국 광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박명근(朴明根)은 이렇게 말한다. {삼촌이 요절한 뒤 나는 삼촌의 동지들을 자주 찾아뵈었지요. 심계원에 있을 때 1군참모장인 朴正熙장군을 찾아갔더니 삼촌 이야기를 하면서 반갑게 대해주고 그 뒤 각별히 아껴주셨어요. 삼촌의 딸 正根이가 해운대로 피서갔다가 익사했을 때는 군수지기 사령관으로 계시던 朴장군이 시체수습 등 여러 가지 편리를 봐 주셨읍니다.
  
  제가 청와대에서 경제담당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된 것도 그분의 직접선택이었고, 지역구 의원 후보 공천을 받을 때 삼촌을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모략하는 것도 막아 주셨읍니다. 그분이 저의 삼촌을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읍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뤄 朴正熙가 만군시절에 일말의 민족적 양심을 갖고 있었고, 朴承煥그룹의 지하활동에 관련되어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 [관련의 정도]가 쟁점이다.
  
  文容彩에 따르면 그때 만군 안에서 약 1백50명의 한적장교가 있었고, 그 가운데 60∼70명이 호응했다고 한다. 이 [호응]은 건국동맹의 비밀조직에 가입·활동했다기보다는 일단 유사시에 궐기할 뜻이 있는, 즉 민족혼을 잃지 않고 있는 성분의 장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朴正熙의 동기생인 李再起는 {당시엔 완전히 일본인이 돼버렸거나 될려고 하는 한국인장교들도 많았다}고 했다. 적어도 朴正熙는 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李再起의 증언이다.
  
  해방때까지 朴正熙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方圓哲은 {朴正熙는 건국동맹의 포섭대상이었지 그 조직의 주동적 멤버였다는 주장은 과장이라고 본다}고 말하고 있다. 朴正熙가 건국동맹의 비밀요원이었다 해도 그가 조직·포섭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한 흔적은 전혀 없다. 즉, 그는 비밀독립운동에 대?심정적인 동조자였고, 만군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민족혼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은 아니었던 정도로 봐야 할 것 같다. 朴正熙가 그럴 수 있었던 데는 군 장교로서 전황에 대한 정보가 많아 일본의 패망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보병8단이 단장 부관 朴소위
  
  申鉉俊상위(대위에 해당·당시 27세)는 1944년 8월1일자로 간도 특설부대(1943년부터는 열하성에 주둔)에서 만주군 보병 제8단(團)으로 전보명령을 받았다. 申대위가 제8단 본부가 있는 열하성흥륭현의 반벽산(半壁山)에 도착한 것은 1944년 8월26일이었다. 북경의 동북쪽에 있는 이 산악지대는 만리장성의 북쪽 변경이었다. 조금만 더 북상하면 몽고다. 단(團)은 연대규모의 편제로서 약 3천명의 병력으로 돼 있었다. 사병은 거의 전부가 만주 및 한족(漢族)이었다. 단장은 당제영(唐際榮)이란 50대 초반의 중국인으로서 계급은 상교(대령에 해당)였다. 장교는 대다수가 중국인이었고 일본인이 20여명, 한국인 장교는 申대위를 포함해서 네 명이었다. 申대위는 첫날 9대대 6중대장으로 임명받은 대로 본부에 들리지 않고 중대본부로 바로 갔다. 이 중대본부로 전화가 걸려 왔다. 단 본부의 朴正熙소위였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중에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申상위가 맡은 그 부대는 참 어려운 부대입니다} 대개 이런 취지의 인사를 한국말로 했다. 만주군에서의 공영어는 북경어였다.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공부로 申대위나 朴소위는 통역없이도 북경어로 통솔을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申대위는 두 시간쯤을 걸어서 단 본부에 도착, 단장 唐상교에게 신고를 했다. 이 자리에서 朴正熙소위와 첫 대면을 했다. 申대위보다 한 달 앞서 부임한 朴正熙는 단장의 부관이었다. 부관은 단 본부의 인사·행정업무를 관장하고 단장을 보좌하는 요직이었다. 똑똑한 신예장교가 차지하는 자리였다.
  
  신임 소위 朴正熙가 이 자리에 임명된 것은 그의 충성심과 능력이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날 저녁 申대위는 단장과 朴正熙등 단 본부의 장교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 朴소위는 申대위가 맡은 6중대에 대해서 브리핑해 주었다. 전임 중대장은 중국인이었는데, 현지 주민들을 괴롭혀 원성이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팔로군 게릴라들이 그를 암살해 버렸다는 얘기였다. 申대위는 朴소위를 통해서 제8단에 李周一중위(대대 부관), 方圓哲중위(중대선임장교) 등 2명의 한국인장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로군 상대로 방어·조우전
  
  보병8단의 임무는 모택동(毛澤東)휘하의 팔로군 토벌이었다. 일본 관동군의 하도(夏道)부대로부터 작전지휘를 받고 있었으나 8단의 지휘엔 중국인 단장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따라서 한·중·일 3국 출신 장교사이의 민족감정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申鉉俊은 회고했다. 이 부대는 원래 목단강성 연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1943년 11월에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 지구로 이동한 것이었다. 申鉉俊대위의 6중대는 석문진(石門鎭)이란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6중대는 어느날 새벽 팔로군을 기습하러 갔다가 역공을 당한 적이 있었다. 申대위가 직접 기관총을 붙들고, 일장기를 흔들면서 접근하는 위장 팔로군들을 향해 사격을 해야 할 만큼 사태가 급박했다. 활로를 트고 석문진으로 퇴각해보니 사망·실종자가 5명이었다(중대원은 모두 1백20여명). 申대위는 5명을 전사자로 보고했다. 그런데 죽은 걸로 치부했던 2명의 중국인 부하가 그 다음날 농민들에게 업혀 부대로 돌아왔다. 팔로군은 이 부상자를 포로로 잡아 치료까지 시키고 돌려보낸 것이었다.
  
  낭패한 것은 申鉉俊이었다. 이미 올라간 전사보고가 엉터리였음이 드러나 버린 때문이었다. 전사자 보고의 착오란 것은 장교로서는 큰 치욕이었다. 고지식한 申鉉俊은 자결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공산 게릴라들과 싸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중국인 사병과 현지 중국인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도 더 중요했읍니다. 팔로군도 주민들의 신임을 잃지 않고 있는 한 만군장교들은 해치지 않았읍니다} 제8단에는 李周一과 같은 신경군관학교 1기생인 方圓哲중위가 있었다.
  
  1943년 6월에 소위가 된 그는 제8단의 보병중대 선임장교로서 당천(唐泉)이라 마을에 두둔하고 있었다. 팔로군과는 주로 소규모의 방어전과 조우전을 되풀이했다. 박격포와 기관총을 동원한 본격 전투는 한 두 차례 있었다. 그때 팔로군은 무기가 모자라 소총도 갖지 못한 맨손부대가 전투를 견학한답시고 따라다녔다. 이런 비무장포로들을 잡아도 곧 풀어주곤 했다. 方중위 부대의 전임 중대장도 주민들을 괴롭히다가 팔로군 유격대원에게 암살당했었다. 함경도 출신의 화끈한 남자인 方중위는 중국인 주민들과 친해져 밤중에 민가에 나가 마작도 같이 하곤 했다. 현주민들의 인심을 잃지 않으면 팔로군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고 믿고 안심했다고 한다.
  
   이틀 뒤에야 해방 알아
  
  1945년 8월14일 저녁 方중위의 부대는 일본군과 함께 훈련을 한 뒤 만리장성에서 6㎞쯤 떨어진 구산즈에 도착, 휴식에 들어갔다. 통신체계가 엉망인 부대여서 소련군의 참전 사실도 연락받지 못하고 훈련을 했다. 이때 朴正熙중위(한달 전에 승진)가 유선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수고했읍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 조선어를 쓰겠읍니다. 소련군이 침공, 전면전 상태에 들어갔읍니다. 우리 8단은 명령에 따라서 외몽고의 다륜(多倫)으로 진격하게 되었읍니다. 훈련은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대로 돌아오십시오} 申鉉俊대위는 8월9일 소련의 참전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의 중대도 方圓哲부대처럼 일단 반벽산의 본대로 집결했다가 15일 오전에 흥륭을 향하여 출발했다.
  
  제8단의 통신장비는 행군중에는 다른 부대와 교신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반벽산에서 흥륭까지의 행군로는 강원도 산악지대와 같은 험로였다. 차는 다닐 수 없었고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야 했다. 15일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方圓哲의 부대에선 강행군 도중에 졸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거나 급류를 건너다가 익사하는 병사들도 나왔다. 군수품은 수백 마리의 당나귀가 운반했다. 보병 8단은 8월15일의 천황 항복방송도 듣지 못하고 그냥 산 속을 헤쳐갔다. 16일도 행군이었다. 17일에 그들은 읍 규모의 흥륭현에 도착했다. 申鉉俊은 국민당의 청천백일기가 마을에서 휘날리는 것을 보고서야 {세상이 바뀌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중국장교에게 무장해제 당해
  
  方圓哲의 부대는 후미에 처져 있었다. 통신 장비는 대대급 이상에만 있었다. 2∼3분간 손잡이를 돌려야 가동하는 발전무전기였다. 方중위 부대의 통신병이, 흥륭에 가까이 왔을 때 무전기를 가동시켰다. 아무리 만져도 단 본부가 나오지 않았다. 라디오도 나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만지고 있는데 북경방송이 잡혔다. 그 순간 蔣介石의 연설이 나오고 있었다. 方圓哲은 그 연설내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였읍니다.… 특히 동북아지역에서는 조선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심한 압제를 받았읍니다. 조선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빌붙어 먹은 나쁜 사람들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보복은 일체 금하는 바입니다. 동북반사처를 조직하여 왕 장군(김홍일.金弘壹을 가리킴)을 보내기로 하였읍니다}
  
  중대장 가나모리 대위는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중국인 孟중위가 사병들을 데리고 오더니 {죄송합니다만 무기를 반납해 주셔야 하겠읍니다}고 했다. 일본인 장교와 함께 朴正熙, 方圓哲 중위 등 한국인 장교들도 무장해제를 당했다. 方중위는 권총과 군도를 풀어주고 쌍안경만 가졌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나}는 생각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일본의 항복은 만주와 북지에 일시적인 힘의 진공상태를 불러들였다. 천황의 항복방송은 전쟁의 종결선언이자 대혼란의 신호탄이었다. 무력으로 뒷받침되던 일본의 압제체제가 무너지자 곳곳에서 둑이 터진 것 같은 파괴본능의 집단표출이 일어났다. 5족이 협화(協和)하여 만들었다는 만주국은 구성자체가 복잡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실밥이 터지자 복잡한 내용물들이 쏟아지면서 혼란의 상황도 더욱 복잡기괴해져 갔다. 해방때 만주와 북지에는 소련군, 일본군, 만주군, 蔣介石군, 毛澤東의 팔로군 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일본의 항복선언이 당장 일선부대에까지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전승국인 소련과 중국이 곧바로 질서를 확립할 수도 없었다.
  
   만군과 이별, 북경으로
  
  보병 제8단의 한국인장교 4명은 무장해제되면서 만군부대 안에서 손님 대우를 받으며 며칠간 머물렀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중위로 승진한 지 한 달만에 일제의 패망을 맞은 朴正熙가 이때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때까지 28년간 일제 시대만 경험한 삶이었다.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그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시켜 준 일제의 패망으로 그는 무장까지 해제당하고 한 힘없는 개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인간적으로는 모멸감을 느끼고, 개인적으로는 반발도 했지만, 그는 일제의 시스팀 속에서 순응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구했었고, 출세를 도모했었다. 그의 존재와 가치를 떠받쳐온 제도는 이제 허물어졌다. 해방으로 그는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게 많은 사람이 됐다. 그는 허전했을 것이다.
  
  朴正熙 등 네 사람에게 닥친 당장의 시급한 과제는 [고향으로 무사귀환]이었다. 철로가 마비되고 대중 교통수단이 전무한 중국벌판에서, 또 방황하는 여러 갈래의 무장집단들이 어디에서 총질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귀환은 또 하나의 전투였다. 方圓哲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으로 가겠다고 했다. 동북행이었다. 朴正熙 李周一 申鉉俊은 북경으로 진로를 잡았다. 申鉉俊의 증언은 이렇다.
  
  {만주국이 망해버렸으니 만군 제8단은 고아처럼 돼버렸읍니다. 독립무장병력을 거느리게 된 중국인 단장은 蔣介石에 붙을까 탐색을 하는 것 같았읍니다. 그는 일단 북경에 가까운 밀운이란 도시까지 나가서 동향을 살피기로 했읍니다. 밀운에서 북경까지는 철로로 통한다는 것이었읍니다. 부대가 밀운을 향해 출발하기로 된 전날인가 朴正熙중위가 李周一과 함께 선임자인 저를 찾아왔읍니다. 朴중위가 [형님,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하고 저의 의견을 물어요. 저는 서슴없이 [군자는 대로행이라는데 북경까지 갑시다]고 했어요. 그렇게 되어서 8단과 함께 이틀을 걸어서 밀운까지 갔고, 밀운에서 8단과 헤어졌읍니다. 그 뒤로는 8단의 운명에 대해 들은 바가 없읍니다. 우리는 밀운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만에 북경에 도착했읍니다. 그날이 8월29일 국치일이었죠}
  
   광복군에 편입, 중대장으로
  
  朴正熙 일행은 북경에 도착, 맨먼저 덕경루(德慶樓)를 찾아갔다. 동포가 경영하는 큰 음식점이었다. 학병으로 끌려갔던 한국청년들이 수십 명 씩 모여 있었다. 이틀간 여기서 신세를 진 朴正熙 일행은 북경의 동북쪽에 있는 북신구(北新區)의 제지공장 자리로 옮겼다. 이것도 한국동포가 경영하던 공장이었는데 그때는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이곳으로 일군, 만군에서 나온 한국인 사병들이 모여들었다. 공장은 병영이 되고 1천여 평이 넘는 마당은 연병장이 된다. 이곳을 숙영지로 마련해준 것은 임시 정부가 보낸 동북반사처장 최용덕(崔用德)이었다.
  
  崔장군은 중국공군 소장으로 蔣介石장군의 전용기를 조종한 사람이었다. 반사처는 4백여 명에 이르게 된 이 젊은이들을 김학규(金學奎) 지대장 휘하의 임시정부 광복군 제3지대로 편입시켰다. 광복한 뒤에야 광복군이 된 젊은이들 가운데는 그 이름을 쑥스럽게 느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 학병 출신으로 이 광복군에 끼여 있었던 박기혁(朴基赫.연세대 부총장)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족끼리 그런 집단을 만든 것이다. 배편을 기다리면서 대기하자니 규율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군사편제로 조직이 된 것이다. 광복군이란 말에 어울릴 정도로 뚜렷한 이념 아래 뭉친 조직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로 불리게 됐다. 대대장은 과거의 계급이 가장 높았던 申鉉俊이었다. 그 밑에 3개 중대가 있었다. 제1중대장은 李周一, 제2중대장은 朴正熙, 제3중대장은 학병출신인 윤영구(尹暎九)였다. 부대원들은 국방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었고 계급장은 붙이지 않았다. 소총과 기관총 등 기본 무장은 되어 있었다. 이들의 일과는 훈련이었지만, 최대의 현안은 먹는 문제였다. 申鉉俊 등 간부들은 崔用德처장과 함께 북경의 동포들(약 3만 명)로부터 식량을 얻어 와 수백 명의 끼니를 대느라고 골치를 앓았다. 반사처에서는 광복군채를 발행, 동포들에게 팔기도 했다.
  
  {식사는 부대 안에서 지어서 했는데 의자가 없어서 서서 먹었지요. 밥도 먹고 죽도 먹고 굶을 때도 있었읍니다. 이 무렵 朴正熙 중대장은 노래를 하나 지어 혼자서 콧노래 하듯 했어요} 申鉉俊은 朴正熙 작사·작곡의 그 노래를 지금도 가끔 불러 본다고 한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 있다] 朴正熙가 뒤에 대통령이 되어 지은 [새벽종이 울렸네…] 하는 노래와 비슷한, 경쾌한 가락이다. 申鉉俊에 따르면 朴正熙는 이 부대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었다고 한다.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 일본육사졸업의 경력에다가 나이도 3∼8세나 많은 편이었고, 과묵하면서도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방한 성품이 그를 중심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부대 안에는 진짜 광복군 출신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친일경력에 대한 시비는 없었다고 한다. 뒤에 朴正熙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던 사상계 사장 장준하(張俊河)씨가 여기서 朴正熙를 처음 만났다는 풍설은 사실과 다르다. 두 사람은 해방 전엔 서로 만난 적이 없다. 申鉉俊에 따르면 광복군 내부에선 사상적으로 미묘한 편갈림이 의식되곤 했다는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38선이 부대원들 사이에 그어지는 것 같았읍니다. 밤새워 사상문제로 토론을 벌이는 일도 잦았어요. 그러나 이것이 하극상이나 내분으로까지 악화된 적은 없었읍니다. 朴正熙 중대장이 그때 어떤 이념에 경도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분이 呂運亨을 줏대 있는 지도자라고 존경하는 듯한 이야기를 자주 했던 일입니다} 朴正熙가 만군 시절에 呂運亨계열의 비밀결사와 관계를 맺었던 일과 연관시켜 볼 때 申鉉俊의 이 증언은 朴正熙의 사상적 경향을 헤아리는 한 가지 자료가 될 만하다.
  
  {6년만의 만주} 청산, 맨손의 귀국
  
  이 광복군 지대의 젊은이들은 1946년 5월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미군정 당국에선 부대단위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申鉉俊 朴正熙 등이 이끌던 부대원들은 군복을 검정색으로 물들인 뒤 1946년 5월6일 미군 LST에 타고 청진을 떠나 5월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朴正熙로선 6년간의 만주·북지생활의 청산이었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한 장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朴正熙는 申鉉俊 등과 함께 서울까지 올라와 장충단공원 부근에 있던 피란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낸 뒤 고향 선산으로 내려갔다. 朴正熙의 고향집에서는 그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다. 申鉉俊도 북경에 있으면서 집에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편 통신망이 마비된 때문이었다.
  
  朴正熙의 누님 在熙는 남편 한정봉(韓禎鳳)과 함께 일본에서 귀환한 뒤 구미에서 살고 있었다. 바로 옆집은 오빠 朴相熙의 소유였다. 朴正熙의 아내 김호남(金 南)은 첫딸 在玉과 함께 기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곳에서 방을 얻어넣고 살고 있었다. 생계는 친정과 시가의 도움으로 꾸려졌다. 在熙는 집이 경부선 철로역에 가까이 있어 기차소리만 들리면 나가 보곤 했다. 朴在熙는 어느날 마당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삽짝문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동생 正熙가 씩 웃으며 들어왔다. 밀짚모자, 반바지, 반소매 웃옷, 운동화 차림이었다. 손에 든 것은 지휘봉으로 보이는 막대기 뿐이었다. 그것을 휘휘 돌리고 있었다.
  
   냉대와 실의 속에 실업자 생활
  
  어머니는 막내아들 朴正熙가 살아돌아온 것을 고마워 했으나 형제들로부터는 냉대에 가까운 불평을 들었다고 한다(아버지는 그가 교사시절에 사망). 朴在熙 할머니는 그 무렵의 동생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오빠들은 동생에게, 그냥 교사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됐을텐데 고집대로 했다가 걸뱅이가 되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읍니다. 동생은 본가나 처의 집에는 가지 않고 우리 집에서 먹고 자는 날이 많았어요. 첫딸 재옥이는 귀여워하는데, 재옥이 어머니가 딸을 보내 식사하러 오라고 해도 끝내 안가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동생은 우리집을 근거로 해서 별 하는 일 없이 소일합디다. 보기에도 안스러울 정도였어요. 마을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면 동생이 신문을 읽다가 얼굴을 덮고 자고 있는 일이 많아요. 그런 꼴을 보면 눈물이 핑 돌더군요. 누구보다도 동생을 아끼던 相熙오빠도 동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바로 옆집인 데도 식사할 때 부르지도 않았답니다}
  
  朴在熙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집안에선 朴正熙가 해방과 함께 졸지에 실직해버린 것이 못마땅했던 듯하다. 朴正熙에게는 취직이 가장 큰 현안문제였다. 朴正熙는 가끔 대구에 가서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잠을 자고 낮에는 백조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곤 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그는 계급장을 떼어버린 군복을 입고 다녔고 차값은 주로 친구들이 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누님에게 말했다. {구미에서 무슨 취직을 하겠읍니까. 아무래도 서울에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뒤 朴正熙는 자전거를 빌어 타고 출가한 누님과 형님댁을 돌면서 서울로 갈 노자돈을 얻으러 다녔다고 한다. 진실누님(큰 누님인 박귀희.朴貴熙) 집에 갈 때는 {돈을 빌면 하루 자고 올 것이고, 못 빌면 오늘 저녁에 오겠다}고 했다. 그냘 저녁에 돌아온 朴正熙는 {에이, 돈이 있으면 내가 보태주고 싶더라}고 했다. 그리곤, {야, 마당에 닭도 많던데 그것 잡아먹었으면 좋겠더라}고 농담을 했다. 그의 매형인 韓禎鳳이 상주의 농토를 일부 처분하여 서울행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朴正熙가 서울로 가기 전날밤 在熙는 열병에 걸려 앓아누워 있었다. 오빠(相熙)가 무엇인가를 들고 오더니 머리쪽 선반 위에 얹어 놓으면서 {이것 잘 좀 간수해 달라}고 말하곤 나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朴正熙가 나타나더니 선반 위를 더듬었다. 그는 朴相熙가 놓아둔 것을 내렸다. 카메라였다. {누님, 나 이것 갖고 갈테니 형님한테는 내가 기차 탄 뒤에나 이야기 하십시오} {그거 비싼 거냐?} {갖고 가서 급하면 팔아서 쓸 거에요} 朴正熙는 과연 서울에 가서 이 카메라를 처분했다고 한다. 카메라가 없어진 것을 안 朴相熙는 애꿎게도 재옥이 어머니를 불러 호통을 쳐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朴正熙가 서울로 올라간 지 열흘쯤 지난 어느날(1946년 9월) 在熙에게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총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계속〉
출처 : 월조
[ 2003-06-30, 14: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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